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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시모음
2015년 04월 23일 22시 03분  조회:4137  추천:0  작성자: 죽림
 
<소리에 관한 시 모음> 이양우의 '맑은 소리' 외

+ 맑은 소리 

다시 또 이슬처럼 곱기를
햇살처럼 맑기를
고요처럼 무겁기를
숨소리에 잠이 깨일 까봐서
작은 미동에도
내가 널 그르칠까봐 
이렇게 나직한 자세로
고개를 떨구누나
사랑함이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사랑함이 얼마나 고요해야 하는 것이기에
맑게 흐르는 실개천 
아침 햇살에도 여린 찰나여! 
쌀을 씻는 아낙의 손길이
그 얼마나 정결하고 진지함일지
아아, 나는 당신의 행주치마 같은 햇살이고파라.
(이양우·시인, 1941-) 


+ 소리의 탑

첼로 연주 소리가 들린다. 
지그재그로 공기를 찢으며 다가온 
音波가 나를 흔든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기에 상처를 낸다는 것. 
첼리스트의 움직임에 따라 가슴에 파고드는 
그 상처에 넋 나간 듯 사로잡혀 있으니 
감동이라는 말은 
형형색색으로 파헤쳐진 영혼의 상처를 
美化시킨 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마음 깊은 곳에 소리를 새겨넣는 일. 
지그재그로 상처를 새겨넣는 일. 
몸 안 奧地에 박힌 그 상처가 
살아가는 밑천이 되기도 하니 
그대와 나는 
적요 속의 소리에 실려가는 존재. 
연주가 끝나고 박수 소리 들린다. 
이 소리 저 소리가 숱한 사금파리로 쌓이는 몸은 
소리로 된 탑일지도 모를 일. 
때가 되어 무너지는 날은 
또 다른 소리를 부를지도 모를 일. 
(설태수·시인, 1954-)


+ 삶의 소리 

삶의 소리가 나를 깨운다 
의식을 깨우고 머리를 맑게하고 숨을 쉬게한다 
베란다를 통해 들려오는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바람이 커튼을 펄럭이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수돗물 소리 
등교하면서 햇살에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해맑은 소리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소리 
누군가가 버튼을 눌렀을 전화벨소리 
모든 소리는 살아 숨쉬는 생의 소리이다 
움직임 이는 이동의 소리이다 
아무도 제 자리에서는 숨을 쉬지 않는다 
계절에 빛 바랜 길가의 들풀도 
어제보다 더 깊은 침묵으로 조용히 숨을 쉬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기적인 마음에 한때 시끄럽다고 
짜증내던 그 시간들은 가장 활발하게 
내 주위에 생명이 모여있었던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의 생은 좀더 기쁨으로 충만했을 텐데...
(한상숙·시인)


+ 소리 

나무 책상 하나를 구했다 
대패 자국이 선명하다 
대패가 지나갈 때마다  풀려 나왔을 소리들이 들린다 
숲에서 들었던 소리들이 아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렇게 흘러가는 소리들이 아니다 
나무는 흘러가는 것들을 그냥 버려두고 
제 몸 속 소리만 품어 키운 것이다 

소리도 오래 되면 곰삭아서 
말갛게 걸러진 소리를 갖는다 
새파란 대팻날 앞에서 조근조근 말할 수 있고 
제 소리 담아 둘 옹이를 만들 줄도 안다 
살점 저미는 소리를 고요하게 만들 줄도 알고 
저며진 살점 속에 향기로 바꾼 소리를 쟁여 둘 줄도 안다 

저렇게 자세 반듯한 책상이 될 줄도 아는 
오래된 소리 
이제는 곰삭아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 내보이는 
나무의 해탈을 본다 
숱한 직립의 소리들 쪽으로 몸을 돌리는 
목쉰 소리 하나
(박미라·시인)


+ 북소리   

목덜미 수줍게 
훅 
훅 
바람을 불어 
귓불마저 빨개지면 

가슴 한마당 
둥 
둥 
진군進軍의 
북소리가 울린다
(공석진·시인) 


