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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는 시 몇수
2015년 05월 03일 17시 42분  조회:4186  추천:0  작성자: 죽림

 

자위

                     함민복 

 

 

남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

 

 

 

 

 

 

 

 

  기 차 는 간 다

 

                               허  수  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 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1992년 시집 "혼자가는 먼집"

 

 

 

 

 

 

 

 

 

어느 쉰 살들의 모임

 

                                        유정임

 

 

쉰 것들이 모여 앉았다

한 살부터 아홉 살까지

모두 쉰 것을 앞에 차고 앉았다

"나, 이혼 할까봐"

한 쉰 것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다른 쉰 것들이 놀란 척

"왜?"

하고 쉰 것을 바라본다

"우리 영감이 바람이 났어"

"응? 그 나이에?"

쉰 것들은 놀란 척 하지만 속으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안 해"

"몇 살이나 먹었는데?"

속으로 그 여자가 영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 또래야?"

쉰 것들은 쉰것에는 흥미가 없다

"경제권은 네게 있잖어?"

"그럼"

쉰 것이 자신있게 대답한다

"야,그럼 내비둬"

쉰 것들은 쉬지 않은 음식을 아귀아귀 먹으며

앞에 찬 쉰 것들을 연신 흔들어 댄다.

방안이 쉬척지근하다.

 

 

 

 

 

 

 

 

 

엘레지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굴 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오탁번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걸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좋게 났던가 
이따위 추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딱 부러졌다 
손에 쥐가 났다 

 

 

 

 

 

 

 

 

오이를 씹다가 

                          박성우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 집에 첨으로 놀러 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오이나 따 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는 니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릿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테기에다 거시기를 해 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을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 꼭다리가 요러코럼 쓰다냐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 愛 (애) 必 (필) ) 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보리누룽지처럼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그게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2008년 제3회 윤동주상 수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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