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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석화
2015년 03월 08일 22시 17분  조회:5023  추천:0  작성자: 죽림
 
 

석화 시인 프로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석화(石華) 약력:

 

1958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졸업,

한국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 석사졸업,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역임,

월간《연변문학》한국서울지사장 역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연변작가협회부주석.

 

 

시집: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연작시 << 연변>> 외.

 

수상: 《천지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외.

 




일본서 석화 시인의 시 연구를 중심으로 한 문학 석사학위 논문 제출이 화제가 되는 가운데, 
그의 시가 지난 2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연변>이 수록,  
이어 두번째로 또 석화시인의 시 가요 《정다운 고향(작곡 김승철)》이
국정교과서
인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권에 수록되었다. 

2005년 12월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새로 편찬하여 출판한 이 교과서 
는 전국조선문교재심사위원회에서 심사하여 발행하는 의무교육조선 
족학교교과서이다. 중국 내 조선족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 교과 
서를 사용하게 되며 모든 학생들은 이 교과서의 내용에 따라 수업 
을 받게 된다. 

석화시인이 가사를 쓴 이 가요작품은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 
권 제 2과(7페이지)에 수록되었다.
작곡자는 현재 연변텔레비죤방
송국에서 음악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김승철PD,
김PD는2003
년 50회분 대형음악시리즈 《우리 노래 50년》을 제작, 방송한
로로 한국방송공사(KBS)의 해외방송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석화시인의 작품이 국정교과서에 수록되기는 2005년 2월에 발행된 
중학교 어문교과서 7학년 하권에 편찬된 시 《연변》에 이어 두 번 
째이다. 

================ 
정다운 고향 

작사 /석화 
작곡 /김승철 

잠자리 나래 접는 울바자 아래서 
병아리 나래 접는 정다운 고향 
그리운 동년을 묻은 곳 
언제나 언제나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쌍제비 둥지 트는 처마아래서 
고추다래 빨간 정다운 고향 
어머니 사랑이 깃들은 곳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앞마을 논벌에 달빛이 흐르면 
개구리 합창하는 정다운 고향 
꿈마다 찾아가는 그리운 곳 
그 어데 가 있어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맑은 물 굽이도는 시냇가에서 
버들피리 꺾어불던 정다운 고향 
못 잊을 추억이 샘솟는 곳 
세월이 흘러도 있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조선족 시인 석화, 그와 잠시 걷다

시집 <세월의 귀>를 가방에 넣고

                                                                                   서석화

 

 

 
 

1. 같은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론 지극히 일차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한다면 결국 문학 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위험을 떠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이고 그것의 잉태는 여러 정황들의 필연적인 교접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을 보되 작품의 기저에 있는 여러 상황을 함께 볼 수 있는 관심일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시인은 중국 조선족 3세 석화다.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연변문학> 편집을 맡았다.

 

등단과 함께 '천지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인상', '진달래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압록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연변 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나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한 동포 시인이다. 1989년 시집 <세월의 귀>가 '지용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 석화의 시를 읽기 위하여 필자는 우선 그들 사회에서 활동하는 다른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변문학> 1년 치를 어렵게 구했고 참을성 있게 읽어나갔다. 같은 땅 같은 사회에서 이민족이라는 동질의 정서를 같이 노래하는 동료 시인들의 시들을 보지 않고선 시인 석화에 대한 본격 오독의 실수를 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는 한국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 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칫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긍정성을 떨어뜨리는 위험 인자로 작용하는 동시에, 혼자만 갖고 노는 자족의 놀이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엔 황춘옥의 <잎>이라든가, 리중의 <소멸>같이 현대시가 지양해야 할 교과서적인 시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더러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 현상 하나에도 억지 의미를 돌출해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범주 안에 머물게 하는 그들의 시를 보며 필자는 귀하게 얻은 석화의 시집에 나름의 변별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마침내 필자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동명의 이름을 가졌다는 남다른 친근함으로 그의 시의 눈과 마음과 심장을 열어보기로 했다.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는 팔자론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나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길이라는 지역을 탐험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시집 <세월의 귀>를 열어보자. 이로써 필자는 엘리어트의 말에 약간의 반기를 든 셈이다. "시는 시 그 자체"에다 "시인을 둘러싼 정황 엿보기"를 곁들인 또 한 번의 오독을 용서하시라.

