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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에서 내면세계 미학
2015년 02월 19일 15시 50분  조회:3703  추천:0  작성자: 죽림
 

이 시론은 <사상계> 1966년 3월호에 발표된 시론으로서 한국 현대시에 '내면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서 해방된 '순수 이미지의 세계'라는 창조적 영역을 개척한 시론이다.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에서 '하이퍼시' 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론이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 된다

 

내면세계의 미학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이미지의 시대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추상예술의 모험'의 저자인 미술 평론가 미셸 라공은 말의 시대가 있은 후 기술記述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 즉 이마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범람하는 텔레비전, 영화, 간판, 사진 등 우리 시대의 전반을 ‘이미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라는 특수 분야에 한정해서 보아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시어에는 소리, 의미, 이미지의 세 국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 세 국면을 고려한다면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미지의 시’에 도달한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시는 소리의 시였다. 서정시를 의미하는 Lyric이 그리스의 악기 라이어(Lyre)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고대의 서정시가 악기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어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또 중세의 서정시가 음유시인들에 의하여 음송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근대의 시는 의미의 시였다. 근대 로만주의시가 풍부한 감정과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요구하여, 형식보다는 내용편중의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래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철학시가 나왔고, 워즈워드를 위시한 근대 로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심원한 주정적․주관적 세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의 시이다. 시를 정의해서 이미지라고 하고, 시의 구조가 바로 이미지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이미지가 단지 ‘언어가 그리는 심적心的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주장한 영미의 이미지즘 운동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이미지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적극적 표시라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분석비평가들의 초점도 이미지의 분석에 두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 운동과 비평 운동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현대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줄 안다.
  
이미지의 미적 주권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즉, 우리가 탐구해 보려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미지란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지를 그 구조상에서 본다면 유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정도의 이미지는 20세기의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시에도 편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러한 개념정의를 새삼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미지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를 정의하여, “일순에 시현示現하는 지적․정적 복합체”라고 하였고, 이미지즘 운동의 창시자인 T.E. 흄은 “아날로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 양자에 각각 뭔가를 부가하고 하나의 경이감을 부여하는 것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의 아날로지의 주된 작용은 흥분을 일으키는 일 점一點에 독자의 주의를 끌어 붙들고, 그리하여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서 그 일 점一點을 일 행으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지스트들이 탐구한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심리회화도 아니요, 단순한 유추도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점에 이미지즘 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초현실주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적 변증법에 입각한 이미지의 탐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 이론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이 어느 날 밤 잠들기 직전에 ‘유리창에 둘로 절단된 한 사나이’라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는데, 이러한 ‘초현실적 이미지’는 브르통의 말대로 인간이 두 번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는, 아편阿片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브르통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라든지, ‘전도체(conducteur)의 전위차電位差’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두 말의, 말하자면 우연한 접근에서만이 어떤 특수한 빛을 자아내게 하며, 이와 같은 이미지의 번쩍임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이 한없이 민감한 것이다. 이미지의 가치는 이와 같이 해서 획득한 불꽃의 미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두 전도체傳導體 사이의 전위차에서 생기는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번쩍임이라든지, 두 전도체 사이의 전위차라든지 하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과 같은 이미지 정의는 브르통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또 브르통 이후에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의 참된 의의는 말하자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이론이 갖는 변증법적 우주론, 무의식의 영역의 발견과 중시,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 오토마티즘 등도 따지고 보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를 위한 방법이요, 배경적 이론에 지나지 않다.
나는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 오늘이야말로 이미지의 미적 주관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지가 시에 있어서의 모든 미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전위 예술 운동의 중심 과제가 이미지의 추구였다는 점과, 그러한 운동이 성취한 이미지의 순수한 가치면에서 볼 때 조금도 과장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권이라는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된 권리’라는 의미의 정치 용어이다. 우리가 국가주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대내, 대외의 양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주권美的主權’의 경우에도 그렇다. 시 자체의 내적 면에서 이미지를 본다면, 그것은 시의 구조의 핵심이며, 또 시의 본질 그 자체이며, 시가 갖는 모든 미감美感의 결정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의 외적 면에서 본다면, 대상과 주제(주제는 시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에 관련이 없는 순수한 자주성自主性을 의미한다. 나는 특히 후자를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

 

