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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춘: 시는 객관세계가 작가의 심령에 불러일으킨 촉동을 표현해야 한다
현대인의 시간은 과거와 속도가 다른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일부 사람에게만 다른 속도를 적용하고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일흔고개에 올라선 한춘선생만 봐도 그렇다. 아직도 배갈을 쭉쭉 내는 모습,청년들처럼 열변을 토로하는 모습, 뜨거운 일욕심, 그리고 미인을 사랑하는 마음… 시인이고, 평론가이고 하는 인간 삶의 규정어들을 론하기에 앞서 그는 열린 사유와 미리지향적인 자세를 지닌, 삶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또한 이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문학인생에 녹아내려 화려한 악장을 연출하는것 같다. 문학인으로서의 한춘(본명 림국웅, 70세)은 문화대혁명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79년부터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으로 활약, 현재는 퇴직하고 흑룡강동방학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초빙교수로 일하고있다. 조선족 북방문단의 형성과 현대파 시인 군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한 뿌리 깊은 나무이며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현대파시인이다. 또한, 최근에는 왕성한 평론활동을 펼치고있다.
북방문단과 현대파 시인 군체의 형성을 위해 노력하다 문화대혁명전 전반 흑룡강성 조선족문단은 창작대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리삼월, 허도남 등 10여명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뿐이었다. 당시 ‘흑룡강신문’의 진달래부간도 페간되였었다. 문화대혁명후기, 1975년을 전후하여 ‘흑룡강신문’에 ‘아침노을’이라는 부간이 생기였고 차츰 문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후, 4인방이 타도되면서 문학열조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문화대혁명기간에 중단됐던 흑룡강신문의 ‘진달래문학부간’도 회복되였다. 당시 한춘선생은 동북농업학원 토지규획전업 졸업으로, 해림에서 문학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갖고있었으나 송화강잡지와 흑룡강신문 ‘아침노을’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였으며 1979년부터는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후기부터 1979년까지 흑룡강성조선족문단에는 소설에 윤일산, 김송죽 등이 신문을 통해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4인방이 타도된 후에는 윤림호, 장금선이 나타났다. 1982년에는 리삼월, 리명재, 박철준, 한춘, 강효삼, 김동진, 한병국 등 7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묶은 ‘칠색무지개’라는 시집이출판되였다. 이러한 계기로 흑룡강성에 문학인군체가 형성되였으며 북방문단이라고 불리웠다. 이 시기 한춘선생은 흑룡강성의 조선족 문학인들에게도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여 연변작가협회와 적극 련락, 제1회로 8명의 북방문단의 작가들이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여 흑룡강성창작소조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1984년 한춘선생은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직을 맡게 되였으며 흑룡강성 창작소조 8명 회원이 흑룡강성작가협회에 가입하는 일을 추진, 흑룡강성 문화청과 선전부, 작가협회, 민정청 등 부문을 뛰여다니며 노력한 결과 흑룡강성작가협회 산하의 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를 설립할수 있었다. 초대회장에홍만호선생이 당선되고 민족호텔에서 성대한 설립대회를 열었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주석, 조선작가동맹위원회의 부위원장이 설립대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흑룡강성은 독립적인 창작군체를 형성하였으며 박옥남, 조광명, 홍군식, 최화길, 리홍규 등 중견문인을 배출하였다. 흑룡강신문사는 한춘선생의 주도로 해마다 문학행사를 마련하여 수필문학상,시조문학상 등을 단일쟝르 문학상을 설치하였다. 1985년에 시작된 수필문학상은 7회를 유지하여 왔다. 역시 1985년에 시작된 신춘문예 장편소설 련재는 11회까지 유지되였다. 당시에 련재된 허련순의‘바람꽃’, 리혜선의 ‘빨간 그림자’ 등은 모두 중국 소수민족 ‘준마상’을 탄 작품들이다. 1980년대는 중국에서 사상 해방 시기였으며 문학관념에 대한 전변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한춘선생은 당시 중국문단의 한 류파로 자리잡고있던 몽롱시의 영향하에 전통적이고 사회 직접 반응이며 송가적인 시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1984년에 ‘시가 관념을 갱신할 때가 되였다’란 단상을 발표, ‘연변문학’잡지에 많은 반박 문장들이 나가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한춘선생은 전반 시대적 흐름을 읽으면서 문학 전환의 흐름이 형식위주로 나간다고 보았다. 즉 예술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시는 감정 정서를 표달하는게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객관세계가 작가의 심령에 불러일으킨 촉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편집으로써, 흑룡강신문에 현실주의 시와는 색갈이 틀린 시들을 발표하고 그 작품 해석을 쓰면서그 과정에 젊은 시인 군체들을 이끌어주었다. 근 10년에 가까운 노력을 거쳐 현대파 시인 군체가 형성되였으며 현재는 현대파시가 조선족문단에서이미 충분한 위치를 가지게 되였다. 2011년에는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이란 모던시집을 묶어 현대시의 결과물을 보기도 했다.
