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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시집 평설
2015년 02월 18일 23시 57분  조회:3981  추천:0  작성자: 죽림

 

 

머리말과 평설

하이퍼, 퍼포먼스, 기타

 

문덕수

 

 

[1] 이선(李仙: 본명 李因仙)은 2007년 ������시문학������신인작품당선작의 종심에서 이선이라는 펜네임으로 등단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은행이 공모한 시부문에 특선(2004),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은상(2004), 웹진의 ������올해의 좋은시������100선에 선정(2011), 제8회 푸른시학상수상(2011)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선은 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입니다.(그의 신인작품상 심사한 심상운님이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 당선된 후 그를 사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번에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의 상재를 축하합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축하하는 머리말과 평설을 겸한 사족(蛇足)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선은 잠자는 시인이 아니라 늘 깨어서 눈을 뜨고 사물을 관찰하고 그 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 “하이힐의 또각또각”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의 톡톡 튀는 발랄한 모습을 연상시켜 그의 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톡톡 튄다”는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바로 이 시인에게 해당되는 몇 가지를 골라봅니다. 1)무엇이 여러 번 터지거나 부러지는 소리, 2)나가다가 여러 번 거치는 모양이나 부러지는 소리, 3)여러 번 튀는 모양이나 소리 등. “여러 번 슬쩍 하는 모양이나 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슬쩍”은 이 시인에게 적용하기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선이라는 시인

을 특히 괄목(刮目)하는 것은 톡톡 튀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냥 특이하다,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선은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2] 이선은 다소 예언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 젖혀두고 이미 유명해진 여러 여류들과 비교하면서 연상해봅니다. 이것은 이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보다 그녀에게 무엇인가의 기대를 은밀히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87~1961)입니다. 처녀작 『앵디아나』(Indiana)를 비롯하여 100여 편의 소설을 쓴 여류입니다만, 상드와 이선을 등가의 인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선에게 상드와 같은 많은 작품의 생산을 기대하는 그런 은밀한 소망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선은 가끔 한국의 ‘사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화적 존재인 여류시인 사포(sapphōp, 기원 전 7세기 무렵의 그리스 여성 서정시인)와 연상해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부정적인 소문과 연관짓고 싶지 않으며 다만 사포와 같은 높은 성가(聲價)를 지닌 서정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소망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나혜석(羅惠錫 1896~1949)은 어떨까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혜석처럼 가정을 무시하는 페미니즘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선의 부군은 정말 너그럽고 훌륭하고 이선의 시를 소중히 여기며 일가가 모두 그녀의 시의 온상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여러 다른 여류와의 연상작용은 그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이선의 시는 프리다 칼로(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화가)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브르통(1896~1966)이나 데스노스(1900~

1945) 같은 사람이 아니라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칼로” 같은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이선의 톡톡 튀는 성격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다 칼로」라는 작품부터 들기로 합시다. 이 작품의 배경은 거의 누드나 다름 없이 얼굴과 두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발가벗고 있고, 가슴과 배꼽까지 두 유방을 드러낸채 띄엄띄엄 흰 고정대로 감기어 있고 거기에 ‘못’ 같은 것이 꽂혀 있습니다. 엉덩이 이하는 침대 시트 같은 천으로 걸쳐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신이 못으로 박혀 있음은 주체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한 것 같습니다.

 

“똑바로 서!

