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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활동한 서정 시인, 풍자작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한 뛰어난 서정 시인이자 풍자작가이다. 브루투스 진영에서 군대 호민관으로 활동하다가 패한 뒤 이탈리아로 도주한 호라티우스는 이후 금고 서기직을 맡아 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즈음 문인 마이케나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통해 옥타비우누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제1권과 17편의 <서정시>를 쓰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에는 <서정시>와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지위를 굳히자 <송가>로 방향을 바꿔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100년제’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세기의 찬가>를 지었다. BC 8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송가 Odes〉와 운문 〈서간집 Epistles〉에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는 사랑과 우정, 철학 및 시론이다(→ 색인 : 아우구스투스 시대). 호라티우스는 아마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방에 사는 사벨리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노예였지만, 호라티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자유를 얻어 경매인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토지를 조금 갖고 있었고, 아들을 로마로 데려가 같은 사벨리인인 유명한 오르빌리우스(호라티우스의 말에 따르면 체벌의 신봉자)의 학교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만한 여유도 있었다. BC 46년경 호라티우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강연을 들었다. BC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아테네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은 일시적으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카이사르의 동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젊은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외종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개인 상속자로 지명했다. 호라티우스는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군대 호민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아들에게는 이례적인 명예였다.
BC 42년 11월 필리피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한 전투가 2차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호라티우스와 그의 동료 호민관들은 계급이 그들보다 높은 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 군단 가운데 하나를 맡아 지휘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참패를 당하고 전사한 뒤, 호라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는 이탈리아로 달아났지만, 베누시아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은 제대 군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기 위해 몰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가서, BC 39년에 일반 사면령이 내리기 전후에 금고 서기 자리를 얻었다. 36명의 금고 서기는 비록 하급직이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BC 38년초 그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를 소개받았는데, 마이케나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문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를 그와 친한 작가들의 명단에 올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호라티우스는 마이케나스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Satires〉 제1권을 쓰고 있었다. 6보격의 운문으로 씌어진 이 10편의 시는 BC 35년에 발표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풍자시〉에서, 호라티우스는 공직생활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온함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는 여기서 윤리 문제(재산과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 극단적 행위의 어리석음,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의 바람직함, 야망의 해악)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편의 〈서정시 Epodes〉도 쓰고 있었다. 이 작품은 격한 어조의 조롱을 보여주며, 예로부터 인신 공격과 조롱에 사용된 운율을 채택했지만, 호라티우스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악습을 공격하고 있다. 이 시의 어투는 필리피 전투 이후 그가 느끼고 있던 불안한 기분을 반영한다.
BC 30년대 중엽에 그는 마이케나스에게서 사비니 구릉지대에 있는 안락한 집과 농장(로마에서 북동쪽으로 35㎞ 떨어진 리첸차에 있는 언덕일 가능성이 많음)을 받았다. 이것이 선물인지 빌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집과 농장은 평생 동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북서쪽의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BC 31), BC 30~29년에 호라티우스는 〈서정시〉와 8편의 시로 이루어진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다. BC 27년에 승리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확고한 지위를 굳히자, 호라티우스는 〈송가〉로 방향을 바꾸어 BC 23년에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활발하게 시를 쓴 시기는 이때였다. 호라티우스는 〈송가〉에서 그리스 초기 서정 시인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지만, 낱말을 섬세하고 절제 있게 구사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과 포도주, 자연(거의 낭만적으로), 친구와 중용(그가 좋아하는 주제였음)을 노래했다. 〈송가〉의 일부는 마이케나스나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던 고대 로마의 미덕을 찬양했지만, 그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었고, 송가를 하나의 주제나 분위기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개인비서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거절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처음 3권의 〈송가〉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호라티우스가 그런 시를 더이상 쓰지 않을 작정이었음을 암시한다(그는 BC 23년에 시를 발표한 뒤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했을 것임). 그의 서간체 시집(BC 20~19년에 발표한 제2권으로 〈풍자시〉를 좀더 성숙하고 심오하게 변형한 문학적 '편지들')에 실린 마지막 시는 '천박한' 서정시를 버리고 좀더 교훈적인 종류의 운문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 직후에 그는 3편의 서간체 시(첫번째 책에 실린 어떤 서간체 시보다 훨씬 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창작 활동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모든 풍자적 요소를 버리고 부드럽게 비꼬면서도 분별 있는 태도를 취했지만, 중용을 찬양하는 진부한 말도 그의 손이 닿으면 결코 따분하지 않다. 그중 2편은 2번째 책으로 묶여 나왔고, 3번째 서간시인 〈피소 삼부자에게 보내는 편지 Epistles to the Pisos〉에는 후세 사람들이 〈시론 Ars poetic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마지막 3편의 서간시는 느슨하고 대화적인 형식 속에 문학비평을 싣고 있는데, 특히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서간체 시집 제2권 제2편)는 호라티우스가 왜 서정시를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훌륭한 시는 즐거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호라티우스는 생각했다. 좋은 글의 비밀은 지혜('미덕'이라는 뜻을 함축)이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점을 아낌 없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BC 19년에, 〈시론〉(이 책은 젊은 시인들에게 지침이 될 30여 개의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BC 19~18년경에, 제1권의 마지막 서간체 시는 BC 17~15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이 마지막 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호라티우스에게 보낸 편지도 오늘날 남아 있는데, 여기서 황제는 그때까지 그런 헌정을 받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 마지막 서간체 시에서 호라티우스는 로마 초기의 문학적 배경에 비추어 당시의 시가 가진 장점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호라티우스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한 것이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사실상 계관시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고, BC 1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정권과 지난해에 주창한 도덕 개혁을 종교적으로 엄숙하게 승인할 목적으로 '100년제'(Secular Games)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호라티우스는 이 축제를 위해 〈세기의 찬가 Carmen saeculare〉를 지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서정시 형식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찬가는 서정시 운율로 씌어졌다. 이어서 그는 15편의 송가로 이루어진 4번째 〈송가집〉을 완성했는데, 이 시들은 대부분 이전의 송가들보다 진지한(그리고 정치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 시들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BC 13년에 씌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참모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마이케나스가 BC 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저를 기억하시듯 호라티우스를 기억해주십시오"였다. 그러나 그후 1~2개월 뒤 호라티우스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에스퀼리누스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인생의 후반기에 호라티우스는 늘 로마에서 봄을 보냈고 다른 때도 잠깐씩 로마에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는 로마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따금 남쪽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냈고, 여름과 가을에는 대부분 사비니의 농장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로마 동쪽에 있는 티부르(티볼리)나 프라이네스테(팔레스트리나)에서 지내기도 했다. 짧은 〈호라티우스 전기〉(이 전기의 내용으로 보면 분명 2세기에 활동한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감)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보낸 익살스러운 편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편지를 보면 시인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 같다. 호라티우스 자신도 키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44세 때 자신을 묘사한 것에 따르면, 그는 일찍 백발이 되었고, 햇빛을 좋아했으며 성미가 급해서 걸핏하면 화를 내지만 금방 화를 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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