 

2.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네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길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필자가 십 년 전 <연변문학> 초청으로 동료 시인들과 연길에 갔을 때 우선 느꼈던 점은 발달 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1970년대 국내 소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장에서 보고 있는 듯, 생경하면서도 많이 봐왔던 우리네의 옛날 풍경이 거기엔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베이징과는 도저히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서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세련되고 싱싱한 베이징의 풍경. 전설 속을 헤매다 갑자기 뚫고나온 사람처럼 당혹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들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과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를 넘는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런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 다니거나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잠든 모습들.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연길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석화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길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필자에게 주어진 한권의 시집만으론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 역시 연길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것에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모국을 떠나 있는 사람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란 건 축제의 행사이고 축제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석화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모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만 봐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필자는 중국 조선족 시인 석화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시에 사용된 띄어쓰기나 철자법, 행갈이 등은 원문 그대로 옮겼다. (참고로 이 글은 수년 전 필자가 대학원 재학 중에 임헌영 교수님께 레포트로 제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3. 느리게 그러나 같이 

 

그의 시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주조를 이룬다. '도문을 가며 3'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피안>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심경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있을수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한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보고싶은 생각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까

                  

- 시 <피안> 전문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과 본질적 그리움이 이 시의 주조라고 말할 수 있다. 3연에서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너무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남의 나라라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천지꽃>이라는 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 시는 현대 연길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가는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 시 <천지꽃>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에게선 다른 조선족 시인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형식과 소재의 참신성이다. <유리컵과 사랑학 개론>이라든가 <작품> 연작시가 바로 그것인데 <연변문학>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아 물질문명에 편승된 자아의 울림이 뿌리 깊은 향수와 정한을 채색하며 그의 앞으로의 시의 행보를 말해준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 시 <유리컵과 사랑학 개론>중에서

 

 

철근+시멘트+타일+...+땅= 벽체

     

- 시 <작품 36 (가감승제와 방정식)>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너는 수자다>라고 했다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2240158070406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0433-256-219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 시 <작품 39 (협박)>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 시 <작품 91 (탈출)>중에서

 

위에 인용한 시들은 필자에게 새롭게 도래한 세계를 향한 시인의 시상 확대가 얼마만큼의 표현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엿보게 한다. 조선족 시인 석화의 특출성은 여기에 있다.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미학 의식에 바탕을 뒀다고는 하나 새로운 문명 즉 모더니즘적인 요소를 실험하고 있는 그의 시야말로, 조선족의 시가 중국 본토의 시에 비해 형편없이 질이 떨어진다는 혹평을 거둬낼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에 박수와 함께 동의를 보낸다.

 

4. 외람된, 그러나 뜨거운

 

내밀한 정서의 공감만으론 폭넓은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시가 일방적인 읊조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구체성,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항상성 유지, 이 모든 것이 결합된다면 조선족 시인 석화는 왕성한 시작 활동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많은 좋은 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언젠가 모 문학잡지에서 어느 시인의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좋은 시는 좋고 나쁜 시는 나쁘다!"

필자는 선승의 화두와도 같던 그 짧은 문장에 지금까지도 혼란과 함께 주눅이 든다.

 

잘쓴 시와 못쓴 시에 대한 구별이나 판단은 어느 정도 보편적 수준에서 가능한 일이나, 어떤 시가 좋은 시고 또 어떤 시가 나쁜 시인지는 이십 년 가까이 시를 써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늘 숙제다. 

 






천지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어나다

 

글 / 김호림

 

 

특기할 일이었다. “천지꽃”이 남쪽 나라 한국에 피어났다.

천지꽃은 진달래를 이르는 조선 함경북도의 방언이다. 이 낱말은 현재로선 거의 연변 일대에서만 통한다. 그런데 “천지꽃”이라는 이름이 한국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버젓하게 나타났다. 시인 석화의 작품 “천지꽃과 백두산”이 교과서의 과목으로 수록된 것이다.

한국의 교과서에 이처럼 연변 조선족시인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백년에 한번 피는 꽃처럼 전설로 불릴 정도.

