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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계관시인 - 김남조
2015년 04월 14일 21시 26분  조회:4759  추천:0  작성자: 죽림

 

 

편 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평행선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저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로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생 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설일(雪日)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정념의 기(旗)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펄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서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6월의 시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네 생각 그 하나에                                      
 

너를 재우고 돌아서던 손시린 돌무덤에

이제 나도 영원히 쉬려고 찾아온 거다


별이란 그저

잠잠히 순명하는 광망(光芒)이더구나

새삼 무에랴 우리를 일께워

섧게 만드리

인식할 것으로 믿자


너를 불러 네 옆에 이처럼

나 돌아왔음은

진실로 하늘이 짚어준 길이었거니


무서리 내 가슴에 잠기고

흰 눈깨비 성성히 덮혀오는

경루 한밤에도

오직 네 생각 그 하나에

나는 살았더니다
 

 


 

고 백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 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김남조 金南祚 (1927. 9. 26 -   )                                                                


192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계관시인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후쿠오카[福岡] 규슈여고[九州女高]를 졸업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1993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2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1984~),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1986~),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90~), 방송문화진흥회 이사(2000~)로 활동하고 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1953년 첫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한 첫시집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참신한 정열의 표출이 조화를 잘 이룬 초기 대표시집으로 평가된다. 이후의 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뜨거운 정열의 표출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갈망이 더욱 심화되어 절제와 인내가 내면화된 가운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감어린 세계를 그려낸 시집 《겨울 바다》(1967)를 비롯해 《설일(雪日)》(1971) 《사랑초서》(1974) 《동행》(1980) 《빛과 고요》(1983) 등 후기 시집으로 가면서 더욱 심화되어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제8시집 《사랑초서》는 전편이 '사랑'을 주제로 다룬 연작시로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는 사랑의 원초적인 힘을 종교적 시각에서 승화시켜 노래한 작가는 1950년대 등단 이후 현재까지 의욕적인 작품활동으로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발간했다. 삶의 근원이자 원동력인 '사랑'에 관한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생의 존재론적 탐구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자유문인협회상(1958), 제2회 오월문예상(1963), 제7회 시인협회상(1974), 서울특별시문화상(1985),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8),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1993)과 은관문화훈장(1998) 등을 받았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 《설일》 《사랑초서》 《동행》 《빛과 고요》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등이 있고,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3) 《시간의 은모래》(1965) 《달과 해 사이》(1967) 《그래도 못다한 말》(1968) 《여럿이서 혼자서》(1971)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5) 《사랑의 말》(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등이 있다. 이 밖에 꽁트집 《아름다운 사람들》과 일역시집 및 다수의 시선집이 있다. 

 


김남조 시 모음 67편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
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아가(雅歌) 2 

김남조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
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
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
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
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상심수첩

김남조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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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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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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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
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
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
시인(詩人)

김남조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
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
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
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
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
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
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
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
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


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
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
오늘

김남조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
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
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
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
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
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
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
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
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
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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