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월 2025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동시인 - 한석윤
2015년 03월 05일 22시 15분  조회:4809  추천:0  작성자: 죽림
 

 

 

동심어린 한석윤시인의 고향을 찾아서

 

글/ 한태익 사진/ 성광호

 

 

 

   한석윤 동시인을 모시고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우리 탐방 팀 일행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마을에서도 한석윤 동시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양으로 여러 번 한석윤 동시인께 전화를 걸어왔다. 벌써부터 고향을 찾는 이와 고향에서 기다리는 이들의 상봉이 기대되었다.

 

드디어 우리 탐방 팀 일행은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인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중강자 마을에 도착했다. 한석윤 시인의 고향 중강자 마을은 한 폭의 산수화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아담한 동네였는데 촌장이 마을 노인들을 친히 모시고 나서서 반겨 맞는다.

 

한석윤 동시인을 반겨 맞는 이들이 바로 한석윤 동시인과 공부했던 동창들이라 한다. 한석윤 동시인이 어렸을 적에 업어주기까지 했다는 이웃집 누이도 이제는 칠순을 넘긴 고희의 늙은이건만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한석윤 동시인의 두 손을 붙잡고 어쩔 바를 모른다.

 

“석윤이, 어머님 건강히 잘 있소?>

 

여러해 전에 고향을 찾은 어머님을 보았다는 안노인들의 물음이다.

 

“잘 있소. 모시고 함께 오고 싶었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그러지 못했소.”

 

“청상과부로 홀로 살며 자식을 잘 키워 늘그막에 복 받는구먼. 옛날에 석윤일 공부시키겠다고 무작정 연길로 이사 간 엄마가 대단한 분이지. 우리들도 그때 석윤이가 도회지로 이사 가니 얼마나 부러워했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홀로 생판부지인 시내에 가서 얼마나 고생했겠소. 엄마가 그랬기에 석윤이도 농촌을 벗어나 대학공부도 하고 이렇게 큰사람이 되었지.”

 

고향사람들은 도회지에 가서 출세한 한석윤 동시인의 지난 일을 추억하며 감회에 젖는다.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 증강자 마을의 박경석 촌장이 고향의 특산물로 마련한 음식이 식는다고 식사부터 하시라는 권고도 마다하고 자신이 살던 생가부터 찾았다.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한석윤 동시인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생가 앞에서 한석윤 동시인은 지난날을 회상한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전임사장이며 현 연변청소년진흥회 회장이신 한석윤 동시인은 중강자 마을에서 자라고 소학교에 입학하여 열두 살까지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곳 중강자에서 세살에 한석윤 동시인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시인의 부친께서 한석윤 동시인이 공부로 출세 할 것을 바라 자신을 문필봉아래에 묻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석윤 동시인은 문필봉으로 부친의 성묘를 다닌다고 한다.

 

한석윤 동시인은 남편의 뜻을 헤아린 어머니를 따라 연길에 와서 학업을 이었고 196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3309병퇀을 따라 북대황에 가서 노동단련을 받았고 후에는 주인민정부 번역과를 거쳐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당조서기 겸 사장 사업을 장장 21년간 하시다가 지금 정년퇴임 하시고 지금은 연변청소년진흥회 회장으로 여생을 청소년사업에 바치고 동시창작에 태워가고 있다.

 

한석윤 동시인은 동년의 소꿉친구들과 함께 중강자 마을 뒤편에 터를 잡고 있었던 옛날 학교자리를 둘러보며 흘러간 개구쟁이시절을 추억하다가 후에 마을 뒷산 밑에 다시 세웠던 학교가 폐교된 현실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어린이들이 없는 농촌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반면에 정다운 고향이 해체의 위기를 맞지 않고 새롭게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고 한석윤 동시인은 기쁨을 금치 못했고 앞으로도 고향을 자주 방문하고 고향에 도움이 되는 일을 얼마간이라도 할 생각이라 했다.

