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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과정의 절차와 단계 ―습작자들을 위한 몇 가지 提言1)
이은봉
1. 머리말: 시적 형상의 핵심 요소로서의 이미지
이미지를 내포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상도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상 역시 이미지를 자질로 하는 사유의 한 형식, 즉 정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과 공상의 차이는 이미지의 내포 여부와는 무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를 내포로 한다는 점에서는 무의식의 구체적인 발현 형태인 꿈도 마찬가지이다. 상상과 공상이 변별되는 점은 그것이 현실의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있다. 상상은 현실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는 데 비해 공상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시적 인식의 방식은 당연히 현실의 경험과 관련한 상상에 기반하기 마련이다. 삶의 실제와 무관한 공상은 시적 인식의 내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모든 시가 공상과 무관한 채 창작된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공상 역시 시의 형상을 이루는 중요한 인식의 한 방법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상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환상의 영역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공상과 환상이 공히 현실의 경험과 무관한 이미지 사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환상적 이미지를 기초로 하는 시도 적잖게 발견되고 있다. 그것이 제대로 심미적 감동을 수반하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환상적 이미지는 특히 동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비현실적 이미지를 기초로 하는 시들 역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최근에 들어서는 현대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공상과 환상 역시 우리 시의 중요한 인식 방식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시적 인식의 기초는 상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을 듯싶다. 기본적으로 시적 인식은 시인의 체험적 현실, 즉 경험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거니와, 이 때의 시적 인식이 상상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의 언어가 이미지의 언어를 기초로 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미지의 언어가 시적 형상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연유한다. 습작자가 유독 이미지의 언어에 집착하는 것도 대부분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이미지의 언어야말로 이야기․정서의 언어와 함께 시적 형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본래 형상을 추구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형상은 항용 학술의 언어가 개념을 추구하는 하는 것과 대비되어 논의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시적 형상을 이루는 주요 자질이 이미지, 이야기, 정서라고 강조해온 바 있다.2) 물론 ‘이야기’는 창작의 실제에서 작품의 제재나 대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야기’는 시의 기법이나 방법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미지나 정서와는 달리 ‘이야기’는 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거론하기에 적당치 않다는 뜻이다. 이들 각각의 형상의 자질은 기본적으로 유의미한 의식지향을 내포한다. 형상 자체가 그렇듯이 형상의 주요 자질인 이들 이미지, 이야기, 정서 역시 그 나름의 유의미한 의식지향을 갖는다는 얘기이다. 물론 이 때의 의식지향은 형상의 자질들이 거느리고 있는 의미, 다시 말해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진실(진리)를 목표로 한다. 구체적인 시작품 속에서 이미지, 이야기, 정서는 언제나 상호 침투하기 마련이다. 이미지는 정서와 이야기의 산출에, 정서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산출에, 이야기는 이미지와 정서의 산출에 상호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미지, 이야기, 정서는 언제나 상호 적층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항용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전경화되거나 후경화되어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의 시가 정서 중심의 작품(낭만주의 시), 이야기 중심의 작품(리얼리즘 시), 이미지 중심의 작품(이미지즘 시) 등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시를 가리켜 형상의 언어라는 것은 상상의 언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상상의 내포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언제나 정서나 이야기 등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일단은 먼저 상상 혹은 형상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인 이미지를 앞세워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려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러한 다음에는 정서를 산출하는 요소들과 더불어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묘사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절제된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들뜬 감정이 앞설 경우 대상에 대한 제대로 된 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묘사는 시인의 객관적인 정신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주관이 배제된 객관적인 대상이 하나의 화폭으로 현현될 때 묘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상과의 심미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이지적인 인식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한 묘사로서의 언술의 방식은 일단 어휘의 차원에서부터 출발된다.4) 상대적으로 이미지의 밀도가 높은 어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어나 추상어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구상어나 구체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어나 사물어가 상대적으로 이미지의 밀도가 높다는 것인데, 본래 이들 어휘는 나날의 일상 속에, 생활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표준어나 문화어보다는 방언이나 토착어, 인공어나 학술어보다는 자연어나 생활어 등이 묘사로서의 이미지의 생산에 좀더 실질적으로 기여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외국어나 외래어보다 고유어나 토착어가 묘사로서의 이미지의 밀도가 높은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다. 