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쓰기
오세영
시 쓰기에 대한 내 나름의 태도나 습관 같은 것을
이 기회에 한번 생각 해 보기로 한다.
시와 생활: 다 아는 바와 같이 나는 교수로서 시인이다. 나로서는 이 두 가지 일 그 어떤 것도 소홀할 수 없고 소홀히 해 오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나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의 전부를 바쳐 시 쓰기에 몰두한 적이 없다. 그 절반은 항상 학문하는 일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50대 이전까지는 오히려 학문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단에서는 반쪽의 나만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인생이란 누구나 성공에 목적을 두며 성공이란 결국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 역시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하여 나름으로 부단히 힘써 왔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여러 가지로 자질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시간을 황금같이 쪼개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정된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가능하면 모임이나 술자리를 피하는 것 이외 별 다른 묘책이 있을리 없다. 교수 생활 30년을 통해 내가 아직까지 단 한 번의 보직 - 하다못해 학과장까지도 - 을 갖지 않은 이유, 내게 가까운 문인이 별로 없고 성격적인 이유도 많이 있으나 내가 문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소위 인류대학 교수인 것은 내 시를 위해서는 다소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 쓰는 시간: 전업 시인이 아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나 역시 일상 생활인으로부터 시인으로 즉 생활하기에서 시 쓰기로 전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직업이 학문을 하는 대학 교수인 까닭에 더 그러할 것이다. 학문이란 이성과 논리에 의해서, 시 창작이란 감성과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양자는 본질적인 상반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학문과 같은 이성적 사유는 오른쪽 두뇌가, 시 창작과 같은 감성적 사유는 왼쪽 두뇌가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평소 직장 생활에서 - 예컨대 논문 쓰기나 강의와 같은 지적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 오른쪽 두뇌에 의존해 있다가 갑자기 시를 쓰기 위해 왼쪽 두뇌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기계가 아닌 한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오랜 시작 생활을 통해 나름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다음과 같다.
생활하기와 시쓰기 사이에 시간적으로 일정한 공백을 둔다. 두뇌활동을 잠시 멈추고 아무런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는 일이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멍한 상태에서 텔레비전만을 본다든지, 무념무상의 상태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 폭음에 시달려 본다든지, 혼자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든지 하는 것 따위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만나는 일도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란 놀면서 일하는 사람, 시란 놀면서 쓰는 어떤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나이가 들면서 습관화된 것으로 겨울 한철을 山寺산사에서 보내는 일이다. 그 동안 내가 자주 머물렀던 산사 들로는 두타산 삼화사, 치악산 구룡사, 달마산 미황사, 설악산 백담사, 금강산 화암사 등이 있었다. 엊그제는 백담사 만해 마을에서 20여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시쓰기 : 어떤 시인들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시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즉 아무 때나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일단 생활의 시간에서 시 쓰는 시간으로 전환이 되면 나는 아무 때나 시를 쓸 수가 있다. 생활의 시간에서 시를 쓰는 시간으로의 전환이 어떤 유연이나 신비스러운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조작된 행위이므로 ‘아무 때나 시를 쓸 수 있는’행위 역시 의도적이고 인위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시를 쓰려고 마음으로 작정을 하면 아무 때나 시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만들어진 시가 훌륭한가 혹은 훌륭하지 않은가는 물론 별개이다. 어차피 영감을 받아 시를 쓴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시가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시인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작품이든 아니든 누구나 시를 쓰면 모두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 등단이라는 어떤 독특한 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을 우리가 관용적으로 특별히 시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그가 이제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단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문단 등단이란 지금부터 그가 아마추어로서의 위치를 버리고 프로페셔널할 시쓰기의 차원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공인하는 절차이다. 그것은 잘 쓰고 못 쓰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느냐의 차원이다. 실제 작품의 우열을 따질 경우라면 문단에 등단하지 못한 사람들 -- 아마추어가 쓴 시가 문인으로 등재된 사람의 작품보다 더 훌륭한 예는 수없이 많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인이다. 프로페셔널한 운동선수가 어디 자신의 기분이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경기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시 창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요구가 있고 - 가령 원고 청탁과 같은 -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 즉시 한편의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감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탓해야 할 것이다.