 

한석윤 동시인을 기억하고 반갑게 반기는 이들도 많았지만 한석윤 동시인을 알지 못하는 고향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부모들의 이름을 대면 누구누구네 자식임을 한석윤 동시인은 헤아려보고 반가워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자주 방문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오래 동안 고향을 잊고 살았던 저를 이렇게 고향의 진수성찬으로 대접해주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의 고향 탐방을 마련해주신「송화강」잡지사에 고마움을 표하고 함께 해준 한태익 방송인과 성광호 사진작가에게도 고마움을 드립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련한 오찬을 마주하고 한석윤 동시인의 마음은 감격에 떨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사람들하고 나누는 오찬일진 대 이 한잔 술도 꿀보다 더 달 것이 아닌가?

 

“여러분 잘 계십시오. 가을에 어머님을 모시고 꼭 다시 오겠습니다. 부디 그동안이라도 모두들 옥체건강하십시오.”

 

탐방 팀 일행과 함께 한 몸이라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에 더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귀로에 오를 때 한석윤 동시인은 다음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번 고향 행을 통해 한석윤 동시인은 다시 동심을 찾은 듯 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동년을 같이 보내던 고향 사람들을 만나 동년의 회포를 풀었으니… 이번 고향 행을 통해 한석윤 동시인은 만년에 어린이 동심을 간직하고 동시창작에서 더 큰 성과를 이루기를 미리 빌어마지 않는다.

 

 





동시인 한석윤 한국에서 시화전 펼쳐
 

저명한 동시작가 한석윤(70세)시인의 동시화전이 7월 4일 한국 서울 서초동의 한국청소년운동련합에서 개최,시화전에서는 많은 독자들이 평생을 어린이들과 살아온 한석윤 시인의 동시에 세계적인 조선족 화가들이 그림을 덧입힌 시화들을 만났다.
 
한국청소년운동련합의 초청으로 열린 이번 동시화전에는 한석윤시인의 동시작품 60여편이 전시, 한시인의 동시와 중국 조선족화가인 신순칠과 고 장홍을 화백의 그림이 만나 재미있게 형상화됐다.
장홍을화백은 타계하기전 도합 30여폭의 동시화를 남겨놓았고 그후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미술편집인 신순칠화가가 또 한석윤선생의 동시화 50여폭을 창작했다. 이번에 선보인 동시화전은 한석윤시인이 두 화가와의 합작으로 만든 80여점의 창작품중에서 60여편을 추려서 전시한것이다.
이에 앞서 한시인은 1996년 한국 인사동 갤러리에서 20여명의 조선족화가들과의 합작으로 만든”중국조선족동시인 한석윤초청시화전”을, 2006년 8월에 또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과 대전시, 제천시에서 각각 일주일간의 동시화전을 펼친바 있다. 조선족 작가들중 개인시화전을 펼친것은 그가 처음이다.
 
한석윤시인은 언론인, 동시인, 사회활동가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기자협회 부주석,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부회장,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등을 력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을 맡고 있다.
“별과 꽃과 아이와”, “웃음을 쏘는 대포”등 9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학상, 한국방정환문학상 등 여러차례 문학상을 수상했다.
 
명년에 열번째 신작 동시집 출간을 앞두고있는 한석윤시인은 “앞으로도 아이들을 위해 우리 민족의 얼을 우리 글과 말로 노래할수 있는 작품을 그냥 써갈것”이라고 밝혔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5일
 
 한석윤 동시인, 시조창 발전 공로상 수상

 

 


 

저명한 동시인 한석윤이 대한시조협회 함안지회(지회장 김재순)에서 실시하는 제5회 시조창 발전 공로상에 선정되였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정년 퇴직한후 연변 청소년문화진흥회를 출범하고 아이들을 위한 일에 “평생무휴”로 로고를 바치고있는 한석윤 동시인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시조창이라는 이 고유의 쟝르가 조선족사회에서 잊혀지고있는 실정을 감안해 한국의 시조창 기능자들에게 전수해 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결과 한국 함안지회장인 김재순 명창의 “중국동포를 위한 시조창 봉사활동” 이 개시되였고 연길시, 도문시 등에 시조창의 씨앗을 뿌리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2007년에 처음으로 “시조창 사랑회”가 발족되여 지금은 소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과학기술대학, 연변대학 등 대학생들까지도 시조창을 배우게 되였고 올해는 “연길시 중국 조선족 시조협회” (사단법인)를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사단법인 대한시조협회 함안지회에서는 2006년부터 시조창 발전에 기여한 분을 선정,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사패와 함께 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1년 1월 10일 

