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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의 즐거움 -시와 함께 사는 사람
1.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너는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느냐?’ 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의 삶을 위해 쓴다고 대답할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 생계의 수단은 되지 못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가슴앓이를 해온 것이 벌써 55년째, 남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인이 걸어야 할 길을 돌아보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덧 저녁놀이 코앞이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고 남은 삶이 보다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도 없잖은가. 여나믄 권 삶의 발자국을 찍으며 때로는 기고만장하여 험한 산길도 마다않고 단숨에 기어 오르기도 했으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도 넓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하는 일에 늘 만족해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하던 일을 중단하지 못하고 잠시 뒤면 후회할 일을 되풀이 하는가 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의 경우, 쓰고 찢고 뜯어 고치기를 열 번, 스무 번 되풀이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지금까지의 노동을 원점으로 돌려 버리기도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지루한 삶의 오후, 배달된 몇 권의 시집을 들추며 일상적 삶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그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시를 쓰는 즐거움도 시를 읽는 행복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아무리 거닐어도 가슴이 설레지 못하는 법이다. 이 기회에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잠시 눈을 감고 돌아보고 싶다.
2. 몸에 밴 넋두리
1) 시가 뭐길래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不學詩면 無以言」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아들을 가르치는 대목이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에게 할 말이 없다’라는 뜻이야 뉘라 모를까만 시가 타인과 아우르는 인간관계의 바탕에 널찍하게 깔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시를 익히는 일이 말을 배우는 일임을 가르치고 있다. 시는 언어예술인 문학적 영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양식이다.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 했던 T.S. Eliot의 말처럼 시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여섯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의를 내렸다는 이야기처럼 관점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정의와 해명이 가능해 진다. 굳이 시가 무어냐고 묻는달지라도 쉽게 질문에 대한 정확한 정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과정을 어렴풋이 내비치고만 있기 때문이다. 시가 무엇이길래 동양과 서양에 있어서 이토록 인문적 전통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을까. 시를 지어 인재를 등용하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인간 이해에 대한 타당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동양에서는 공자의 「詩三百一言而 蔽之曰 思無邪」(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악함이 없다)라는 가르침을 시의 정의를 말하는 경전經典처럼 활용하고 있다. 얼마나 명쾌한 결론인가. 또한 미국의 E. A. Poe는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다’.라고 정의하고 있고, Aristoteles는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그리고 영국의 K. H. Hudson은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시는 언어로 되어 있고, 운율이 있으며,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사상을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시는 작가의 사상과 정서를 상상력을 통해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문학’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의를 예시하면서 정답에 접근하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과정을 겉만 핥고 있을 뿐, 아직까지 시원스럽게 가려운 곳을 긁어 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두고두고 연구 노력을 해야 할 과제로 남겨야 한다. 그러나 현명한 독자는 자기 몫의 정의나 시의 정의에 대한 결론을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위임하지 않는다. 다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즐기면서 해답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2) 왜 쓰는가?
내 경우 즐거워서 쓴다. 하루하루의 삶이 즐거운 것은 시가 있기 때문이요, 시가 있기에 삶이 풍요롭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시를 떠난 적이 없으며 시 또한 항상 내 안에서 형성되고 성장하며 나를 변화시키고 즐거움을 주어 왔다. Aristoteles는 시는 인생의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가장 조화적이며 자연스러운 쾌락을 주는 예술이라 했다. 그 즐거움은 곧 감동이며 쾌락으로 일종의 카타르시스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의 해소요, 욕구의 실현으로 나에겐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쾌락적 기능의 극단화는 커다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으며, 관능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적 쾌락만을 문학이 추구하게 될 때는 상업주의, 소비문학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일침을 잊지 않는다,
나는 평소 ‘시는 나의 삶이요, 구원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시가 내 삶의 버팀목이 되고, 삶의 구실이 되며 자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시인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피가 뛰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시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묶어 두면서도 스스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말을 뱉어본 적이 없다. 됨됨이가 우둔하고 고집스러워 학문에 대한 의욕을 앞세울 뿐, 깨우치는 속도가 매우 늦다. 그러면서도 남을 감동시키기는 시를 쓰기는커녕 나 자신도 머리를 흔드는 경우가 많으니 누구 앞이라 감히 가리워진 베일을 벗길 수 있겠는가. 남들은 심심할 때 쓰는 시를, 한두 달만 장난 삼아 끄적이면 내노라 하는 시인(?)이 되어 나오는데 멍청스럽게 시인에 대한 미련을 대학까지 몰고 가 싱갱이를 쳤고, 또 평생을 짧은 혀끝으로 삶을 노래해야 할 터이니 바보가 따로 없을 모양이다. 열 여덟 해 동안 멍청한 짓을 하면서 바보의 의미만을 깨우쳤고, 인내를 배웠고 모든 욕심을 비워 남의 앞에 서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다만 학창시절 동경하던 ‘시인’에 대한 열망을 항상 가슴에 묻고 내 스스로 ‘나도 시인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올 때까지 시와 함께 시와 더불어 시 곁으로 꾸준히 접근해 갈 것이다.