+ 빛의 소리 

빛이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창문을 드르륵 하고 여니 빛이 들어오고 
방문을 스르르 하고 여니 빛이 들어오고 
삐걱거리는 옷장을 여니 
잠자던 옷가지에 빛이 들어온다 

소리는 빛을 타고 와 
빛이 비치는 곳마다 소리가 들린다 
뒤뜰의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고 
들판의 땅 밑에 함성이 들리고 
흙 속의 벌레 알 발가락 펴는 소리가 들린다 

빛은 소리를 데리고 봄으로도 와 
빛이 머무는 곳마다 소리를 낸다 
목련꽃에는 하얀 소리를 내고 
개나리꽃에는 노란 소리를 내고 
참꽃에서는 연분홍 소리가 난다 
철길 두드리는 봄 소리가 난다 
(우영규·시인, 대구 출생)


+ 봄이면 어디선가 쮸쮸바 소리가 들린다 

봄이면 
닫혔던 물관이 
툭! 터지면서 
물살 소리를 낸다 

아마도 
겨우내 심한 몸살을 
앓았다는 징표인가 보다 

연약한 실뿌리도 
몸통을 키우기 위해 
심연으로부터 자양분을 
쪼옥 쪽 빨아들이는 소리 들린다 

그 소리 예전에 먹던 
쮸쮸바 소리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나도 모르게 
옳거니 옳거니 
박수를 치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봄이면 어디선가 
쮸쮸바 소리가 들리는가 보다 

봄에 도취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영혼과 같은 소리 

오, 쮸쮸바
(반기룡·시인)


+ 심야의 소리 

초저녁, 바람소리가 심하다 
개 밥그릇 날아가는 소리가 화단 쪽에서 
자지러진다. 분명 사지가 너덜거리겠지 
텔레비전에서 애국가가 끝나고부터 
집 밖 처마귀퉁이 어디쯤에서 토닥토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발자욱 소리, 밤새도록 어디로 가나 
아마도 봄 동산에 꽃불 켜려고 가겠지 
둘째딸 방에서 기침소리가 여전하다
(신석정·시인, 1907-1974)


+ 자연의 소리 
  
졸졸졸 물 흐르는 시냇가에서 
숨죽이고 귀기울여 
조용히 그 물소리를 듣는다 

잔잔한 음악 같기도 하고 
준엄한 교훈 같기도 하고 
다정한 속삭임 같기도 하다 

살구만한 
사과만한 
참외만한 둥근 돌 틈 사이로 
낮은 데를 향해 흘러가며 
끊임없이 들려주는 저 소리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흘러가는 저 물소리 
오늘 내 귀에 들려오는 
변함없는 저 자연의 소리 

낮아져라 
겸손해라 
사랑해라 
(오정방·시인, 1941-)


+ 작은 소리로 

탁자 위에 한 묶음 국화가 
가까이 코를 대면 
그제서야 
제 이름을 말한다 

미미한 향기 
그래도 제 향기 

그들은 벌 나비 날갯짓을 알고 있을까 
벌 날개 같은 꽃잎들이 동그랗게 
나비춤을 추려 한다 
그들은 달 뜨고 별 지는 하늘을 보았을까 
속 꽃잎들은 달 모양으로 떠서 별빛을 담아 놓고 있다 
그들은 가을 바람에 허리 휘어본 적이 있을까 
가느다란 줄기가 곧 휘어질 것만 같다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 
작은 손짓으로 멈추게 하는 

미미한 향기 
그래도 제 향기 
작은 소리로 제 이름을 말하고 있다. 
(유봉희·시인)


+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그 옛날 
시냇가에서 
물장구 칠 때 듣던 소리 

대청에 앉아 
별똥별 떨어지는 밤하늘 바라보면 
배경음악처럼 잔잔히 들리던 소리 

메뚜기, 개구리 잡으려 소리 죽이면 
더 크게 울어대던 소리 

언제부턴가 

자동차 소음과 
기계음 소리가 
익숙하게 들려오는데 

오늘은 
어디선가 또 다시 
정겨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박인혜·시인, 1961-)


+ 시냇물소리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 
종일토록 이어지는 
맑은 영혼의 기도소리 

음색은 가늘어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고운 영혼의 찬양소리 

겨울의 꼭지점에서 
얼어붙은 냇물을 
온몸으로 녹이고 있다. 