많은 습작자들이 시창작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계기는 무엇보다 시가 심미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강력한 심미적 정서의 충격이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독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창작의 길로 나서게 한다는 뜻이다. 이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심미적 충격을 경험했을 때 그에 합당한 심미적 언어, 즉 시의 언어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습작자들이 가장 먼저 집착하는 것은 시의 어휘, 다시 말해 형상어라고 할 수 있다. 맨 처음 시창작의 세계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심미적 형상어가 주는 매력만큼 독특한 것은 없다. 선택된 형상어들이 평면적으로 배열되는 가운데 축자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정작의 묘사적 이미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형상어의 평면적 선택과 배열의 과정에 자연스럽게 축조되는 것이 실제의 묘사적 이미지라는 뜻이다. 어휘에 집착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묘사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묘사에 빠져든다고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 묘사의 능력은 심미적 글쓰기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원적인 능력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묘사의 능력은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의 차원으로부터 조금쯤 비켜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묘사 역시 어휘의 선택과 배열의 과정에 구체화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선택되고 배열되는 낱낱의 어휘 그 자체가 더없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 때의 시의 어휘, 즉 형상어가 단지 외적인 이미지만을 거느리는 것은 아니다. 습작자들이 자신의 심적 에너지를 다양한 내적 형상어, 즉 독특하고 유별난 부사나 형용사, 명사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습작자들이 이처럼 내외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어휘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습작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라는 것이 심미적 언어의식의 산물임을 자각하게 되고, 나아가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해 가게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번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내외적 이미지를 함유하고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어휘에 집착하고 있는 예는 적잖이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어휘에 집착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ꡔ살아있는 시ꡕ의 동인들의 경우 이제 막 습작과정의 초입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늦가을 여린 햇볕을 쪼이며 ―곽송순, 「10월, 변산 해수욕장에서」 부분
꽃 속의 心本이 살갑게 미소짓는다 ―이근보, 「心本」 부분
감이나 따 볼거나 ―김영찬, 「변산」 부분
하도 많아 ―이수남, 「별들의 노래」 부분
새초롬이 앉아 있던 수줍은 진달래 ―김광자, 「오후의 산책」 부분
②의 시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어휘는 ‘心本’이라는 한자어이다. 각주까지 달아 출전을 밝히고 있지만 정작 창작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心本’이라는 어휘 그 자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는 ‘心本’이라는 어휘가 ‘마음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상당한 작용을 했을 것이다. ③의 시에서 창작자가 집착하고 있는 어휘는 ‘간짓대’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습속이 바뀌어 이제는 효용가치 자체가 소멸되어 버린 ‘간짓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심미적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④의 시에서는 창작자가 ‘하도’라는 일상적 부사어에 깊이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적 어법으로 보면 구문상 ‘그리’ 정도의 부사어가 와야 마땅할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는 어휘 자체가 갖는 어쩔 수 없는 매력 때문에 굳이 여기서 ‘하도’라는 말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⑤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새초롬이’와 같은 부사도 어휘 자체가 갖는 매력 때문에 선택된 것으로 이해된다. 모음들이 어울려 드러나는 ‘새초롬이’나 ‘함초롬이’ 등과 같은 어휘가 지니고 있는 화음상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여기서 강조를 할 필요가 없다. 시창작의 과정에 들어서면 누구나 다 이러한 절차와 단계를 거치게 된다. ꡔ살아있는 시ꡕ의 동인들의 경우 아직도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정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자신의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해 억지로 조어를 만드는 단계는 벗어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막 시창작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어설픈’이란 말을 줄여 ‘설픈’이라고 쓴다든지, ‘서글픈’이라는 말을 줄여 ‘글픈’이라고 쓰는 등의 조어에 집착하는 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조어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어에 내재해 있는 심미의식을 깨닫고 있다고 평가를 할 수 있기는 하다. 적어도 그는 심미적 언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시라는 사실만은 터득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 때의 창작자 역시 이미 시의 영역에 들어온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창작 역시 하나의 생산 행위라는 점에서 보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은 없다. 심지어는 작품의 문면에 하나 이상의 새로운 이미지가 표현되어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조차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습작자가 우선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 즉 새로운 비유체계의 창조에 깊이 몰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유체계에 의해 탄생되는 새로운 이미지만으로 시가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어휘의 결합을 통해 비유를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ꡔ살아있는 시ꡕ 동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습작자로서는 삼빡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것만큼 즐겁고 유쾌한 일은 없다고 할 것이다.
