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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아이러니
2015년 02월 19일 16시 12분  조회:4201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와 아이러니

 

                                                                           김춘수< 시인 한국>

 

이 논문은 1990년에 개최된 제12차 서울 시인대회 때에 발표한 것이다. 

 

 

영어의 아이러니는 위장을 뜻하는 희랍어 eironci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위장, 즉 거짓 꾸민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의도를 감춘다는 것이 된다. 그것(의도)을 직설적으로 노출시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 즉 의도의 내용이 뉘앙스가 죽어 그 밀도와 강도가 훨씬 덜해진다. 단순히 사전적 뜻만을 알리고자 할 때, 즉 보통의 산문의 경우는 굳이 뒤틀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시와 같은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코자 할 때는 산문이라는 다른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시적 의도가 죽는 수도 있다. 뉘앙스가 사전적 뜻보다 더 시적 의도를 살리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일차적으로는 시의 표현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소박한 시에도 그것이 시인 이상 표현상의 아이러니는 있게 마련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위의 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끝 행은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 외연과 내포(감추어진 의도)의 긴장상태가 시적밀도를 빚어내고 있다. 이 대목이 이 시의 전체 내용에도 뉘앙스를 주고 있다.

 

아이러니는 한편 발상과 관계가 있다. 가령 클리언스 브룩스가 워즈워드의 14행시 「웨스트민스터橋上에서」를 분석한 것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도다

이처럼 장대함, 몸에 다가서는 광경을 지나치며 돌아보지 않는 자는 둔하도다.

거리는 지금 의상처럼,

새벽의 아름다움을 걸치고 있도다. 묵묵히 숨김없이,

배도 탑도, 원탑도, 극장도, 사원도,

푸른 들에 큰 하늘에 스며 누웠도다.

연기 없는 대기 속에 모두 찬연히 빛나도다.

새벽녘의 밝음에 해는 이처럼 아름답고

골짜기를, 바위를, 언덕을 빛으로 덮은 일은 없었도다.

이처럼 깊은 고요함을 본 일도 느낀 일도 없었도다.

강은 스스로의 마음 그대로 절로 흐른다.

아 신이여, 집들마저 잠자는 듯하고,

크나큰 심장은 지금 소리없이 누워 있다.

 

템즈 강이 새벽녘에 잠이 아직 깨지 않고 있을 때에 오히려 아름답게 살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낮이 되어 활동이 시작되면 템즈강은 오히려 오염된 더러운 흐름으로 변한다. 따라서 낮의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 오히려 죽어 있는 시간이 된다. 워즈워드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 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시간의 템즈 강이 살아 있다고 본다는 것이 된다. 이런 해석이 타탕하다면 호반시인인 워즈워드의 자연예찬의 진가가 이 시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동시에 발상의 시적 호소력은 배가한다.

 

아이러니는 시의 표현이나 시의 발상과의 관계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케 한다. 먼저 시의 효용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장자의 「人間世篇」에 나오는 가죽나무의 비유는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장인 石이 제나라 곡원을 지나다가 거대한 가죽나무를 보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그날 밤 꿈에 가죽나무의 신령이 나타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깨우쳐 준다. 石은 그가 너무도 장인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답답하게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죽나무가 天壽를 다할 수 있어 그처럼 자란 것은 목재로서의 이용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쓸모없는 잉여물일까?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는 그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 된다. 백 아름드리나 되는 그의 몸피에 달린 잎들이 한량없이 넓은 그늘을 만들어 수많은 행인들의 더위를 씻어주고 휴식의 장소가 되어준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다 후련해진다. 이런 일들은 가죽나무의 크나큰 덕이라고 해야 하리라. 시가 실용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이치에 있다.

