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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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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子 / 西川 / 그리고, 李箱
2015년 04월 05일 21시 54분  조회:4329  추천:0  작성자: 죽림

 

자살한 하이즈海子와
『하이즈시선海子詩選』을 내준
시촨 시인

 

1. 하이즈와 시촨의 만남

 

  최근 한국의 모 잡지에서 중국 젊은 현대시인과 그의 대표작을 함께 번역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13억 인구 속에 섞여있는, 이름 하여 잘 나가는 ‘유망주 젊은 시인’을 찾아보았다. 마침 선양沈陽에 거주한 지 두 달여 되가는 동안, 급조로 사귄 중국시인이며 중국 잡지사 주간들에게 만나는 데로 부탁도 해보았다. 그러나 중국 역시 이 태평세월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각양각색의 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때여서 내가 찾는 그 ‘유망한 시인’이란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지, 그들은 난색을 표할 뿐,... 결국 무조건 중국시인의 블로그를 찾아 들어가게 됐는데, 마침 시촨西川의 블로그가 나왔다. 수상도 많았고 특히 블로그에 올린 작품들이 눈에 띄어 훑어보니 현실로부터 얻어지는 소재를 갖고 언어시를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唐, 宋 전성기의 시에 대한 회고와 편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인들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서구시의 발전과 새로운 시도를 나름 찾고 연구하며 중국시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꾀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베이징 대학 영문과를 다닐 때 동대학의 법과대학을 다니던 하이즈海子와 동인이었으며 80년대에 등단하고 같은 64년생이고 하이즈가 자살하고 문단으로부터 많은 질책과 혹평을 받을 때 하이즈의 자살동기와 그에 대한 추모의 글들을 발표, 쓸데없는 무모한 추측과 힐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진정한 친구였으며 동료 시인이었음을, 올 2009년 3월에 출판한 『하이즈시선海子詩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책엔 미발표작을 포함, 200여수의 서정시와 7부의 장편 연시가 실려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면, 하이즈는 내가 이미 몇 년 전에 그의 시편들이 좋아서 소개한 바 있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그가 시촨西川의 친구였다니,...!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음을 다시 실감하며 우선 하이즈의 삶과 그의 대표시 세 편을 소개한다.

 

2. 보리밭 시인 하이즈의 자살 동기는

 

우선 그의 본명은 자하이성查海生이고 1964년 3월25일 안휘성安徽省 안칭시安庆市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1979年 15세 때 북경대학 법학과에 합격, 북경에 올라와 재학 중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83年 베이징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정법대학 철학연구실에서 근무하며 학교강의도 나갔다.

그는 시 외에도 소설과 희곡, 논문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대표시로는 장시《그러나 물, 물但是水,水》、《토지土地》가 있으며、시극으로는 《태양太阳》(미완성작), 합창극《메시아弥赛亚》、시극《시해弑》등과 약 200수의 서정시가 있다. 또한 시촨과 합동으로 만든 《보리밭의항아리麦地之瓮》가 있다.

1986년 베이징대학 제 1회 예술제에서 《5.4문학대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1988년엔 제 3회 《시월十月》문학영예상을 받았다. 그리고 하이즈가 자살한 뒤, 대학 당시 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인 시촨西川과 시인 스즈食指로 알려진 꿔루성郭路生과 함께 작품을 모아 출판한 시집으로 2001년 4월 28일 제 3회 시 부문 《인민문학상》을 받았다. 

이렇게 주목받던 하이즈가 25세 젊은 나이에 왜 갑자기 자살을 했을까.