평론가로서의 한춘이 보는 시와 수필 “내가 편집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니 편집으로서 전반 문단의 흐름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평론을하게 되였다. 시대적 흐름을 볼 때 문학은 내용 위주에서 형식 위주로 나간다고 생각했다. 또한, 모던은 언제나 새로운 시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보는것을 말한다. 현재 진행형이라고 해서 다모던인 것이 아니다.” 한춘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한춘선생의 ‘난해시의 변호’, ‘현대시의 진단’ 등 평론은 조선족시단의 변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문체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작품을 평론하면서 현대시를 전통적인 사실주의 방식으로 평론하기 어려우나 구조주의로는 가능하다는것을 발견, 즉 능기(能指)- 시밖에무엇이 있느냐로 평론을 했으며 시행의 이미지 사이의 내재적 련계를 추적해내면서 1+1>2이라는 시평을 할수 있었다. 한춘시인이 수필 평론쪽으로 눈길을 돌린것은 1986년 ‘도라지’잡지에 ‘옆쪽 쪽걸상에 앉은 수필문학’이라는 문학단상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족 수필 현장비판을 시작하여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에 수필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수필은 격이 없으므로 평론이 가장 어려운 쟝르이다. 역시 형식 평론을 한다,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어떻게 썼느냐를 평론한다. 즉 이야기가 작품이 아니고 그 이야기가 작가에게 가져다준 정서적인것이수필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나무 하나 전지하면서도 거기에 도리를 담으려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거기에 감정을 담는게 좋다고 본다” 한춘시인은 우리 수필이 가장 부족한것이 문화의식과 력사의식이 미약한것이라고 봤다. 즉 민족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적 심리를 써야 하는데 깊이 파고드는 멋이 부족하다는것이다. 그리고 력사의식이 미약하다는것은 우리 수필이 너무나 좁은 민족세계에 국한되여 있다는 점, 전중국적, 혹은 인류의시점에서 력사의 본질을 추구해내는것이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70고령임에도 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하고있는 한춘선생은 교수과정에서 한국문학사 교과서가 마땅한것이 없음을 느끼고 30만자에 달하는 ‘한국문학략사’를 편찬해 올해 8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당시 150수’, ‘송사 150수’의 우리글 번역서도 8, 9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연변일보
한춘 프로필: 1966년 동북농업학원 졸업, 1968년 해림시 수리국 취직. 1979년 12월 흑룡강신문사 입사. 2003년 3월 정년, 고급편집. 전 흑룡강동방학원 초빙교수.한국문학 강의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력임, 흑룡강작가협회 리사 력임, 명예리사.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회장 력임, 고문 수상경력: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3차, 흑룡강성문예상 2등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1등상, 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 장락주문학상 등 다수. 작품집: 시집 <무지개는 뿌리 내릴 곳을 찾는다>등 5부, 평론집 <현대시의 선택과 곤혹>. <한국문학약사> 등. 금년 시집 한권과 수필집 두권 출판계약 맺음. 번역: ‘당시 정선 150수’, ‘송사 정선 150수’ “왕몽 자서전 '나는 학생이다'” , 홍매 ‘수필집’ ( 번역제목 <경제지략>)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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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계절에 우리는 한춘선생을 떠나보냈다. 아니 선생께서 이런 계절을 선택해서 우리를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병마와 조우하신후 50성상 시인의 삶을 살아오신 선생답게 생명의 마감을 이렇듯 아름답고처절한 계절로 선택해 장식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 슬픈것은 그것이 다시 살아돌아올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슬픈 죽음의 다른 한 의미를 망각할 때가 많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란 곧 생명 창조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그 점이다. 무릇 생명이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수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생명의 연장만이 아닌 생명의 창조에서 우리는 삶의 보람과 의미를 한결 더 절실하게 느낄수 있지 않은가. 선생의 떠남이 우리의 가슴을 더더욱 저리게 하는것은 바로 선생의 시창작,선생의 문학비평, 선생의 후학에 대한 사랑과 가르침...... 이 모든것이 바로 7월의 수풀처럼 절정으로 치닫으며 생명 창조의 찬가를 부르는 가운데 문득 단절되였기때문이다.