파랑을 키우고 있는 내 안의 갈등 몇 마리 ―남석희, 「곰소항에 와서」 부분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열꽃을 피운다 ―전경란, 「설악 단풍」 부분
선홍빛 엽신 하나 내 가슴에 비수로 꽂히던 날 ―남석희, 「편지」 부분
병 뚜껑처럼 얹혀진 머리에 히끗히끗 세월이 바래지고 있다 ―이종숙, 「하모니카 부는 남자」 부분
사락이는 꽃이파리 ―남석희, 「함박눈」 부분
말없이 혀끝으로 받아먹고 ―나명호, 「풍경」 부분
턱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땀방울을 ―김광덕, 「수도 검침원」 부분
고무함지에 즐비하게 담긴 바다 ―박승미, 「1999년 8월 18일 인천」 부분
한 장의 편지이고 싶다 ―최승자,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여자가 되고 싶게 하는……」 부분
환하게 엄마의 가슴에 터트려 본다. ―박창복, 「달빛 아래서」 부분
차로 달리니 개나리는 줄줄이 강강수월래 ―안효순, 「개나리」 부분
시의 긴장감은 아무래도 비유체계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만드는 유사성보다는 차별성에 기반하여 형성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차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야말로 시의 참신성을 산출하는 주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비유체계를 이루고 있는 두 언어의 내포가 상호 유사성에 못지 않게 차이성도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도하게 유사한 언어의 내포를 매개로 하여 비유체계를 만들 때 좀처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①의 시에서는 “내 안의 갈등”이라는 관념이 “몇 마리” 생선이라는 이미지로 전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갈등’이라는 추상이 ‘생선’이라는 이미지로 구체화됨으로써 의미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예이다. ②의 시에서는 “내 안의 사랑이”라는 추상이 “심장 박동 소리”라는 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역시 ‘사랑’이라는 추상이 ‘심장 박동 소리’로 물질화됨으로써 그 내포가 생생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의 시는 좀더 복잡한 비유체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은 원관념인 “바람”이 보조관념인 “검”으로 의미가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술구조에 의해 뜻밖에도 ‘바람’의 의미가 칼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는 엽신의 이미지가 비수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④의 시에서 드러나 있는 비유체계는 매개어를 갖는 직유이지만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는 자못 신선해 보인다. “머리”의 이미지가 전혀 엉뚱한 “병 뚜껑”이라는 이미지로 치환되는 가운데 좀더 생생한 의미망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⑤의 시에는 병치은유에 이어지는 직유의 비유체계가 드러나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잠자리”의 이미지가 곧바로 “은박지”의 이미지로 병치, 전이되는가 하면 “꽃이파리”의 이미지로 그 의미망이 확산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박눈이라는 원관념의 보조관념으로 드러나 있음도 알 수 있다. ⑥의 시에서는 “눈꽃”의 의미가 매개어를 바탕으로 “솜사탕”의 의미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유로서의 언술구조가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내포가 이루는 관계는 다소 익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강물”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표출되어 있어 형상을 좀더 구체화시키기도 한다. 직유로서의 비유체계가 드러나 있는 것은 ⑦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용된 구절에서는 “턱 끝”의 이미지가 “수도꼭지”의 이미지로 전이되면서 좀더 생생한 땀방울의 의미망을 만들고 있다. 일종의 환유적 수사법이 쓰이고 있는 ⑧의 시는 “고무함지에 즐비하게 담긴 바다”의 이미지가 좀더 관심을 끈다. 이 구절에서 ‘바다’는 ‘생선’의 알레고리로서 구절 전체의 의미망을 두루 신선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드러나 있는 환유는 직유나 은유보다는 좀더 진전된 비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⑨의 시는 가장 일반적인 은유가 사용되어 있는 예이다. ‘나’라는 추상이 곧바로 ‘편지’라는 구상으로 의미의 전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⑩의 시 역시 은유가 겉으로 드러난 예이다. “봉선화 꽃씨”이라는 구체가 이내 “희망”이라는 관념으로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두 언어의 내포가 이루는 관계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은유를 이루는 두 언어의 내포가 충돌하면서 만드는 긴장감은 ⑪의 시에서도 자못 폭넓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나리”의 의미망이 다소간은 낯설게 받아들여지는 “강강수월래”의 의미망으로 참신하게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에는 자못 독특하고 신선한 비유와, 그에 따른 이미지들이 충만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비유체계에서 비롯되는 생생한 이미지들만으로 완미한 형상의 작품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 비유에서 생성되는 참신한 이미지는 단지 시적 형상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적 형상을 산출시키는 그밖의 여러 세목들이다.