안정적인 직장을 내던지고 황산이 있는, 안휘성 벽지로 다시 소도시 핑창으로 베이징으로 오르내리며 정착하지 못하던 그가 끝내는 당시 문명의 첨단이 되었던 기차레일에 누워 한 생을 마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9년 3월 26일,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과 롱자잉龙家营 부근의 기차 레일에 누워 25년간의 생을 마감했을 때, 문단은 물론 세간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반향은 한동안 세간에 자살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즉, 북경대 시인 거마이戈麥와 아내를 권총사살하고 이어 자살한 꾸청顧城 시인이 생겨나 문단은 오히려 혹독한 비평과 힐책으로 그의 자살동기를 추리, 한동안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그 예로 어떤 이들은 하이즈를 *“장랑차이진江郎才尽” [남조(南朝)의 강엄(江淹)은 젊은 시절 문재가 뛰어나 모두들 ‘강랑(江郞)’이라 불렀으나, 노년에는 좋은 글귀가 나오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재주가 다 고갈되었다고 말하였음] 즉, 창작력이 고갈되어 죽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도시와 농촌의 모순이 그 원인이라고 하고, 반면 기공을 너무 지나치게 연마하다 주화입마(走火入魔)하였다고도 했다. 사천성 시인 종밍(鐘鳴)은 <중간지대>라는 문장에서 하이즈는 한동안 머물었던 창핑(昌平)과 베이징을 분주히 왔다갔다 했지만 두 곳 어디서도 자신의 집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일종의 중간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그의 생일과 기일이 한 날이어서 그의 자살이 하나의 충동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들이었다.       

한편 하이즈가 죽은 뒤 하이즈의 시의 수준문제에 대해서도 크고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그의 시는 위대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시적 사유가 너무 혼란스럽고 언어는 창백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했다. 한 수청잡지书城杂志에 《대박난 병적 언어病句走大运》라는 문장을 발표한 사람은 본인이 하이즈의 대학동창이라며 그의 시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의 시와 언어 수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주따커(朱大可)선생의 “선지자의 문 先知之門”에서는 하이즈의 죽음이 시 예술에서 행동예술로의 급속한 비약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세심한 천재적 계획에 따라 자살로순수한 생명의 언어와 최후의 위대한 시편을 완성하였다고 보았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것 같지만 논리가 엄밀해서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주었다.

그러나 하이즈와 대학시절부터 동인으로 함께 활동을 했던 시인 시촨이 하이즈를 추모하는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시촨은 하이즈의 시 작품을 전면적으로 편집, 출판을 하면서 한편 <사망 후기>도 썼는데, 이는 자살을 모방하지 말도록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3. 황토를 사랑한 시인

 

그는 농사꾼의 아들로 황토를 사랑한 시인이다. 경제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라져가는 대표적 대상인 황토에 그는 애착을 가졌으며 그런 만큼 그 상실감도 자연 컸다. 1989년 초, 그의 고향 안휘성으로 돌아갔을 때, 고향은 그에게 커다란 황량한 삭막함을 주었다. “내게 익숙한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는 1964년 4월 2일, 백양 별자리였다.

1984년, 같은 백양자리였던, 반 고흐에 대한 시《그대의 태양 阿尔的太阳》 를 보면

 

  瘦哥哥梵高,梵高啊/从地下强劲喷出   

  的/火山一样不计后果的/是丝杉和麦田/

  还有你自己/喷出多余的活命时间

   

   말랑깽이 형 반 고흐, 반 고흐여

   땅 밑으로부터 힘차게 분출하는

   화산처럼 갑자기 생겨난 삼나무와 보리밭

   그리고 네 자신까지

   남아도는 생명의 시간을 분출하고 있구나

   

하이즈가 자신과 비유한 것임을 금새 알 수 있다. “계획에 없던 결과” 가 하이즈 신상에도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방식은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1988년 말, 그는 오히려 그의 친구, 시촨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 때 그는 막 결혼하자고 말하는 소도시 평창의 한 여자와 헤어진 뒤였는데,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않고 평창을 배회하며 보냈다. 그 때 일화로 창평의 한 식당 주인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내가 이곳 손님들 앞에서 내 시를 낭송할테니, 당신은 내게 술을 주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 식당 주인은 그런 니체주의적 낭만이 없었으므로 ”줄 수야 있지요. 단 당신은 여기서 낭송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 그의 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식구들조차 그의 사상이나 시작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는 심지어 그와 말을 할 생각조차 안했다.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선생인 아들이 베이징에서 그래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음에도 시골에 들어와 흑백 티브이를 놓고 들어앉았기 때문이었다.