그러한 생명 창조는 칠순이라는 선생의 년세와 무관한것이였다. 그만큼 선생은 시인으로서 치열한 인생을 살아오셨고 그 치열함속에서 완성돼온 선생의 문학세계와 문학사상은 곧 그이를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도록 만든것이였다. 그처럼 즐겼던 소주와 줄담배만큼이나 문학에 심취하며 살아오신 선생은 온 생명을 문학과 문학을 위한 일과 사람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방문단의 거의 모든 시인, 작가들이 선생의 관심과 가르침을 받았고 그들의 성장과정에 알게 모르게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또한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만큼 선생은 지난세기 80년대부터 북방문단의 기수와 도사로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문학인생을 살아오셨던 것이다.
그러한 문학인생은 또한 선생을 북방문단뿐이 아닌 전반 중국 조선족문단에서도 그이만이 이룩할 수 있는 업적을 쌓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가장 먼저 <시가관념갱신>을 주장하며 시가 리론과 창작을 적극 실천해오셨다. 그것은 단지 현대시창작방식을 주장해온 것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건국이후부터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경과하면서 굳어지고 경직된 우리의 문학환경에 대한 도전이였고 정치와 전통관념의 예속에서 리탈하려는 과감한 시도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문단의 관념전변과 사상해방이 그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은 이미 20여년 흘러 지금 우리문단은 창작관념이나 방식에서 전례없는 다원화 국면이 조성되고있는데 여기에는 선생의 당초 관념갱신 주장과 실천에서 그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애주와 달변 그리고 소탈함과 박식으로 유명하셨던 선생은 어딜 가나 주변에 문우들이 모여들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인생을 담론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이의 시를 진정 리해하는 이 몇이였고 그이의 작품세계에 깊숙이 들어간 이 몇이였던가. 우리의 보잘것 없는 시와 수필 그리고 소설에 대해 선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토록 자세하고도 심각하게 그 우렬과 높고 낮음을 가려주셨지만 그이의 문학세계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습득하고 있었던가. 그래서 선생은 어쩌면 고독하셨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학인생을 살으시며 그토록 높은 금자탑을 쌓으셨기에 그만큼 그이는 정신의 고독함을 감내하시다가 가셨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늦게나마 알게 된 우리의 가슴은 그래서 더더욱 슬퍼지는것만 같다. 이제 우리는 빈말이 아닌 실제행동으로 그의 문학사상을 리해하고 거기서 창작과 사상의 양분을 길이길이 섭취해야 할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를 사랑하고 가르치셨던 선생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인지도 모른다.
7월 19일 오전, 선생은 몇줌의 하얀 뼈를 남기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골회함을 받쳐든 선생의 아들 대용이와 딸 미금이를 따라 납골당까지 갔다. 하늘나라에도 주소가 있다면 납골당 번호가 바로 그 문패일것 같아 그걸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혹시 선생이 그리우면 가끔 찾아가뵐수도 있으니까.
할빈 하평로(哈平路) 납골당 3층 천지(天池)실 997번. <주소없는 편지>를 한권의 시집으로 묶어내셨던 선생이 남기신 마지막 주소인셈이다. 주소는 있으되 편지를 보낼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그리움만은 항상 보낼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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