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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량시인과 그의 안해. |
길림성 안도현 량병진 고수촌에 자리잡고있는 농민시인 김일량선생의 집은 헐망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이였다. 부엌을 빼면 정주와 웃방, 가장집물이라야 찬장, 이불장과 궤짝 2개, 그중 한 궤짝에는 귀중한 책들이 들어있었다. 낡은 텔레비전이 정주 한쪽을 차지하고있었고 앉은뱅이상 하나가 웃방구석에 놓여져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색다른 액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상장은 1995년 11월 민속학회 백두분회에서 증정한것인데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살아서 글로 싸우고 죽어서 글로 남기라’ 필과 함께 인생을 산다는 뜻깊은 글귀였다.
조금 삐뚠 작은 뙤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마당에서 닭들이 모이를 쫓느라고 분주하고 터밭 저쪽은 강뚝이다. 강뚝에 올라서면 맑은 개울이 조잘거리면 흐르는데 김일량시인은 이 뚝을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새벽이면 목높은 장화를 받쳐신고 소를 멀리 산기슭에 몰아다 매여놓고 낮이면 풀낫을 허리에 차고 논둑을 밟으면서 여물어가는 곡식을 보는것이 요지음 김시인의 재미라고 한다. 금년엔 각별히 벼농사가 풍년이여서 웃음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땡볕에 까맣게 탄 얼굴, 투박한 손, 힘 고인 팔뚝... 어디로 보나 김시인의 몸에서 시인의 풍채를 찾아볼수 없었다. 순수한 토배기농민의 멋이 풍기는 촌사람일뿐이였다. 그러나 그의 그 투박한 손에서 아름답고 멋진 시들이 창작되여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CJ상, 제1회 ‘송웅컵’아동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시인은 지금까지 400여수의 시를 발표했고 소설, 수필도 적잖게 발표한 연변문단의 중견시인이였다. 요지음에는 또 첫 시집 ‘남자의 피는 술이다’를 펴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무척 즐겼습니다. 중학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이 내 손에서 떨어진적 없습니다. 중학시절의 책읽기는 관건입니다. 그때 읽은 책들이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책이 선생이지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옆에 선생도 없고 하여 홀로 배우느라 끙끙거렸습니다.”
시가 발표되면서 차츰 마을에서는 수재로, 사회에서는 ‘농민시인’으로 불리게 되였다. 김시인은 창작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문학리론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현소재지거나 주에서 꾸리는 통신원강습반, 문학강습반같은데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기량을 닦기도 했다고 한다.
낮에 찾아두었던 시종자를 싹틔우면서 웃방구석에서 끙끙거릴 때면 안해는 옆에 슬그머니 다가앉아 어떤 시를 쓰느라고 그러는가 하면서 기웃거린다. 그럴 때면 김일량선생은 희죽이 웃으면서 원고를 내밀어주기도 한다. 김시인의 첫 독자는 언제나 안해였고 안해가 좋다고 하는 시면 어디에 투고해도 합격이였다고 한다.
“시인남편 만난것이 행복입니다.” 라는것이 그의 부인의 속심이였다. 시 잘 쓰고 일 잘 하는 남편에 대한 믿음은 각별했다. 남들은 다 땅을 버리고 도시로 간다고 하지만 김시인은 평생을 흙과 함께 살거라는것이였다.
김시인의 시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시풍이 넘치며 아름다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시구는 장황하지 않고 단일하지만 시의 저변에 생활의 철리가 깔려있다. 해독이 쉽고 랑송도 가능해 애독자가 많다.”는것이 전문가들의 평이였다.
“가을이면 시가 잘 씌여집니다. 올 가을에도 좋은 시를 많이 써야겠는데...”
황금물이 들기 시작하고있는 논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벌써부터 흥분하고있었다. 시에 대한 그의 애착은 이제 가을빛과 더불어 더욱 짙어질것이다.
/리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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