=============================

 

내가 아는 한석윤

림금산


내가 동시인 한석윤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86년 연말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나는 안도현 제2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하루는 나더러 연길에 있는 소년보사에서 왔다가라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말미를 맡고 연길에 달려가 하남 3백화점 바로 위쪽에 있는 단층집(간판은 천지월간사라고 쓰여 있었음.) 한쪽 칸에 찾아들어가니 사장이신 한석윤 선생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것이 나와  동시인 한석윤 선생사이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몸이 퍽 갱핏 했고 키가 좀 큰 편이었는데 머리는 짧고 도수 높은 안경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도 역시 지금처럼 웃는 눈길이었다. 첫인상에 전형적인 지성인 타입이었다. 그리고 한손에 빗자루를 쥐고 한손엔 쓰레바끼를 들고 있었다. 마침 실내청소를 하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너무나 소탈하고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열정적이고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란 인상이 강하게 안겨왔다. 우린 만나자부터 마치 오래 익숙히 아는 사이처럼 마음이 통하였고 나는 그와 한집안 식구 같은 분위기에 잠겼다. 그이는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많은 말씀을 해주었고 소년보사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 되는데 수속이 되는대로 1987년 1월부터 정식 출근해도 별문제 없다고 찍어 말해주었다. 

그때 그 옆에 소년보사에서 인사를 책임진 최숙녀 선생이“한 사장은 성 노력모범이 되었는데 동무도 그를 따라 배워 잘해보라.”고 귀띔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 그 갱핏한 몸매를 눈주어 보았다.

이렇게 나는 소년보사란 이 가정에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부하』로 오늘까지 18년간 아이들 신문을 꾸리는 일을 맡아보게 되였다. 

또 이러는 가운데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 많은 일들을 알게 되였고 그의 웅성 깊은 이상과 이글거리는 열정, 쉼 모르는 사업 심, 부드러운 인간애를 몸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개괄해 말한다면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그때 우리 중국조선족어린이들이 꿈 하늘에 오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칠색의 무지개발 작용을 하였으며 현란한 동시, 동요, 창작을 펼친 유능한 아동문학작가였으며 중국조선족 아동문화사업의 조직자와 실천자의 한 사람이었다.

 북경에서 있었던 일
언젠가 나는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함께 소년보사의 경비문제로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인 호요방 동지를 만나러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80년대에 이런 일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린 연변의 특산인 능금을 한 가방 메고 북경까지 갔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북경까지 줄곧 침대차 없이 자리표만 떼고 그냥 눌러앉아 긴 여행을 했었다. 북경에서는 더구나 간고하였다. 돈을 절약하느라 단 한번 택시를 타지 않아 발이 다 부르텄고 식사는 기본상 도시락으로 에웠다. 

하지만 시간상오차로 호요방 총서기를 만나진 못했고 당시 중공중앙 통전부에서 사업하는 호요방 동지의 아드님과 전국소선대 사업위원회 주임 진해연 동지를 만나 우리 신문의 실제 곤란을 반영하였으며 우리사의 정황 회보서를 호요방 동지한테 전하도록 하였고 우리가『예물』로 가져간 연변의 능금을 한가방중 반은 통전부에, 반은 호요방 동지께서 맛보시라고 올려 보냈다. 

얼마 후, 호요방동지는 친필비준서를 쓰시여 통전부에 내려 보냈다. 그 내용은 대개 연변의 소년보사 동지들의 일을 통전부에서 알아서 잘 해결해주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통전부에서는 인차 문건을 내고 공청단 동북3성위원회에서 물심양면으로 우리 신문을 뒷받침해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때의 그 문건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민족 소년신문을 꾸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 한 번은『전국근로소대, 지혜소대 여름철야영』참가차로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의 홍매 어린이와 요녕성 본계시 왜두산조선족소학교의 조경애 어린이를 데리고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내가 북경으로 간적이 있다. 