총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흰 가죽 고정대가 내 몸을 긴장시킨다

서른 번 수술하고 가까스로 살아낸, 성스런 몸

내 몸의 신전 기둥에 열대 모래바람이 탕탕, 못질을 해댄다

(지금, 춥고 아픈데…)

-「프리다 칼로·1」에서

이런 대목의 사건 진상은 알 수 없으나 30번이나 죽을 고비에 직면했다가 병원에서 수술로 살아난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30번이나 소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체가 겪은 고통은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라는 대목은 이 주체인 내면적 고통의 가중(加重)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2」로 옮겨가서 봅시다. 「자화상·다친 사슴」

의 부제가 있습니다. 이 시는 먼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의 그림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 시가 있습니다. 디카시를 연상하게 합니다. 밀림 속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사슴의 주행 그림입니다. 앞발이 몸 앞으로 내닫고 있고, 두 발이 그 뒤를 따르는 이 모습은, 전신에 화살의 고통이 꽂혀 있는 모습으로 매우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가지 밑으로 네 개의 화살이 꽂혀 있고, 배와 등에 다섯 개의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어쨌든 화살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화살이 영혼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삶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즉 패러독스의 시입니다. 이 역설의 사슴은 바로 초현실주의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자신의 고통의 현실과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 형이하학적 삶을 그대로 노출시킨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름달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타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먹은 죄로, 나는 노새 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2」 부분

 

여기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 「다친 사슴」은 바로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동시에 이 시인(李仙)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 창자 길이와 작은 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합한 거다”(「셀룰러 메모리」에서. 윗 부분은 이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성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작자의 태도에서 이 작자의 자화상의 실존적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다친 사슴은 벗어날 수 없는 2중의 고통 현실에서 동작(주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냥꾼의 표적이라는 점, 둘째는 이 밀림에서의 탈출 불가능이라는 사실, 이러한 겹친 고통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고통을 짊어진 동작은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삶 자체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연에 나오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바로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면서 멕시코의 유명한 민중화가입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프리다 칼로의 작품(「프리다칼로·1」)을 보면 바로 그녀의 여동생과 동침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프리다 칼로는 애인인 남편을 여동생에게 빼앗기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자기 몸에 살인적인 많은 화살을 빼지 말라고 타자와 자기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이선의 시집 앞쪽에 「( )와 ( )사이」라는 시에는 ( ), { }, [{((( )))}], 《 》 등의 기호가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의 대목이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흐르는 강물,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빌딩이 자라고 있는 장소는 모두 그 형태가 안 보이는 허처(虛處)입니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허무나 여백(餘白), 공백(空白)을 여러 가지 괄호(기호)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호를 대동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 시의 3연은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라고 하는데, 이 대목의 ( )는 상실한 연인 또 헤어진 연인, 혹은 단절된 절친한 믿음 등을 가리킵니다. 즉 상실(喪失), 이별(離

別), 단절(斷絶), 배신(背信) 등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기호를 지닌 실존입니다만, 그 기호에 어떤 의미나 기능을 부여한다는 점은 삶의 뭣인가를 부가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 )  { }   [ ] 《 》 이러한 도형을 흔히 기호(sign)라고 합니다. 시에서 이러한 도형을 처음 쓴 시인은 이상(李箱)입니다. 나는 이상을 초현실주의 시인이라기보다 ‘기호시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다른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호는 오남구(오진현), 김영찬 시인 등이 즐겨 썼습니다만, 이선의 이 기호는 이들과는 또다른 의미의 것입니다. 이러한 기호 쓰기는 시에서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되며, 넓은 의미의 하이퍼시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5] 이선의 시에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가 있습니다. 부제는 「샤갈의 잠」입니다. 이 시는 이선의 하이퍼적 이미지 만들기의 원인을 알려주는 좋은 보기입니다. 「빨간 손바닥의자」도 매혹적인 하이퍼시입니다.