기실 석화의 작품은 교과서에 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여러 편의 작품이 중국의 각종 문학선집과 중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 등 국내의 유수의 문학예술연구기구와 한국, 일본 등 국외 문학예술연구기구는 이미 석화의 문학창작현상과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석화는 중학교 시절이던 1976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3천여수의 시를 창작했으며 “나의 고백”을 비롯하여 4부의 시집을 출판, 해내외 각종 문학상과 문예상을 30여차 수상했다. 거기에는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진달래문학상”, “지용시가문학상”, “전국대중가요작품상”, “해외동포문학상” 등이 망라된다.

석화는 조선족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일찍부터 해내외에 연변의 “천지꽃”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월계관을 쓴 애송이

1976년 5월 9일은 시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저의 첫 작품이 ‘연변일보’에 발표된 날이지요.” 석화는 그제 날의 감회에 잠긴 듯 잠깐 말을 멈춘다.

그날 담임교원 한병춘은 제자의 시가 실린 신문을 학교의 여러 교학연구실마다 들고 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고 한다.

하긴 그럴 만 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지금처럼 많지 못했던 그때 지면에 작품을 싣는다는 건 “하늘이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연변일보”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권위적인 일간지로 여간해서는 넘보기 힘든 간행물이었다. 또 문학도라는 이름 하나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던 그 시절의 독특한 풍토였다. 그런데 아직 중학생인 열 일여덟 살의 애송이가 혜성처럼 홀연히 문단에 등극했던 것이다.

한병춘 선생은 바로 석화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길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길라잡이였다.

석화는 1958년 대약진 운동 시기 룡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운동은 그의 소년기에도 숙명처럼 계속 이어졌다. 훗날 화룡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은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이때 물질적인 배고픔이 있었고 또 정신적인 배고픔이 있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중학교에 올라온 후 갑자기 책의 세계가 나타났다. 한병춘 선생의 저택에 서가가 있었던 것이다. 석화는 마치 꽃밭을 찾은 꿀벌처럼 금세 서가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조선의 시인 조기천, 김소월, 박팔양 그리고 러시아의 뿌쉬킨과 마야꼽스끼, 독일의 괴테와 하이네… 이름만 들어도 현혹할 시인들이 뭇별처럼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언어로도 감동을 주는 예술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가 시를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아예 소설이나 극작품은 한쪽에 밀어놓고 시만 찾아서 읽었다.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흰 바위에 앉아서”, “수양버들”, “조선은 싸운다” 등은 아직도 구구절절 기억에 남아있단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본다.” 한병춘 선생은 석화를 그의 대학친구인 유명한 시인 김문회에게 소개했다. 석화는 이로써 정식으로 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연변일보”에 처녀작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

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연변대학에 입학한 후 개인의 시 창작은 물론 문학동아리 “종소리문학사”의 창립 현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석화는 “종소리문학사”의 초기 창설멤버의 일원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 시낭송모임을 가졌고 자작시를 강판글씨로 찍어냈다.

석화는 련인처럼 시우와 늘 함께 한다는 그 자체로만도 마냥 즐거웠다고 말한다.

대학의 글 마당에서 갈고 닦은 기예는 금방 나타났다. 대학을 졸업하기 바삐 석화는 시 “벗들아, 우리의 이름은 청춘” 등으로 원숙한 시인의 매력을 발산한다.

 

 

시인의 꽃의 “장례식”

대학을 졸업한 후 석화는 연변라디오방송국에 기자, 편집으로 배치된다. 이 기간 그는 짧은 몇달 사이에 6부의 녹음테이프(가사)를 출판하는 실적을 올린다. “유병걸노래집”, “구련옥노래집”, “김은희독창집”, “김상운독창집”, “한해연독창집” 등 유명한 조선족가수의 카세트노래특집의 가사는 모두 그가 창작한 것이다.

솔직히 석화는 음악부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가사를 쓰는데 월등한 플랫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누구더라도 그 자리에 설 경우 가요창작의 “코기러기”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찍부터 시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석화에게는 가수와 작곡가들의 청탁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 석화는 방송국 입사 전부터 가사창작에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과 더불어 오래오래 전해질 그런 노래를 써볼 욕심이 있었지요.”