머릿속에 항상 소년보와 아이들을 담고 있는 그였기에 이번기회가 우리 조선족 애들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민족 신문의 위신도 수립하는 좋은 기회라는 걸 그는 잊지 않았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전략과 전술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이번에 등영초동지가 전국에서 모여온 56개 민족 어린이들을 만나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연변박물관에 달려갔다. 당년 주은래 총리와 등영초 동지께서 연변에 왔을 때 연변가무단배우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크게 확대하여 멋진 액틀에 넣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조선족어린이 23만 명(초중생까지 포함)이 등영초 동지한테 올리는 문안편지를 써가지고 떠났다. 중남해에 있는 등영초 동지의 저택―서화청에서 이 기념사진을 드리고 공청단 중앙 동지들의 비준을 거쳐 홍매 어린이가 당장에서 이 편지를 읽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전국각지에서 대표로 뽑혀온 어린이들은 모두 150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누구하나 마음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는 등영초동지가 몸이 안 좋았고 다른 하나는 국무원에서 접견시간을 20분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짧고도 짧은 시간에 전국의 소수민족어린이를 대표하여 꽤긴 문안편지를 읽은 애는 유독 우리 민족 어린이 홍매 하나밖에 없었다. 하기에 이는 단지 홍매 어린이 단 한사람의 영광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전반 조선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때 희색이 만면하여 우리가 가져간 흑백사진을 보던 등영초동지가 처음엔 연변에서 왔다고 하니 연안변경에서 왔느냐고 반신반의 하시다가 조선족이라고 반복해 설명하자“아, 조선족! 조선족!”하고 불렀다. 마침 사진에서 등영초 동지는 우리 민족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인 한석윤 선생도 이때만은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인자하신 아빠
한번은『사랑의 일기』큰 잔치에 참가차로 한국 전남에 가게 되었는데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전남대학에서 문학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 자기 따님 한연이도 만나보지 않고 대회가 끝나는 길로 전화만 댕그랗게 남겨놓고 중경으로 날았다. 한연이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언짢아한단다. 박사과정공부에 드바삐 보내다가 고향에서 아빠가 오셨다니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을까? 하지만 매정한 아빠는?  한석윤 선생도 얼마나 막내딸을 찾아보고 싶었을까만 그럴 겨를이 없는 걸 무슨 방도가 있담. 중국소년아동간행물협회 부주석 직을 맡고 있는 그가 1년에 한번밖에 없는 년차 회에 안 참가해서야 되겠는가?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이렇게 드바쁜 사람이었다. 또 그 때문에 때론 인자한 아빠가 못 될 때도 많았다.

80년대 말까지 나는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연길시 남산기슭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나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에 와 불도 때고 석탄도 퍼들이고 했지만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그렇지가 못하였다. 퇴근 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참가해야 했고 상급지도자들을 만나야 했고 또 장춘으로, 북경으로, 한국으로 자주 출장을 가야 했다. 하다보니 집안일 대부분은 사모님의 몫이었다. 그때까지 자식들은 다 초, 고중 공부에 바쁘다보니 집일을 도울 계제가 못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시선엔 심심찮게 사모님께서 마당에서 일하는 모습이 날아들곤 했었다. 마당모서리에 있는 큰 웅덩이에 밀차로 흙을 퍼 담아다 메우느라 땀 흘리는 모습이랑 또 봄이면 오이 밭에 장대기를 세우는 모습이랑…

아마 그때 일이 늘 마음속에 죄스럽게 생각되었던지 몇 년 후부턴 자식들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자기서재는 다 아들딸들에게 할애하고 자신은 부엌 칸에서 밥상에 마주 앉아 전등을 낫게 드리워놓고 그의 명동시집『별과 꽃과 아이와』를 탈고했다.

그의 자식들에 대한 인내력 있는 사랑과 교양 하에 자식들은 크나큰 의지력으로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미국솔로몬대학 명예문학박사로 되다보니 그들의 메일이나 전화내용은 퍽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군 한다. 서로서로“한 박사님, 한 박사님”하니 말이다.

너무나 드바쁘던 세월에 자식 셋을 끌끌한 인재로 키워낸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지금은 또 외손녀 혜경이를 알뜰살뜰 키우느라 바쁘시다.