 

꽃사과 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의 1연

 

이 시는 제목부터 하이퍼시입니다. “물고기의 레이스”라는 대목에서, 수족관이나 연안바다나 심해에서 많은 물고기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어군을 TV영상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바로 그 어군

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상 이미지의 대조에서, 우리는 보이는 어군과 안 보이는 어군의 역설적 대조를 느끼게 됩니다. 이선의 하이퍼시에서 느낄 수 있는 패러독스입니다. 하이퍼시를 패러독스의 시라고 하는 이유의 일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대목의 기발한 초월적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다. 물고기의 대군(大群)이 이동하는 바다 속의 “전봇대 위”라는 이미지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불가능이 가능성의 현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봇대”는 육지에서만 가능한 이미지입니다만 물고기만의 레이스가 있는 바다에는 육지의 연결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시 독자는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가 생산하는 신비적 이미지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의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이선의 하이퍼적 방법의 비밀을 말한 대목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며, 통일 왕국의 확립자인 (히)dāid, (영) David(재위 B.C. 999~B.C.966)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통일은 북쪽의 다마스커스에서 남쪽으로는 홍해(紅海)에까지 미쳐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됩니다. 다윗의 도상(圖像)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구약 시편의 작자이고 수금(竪琴)의 명수(名手)로서 악사(樂士)와 무용수(舞踊手)들의 중앙의 왕좌에 앉아 수금을 연주하거나 수금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선이 인용한 ‘다윗’은 바로 이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바람 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라는 대목에서 숨겨 놓은 비파가 하얗게 소리지르는 것은 이선의 하이퍼적 감각적인 장치가 어떤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하고,(숨

겨 놓은 것은 이선의 하이퍼 이미지 창조의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옛날 장자(莊子: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의 “천뢰”(天籟)와 “지뢰”(地籟)도 연상하게도 합니다. 장자의 천뢰는 어떤 소리일까요. “너희들은 인뢰(人籟)는 들었지만, 아직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지. 인뢰란 피리나 퉁소 소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내는 기물이지. 지뢰라는 것은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천지의 울림이다. 그것은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내는 소리다. 이쪽에서 쪼톡쪼톡 하는 소리가 난다. 저쪽에서 살랑살랑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무 속에는 구멍이 길게 뚫려 있어서 바람이 와서 그것에 닿으면 소리가 난다. 바람에게 물어보면 바람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하고, 구멍에게 물어보면 구멍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무엇이 바람을 불게 하고 무엇이 바람으로 하여금 구멍에 닿게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장자는 이를 “진재”(眞宰)라고 한다)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천뢰”(天籟)를 진정으로 듣게 됩니다.” 라고 말한다. 이선의 시는 단지 다윗의 수금 소리만을 듣게 하지 않고, 장자의 “천뢰”(天籟)까지 연상하여 듣게 합니다.

이 시는 물론 1연에서 다윗, 2연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3연에서 신데렐라의 설화 등과 연결되어 하이퍼시로서의 여러 가지 다양성을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샤갈 꿈이 동시에 이 시인의 꿈입니다.

[6] 시 「숨은그림찾기」는 하이퍼시인지 아닌지 잘 분간이 안 되나 그림(‘그림’도 기호의 일종이다)과 언어시와의 융합과 보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퍼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시를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 작품

(시의 의미 찾기를 무슨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 것과 같은 식으로 쓰는 시인도 볼 수 있습니다)입니다. 그림도 기호(sign)의 일종이고,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꼭 어떤 퀴즈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어떤 유희(play)가 내재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시가 너무 엄숙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한 한 막는 것 같습니다.