3) 어떻게 쓸 것인가
① 시의 본질
시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은 기우杞憂다. 쓰는 사람은 시인 자신 뿐이지만 독자는 수 십, 수 백,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수를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시인의 생각을 넘어서 보다 많은 감동을 되돌릴 수도 있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산문은 걸어가는 것이라면 시는 춤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시는 운율에 의한 창조행위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우리 일상 주변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일들을 산문적으로 서술하는 일을 몇 가지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면 시가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몇 가지 형식적 절차란 운율, 행과 연의 가름, 문장의 길이, 쓰이는 어휘의 됨됨이를 가리킨다. 산문으로 쓰면 쉬울 것을 시로 쓰려니까 힘들고 어려워진다. 즉 줄글로 쓰면 충분히 독자가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내용을 억지로 시처럼 행을 가르고 연을 가르다 보니 멋만 부리다 망치는 경우가 되고 만다. 좋은 시는 독자로 하여금 큰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누군가가 얘기했던 좋은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말은 공감과 감동을 말하는 것이다. 감동을 받았을 때, 누구나 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고 그 충동, 느낌을 거짓 없이 옮겨 놓으면 한 편의 훌륭한 시가 된다. 물론 감동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도 아니요, 욕심을 앞세운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이란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가슴을 치고 파고드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천박스런 감동이 아니라 아주 잘 정제된 매우 고급스런 감동 그것이다.
② 시의 성격
어쩌다 여행길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보시게, 시 한 편 나옴직하지 않은가?” 가끔 지인들의 농담을 듣는 경우가 있다. 맛 있는 음식을 취한다고 바로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자신의 지성이나 능력에 알맞은 것을 취해 모르는 척 머리 속에 저장해 두어야 한다. 저장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것이 얼마만큼 저장될 것인지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른다. 능력이란 많은 체험을 통해 얻은 그릇의 크기다.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이 크면 새로운 많은 체험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훗날 한 편의 시로 형상화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 저장된 체험은 훗날, 아니면 아주 먼 훗날 유사한 체험을 만나게 될 때,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의 확인하게 될 것이며 억지로 쓰려고 밤잠을 설치지 않더라도 그 감동은 오랫동안 희열을 안겨 줄 것이다.
원칙은 아니지만 필자가 작품을 얽을 때 관심을 두는 몇 가지 이야길 참고삼아 이야기 하면,
첫째 소재에 대하여: .시인은 사물을 응시함으로써 시적인 능력을 기른다. .시인에게 필요한 상상력은 어떤 사물을 응시함으로써 이미지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시인이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말은 그만큼 생활(직,간접경험)이 넉넉함을 의미한다.
둘째 주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이야길 말한다. 시의 요소 중 하나다. 먼 산 바라보듯 질서없이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행을 가르고 연을 가르는 것이 아니 라 자신과 현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고 꼭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찾 는다.
셋째 동기에 대하여: 시의 소재를 동원 작품으로써 시를 결정시키는 계기이다. 소재와 주제를 결합시키는 중개역할을 하는 모티브를 말하는데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거 나 황혼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 등 일연의 자극을 준 사실이 자신의 마음속에 오랫동 안 사라지지 않아 자신의 문제로 간주되어 고민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될 때 일어 나게 된다.
넷째 영감에 대하여: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여 작용한다.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나기도 하며 일상적인 체험과 는 동떨어진 특수하고 신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섯째 제목에 대하여: .시 전체를 설명하려 하면 안된다. .함축성이 있어야 한다. .간단 명료해야 한다 .신선한 맛이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매력이 있어야 한다.