 

하이즈는 당시 양방면의 저항을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권력과 결합한 수구문학과 선봉문학의 대립에서 오는 사회에서의 시인에 대한 불신임이었다. 다른 하나는 선봉문학계 내부의 상호불신임으로 서로 배척하고 이해하지 않는 데서 오는 정신적 압박감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은 뒤에까지 심각했다. 이 일로 1989년 이전 대부분의 청년시인들은 하이즈의 시에 대해 유보의 자세를 취했다. 어떤 시인은 하이즈에게 ”물기만 너무 많다“라고 편지를 써보냈고 1988년 즈음 베이징 한 시인단체는 ‘다행히 살아있는 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말은 한 시모임에서 하이즈의 장시가 시대적 착오이며 더불어 그의 시는 결핍투성이 무일푼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1987년, 하이즈가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와 민간시 잡지에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 평론가가 말하길 “북방으로부터 왔다 고통스런 한 시인이/ 가방에서 꺼내지는 유용하기를 바라는 시편들을 갖고” “인류는 오직 한 사람의 단테로 족하다” “그는 현재 내 친구다, 그러나 장차 나의 적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하이즈는 너무 상심해서 바로 어린아이처럼 친구 이화一禾에게 달려가 울었다고 한다.     

하이즈의 생전의 발표된 작품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발표와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타자로 쳐서 보내는 걸 즐기곤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시인의 시 몇 항들을 표절했다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러나 자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아무래도 한 여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살 며칠 전의 금요일, 하이즈는 그의 첫사랑의 연인을 만났다. 그녀도 1987년 중국법과대학을 졸업, 학생시절 그의 시를 좋아했다. 그녀는 보통 키의 둥근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내몽고의 시인 슈에징저薛景泽(옌베이雁北)의 친척이었다. 하이즈의 최초 발표한 대부분의 시가 내몽고의 간행물에 실리게 된 데는 바로 그녀의 영향이 크다. 그녀는 하이즈가 일생 가장 깊이 사랑한 여인으로 하이즈가 쓴 대부분의 애정시는 그녀를 생각하며 쓴 것이었다. 그들은 왜 도대체 헤어져야 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지만, 단 하이즈가 최후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하이즈에 대해 냉담했다. 그 날 저녁, 하이즈는 그 일로 술을 꽤 많이 마셨고 계속 그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며 괴로워했다. 그리곤 25일 아침, 그는 바로 법과대학이 있는 베이징 학원로를 출발, 산해관으로 갔다. 그 날 아침 시촨의 모친이 마침 출근하면서 베이징 학원로로부터 시즈먼西直门쪽 기차역으로 머리를 떨구고 달려가는 하이즈를 보았다고 한다.    

바로 죽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4. 하이즈의 시와 시 세계

 

중국 신문학사에서 문학과 생명의 한계에 도전, 충돌해 온 시인으로 하이즈海子를 뽑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농촌의 단조로운 생활환경과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해박한 지식 아래 그만의 날카로운 직관과 비범한 창조력으로 시를 써온 시인이었다.

하이즈는 시를 통해 모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사모의 정과 생명의 세속적이고도 숭고하기까지 한 그 격동과 관심을 읽어냈다. 때론 그것이 개방된 이래 마구 쏟아지는 숱한 사상과 문예사조 및 서구 문단의 새 변화에 따른 중국내의 변화를 다 수용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시인의 궁핍한 농촌의 현실에 대한 애정과 아픔은 그를 ‘보리밭 시인’으로 불리게 했으며 한편, 도시 유랑자의 모습, 취약하고 민감한 심령, 실현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불안과 고뇌의 모습은 그대로 시로 우러나와 좌절하는 현대인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의 시에는 특히 죽음, 흑색, 검은 밤, 슬픔, 은빛 노을, 끝없이 긴 황혼 등과 같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아이상의 극도의 확장과  평범한 생존 현실에 대한 심각한 포기와 경시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붉은 흙에 바탕을 둔 보리밭과 황막한 들판에 펼쳐진 이름 모를 풀밭에 서서 그들의 뜨거운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선 자신, 즉, 인간의 존재에 한 가닥 희망을 놓칠 수 없음을 또한 깨닫곤 했던 것이다.