[7] 어떤이는 하이퍼시를 “미친놈의 잠꼬대”라고 말하고, 어떤이는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군소리”라고도 말합니다.(한 단체의 수장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욕설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만, 시인이면 시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알고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이퍼시의 본격적 논의를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는 비유구조로 되어 있고, 모든 시는 비유와 비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을 두고 미친사람의 잠꼬대라는 말은 모든 시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의하여 환기된 새로운 인지(認知)의 도식은,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를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비유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인식은 결코 ‘진실 자체’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관념시가 그렇고, 관념을 벗어나 탈관념의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결코 사람과 갈대를 완전한 동일성 또는 유사성으로서 납득시키면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은유나 상징을 사용해도 사람과 갈대를 그 일부밖에는 동일시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과 갈대를 결부시킨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이퍼적이라고(적어도 처음에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빌딩이다”도 하이퍼적 은유입니다만 사람과 빌딩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 관계는 그래도 가능한 연결입니다. “은유는 천재의 표지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의 심성(心性)은 양(羊)이다”도 은유입니다. ‘그’와 양(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만, 이 경우 ‘그’는 본의(本ム義)이며 양(羊)은 유의(喩義)라고 합니다. 하이퍼시의 경우에 도입되는 양, 강, 바다, 신(神), 표범, 빌딩 등 무엇이든지 유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퍼시에 있어서 일반적 스타일입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성은 시의 일반적 비유 구조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8] 이선은 「프리다 칼로」라는 시를 3편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다 칼로 그림을 시의 머리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일종의 비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신에 못이 박힌 칼로나 모가지 밑과 배와 등에 화살에 꽂힌 이 다친 사슴의 그림, 이 그림은 비유(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교유(交喩 diaphor)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못에 박힌 자화상이나 화살에 꽂힌 사슴은 고통, 신음, 죽음, 절망(絶望) 등의 유추로서 이 그림을 통하여 시인 자신의 처한 환경적, 또는 내면적 고통의 어떤 유사성(동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삶이란 이런 것임을 적나라하게 유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교유(交喩)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라는 이선의 다른 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피리, 북, 장고

내장을 모두 비워낸 소리를 낸다

세상 밖으로 제 살을 모두 밀어내고

속을 후벼 파내어

바람의 계단을 밟고 홀로

허공을 울리며 올라가는 소리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 부분

 

이 시에선 피리, 북, 장고 등의 악기를, 내장을 지닌 생명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내장’이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은유이긴 하나, 신진(辛進)이 말한 ‘차유’(差喩)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 피리의 내장, 북의 내장, 장고의 내장이라고 하여 생명체로 본들, 결코 본래의 악기(피리, 북, 장고 등)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이를 더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시는 어떤 결론이나 결과를 나타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라는 것은 진실의 세계로 접근하는 멀고 먼 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선이 「프리다 칼로·1, 2」에서 아무리 칼로를 유추하여 인용했다고 하더라도(인용해서 비유하는 것을 引喩라고도 한다) 온 전신에 못박힌 것이나 화살이 꽂힌 그 고통은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 자신의 고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비유로 도입한 본의는 결코 처음 나타내고자 한 고통과 동일하지도 유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갈대다”에서 사람과 갈대가 동일하게, 유사하게 같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9] 여기서 신진(辛進:부산동아대학교 교수, 시인)의 “차유”(差喩)에 대하여 언급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대만대 인문사회계 고등연구원장인 황준채(黃俊蔡)의 정다산(丁茶山)에 대한 연구논문으로서 다산 25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연구논문도 언급해야 하고, 특히 다산의 “사물이 원리에 앞선다”(事先理後)의 정신도 말해야 합니다만 논문을 구하지 못해서 언급을 보류합니다. 신진의 ‘차유’의 제기논문은 「시의 4형 고」(한국시학연구 제16, 2006)인데,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iser)의 ������언어예술작품론������(대반출판사, 1982)에서 언급한 서정시의 세 가지 양식에서 힌트를 받고, 카이저가 제시한 3유형 외에 “거부의 시”를 첨부한 데서, 시의 기본구조라고도 할 수 있는 유추구조인 은유, 환유 외에 차유로서 도입함을 암시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차유론은 최근의 신진의 논저 ������한국시의 이론������(산지니, 2012)에서도 상론되어 있습니다. 신진의 이 논저에서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며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란 의미이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한 대치(substitution)를, 환유와 인접성에 의한 연결(contexture)을 지향한다면 차유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tension)을 지향한다. 꿈의 작용과 관련하여 추론하자면 응축과 치환이 환유의 원리이고, 상징이 은유의 원리이다. 모순은 차유의 원리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진(辛進)이 처음으로 제기한 “차유”(差喩, transphor)는 혹시 하이퍼적 이미지의 연결 원리가 차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인합니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10] 이제 이선의 작품을 예로 들어 차유의 실례를 조금 검토해 볼까 합니다. 이선의 시에는 하이퍼시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녀는 체질적으로 하이퍼시인입니다.

