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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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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시모음
2015년 04월 26일 14시 19분  조회:4233  추천:0  작성자: 죽림

<신발에 관한 시 모음>  


+ 구두에 관하여

내 신발은
어느 늙은 소의 가죽을 잘라 만든 것,

내가 걸어다닌 길들의 역사,
내 육체의 발이 오래 길들인 애인,
일몰의 시각에 저 혼자 외로운 추락의 왕자,

신발이 어느 날 갑자기 무겁다.
문 앞에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는
헐벗은 개 한 마리,
세상을 비관하지는 않았다.

발은 불안한 바람을 딛고, 기우뚱
발은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딛고, 기우뚱
발은 공중변소도 다녀왔고,
길에 함부로 버려진 오물도 밟는다.

내 신발은 무겁다, 그것의 뒤축은 닳고
그것은 내 걸음걸이의 오랜 습관을 말해준다.

한밤중의 빈 구두는 말이 없다.
침묵 속에 숨은
한숨과 비명 소리를 듣는다.

이미 저를 많이 버린 구두는
비천하다, 삶도 저와 다를 바 없다.
시간은 모두 질기고 뻣뻣한 것들을 부드럽게 만든다.
굴종의 편안함이여, 헛된 욕망의 끝없음이여
그러나, 언제까지
굴종 속에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오래 신어 이미 발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여,
네 몸의 일부는 오래 닳고,
내 걸음걸이는 가끔 기우뚱거린다. 
(장석주·시인, 1954-)


+ 구두 한 켤레의 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곽재구·시인, 1954-)


+ 네 켤레의 신발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이기철·시인, 1943-)


+ 구두 한 짝 

비 맞고 있다
개나리 덤불 후미진 데
버려진 구두 한 짝,
발이 아닌 흙덩이를 신었다
어디서 어떻게 기막히게 알았는지
어린 채송화가 와 뿌리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의 추억과
냄새가 눈시울을 흔들어 놓기도 했지만
끈 떨어지고 뒤축 닳은 뒤에도
세상 넓어 누울 곳 남았는지
채송화 거처로서 별 불평 없다
사실, 사람이 신지 않으면 
구두는 아무도 밟지 않는다
사람만이 구두를 신고 무언가 짓밟는다
그럴 때마다 구두는 허리끈 풀며
가까스로 발벗는 꿈에 젖었었다
다시 사람 꿈을 이제 꾸지 않아도 되는
오래된 구두 한 짝, 그 채송화네
집 처마 끝으로 빗방울 소리
수런수런 내리고 있다.
(이진수·시인)                


+ 신발의 꿈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강연호·시인)


+ 신발論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마경덕·시인)


+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漁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든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황지우·시인, 1952-)


+ 상가에 모인 구두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유홍준·시인, 1962-)

+ 향해일지

영안실 뒤뜰에 노아의 방주 떠 있다.
들어선다.
뒷굽 안쪽까지 젖은 구두는 벗어두고
벌써부터 구김살이 움켜쥔 넥타이는 풀어둔다.
없는 게 없다.
뻘건 국물엔 오늘 아침 잡았다는 소의 옆구리가 뜨고
붉은 화투패에선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진다.
환호성도 터진다.
투망한 화투패로 한 두릅 싱싱한 지폐를 낚아 올리고
푸른 새벽이 와도 충혈된 눈은 감길 줄 모른다.
기우뚱! 기울어진다.
배가 세찬 풍랑을 만날 때마다
승객들은 기우는 쪽으로 쓰러져 불편한 새우잠이 든다

이제 나서야 한다.
뒤엉킨 신발 속에서 용케 딱 맞는 구멍을 찾아내고
아직 하품이 덜 끝난 구두 속에 발을 쑤셔 넣는다.
어디로 가는가?
몸무게라도 재듯 잠시 구두 속에 서 있으면
어느새 내 몸은 긴 돛대가 되어
255미리 배 두 척 끌고
또 어디로 힘겨운 출항을 하려는가?
허공을 떠가는 고인의 배 한 척,
상주는 발인을 걱정하는데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시 삶으로 회항할 수 있다면
(김종보·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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