대상에서의 해방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상이 있는 시요, 대상의 존재에서만이 그 존재가 가능한 시였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사회 현상이건, 또 순전히 관념이건 간에, 대상이 없는 시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 포플러, 장미, 하늘, 구름, 대지, 강물 등의 이미지가 나오면, 그것들은 곧 시 바깥에 있는 세계의 대상과 연상이 되고 결부된다. 그래서 이 시는 장미를 노래한 시라든지, 저 시는 하늘을 노래한 시라든지 하는 등의 대상이 지적된다. 교통 사고, 전쟁, 혁명, 데모, 시장 풍경 등의 사회현실을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또 이별, 희망, 소원 등의 관념을 대상으로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시 밖의 객관 세계와의 달갑지 않은 주종관계主從關係, 예속 관계가 성립되면, 시 자체의 순수한 자주성이 없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시가 ‘무엇’을 노래했다고 한다면,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시에 앞서서 객관적으로 존재해야만 시가 존재할 수 있고,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갖는 형태, 빛깔, 의미 등에 의하여 시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시는 그 무엇을 닮거나 흉내를 내게 되니, 시의 자주성은 객관 세계의 대상 앞에 완전히 무색하게 되고, 객관 세계의 대상에 예속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관계는 회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욱 명백해진다. 자연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시종 충실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자연이나 그 대용물인 모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회화의 운명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모방기술模倣技術’이라고 말하고, 시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모방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도 전개되었다. 몇 세기를 두고 그 위력을 변함없이 발휘해 온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근대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묵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리얼리즘에 치명적인 일타를 가하고, 객관적 대상과의 주종 관계를 완전히 끊음으로써 시의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이여, 모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하고 열렬히 기도한 화가가 있었고, 또 “내 그림이 자연自然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그림을 모방했다”고 말한 화가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화가들의 이러한 반고전적, 반자연적 발언 속에 대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강렬한 충동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사실 20세기 전반의 유럽을 휩쓴 각종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대상에서의 해방 운동이었으며,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시와 회화에 있어서, 대상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물의 묘사에 충실했던 사실주의에 반하여, 인상주의는 대상 그 자체의 충실한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분위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예술의 주관화․내면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도 객관적 대상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나, 그 색채도 대상의 광선적光線的 반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야수파는 고갱과 고흐의 수법을 이어받아,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 대상과는 관계가 없는 색채 자체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 직접적인 효과를 대담무쌍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적․흑․녹과 같은 색도 높은 원색을 좋아했던 것은 객관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의 감정적 본능을 그것이 노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상을 무시하고 색채 자체의 가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야수파가 현대 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큐비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立體派 화가들은 자연의 수많은 형태를 몇 개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변형시킴으로써, 대상 그것의 충실한 표현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의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분석․해체하여 다시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며, 그 결과 종국적으로는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끊게 된다. 그러나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 설령 대상을 샅샅이 분석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심한 메타모르포즈가 있었다 할지라도 완전히 대상과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대상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도 여전히 대상과의 관계가 있었고, 또 객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대상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도입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삼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기술방법으로서 오토마티즘을 발명한 초현실주의는 시를 내면세계로 전회시키고 말았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다는 것은 현대시를 내면화하고, 이미지에서 객관적 대상을 끊어 버린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

 

시는 인간의 심리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 있어서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 아닌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오는 그릇된 견해에 지나지 않다.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에 관해서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손쉬운 예로서 ‘꿈’과 ‘현실’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는 수면 중 꿈 속에서 날개가 돋혀 새처럼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날개가 있다는 것도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더구나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이러한 현실과는 반대로 꿈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다. 꿈은 현실의 모든 속박을, 모든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만다. 그러기에 꿈의 세계, 즉 내면세계는 외면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반대 세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는 자기의 형이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꿈에 보았다는 대목이 있다. ‘상자’는 ‘금고金庫’를 연상하게 되므로, 이 경우의 꿈은 형이 절약가임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개념적 해석의 정오正誤 여부는 둘째로 하고, 사람이 상자 속에 들어 앉아 살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여신, 인두人頭의 해사海蛇, 용, 봉황, 반인반마의 괴물, 새처럼 날아다니는 양의 다리와 뿔이 난 목신牧神, 가락국의 건국 신화 등도 모두 꿈의 세계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
외면세계에 있어서, 우리를 제약하는 두 가지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다. 우리가 여행한다든지 누구와 만난다든지 할 때,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곳과 때, 어느 장소, 어느 때라는 이 두 조건을 벗어나서는 외면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외면세계의 기본 구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질서로 형성되어 있다.
우선 공간 질서부터 보기로 하자. 먼 사물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사물은 크게 보인다. 이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원근법이다. 외면세계에서는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되어 있다. 동이 서가 되고, 남이 북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면세계에서는 이러한 원근법과 방위 감각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먼 사물이 가까운 사물보다 더 크게 보일 수도 있고, 동이 서로 뒤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면세계의 공간은 외면세계의 공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내면세계의 공간은 애너키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시간 질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면세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기계적인 일방적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객관적․자연적 법칙이다. 그런데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의 진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할 수도 있고, 또 과거에서 현재를 거치지 않고 미래로 뛰어 넘어 직행할 수도 있다. 다방에서 애인과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커피 빛깔에서 문득 낙엽을 연상하게 된다. 그 낙엽은 몇 년 전 B라는 친구와 금강산에 관광 여행을 한 사실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낙엽의 빛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정에서 벗들과 싸우다 흘린 비혈鼻血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리적 연상은 시간의 역순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시간의 의식에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 등의 현대 심리주의 소설가들의 수법은 이러한 내면세계의 시간 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의 이와 같은 차이는 시의 구조에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한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자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원시인은 태양을 톱니바퀴의 형태로 그렸다. 우리의 조상도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불교와 도교의 세계는 환상적이긴 하나 실재성이 있는 무진장의 이미지가 있는 줄로 안다. 우리는 섭섭하게도 ‘용’, ‘봉황鳳凰’ 등에 해당할 만한 상상적 동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꿈조차 없다. 우리는 원시인에 비해서 너무도 합리적인 세계에만 살고 있고, 또 원시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건강한 꿈과 강렬한 상상력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조건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주력해야 하겠다. 비단 과거의 이미지를 메타모르포즈하여 현대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 한국시의 한 경향이 내면화의 방향으로 전회하면서, 내면세계의 구조가 요구하는 방법을 확립하고, 순수 이미지의 창조에 노력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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