흰 눈처럼 깨끗한 사랑과 풋풋한 인정세계를 펼치고 있는 가사들은 금세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선보를 탔으며 뒤미처 가수의 감미로운 목청에 실렸다. 이때 석화는 그의 창작생애의 황금기를 맞으며 무려 수백 수의 가사를 창작한다. 가요 “동동타령”, “추억의 노래”, “어머님 생각”, “별과 꽃과 선생님”, “동그라미”, “노래를 부릅시다”, “돌다리” 등 가요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방송국에서 근무한지 거의 20년 세월이 흘렀다. 애석한 그 무엇이 노래처럼 늘 가슴 한구석에 맴돌았고 그것이 풀지 못할 응어리로 되어 점점 커졌다.

“작품이 그냥 소리로만 만들어지고 책으로 남지 않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마침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에서 편집으로 초청하는 러브콜이 날아왔다. 석화는 그에게 한때 꿈의 향연을 펼쳤던 방송국을 미련 없이 떠난다. 자칫 “가요의 산원”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치는 파격적인 전근이었다.

이 무렵 시인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하나의 정상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창작한 시들은 행마다 뼈를 깎는듯한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었다. 시 “우리는 개인가”, “나는 나입니다” 등등으로 그는 스스로 물음을 연방 제기하고 또 나름대로 그에 따른 대답을 찾고자 방황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시와 만나는 과정은 자아를 찾아가고 확인하며 구원하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석화는 시단에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필묵을 던지고 문학석사 학위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어제 날의 “시인”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2001년 그는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에 들어갔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강했지만 그 시간이 그토록 즐거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A학점을 취득, 드디어 2003년 학위론문 “김조규시문학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기간 석화는 연변대학의 지인과 함께 서울과 지방의 대학, 문인협회에서 중국조선족문학알리기 세미나를 수십회 조직했으며 한국의 여러 간행물과 신문에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한 론문을 십여편 발표했다. 2006년 그는 한국학술정보사에 문학평론집 “시와 삶의 대화”를 출간한데 이어 또 연변인민출판사에 “윤동주대표시 해설과 감상”을 펴냈다.

석화는 어느덧 학자풍의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시인의 백년의 묵향(墨香)

운명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귀국한 후 석화가 창작한 첫 시는 또 “연변일보”에 발표된다. 련작시 “사모곡”이다. 그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던 기간 연변에 계시던 양친은 모두 세상을 떴다. 부모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나중에 시라는 이름으로 맺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석화의 시는 민족의식과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삼고 있으며 예전보다 한결 차원이 다른 사고와 경지를 열어 보인다.

시단에는 석화의 또 하나의 “처녀작”이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뒤미처 발표된 련작시 “연변”도 “사모곡”과 맥을 같이한다. 련작시 “연변”은 연변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과 연변의 풍경, 풍습을 점점의 풍속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시 “천지꽃과 백두산”은 22편으로 된 이 련작시의 첫 시이다.

석화는 련작시 “연변”의 창작동기에 대해 “류학시절에 한국에서 그리운 북쪽하늘을 넋 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운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이 흰 구름처럼 비껴있을 것만 같은 하늘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진짜 머나먼 북쪽의 하늘아래에는 “천지꽃”의 고향이 있었고 또 연분홍의 “천지꽃”이 피어나 있었다.

석화는 충주(忠州) 석씨의 32대손으로 입북 14대이다. 그의 조부는 8세 때인 191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연변의 룡정 장재촌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장재촌에서 태어나 화룡에서 생활했고 모친은 해주 최씨로 도문 출생이었다.

“저의 딸은 또 연길 태생이지요.” 석화는 인터뷰 도중에 외동딸의 자랑을 잊지 않았다.

딸 석현은 아빠보다 훨씬 더 이른 소학교 5학년 때 벌써 작품을 발표, 장편소설 “개구장이친구들”을 선후로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했다. 석현은 현재 일본 도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단다.