 

우울증 80%로 벽 속에 갇힌, 여자

고양이 아홉 마리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

-「점검 안내」 전문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하이퍼시입니까. “…벽속에 갇힌 여자”라는 대목은 아날로그 시로 간주됩니다. 갇히지 않고 벽 바깥에 있는 여자와 벽 속에 갇힌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 사이에 초월의 의미가 심각하게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만, 그 다음의 “고양이 아홉 마리” 이하의 대목에서는 초월의 의미가 너무 심각하게 느껴져서 하이퍼시라는 확신이 듭니다. ‘초월’의 의미도 독자의 수용하는 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는 대목은 전연 현실적 가능성이 없고,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리다 칼로」에서 프리다 칼로의 「다친 사슴」 같은 그림은 이 작자의 고통 즉 삶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를 비유구조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전신이 살인적 화살이 꽂힌 상황과 이 시의 작자인 주체(이선)의 고통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경우 고통의 차이성에 관심을 집중하면 이 그림의 도입(보조관념의 도입이며, 본관념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신진 교수께서 제기한 차유(差喩)라고 할 수 없을까요. ‘고통’이라는 추상에서는 유사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고통의 구체적 감각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의 비유는 ‘차유’인지도 모릅니다. 은유나 환유라고 말하기보다는 ‘차유’라고 하는 것이 더

실감이 납니다.

이선의 시에 “페이지가 접혀/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입된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모두 유의(喩義:보조관념)입니다.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는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적 기질(또는 니체적 이단자의 반 기독교적인 기질)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하의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은유도 니체의 예와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의 비유는 모두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설사 하이퍼 시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시의 일반적 비유구조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이퍼라고 해서 시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는 은유, 환유, 차유 등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여기서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차유는 하이퍼시에서 굉장히 큰 기능을 합니다.

[11] 이선의 시는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녀는 하이퍼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모더니즘, 이미지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이 돋보입니다. 어느 시를 읽어도 톡톡 튀는 이선의 특색이 보입니다. 뭔가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특색이 있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간주됩니다. 이선의 시에 “나를 쏟아내어도 쓸 것이 없네요,/ 내가 없어요/ 낡은 잔소리 웅얼거리는”(「이력서」)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없어요”라는 시구도 있습니다. “내가 없어요”는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의 기준을 무화(無化)시킨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는 먼저 사물존재라는 대상을 보며, 그 대상과 어느 정도의 알맞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자기를 무화시킨 후의 객관적 감각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경우 “대상 -언어-시인”이라는 이 관계구도는 대상인식의 형식입니다. 나는 여기서 특히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중요시 하고, 이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거리를 무시하고 대상과 시인이 일체(一体)가 되어야 대상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은, 그것이 서정시 제작의 기본이라고 하더라도 하이퍼시를 쓰기엔 부족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대상-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가져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심미적 거리’(審美的距離aethetic distance)라고 합니다. 미국의 1970년대 비평가인 J.C. 랜슴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누가 주장했던 간에 대상과 주체가 접근하여 하나가 되면 대상은 보이지 않고, 또 반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상은 조그마한 점으로 소실되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대상의 보임에는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르케올로지(arckeologie)라는 말은 원래 고고학(考古學)을 의미합니다만, 아르케올로지는 ‘시원’(始源)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상- 주체 사이에 알맞은 거리를 설정하는 것은 하이퍼시의 아르케올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 틀을 이선은 나름대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1)하이퍼성(性)은 시의 본질적 구조의 확대라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이선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하면서 이만 펜을 놓습니다.

<시인ㆍ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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