  

꽃피는 봄날 바다를 향해 서면

 

 

내일부터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지

말을 먹이고, 장작을 패고, 세계를 주유해야지

내일부터는, 양식과 채소에 관심을 가져야지

내 집 한 채는 바다를 향해 있어 봄엔 꽃이 핀다네

 

내일부터는 모든 친지와 통신을 해야지

그들에게 나의 행복을 말해 줘야지

그러면 행복이 번개 치듯 나에게 말할 거야

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해야지

모든 강과 모든 산에게 하나씩 따뜻한 이름을 지어 줘야지

이방인이여, 나도 그대를 축복하네

그대에게 찬란한 앞날이 있기를 바라네

그대의 애인과 마침내 가족이 되기를 바라네

그대가 풍진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네

나는 그저 꽃피는 봄날 바다를 향해 서 있기를 바라네

 

                                - 1989년 1월 13일

 

               『하이즈시전집』 중에서, 상하이 산리엔 서점에서 1997년 출판

面朝大海, 春暖花開 / 海子

 

               

總明天起, 做一个幸福的人/喂馬, 劈柴, 周遊世界/總明天起, 關心糧食和蔬菜

我有一所房子, 面朝大海, 春暖花開 //

總明天起, 和每一个親人通信/告訴他們我的幸福 /那幸福的閃電告訴我的

我將告訴每一个人 /給每一條河每一座山取一个溫暖的名字/陌生人, 我也爲你祝福

愿你有一个燦爛的前程 /愿你有情人終成眷屬/愿你在塵世獲得幸福/我只愿面朝大海, 春暖花開

 

                            1989年 1月 13日

                        (選自 <海子詩全篇>, 上海三聯書店 1997 年版)

 

   이 시는 바로 자살하기 두 달 전에 쓴 시이다. 사후 근 10년 만에 간신히 상하이의 한 작은 출판사로부터 『하이즈시선집海子詩全篇』으로 묶여 빛을 보았다.

이 시는 쉽고도 소박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간절한 희망의 시이다. 이 때까지도 그는 “나는 그저 꽃피는 봄날 바다를 향해 서 있기를 바라네” 적어도 “내일부터는, 행복한 사람이 되길” 소망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의법으로 쓰인 “내일”이란 단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대지에 밀착된 그의 소박한 ‘말을 먹이고, 장작을 패’는 삶이 현실적으로는 “풍진세상”의 행복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을 배반하는 일이어서 그의 꿈은 단지 상상과 영원을 갈구하는 그의 道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으로 넘나들기 위해 바다로 머리를 돌리고 집도 그 바닷가에 짓고 싶은 그의 행복관은 그래서 실패이고, “꽃피는 봄”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한편 평론가 방창안 方長安은 윗 시에서 “양식과 채소에 관심을 가져야지” 라든가 “세계를 주유해야지” “바다를 향해 ”등은 중국전통 민본民本사상과 서구식 탐구정신이 결합된 것이라는 민족적인 시선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기도 했다.

 

 

까만 밤의 헌시

     ─ 까만 밤의 여인에게 바칩니다

 

 

까만 밤이 대지에서 올라와

밝은 하늘을 막고 있다

추수 후 황량해진 대지 위로

까만 밤이 그대의 내부에서부터 올라온다

그대는 먼 곳에서 오고, 난 먼 곳으로 떠나련다 

멀고 먼 노정은 이곳을 지나고 있고

텅 빈 하늘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

추수 후 황량해진 대지,

사람들이 일 년의 수확을 다 가져갔다

양식을 가져가고, 말도 타고 가 버렸다

땅에 남은 사람들은 땅 속 깊이 묻혀버렸다

 

