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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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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시 모음 ㄴ
2015년 02월 19일 02시 56분  조회:2492  추천:0  작성자: 죽림

<11월에 관한 시 모음> 나태주의 ´내가 사랑하는 계절´ 외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나태주·시인, 1945-)

 

 

  11월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배한봉·시인, 1962-)


 

 

  11월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용하·시인, 1963-)

 

  
11월의 비가 

길이 
어둠을 점화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바다는 별을 쏘아 올리고 

바람, 
네가 피워대는 슬픔의 무량함으로
온 산이 머리끝까지 
붉게 흔들린다 
(도혜숙·시인, 1969-)


 

 

 

  11월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황인숙·시인, 1958-)


 

 

   11월의 나무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11월의 나무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김경숙·시인

  
11월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안진·시인, 1941-)


 

 
  
  
 + 11월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오세영·시인, 1942-)

 

 

 11월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최갑수·시인, 1973-)

 

 

  11월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려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정군수·시인, 1945-)


 


  11월 안부 

황금빛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고 
지난 추억도 갈피마다 
켜켜이 내려앉아 
지나는 이의 발길에 
일없이 툭툭 채이는 걸 
너도 보았거든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식 넣어 
맑은 이슬 한 잔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 끝내고 나서
(최원정·시인, 1958-)

 



 11月

추수 끝낸 들판
찬바람이 홰를 치고

바라보이는 먼 산들
채색옷 단장을 하고는
먼데서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잎을 지운 나무 위에
까치집만 덩그마니
11月 가로수 은행나무
줄을 서서 몇 뼘 남은 햇살에
마냥 졸고 있다

채마밭 식구들 실한 몸매를 자랑하며
초대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길 옆 목장 젖소들 등마루에
남은 가을이 잠시 머문다.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11월을 보내며

하늘엔 내 마음 닮은
구름 한 점 없이 말짱하게
금화 한 닢 같은
11월이 가는 구나

겨울을 위하여
서둘러 성전에
영혼을 떨구는 사람도

한 잔의 깡소주를
홀로 들이키며 
아찔하게 세상을
버티는 사람도

가을과 겨울의
인터체인지 같은
11월의 마지막
계단을 밟는구나

뜰 앞 감나무엔
잊지 못한 사랑인 양
만나지 못한 그리움인 양
아쉬운 듯 애달픈 듯
붉은 감 두 개
까치도 그냥
쳐다보고만 가는...

그래 가는 것이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추운 겨울 바람 찬 벌판
쌓인 눈 속이라도
살아있으니 가는 것이다

희망이란 살아있는 것일 뿐이라 해도
사랑이란 더욱 외롭게 할 뿐이라 해도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계절 따라 갈 일이다
사람의 길 
사랑의 길을
(유한나·시인)

 


 11월이 전하는 말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반기룡·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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