일반적으로 정서는 이미지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어조와 리듬에 생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어조의 미학은 시의 정서적 아우라, 즉 심미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개성 있는 어조의 미학을 살릴 수 있는 지름길은 무엇보다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하는 일이다. 습작자들이 화법과 종결어미에 경도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의 응용을 통해 자기 나름의 섬세한 정서적 울림, 즉 심미적 아우라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언어예술인 한 이들 습작자가 화법과 종결어미의 활용을 통해 자신의 심미의식을 극대화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는 곧 창작과정에서 문장의 멋과 맛에 집착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어 문장은 대부분 ‘-다’, ‘-네’, ‘-라’, ‘-까’, ‘-요’, ‘-지’, ‘-아’, ‘-어’, ‘-유’, ‘이’ 등으로 종결어미가 오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에 주목하여 개성 있는 시적 정서, 곧 심미적 아우라를 극대화하려는 노력 역시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해 가는 한 과정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일 또한 습작자라면 누구나 다 거쳐야 할 절차이고 단계라는 뜻이다. 자신의 심미의식을 시문장의 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는 습작자들의 역량이 훨씬 성숙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아야 옳다. 하지만 이번의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 실려 있는 시들 가운데 이러한 단계에 도달해 있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도 이는 대부분의 습작자들이 자신의 심미의식을 비유체계를 매개로 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단계에서 멈춰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ꡔ살아있는 시ꡕ의 모든 동인들이 다 그러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습작자들의 경우에는 이미 화법과 어조가 이루는 심미적 경지를 충분히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우리도 맑은 바닷물에 한 몇 년 절였다가 볕에 널면 저렇게 하얀 염화(鹽花)로 피어날지. ―최향남, 「바다꽃」 부분
난 누굴 위해 온전히 모든 걸 포기한 적이 있었는지? 어두워진 하늘엔 하얀 깨꽃,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어. ―송영애, 「깨꽃이 진 자리에」 부분
후루룩 빨랫줄로 옮겨 앉아 조잘대면 쌀 한 줌 뿌려 주시며 “옛다 먹어라 그만 앙알거리고” 하시던 ―김연근, 「참새소리」 부분
①의 시는 심미의식을 높이기 위해 자기다짐의 독백의 어조를 끌어들이고 있는 예이다. 적어도 이 구절에 표현되어 있는 창작자의 의도만은 충분히 시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할 수 있다. ②의 시는 깊이 있는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취하고 있는 예이다. 이 구절만으로 보면 수사도 화려해 상당한 정도로 새로운 형상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의 시는 구문의 중간에 생동감 넘치는 직접화법이 활용되어 있는 예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형상의 밀도를 높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처럼 독특한 효과를 갖는 심미적 어조는 시의 문장이 지니고 있는 남다른 화법과 종결어미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따라서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문장 자체에 대해 집착한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이는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하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시의 문장에 경도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시의 문장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의 문체에 집착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시의 문장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 특성이 각각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 문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시도 역시 주제나 의미보다는 문체가 만드는 정서적 특징에 의해 변별적 자질이 발생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시로 하여금 고유의 개성적 가치를 지니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문체라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자가 문체에 대한 섬세한 배려까지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각각의 시 전체가 지니고 있는 맛과 멋을 십분 살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나 문체에 집착하는 단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다음의 경지로 넘어가지 못한다. 시의 문장 역시 문장 일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 단계에서 정작 습작자들이 경도되는 것은 조사나 어미, 접속사나 대명사 등의 문법소를 세련되고 이름답게 처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이들 허사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명확한 의미나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단지 의미나 이미지의 향방을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데서 이들 허사의 기능은 그친다. 