쇠스랑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볏짚 단이 불 위에 쌓인다 

곡식들이 깜깜한 곡창에 쌓여 있다  

곡창은 너무 어둡고, 너무 적막하고, 너무 풍성하다

또 너무 황량해서, 풍작 속에도 염라대왕의 눈동자가 보인다

 

검은 빗방울 같은 새떼들이

노을로부터 까만 밤으로 날아든다

그 까만 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

           

길을 걸으면서

소리쳐 노래한다

거센 바람이 산마루를 휩쓸며 지나가지만

그 위는 끝도 없이 빈 하늘일 뿐이다

 

 

1987년 11월 14일, 하이즈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암흑이란 건 영원하다. 내 소란한 맘을 가득 채우고 다시 범람하게 한다. 어둠은 한낮보다 아름다운 한낮의 시詩이다. 태양을 창조한 사람은 부득불 자신을 위해 암흑의 형제가 될 수밖에 없다.”

“8년 전 한겨울에 야간열차를 탄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한 여인에게서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온기를 느꼈다. 그때의 어둠은 오히려 한낮 같이 밝았다. 한편 현재의 밝은 한낮은 정말로 어둔 노동의 장소나 자궁 속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광란이나 폭풍의 중심에 있을 땐, 어떤 위안도 필요하지 않다. 난 암흑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는 「까만 밤」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하이즈 시 전편」 883~884 쪽)

하이즈는 독일시인 헬더린을 좋아했다. 니체의 “암흑시기”보다 몇 배 더 긴 정신착란증세로 36년간이나 암흑 같은 병고에 시달렸던 시인 헬더린도 그의 시에서 “정신의 까만 밤 속에서 나는 대지로 달려나갔다”를 토로했는데, 하이즈는 “헬더린의 시를 읽다보면, 내 맘 속은 아무 것도 없는 망망한 대 사막 가운데서도 문득 푸른 샘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헬더린의 영향을 받아 그는“멀다는 것은 요원한 걸 빼면 아무 것도 없다”라는, 나름대로의 시론 아래 시를 썼다. (「하이즈 시 전편」 914~917 쪽에서 인용)

그만큼 이 시에서 「흑암黑暗」 은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암흑”은 생명을 지닌 단어이다.

왜냐하면, 까만 밤은 암흑의 여인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암흑”과 “광명”의 관계는 실제로 대지와 하늘의 관계이다.

“黑夜從大地上昇起 / 遮住了光明的天空” (까만 밤이 대지에서 올라와/ 밝은 하늘을 막고 있다) 이 시구는 이 시에서 전반적인 기조가 된다.

봄엔 씨를 뿌리고 가을엔 거둬들이는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 그는  오히려 생장의 멈춤과 생명의 사망을 봤기 때문이다. 추수 뒤에 오는 황량함을 지켜보며 그는 추수의 의미가 풍요로움을 지나 어둠을 상승시킨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시인은 “大風刮過山岡(거센 바람이 산마루를 휩쓸며 지나)가지만” “走在路上 / 放聲歌唱(길을 걸으면서/소리쳐 노래한다)” 라고 쓴 것이다.

“上面是無邊的天空(그 위는 끝도 없이 빈 하늘일 뿐이다)” 이런 극명해진 상황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생존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진정으로 “어둠의 여인”에게 인생의 잠언을 바치는 것이다. 1987년 하이즈는 「시학 : 하나의 제안」에서 “토지를 상실한 현재의 의지할 곳 없이 표류하는 영혼들이 대신 찾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그것도 아주 가벼운 대지 본연의 생명력은 단지 욕망을 대체품으로 사용하거나 대신 지칭할 때만 이용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했다.(「하이즈 시 전편」 889쪽, 인용)”고 했는데, 정말 “그 까만 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어찌하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는지, 어둠이 한낮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아시아의 구릿빛 땅이여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여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여기에, 나 역시 여기에서 죽으리라

그대만이 유일하게 사람이 묻힐 땅이로다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회의와 비상을 좋아하는 새,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바닷물 