시와 발상: 시적 발상을 얻는 일은 일종의 선과 같은 행위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 쓰기가 선과 동일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종국적으로 선은 대상도 긍정도 부정도 벗어나 완전한 자유 혹은 무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지만 시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 초기 단계에서 양자 모두 대상을 부정하거나 대상을 무화시킨다는 점만큼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하므로 나의 시 쓰기는 대상에 대한 조용한 명상에서 시작하여 나와 이 세계를 무화시킨 후 마침내 어떤 결정적인 순간, 하나의 깨우침을 엊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깨우침이 있게 되면 남는 것은 다만 그것을 언어를 통해 미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단계일 뿐이니까 깨우침이야말로 바로 시라 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도 시 쓰기는 또한 선에 비유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적 형상화란 수십 년의 시작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자신의 어떤 비법으로 이루어지는것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시적 발상을 얻기 위한 이같은 명상에는 물리적인 환경도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가지로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공간적, 시간적 환경의 조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개 심야의 밀폐된 공간에서 시를 쓴다. 부득이 낮에 시작해야 할 경우는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하더라도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린 후 등불을 켠 후에 실행한다. 이 밀폐된 어두운 공간에서 한두 시간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하다 보면 최소한 한편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와 같은 방법의 시작에 임해서 실패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기에 한 가지 부연할 것이 더 있다. 내가 또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장난 삼아 혹은 유희삼아 시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때, 그 어느 작품이든 나는 나의 최선을 다 기울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시를 쓰다 내는 파지나 내 시 구절이 적힌 원고를 절대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항상 불에 태워 허공에 날리는 습관아 아마 이같의 나의 시작 태도의 무의식적인 반영이라 할 것이다. 내 시가 좀 답답하다는 평, 너무 진지하다는 평도 여기서 빚어진 내 시의 특성을 지적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의 시작 태도를 바꾸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시 : 시도 예술이냐고 묻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시가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과는 본질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시가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매재에 있다. 음악이 청각을, 미술이 시작을 매재로 하는데 비해 시가 언어를 매재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매재로서 청각이나 시각이 시각이 그 자체 하나의 감각이고 언어란 - 감각이 아니라 - 어디까지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미술에서 붉은 색은 색 그 자체가 감각적으로 인지시켜주나 시의 경우 ‘붉다’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붉은 것이 아니라 ‘붉다’라는 발음을 ‘紅’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자는 단지 약속체계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관념적이요 기호전달적이다. 음악이나 미술의 기준에서 볼 때 문학이 예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학(=시)이 예술의 일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의미의 예술이 아닐 뿐이다. 그리하여 미학에서는 문학처럼 매재가 기호(=언어)인 예술을 관념예술, 미술이나 음악처럼 매재 그 자체가 감각인 예술을 물질 예술이라 불러 구분한다. 여기에 바로 문학 혹은 시가 지닌 숙명이 가로 놓여 있다. 즉 시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차원의 영역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예술의 감각적 매재와 달리 언어란 본질적으로 의미를 수반한 기호체계이고 그 의미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사상 즉 철학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는 감각 즉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의미 즉 철학의 영역에까지 진임하지 않는 한 도저히 쓰여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소위 ‘무의미’라 하여 의미의 해방을 부르짖는 시 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가 어렵고 또 아무리 굿을 해도 미술이나 음악을 시봉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코 훌륭한 작품의 반열에 올라서기가 어렵다. 다만 그 스스로 시의 위의를 자해하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모든 훌륭한 시가 궁극적으로 미학과 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와 진실 :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많다. 또 시는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시어는 일상어와 달라 본질적으로 난해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론에서는 이같은 시의 본질적 난해성을 혹은 애매성(ambiguity - 언어에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난해성), 모호성(obscurity-존제론적 조건에서 기인된 난해성), 막연성(vaguenes-거짓말에서 오는 난해성)따위로 구분하기조차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는 가능한 쉽게 쓰여져야 한다. 적어도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조차 난해하여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를 지닌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난해한 시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시라는 것은 난해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읽어 보면 뻔한 내용인데 그것을 일부러 어렵게 조작한 시들이 - 기왕에 조작하려면 독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조작할 일이지 -- 의외로 많다. 무두 시적 사기로 부엇인가 이득을 보려는 행위이다.
시 쓰기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것을 쉽게 쓴시, 둘째, 쉬운 것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가 그것이다.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시인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의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우열의 순서를 매긴다면 우수한 것부터 ①넷째, ②첫째, ③둘째, ④셋째가 될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시야말로 시의 상지에 속한다.
시에 대한 태도 : 시를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일 시를 잃게 되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또 가장 고귀한 것도 아니다. 시는 인생의 일부이자 동시에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경우엔 시대나 상황에 따라, 개인적인 경우엔 어떤 특별한 계기에 따라 나는 시를 버릴 수도 있고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가난으로 처자식이 굶고 있는 상황임에도 시를 붙들고 앉아 무위도식하고 있다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때는 시 쓰기를 접어두고 우선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 국권이나 인권이 짓밟혀 인간다운 삶이 빼앗긴 상황이라면 시를 버리고 나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싸울 능력이 없는 자라면 시를 무기로(수단으로)삼아 투쟁해야 한다. 문학의 본질이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 때 그 상황에서는 하나의 순수한 예술로서 작품을 쓰는 것보다 사회에 뛰쳐나가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전체 삶의 가치라는 기준에서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나 깨나 시에만 매달려 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 시를 쓰는 까닭에 자신을 훌륭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내가 시를 쓴 시인인 까닭에 훌륭하다. 굳이 시를 쓰려고 고심하지 마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무엇인가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인간에겐 이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 많다. 시는 무작정 시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재능이 있어 할 수 없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쓰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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