4) 쉬운 시와 어려운 시
짧고, 읽기 쉽고, 누구나 쓸 수 있어 자신이 속한 장르가 모든 문학 중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장르라고(시가 아니지만) 일갈하던 어느 문학인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짧고, 이해하기 쉽고, 아무나 쓸 수 있다면 밤 새워 머릴 굴리고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이래서 나는 또 한 번 바보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의 손’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뒤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면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뜯어 고쳐야 할 모양이다. 문학은 내용이 독자를 사로잡는 법이지 형식이 장르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난해시다.’ ‘현대시가 어렵다.’라는 불평을 자주 듣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독서경험이 적은 이들이다. 자신의 지적 태만에 대한 자각증상이 없는 몰주체적 트집이요 원망이요 자기변명이다. 남들이 떠드니까 덩달아 춤추는 꼭둑각씨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동요나 동시에 대한 감식력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결국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 스무 번 계속해서 읽어 보라. 그래도 모르겠거든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을 두고 읽어 보라.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 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30년대 쓰인 김해경의 「오감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의 작품을 엉터리라고 떠드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를 연구하기 위해 대학에 연구소가 설치된 곳도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부분은 앞으로 과제로 남겨 두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는 르나르고의 「뱀」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졌었는데 우리나라 황지우 시인의「묵념5분 27초」는 제목만 있을 뿐 본문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이 형편없는 시라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려운 시와 쉬운 시가 있는 것일까? 시인의 가슴에 쌓였던 많은 체험들이 오랜 세월동안 고독과 싸우며 숙성되고 용해되어 다른 새로운 체험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형상화한 것이 한 편의 시인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속단을 바라는가? 어려운 시와 쉬운 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가 있을 뿐이다. 물론 감상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시인의 고뇌를 헤아려 보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시의 경우 결코 짧다고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시 몇 편 인용해 보면,
뱀, 너무 길다 르나르고 -「뱀」 전문
내 귀는 한 개의 조개 껍데기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 쟝 꼭도 -「소라」전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전문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 밤 쌓았다 헐었다 긴 萬里城. 김소월의 -「萬里城」전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한하운 -「전라도 길」전반 한 연
짧기 때문에 과연 쉬울까? 시인의 심오한 생각을 겉만 슬쩍 훔쳐만 보고 단정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쟝 곡도의 「소라」는 국어 교과서에서 익혔을 것이며 이 짧은 시를 보고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다고 의기를 펼쳤으리라. 안도현의「너에게 묻는다」도 씹어 보면 이해에 앞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는가? 김소월의 「만리성萬里城」도 어려운 말은 없다. 그렇지만 불면의 밤, 시인의 무수한 속생각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대적인 배경이나 개인이 처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어휘만으로 판단하려는 감상 태도는 재고해야 할 것이다. 뒤의 시는 한하운의 「전라도 길」 앞 부분이다. 한하운은 문둥이 시인이다. 나병이 혐오의 대상이던 시절,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함경도에서 소록도로 걸어서 가던 도중 전라도에서 마지막 고통을 호소하던 시다. 몇 개의 시어만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드러지는 문둥이 한하운의 고뇌를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어휘 이해가 문학의 목적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내용을 붙들기 위해 언어와 구조와 형식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휘가 쉽다고 쉬운 시가 아니며 어휘가 좀 까다롭다고 반드시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물론 짧다고 쉽고, 길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적절하게 자신의 처지에 이입시켜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정서를 되살릴 수 있어야 참된 독자다.
5) 좋은 시를 쓰려거든
시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자연현상 모든 것이 체험의 대상이요 시적 소재다. 서둘지 마라. 그러나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억지로 쓰려 애 쓰지 말고 평소 쉬지 않고 쓰는 습관을 길러라. 말을 아껴라. 그리고 사람의 생각도 방치해 두면 녹이 슨다. 진실하라. 남에게 감동을 주려면 진실해야 한다. 순간적인 피해자가 될지라도 진실을 감추어선 안된다. 기억하기 어렵거나 깊이 새겨 두었더라도 급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메모해 두면 편리하다. 이 메모의 습관은 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이다. 모름지기 남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 좋은 시를 가려 읽어라. 좋은 시를 식별할 안목은 자신의 시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 준다. 도서관을 찾아 시집의 뒷꼭지만 훑어도 마음이 살찐다고 하지 않던가. 현대를 살면서도 과거 선배 시인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책 속에서 그들의 사상과 경험과 이상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우리들의 그것에 비교하며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자극이 되고 행복한 체험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사는 이웃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도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안겨 줄 것이다. 생활양식이 달라도 추구하는 목적이 비슷한 것처럼 서로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소중한 지적재산이 될 것이다.
3. 이야기를 마치며
청탁서를 앞에 놓고서야 붓을 잡는 행위는 절대로 자기변명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하다. 이런 시인이 유력한 잡지나 신문에 이름 석 자 큼직하게 올렸다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바보짓이다. 독자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아니 속아주지도 않는다. 독자의 눈은 현명하여 당장은 아니라도 훗날 곱빼기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문학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자신을 위하고 문학을 위해서 일치감치 마음을 바꾸어라. 문학은 심심풀이 소일하는 놀이터가 아니다. 본적도 주소도 없는 몇 줄 내 갈겨 놓고 나도 시인이네 하는 행위는 자기 기만이다. 항상 겸손하라. 능력이 모자라 글은 서툴더라도 혼신을 다 해서 최선을 다 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산모의 진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식에 대한 참 사랑을 모르는 법이다. 과거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작품을 빛내지는 못한다. 허나 좋은 작품은 그 사람의 인격을 한 단계 끌어 올릴 것이다. 출산하는 산모의 심정으로 생명을 바쳐 내 영혼을 되살린다는 각오를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면 자식 아끼듯 작품을 책임지는 시인이 될 거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알맹이 없는 이야길 끝까지 들어 준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모든 관심을 가질 때 예향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필자. 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글 쓴이 약력>
.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중앙일보 신춘문예/월간 시문학 추천완료 . 국제펜회원/한국문협 목포지부장 역임 .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 한정동아동문학상/한국현대시협상/대한민국향토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문학부문)/녹조근정훈장 수훈 . 시집;「표구속의 얼굴」/「종이비행기」/「이승기행」/ 「가슴으로 쓰는 시」/「풀잎위에 머무는 바람」/「한 편의 시로 남고 싶다」등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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