그러나 그대의 주인은 푸른 풀이구나, 스스로 허리를 오그린 채 들꽃의 손바닥과 그 비밀을 지켜주는구나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보이는가? 저 두 마리의 비둘기가, 그것은 굴원이 모래사장에 남겨 두고 간

흰색 신발이도다

우리는―― 우리는 강물과 함께 그걸 신어 보자꾸나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아시아의 구리빛 땅이여

북소리 끝난 뒤, 어둠 속에서 벅차게 뛰는 심장을 우리는 달빛이라 부르련다

그 달빛은 주로 그대를 가지고 만들었으니

 

 

亞洲銅

 

亞洲銅, 亞洲銅/祖父死在這里, 父親死在這里, 我也將死在這里 /你是惟一的一塊埋人的地方

亞洲銅, 亞洲銅/愛懷疑和愛飛翔的是鳥, 淹沒一切的是海水 /你的主人却是靑草, 住在自己縮小的腰上, 守住野花的手掌和秘密//

亞洲銅, 亞洲銅 /看見了嗎? 那兩只白鴿子, 它是屈原遺落在沙灘上的白鞋子/讓我們_______我們和河流一起, 穿上它吧 //亞洲銅, 亞洲銅/擊鼓之后, 我們把在黑暗中跳舞的心臟叫做月亮 /

這月亮主要由你構成

 

   위 시는 전체적으로 몽롱하면서도 우의성이 깊은 작품이다. 제목부터 그렇다. 아니 네 번이나 <아시아의 구릿빛 땅이여>를 반복 영탄하며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아시아 구리亞洲銅’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시아 구리亞洲銅’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과 정서는 또 어떻게 이해, 해석해야 하는가.

 

단어 그대로를 풀어본다면, <아시아 구리>이지만, 이 시편에서 시인이 의도적으로 숨겨둔 우의寓意는 무엇일까? 구리, 동銅은 황동과 청동이 있다. 그러나 여기선 시를 통해 흙빛, 즉 황동을 가리킴을 추측할 수 있다. 왜냐면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리고 장차 내가 죽어 묻힐 대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굴원이 신발을 벗어놓고 빠져 죽은 장강의 한 지류인 멱라강으로부터 중국문명이자 동양문명의 발상지인 황허 유역을 통해 문명은 시작되었고 그 중에서도 구리를 발견, 사용함으로써 그 때로부터 문명은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즉 흙, 대지는 문명의 근거가 된 황토빛 구리와 같은 것이다.

이 시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현실에 만족치 않고 탐색을 하는 새는 그들의 민족성을 나타내며 모든 걸 침몰하게 하는 바다는 그들을 단련시키는 온갖 재앙과 역사적 시건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이 두 상징을 구리빛 땅에 대비시킨 까닭은 한 포기 풀꽃을 피워내는 황토빛 구리 땅이야말로 동방문명의 번영과 다원성을 상징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시의 주제는 끝 연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달빛은 아시아 구릿빛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동방문명은 어둠 중에 세상을 밝히는 달빛이라고.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벅차게 뛰는 심장을 우리는 달빛이라 부르”며 “그 달빛은 주로 그대, 아시아 구릿빛 땅을 가지고 만들었기”때문이다. 달은 빛이고 그 빛은 양성문명이며 대지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어둠 속의 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5.  이상李霜을 닮은 천부적 시인

 

   시촨에 의하면, 하이즈는 키가 작고 얼굴은 둥글고 큰 안경을 낀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이미 등단을 했는데, 그는 우리나라의 천재시인 이상李霜과도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시인이었다. 15살 때 그는 안휘성 시골 구석에서 베이징 대학 법학과로 들어와 중국법학대학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초기엔 교지편집에, 후기엔 철학과 교수연구실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계통론과 미학에 대해서도 강론을 했는데, 하이즈의 미학강의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한 예를 들면,  “상상력”의 수의성에 대해 강의 할 때, “너희들은 갈매기에 대해 상상해 봤니?  하느님의 수영 팬티 같지 않니! ” 라고 말해서 학생들은 그가 시인임을 단번에 알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방과 후 10분간 그가 낭송하는 시를 듣곤 했다고 한다. 