「碧巖錄」의 德雲의 偈는 장자의 가죽나무 비유와 흡사한 효용의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덕운은 우물을 메우기 위해여 눈을 퍼붓는다. 눈은 녹아 물이 되고 물은 차면 밖으로 흘러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짓을 되풀이 한다. 그러는 그 자체가 즐거워서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시지프스는 돌을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돌은 내려놓기만 하면 굴러 산발치로 떨어져간다. 그것을 따라가서 또 짊어지고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갖다 놓기기만 하면 다시 또 산발치로 굴러 떨어진다. 또 따라간다. 그 徒勞에 지나지 않는 돌 나르기는 그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을 무릅쓰고 그 일에 도전해 간다. 비극적이다. 이에 비하면 덕운의 경우는 일종의 놀이가 되고 있다. 이 놀이는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무상을 유상(즐거움)으로 만드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덕운의 행위는 실용에 대한 아이러니가 된다. 실용과 똑 같은 아이러니칼 한 효용을 가진다는 말이다. 호이징어의 놀이인간(Homo Ludens)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는 놀이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그가 말할 때 그는 놀이의 아이러니칼 한 효용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놀이의 즐거움과 함께 공리를 떠난 행위라고 하는 인간의 품위를 일깨워준다. 그것이 놀이의 효용성의 핵이다. 시의 순수성도 이와 같다.

 

실험시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하여 아이러니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 있어서의 효용성을 또한 말한 것이 된다. R.M.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했듯이 부르주아 사회란 속물사회이고 규격화된 상식이 판을 치는 사회다. 예술보다도, 즉 개성보다도 상품, 즉 획일화가 생활의 구석구석을 뒤덮어버린 사회다. 릴케에 따르면, 옛날의 가재도구도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예술품이 된다. 거기에는 그것을 만든 이들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부르주아 사회는 속물근성과 상식적인 획일성에 잠들어 있는 사회다. 아니, 부르주아 사회는 스스로를 오히려 깨어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실험시는 그 상태가 잠들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효용성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그러나 실험시의 非 내지는 反 상식적 획일성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불온시 한다. 그러나 불온하고 두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케 하여 불안을 유도하는 것이(불안에서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또한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하에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프롤레타리아도 시나 예술에 있어서는 부르주아 이상으로 보수적이다. 전위예술을 적대시하고 부르주아 예술이라고 매도한 것은 그들이다.

 

다음은 아이러니와 세계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먼저 處容說話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처용은 동경 밝은 달에 취하여 놀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신이 아내를 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歌舞而退한다. 이 장면은 해학이다. 역신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운명이 안겨주는 고통을 해학적으로 처리한다. 여기에는 세계관적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다. 운명은 불가항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반항하여 싸우는 것을 인간의 용기라고 하는 시지프스적 유럽인의 세계관이 있다. 비극을 비극으로,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그러나 처용의 경우는 다르다. 비극적인 장면을 희극적으로 처리한다. 비극을 심리적으로 극복 내지는 無化시키는 視點이다. 다르게 말하면, 물리적으로는 운명에 굴복한다는 뜻이다. 운명에 부딪쳐서 인간의 자기능력에 절망한다. 그 절망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는 낙천적인 태도가 나온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몹시도 쓸쓸하고 서글프다. 해학에는 그런 뉘앙스와 분위기가 뒤따른다.

 

塞翁之馬의 고사도 그렇다.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고, 고통으로 변한다는 달관은 숙명론에 연결되지만, 한편 매우 아이러니칼 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類의 세계관에 관계되는 아이러니는 18세기말 독일 낭만주의 미학에 잘 드러나고 있다. 장 폴의 후모오르(hu-mor)의 미학이나 프리드릿히 슈레게이의 낭만적 이로니(ironie)라는 것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점에서 처용설화와 비슷하지만, 독일 낭만주의의 경우는 운명이라는 관념보다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의 차원이란 희극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온갖 짓거리가 하나로부터 열까지 모두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후모오르는 이리하여 인간을 아주 卑小하게 만들고, 인간의 비소함을 통하여 반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짚어 알게 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이리하여 하나의 형이상학이 된다. 독일 낭만주의 때의 시인들이 대개가 철학자였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존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의 성격을 띤다.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면서 천사가 되고 악마가 될 가능성은 늘 가지고 있다. 이런 모순갈등과 아이러니컬한 위상을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느끼는 능력의 소유자가 결국은 시인이 아닐까? 형이상학으로까지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비상한 아이러니는 마침내 다시 또 시의 표현이나 발상의 문제 쪽으로 回歸한다. 시는 형상을 갖춘 구체적인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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