꽃망울이 터지며 
종달새는 높이 날고 
온 세상에 봄이 오리라.
(박인걸·시인)


+ 살구나무 속 흐르는 물소리 

토담에 박혀있는 늙은 살구나무 
터실터실 갈라 터진 
껍질 속으로 가만가만 
어디론가 
봄물 올리는 소리 

그 옛적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맨발로 살금살금 
설익은 살구를 따기 위해 
나무에 바짝 붙어 기어오를 때 
들려오던 가뿐 숨소리 

꼬르륵 꼬르륵 
모든 것 다 잘 아는 
하나님도 미처 모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요정의 손들 
물방울 밀어 올린다 

하늘 밑 가지 끝 
작은 꽃봉오리 마른입에 
한 모금 축여 꽃피움 바라보며 
삼동에 마른 이끼 내 마음도 
새롭게 푸르러진다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소리

아내가 돌리는 전자동 세탁기 소리는 

몇 시간 낮잠을 푹 자도 된다는 
아내가 좋아하는 뽕짝 같은 
자장가. 

그 옛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온밤 
안심하고 꿈을 꿔도 좋다는 
엄마가 내게 보내는 
수신호. 

세상의 어떤 소리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가끔은 마음속 
덧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정성수·시인, 1945-)


+ 웃음소리  

촉촉한 
봄비가 
소리치며 
내리고 있습니다. 

봄비가 그치고 
따스한 햇볕 아래 
눈 비비고 씨앗은 
목을 쑥 올리고 
세상을 향해 나옵니다. 

언제나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항상 웃음 가득하게 
피어납니다. 

그 밝은 
웃음소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조동천·시인)


+ 소리에 젖다 

오지게도 내린다 

삼월 한밤 내내 
두터운 침묵을 두드리는 
푸른 빗소리 
안으로 동여맨 섶 풀어내어 
차박차박 적시고 있다 
부풀리고 있다 

꿈속까지 찾아와 
하염없이 수런대는 댓잎 같은 
그대처럼 

지금 지상은 
제 소리에 겨워 우는 
타악기이다
(김기연·시인)


+ 잔소리반찬 
  
아내는 부재 중 
삼일 홀아비 수저 챙겨 보네 
반찬 종지 두어 개 
씁쓸하게 밀어 넣은 찬밥 
돌아서자 빈자리처럼 허기지네 
하루가 시들해지고 
별처럼 잠도 오질 않네 
숟가락에 넘어가던 잔소리도 
내겐 빠질 수 없는 반찬이었던 것 같네 
찹쌀처럼 달라붙던 차진 소리에 
밥 한번 비벼 먹었으면 
둥 둥 둥 
배 두드릴 것 같네
(김종구·농부 시인, 1957-)


+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가을이 와서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쉿, 조용해라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오직 목소리 하나만은 내 혼백과 맞바꾸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산중에 들어온 소리꾼 하나가 
언제 트일지 모르는 소리를 위해 
목구멍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피를 토해가면서, 
그 피로 나뭇잎을 붉게 물들여가면서 
으엑! 으엑! 처절하게는 목이 죽은 소리를 저리 내고 있지 않느냐 
범부의 소리를 죽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심심해서라든지 지겨워서라든지, 
아무튼 생각 없이 산 구경이나 즐기러 온 팔자 좋은 이들이라면 
별일 아닌 듯 말없이 그냥, 그냥 가거라 
그저 못 본체하고 지나가거라 

가을이 와서 
조용했던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한 소리꾼의 소리의 붉은 피가 
몇 되박은 족히 이 숲 저 숲 잎잎마다에 뿌려져 
속내까지 뻘건 적단풍이 되고 말았느니
(곽진구·시인,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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