하이즈는 25 년의 생애 중 15년간을 시골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안에선 늘 바람의 방향과 보리의 자라는 모습  등이 그려지고 있으며 그 붉은 흙의 빛과 어둠, 생명의 온화하고도 잔혹한 본질, 침묵의 대지가 그에게 들려주고 또 말하게 하는 유창하고도 간결하고도 또 연마된 뿌리 깊은 시어들이 그를 대지 안으로 품게 하고 성장하게 했음을 간파하게 된다. 광대한 중국의 빈곤한 고향이 그에게 선물한, 풍부한 시정신의 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겠다. 

    

 ▲ 참고서적:  《하이즈의 시海子的诗》//

              『하이즈. 사유海子·思绪』인민문학출판사 편집/ 1990.2.17 // 

            《하이즈. 난화 海子·暖花》인민문학출판사 편집/ 1994年5月31 //

 

 


​1987년 11월 14일 하이즈의 일기

 

 

 

"암흑이란건 영원하다. 내 소란한 맘을 가득채우고 다시 범람하게 한다.

어둠은 한낮보다 아름다운 한낮의 詩이다. 태양을 창조한 사람은 부득불

자신을 위해 암흑의 형제가 될 수밖에 없다"

 

"8년 전 한겨울에 야간열차를 탄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한 여인에게서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온기를 느꼈다. 그때의 어둠은 오히려 한낮같이 밝았다.

한편 현재의 밝은 한낮은 정말로 어둔 노동의 장소나 자궁 속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광란이나 폭풍의 중심에 있을 땐, 어떤 위안도 필요하지 않다.

난 암흑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는 [까만 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던 것

이다.([하이즈시 전 편]883~884쪽)

 

하이즈는 독일 시인 헬더린을 좋아했다. 니체의 '암흑시기'보다 몇 배 더 긴

정신착란증세로 36년간이나 암흑같은 병고에 시달렸던 시인 헬더린도 그의

시에서"정신의 까만 밤 속에서 나는 대지로 달려나갔다"라고 토로 했는데,

하이즈는 "헬더린의 시를 읽다보면, 내 맘 속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한 대 사막

가운데서도 문득 푸른 샘물이 솟아나는 것같은 희열을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헬더린의 영향을 받아 그는 "멀다는 것은 요원한 걸 빼면 아무것도 없다"

라는, 나름대로의 시론 아래 시를 썼다([하이즈 시 전편] 914~917쪽에서

인용)

그만큼 이 시에서 흑암은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암흑'은 생명을 지닌 단어

이다. 왜냐하면, 까만 밤은 암흑의 여인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암흑'과 '광명'의 관계는 실제로 대지와 하늘의 관계이다.

 

'까만 밤이 대지에서 올라와/ 밝은 하늘을 막고 있다' 이 시구는 이 시에서

전반적인 기조가 된다.

 

봄엔 씨를 뿌리고 가을엔 거둬들이는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 그는 오히려 생장의

멈춤과 생명의 사망을 봤기 때문이다. 추수 뒤에 오는 황량함을 지켜보며 그는

추수의 의미가 풍요로움을 지나 어둠을 상승시킨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시인은

'거센 바람이 산마루를 휩쓸며 지나'가지만 '길을 걸으면서/소리쳐 노래한다'라고

쓴 것이다.

 

'그 위는 끝도 없이 빈 하늘뿐이다' 이런 극명해진 상황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생존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진정으로 '어둠의 여인'에게 인생의 잠언을 바치는 것

이다. 1987년 하이즈는 [시학:하나의 제안]에서 '토지를 상실한 현재의 의지할

곳 없이 표류하는 영혼들이 대신 찾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그것도 아주 가벼운

대지 본연의 생명력은 단지 욕망을 대체품으로 사용하거나 대신 지칭할 때만 이

용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했다.([하이즈시 전편]889쪽

인용)고 했는데, 정말 ' 그 까만 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는지, 어둠이 한낮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

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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