 은행나무와 겸손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언제나 은행나무처럼 깨끗한 분이었고 인자한 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소년보사에 수백만 원의 자금을 협찬 해다가 아이들의 활동경비로 쓰고 여러 가지 장학상을 설치하여 빈곤학생들에게 쓰지만 자신은 항상 소박한 생활에 젖어있다. 나는 지금도 눈보라 치는 겨울날 과학기술대학에서 여러 학교들에서 온 자동차에 책을 실어 보내던 우리 신문사 일군들의 모습을 생각하군 한다. 몇십개의 큰 학교들에 아이들의 고급독물을 그렇게도 많이 해결해온 분이 바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이다. 그는 작가협회 자료실에도 많은 책들을 한국에서 가져다주었고 조선 평양에 있는 소년신문사에도 5천여 근의 입쌀을 보내주었다. 

그는 술 한 모금도 마실 줄 모르지만 친구나 관계호가 그렇게 많고 문단과 정계, 교육계, 신문출판계에 위망이 높은 분이시다. 

그는 우리한테 늘 이런 말씀을 하군 한다. 

“남들이 좋은 일로 청할 때는 시간상 허락이 안 된다면 혹시 못 가볼 수도 있지만 남들한테 나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꼭 가보아라.”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에 옮겼다.

그는 동시창작을 누구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누구보다 창작성과가 뚜렷하다. 새시기 동시창작에서 그는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누구보다도 동시나 동요에 대하여 조예가 깊지만 언제나 남들한테 물어보길 즐기고 남들한테 초고를 가져다 토론하길 즐긴다. 그리고 자기와 견해가 반대되는 사람과도 계속 곁을 주면서 종래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로 만든다. 그의 너른 마음 폭과 겸손한 천직, 그의 인격과 쉼 모르는 일 욕심은 지금뿐 만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나와 나의 친구들의 귀감으로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마지 않는다.

제공:하얀 꿈나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63 시인 - 허옥진 2015-03-08 0 5865
162 시인 - 주향숙 2015-03-08 0 4375
161 시인 - 김영춘 2015-03-08 0 4580
160 시창작의 1, 2 , 3. ㅡ 석화 2015-03-08 0 4404
159 시인 - 송미자 2015-03-08 0 5067
158 시인 - 김경희 2015-03-08 0 5000
157 시인 - 리순옥 2015-03-08 0 5629
156 시인 - 최기자 2015-03-08 0 4558
155 시인 - 석화 2015-03-08 0 5522
154 시인 - 김응룡 2015-03-08 0 5161
153 시인 - 김학송 2015-03-08 0 4483
152 시인 - 김영건 2015-03-08 0 4636
151 동시인 - 림금산 2015-03-08 0 4744
150 시인 - 리임원 2015-03-08 0 4703
149 시인 - 윤청남 2015-03-08 0 4618
148 시인 - 김파 2015-03-08 0 4569
147 시인 - 강효삼 2015-03-08 0 4365
146 명시인 - 괴테 2015-03-07 0 4990
145 보들레르 시 표절작? 2015-03-07 1 4980
144 명시인 - 랭보 2015-03-07 1 5460
143 서구 현대시 시조 - 보들레르 2015-03-07 0 4653
142 노별상 수상 거부자들과 그 리유 2015-03-05 0 4624
141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작 목록 2015-03-05 0 5277
140 러시아 시인 - 조지프 브로드스키 2015-03-05 0 4709
139 민족시인 7위 분향단 2015-03-05 0 5025
138 아동문학가 - 고 윤정석 2015-03-05 0 5203
137 시인 - 박장길 2015-03-05 0 4412
136 윤동주 미발표 시 더 있다... 2015-03-05 0 9956
135 시인 - 김동진 2015-03-05 0 4901
134 스웨덴 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2015-03-05 0 4736
133 윤동주 생가 2015-03-05 0 5083
132 시인 - 김철호 2015-03-05 0 4712
131 동시인 - 한석윤 2015-03-05 0 4809
130 시인 - 고 한춘 2015-03-05 0 4999
129 시인 - 심련수 2015-03-05 0 4453
128 음악가 - 정률성 2015-03-05 1 4913
127 시인 - 고 리삼월 2015-03-05 0 4493
126 룡정 윤동주연구회 "룡두레" 문화총서 출간 2015-03-04 1 4909
125 고독과 시인과 시 2015-03-04 0 5127
124 묘비명 - 자유 2015-03-04 0 4909
‹처음  이전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