이처럼 조부가 이삿짐을 풀고 양친과 나, 자식을 양육한 연변에 시인은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시는 또 연변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집단촌이 이뤄지던 정경을 등장시키며 옛 우물인 “룡두레우물”을 시행으로 끌어들여 연변 조선족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천지꽃과 백두산”은 석화의 가족뿐만 아닌 연변에 이주한 겨레의 백년의 삶과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겨레의 연변의 백년 이주사가 “천지꽃”에 묵향으로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 시인 석화의 작품세계 

서석화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지극히 도식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 등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문학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것으로 이 경우 비평에서 예상되는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주관주의, 가치의 아나키즘 등에 오히려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 밖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상의 시정이 될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 3세인 시인 <석화>는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연변문학 편집을 맡게된다. 등단과 함께 <천지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인상>, <진달래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압록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연변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 매김을 확실히 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시집 <나의 고백>, 1993년 시집 <꽃의 의미> 등을 간행했으며 본 시집 <세월의 귀>가 <지용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시인 <석화>의 시를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변이라는 지역 속에서 이해의 첫 문을 열며 읽어보기로 한다.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발표자가 2년 전 연변에 갔을 때 우선 느낀 점은 시각적으로 20여 년 전의 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 장에서 보는 듯한 발달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에 가까운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러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다니던 모습.......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만은 없는 개화 이전의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석화>의 시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변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선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긍정이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문학이력 역시 연변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동조할 수 있다. 
문학상이 많다는 건 각 나라마다의 특수한 사정이랄 수 있겠으나 아직 사십 중반도 되지 않은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자체에서 나는 교포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라는 것은 축제의 행사이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석화>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고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에서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 시집 <세월 의 귀>를 읽어가며 나는 정지용이란 대 시인의 이름을 건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솔직히 미흡한 부분이 너무 많아 이런 나의 생각의 오류를 잡기 위해서라도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월간<천지>에서 발행되고 있는 연변문학 99년 1년 분량이 연변으로부터 공수되어 왔고, 그것을 읽어나가며 - 절대로 그들 연변 조선족 시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 시인 석화의 시가 그들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와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 긍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는 한국 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태세보다는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현상 하나에도 억지의미를 돌출해 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엔 연변 문학 99년 7월호에 발표된 황춘옥의 <잎>이라든가 같은 해 1월호에 발표된 <리 중>의 <소멸>같이 현대시가 지향해야할 모범적인 시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시인 <석화>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수상경력과 함께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전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포 3세라고는 하나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시의 주조를 이룬다. <도문을 가며 3>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피안>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향수의식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여오르는 한 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 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 보고 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 보고싶은 생각 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가 
-피안-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이 이 시에서는 열반의 세계를 꿈꾸듯 고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3연에서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 보고 싶지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시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교포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무대가 되고 있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이방인적인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천지꽃>이라는 시가 눈에 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이 시는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있다. 

가는 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천지꽃 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는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에 비해 다채로운 시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유리컵과 사랑학 개론>이라든가 <작품>연작시가 그것인데, 연변문학에 수록된 다른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참신성과 기발한 소재채택에서 자본주의로 가고 있는 연변의 문화를 체함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 그의 시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예술이란 그 분야를 막논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내것으로 하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쉽게 서정이라 불리워지는 자칫 무력한 시풍에서 벗어나 사물을 기호화하고 끊임없이 뻗어 가는 정신세계를 시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은 그래서 귀한 것이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내안의 너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유리컵과 사랑학개론- 중에서 

철근 + 세멘트 + 타일 + ...... + 땅 = 벽체 
벽체 * 유리 * 페인트 * ...... * 하늘 = 빌딩 
-작품36(가감승제와 방정식)- 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너는 수자다>라고 한다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2240158070406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0433-256-219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작품39(협박)- 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나야말로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작품91(탈출)- 중에서 

위의 시들에서는 시인의 언어적 탐구가 외적 세계에 대한 응전의 방식과 연관지어보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나 시적 성취도 면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위의 시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시적 세련됨은 물론이요,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엄정한 내부의 시선이 항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집 전편을 논한다면 인식의 치열함이랄까 아직 완전히 자 
기 것이 되지 못한 신문물에 대한 낯설음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중국조선족 시인 <석화>의 시를 살펴보았다. 시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남의 시를 바르게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책임이 부과된 만큼의 어려움을 동반하는 힘든 작업이었음을 글을 끝내며 밝힌다. 오독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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