하지만 이들 허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서는 개성 있는 문장을 쓰기가, 곧 개성 있는 문체를 갖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말의 가락과 리듬에서 비롯되는 시의 감칠맛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이들 허사, 즉 접속사나 대명사나, 조사나 어미의 세련된 운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들 허사 중에서 접속사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하고, 조사나 어미가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를 문법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두루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대명사가 代置와 강조의 기능을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들 허사는 시의 언술구조를 좀더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추상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형상성을 낮추는 것이, 곧 이미지 사유를 약화시키는 것이 이들 문법소(논리소)로서의 언어자질이라는 뜻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논리소로서의 이들 언어자질을 되도록 생략하려고 하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따라서 허사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시의 정서와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들 허사의 운용에 의해 이른바 시에서의 감정가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선 행은 4음보 리듬이나 3음보 리듬을 기본 단위로 하는 가운데 가락을 밀고 당기고, 끊고 맺고, 꺾고 젖히는 등의 작용을 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행은 시의 울림이 지니는 맛과 멋을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행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시의 리듬은 물론이거니와 심미적 형식과 구조에 대해 집착한다는 뜻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행의 처리에 따라 형성되는 시의 문자들 자체가 이루는 추상적 도형 역시 시의 심미적 형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까지 깨닫게 된다. 이른바 구체시가 지니고 있는 심미의식까지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얘기이다. 리듬이 행의 기본 단위라고 하지만 이 때의 행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롭게 개성적으로 조형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은 가독성 등 시각적 효과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습작자들에게 일단 주목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연의 비율과 안배가 시의 심미적 형식과 구조를 낳는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는 점 또한 습작자들의 관심을 끈다. 연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발생되는 심미적 효과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습작자가 시라는 언어예술에 대한 감각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연이 꼭 필요한 시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시도 있을 수도 있다. 월령체 민요처럼 통일된 언술 체계를 반복해 가며 시상을 전개하는 부연과 나열의 시의 경우에는 연의 구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의 초점을 중심으로 이미지나 정서가 수렴되고 집합되는 응축과 압축의 시의 경우에는 연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시의 경우에는 연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언어의 긴밀성과 정밀성을 저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행과 연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 특징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겪은 습작자라면 그들 스스로도 이제는 대강 시의 형식이나 구조가 익숙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점차 시가 몸에 배게 된다는 것인데, 그들의 경우 이럴 때일수록 시의 형식이나 구조가 갖는 상투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매 편의 시가 그 자체로 완결된 자기 형식, 자기 구조를 만들어 간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쯤 되면 창작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작품 자체와의 관계에서 미적 거리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작품의 초점을 중심으로 전체 형상을 객관적으로 조감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창작자들은 실제의 경험적 정서를 덜어내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그것을 객관적 사물에 의탁하기도 하면서 시적 형상 전체의 리듬과 가락을 밀고 당기고, 꺾고 젖히고, 맺고 끊는 등 읽는 맛과 멋을 살리기 위해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러한 노력만으로 한 편의 시가 완미한 형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각각의 단계에서의 모든 작업이 실제로는 세부의 충실성을 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의 각각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 작품의 내부에 존재해 있는 초점을 중심으로 전체의 형상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요컨대 이제는 형상의 총체성을 치밀하게 運算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의 형상이 완미성을 이루기 이해서는 창작자가 무엇보다 고도로 집중된 균형과 조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때의 집중은 창작되고 있는 작품에 대한 미적 거리를 포함한 객관적이고 관조적 마음의 압축적이고 응축적인 작용을 뜻한다. 영감에 들떠 초고를 써내려 갈 때와는 다른, 그야말로 건축 설계사를 능가하는 치밀한 지성의 작용에 의한 총체적인 운산과 계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조적으로 완벽한 시라는 언어의 건축물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단계는 습작자가 도달하는 최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전체의 형상이 완미해지는 과정에 각 부분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수렴되고 집합되는가를 아주 꼼꼼하게 묻고 대답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 습작자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시를 구성하는 어휘들 하나하나가 작용하는 힘의 역학에 대한 끈질기고도 세밀한 계산과 운산을 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이 단계에 도달한 창자자라면 흔히 허사라고 일컬어지는 접속사나 지시어, 조사나 어미 등 형상소나 의미소와는 관계없는 문법소 일반에 대해서까지도 정밀한 감각을 온몸으로 터득하게 된다. 이들 허사를 자유자재로 부리지 못하고서는 시어들의 질서가 이루는 윤기와 활기를 원하는 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창작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창작자는 마침내 한글 24 자모 하나하나에 대한 색깔과 향기, 미감과 음감, 그리고 촉기까지도 섬세하게 감별할 수 있게 된다. 섬세하고 개성 있는 언어의 감별사가 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씌어진 작품이 곧바로 완미한 형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창작 자체에 몰두해 있다 보면 본래 작품 전체와의 미적 거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시공간의 미적 거리를 갖는 가운데 퇴고를 거듭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 예술로서의 시창작 과정에 제작의 속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시창작 과정에도 기술의 속성이 없지 않은 만큼 창작자 모두에게 오랜 습작과 수련이 요구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작 시가 완미한 형상을 획득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일급 시인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선택되는 소재와 주제 자체만으로 심미적 수준이 결정되는 예가 상당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작의 과정에 소재와 주제, 대상과 세계관의 선택이 더없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작품의 수준이 창작자의 손기술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사회, 역사와 계급 등 외적 배경도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지만 좋은 시는 본래 창작자의 지혜의 깊이, 그리고 영혼의 울림과 함께 하는 법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번의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도 이러한 뜻에서의 탄탄하게 완성된 작품이 아주 없지는 않다.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좋은 시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도 적잖다는 얘기이다. 조정임의 「저녁, 목탁소리」 「세연정」 「내 안으로 우주가」, 정영숙의 「눈」, 유상덕의 「맛」, 조영자의 「연필 한 자루」, 박승미의 「낡은 선창」, 이종숙의 「이제는 분주해야겠습니다」, 박미숙의 「매화농원」, 김진호의 「고운 님」 등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결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정도까지는 충분히 완성되어 있는 것이 이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예를 든 작품 중에서 좀더 눈에 띄는 것은 조정임의 시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들은 젊은 시인들의 좋은 시가 보여주는 심미적 호흡과 거의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정임의 시는 정연하게 이미지를 배치할 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삶의 깊이를 융숭하게 담아낼 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우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그의 좋은 시 한편을 감상하며 글을 맺는다.(ꡔ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ꡕ 2003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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