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6월 2024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시인 지구촌

현대시 이렇게 쓰자
2015년 05월 18일 23시 06분  조회:4183  추천:0  작성자: 죽림

 

현대시 이렇게 쓰자 

- 본 글은 박진환 님의 "현대시창작"에 있는 내용을 간추려서 게재했음- 


제1장 현대시 이렇게 쓰자 


시창작에 따른 몇 가지 관심의 환기 

. 物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은 사물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시적 대상으론 사물이 주어지고, 주어진 사물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시작 태도 및 발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때 사물을 보인 그대 로, 본 그대로 기록한다면 사실의 재현 이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일종의 모방의 한계를 극복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를 모방으로 규정함(모방 개념은 플라톤류의 해석인 복사가 아니라 모방함 으로써 즐거움을 맛보는 쾌락의 원리로 봄 
-시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로써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냈을 때 가능해지고 
사실을 이동하거나 변용했을 때 가능해 진다.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사실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 

새로운 사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 
物을 보는 법이 다시 제기됨.-사물을 누구나 보는 데로 보면 안되며 남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본다거나 감춰진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있는 그대로를 이동시켜 본다거나 거꾸로 본다거나 뉘어서 본다거나 하는 변용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더 쉽지 않 는 일이다. 

-예//"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예외없이 바람이 분다고 할 것이다. -보통사람의 생각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시인의 생각 
→이는 곧 시인은 사물을 봄에 있어서 항용의 시각이 아닌 見者적 시각을 동원해야함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각, 꼭 보지 않고서는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시각이 그 것으로서 이는 랭보가 일찍이 見者詩學에서 지적했던 바다.) 

정서적 주정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습작기 사람들의 특성; 본 것을 본 대로 쓰고자 한 것과 같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표출하고 자 함으로써 直情에 의탁하기 마련이다.;그 때문에 본 것을 본 대로 쓴 것이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듯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쓰는 것도 느꼈 던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게 된다. 
-정서적 진술이 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정서적 진술처럼 감미롭고 직정처럼 가슴에 직접 와닿는 것도 없다. 
워즈워드의 지적 
-시를 유로적 정서의 표출로 보아 버린다면 직정은 최선의 시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시는 어느 시대에고 그 본질이 변했던 것은 아니며 주어진 시대마다 드러냄의 방식, 즉 詩法을 달리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오늘의 詩法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오늘의 詩法을 한마디로 집약시킬 수 는 없다 그러나 엘리엇의 지적 
-시는 정서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다.(한마디로 정서를 객관화하라는 주문임) 
-정서의 객관화 
:이것을 하기위해 정서를 물화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이를 엘리엇은 정서로부터의 도피라한다. (왜냐하면 정서로부터 도피하면 정서와 도피 사이 에는 거리가 설정된다. 도피 저쪽에 정서가 놓이게 되고 이 때문에 정서는 가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의 物이 되게 된다. 이 때의 물은 정서가 사물화됐음을 의미하고 정서의 사물화는 정서의 감각화, 즉 정서를 이미지로 대체하라는 주문이 되기에 이른다. 

더 덧붙이 면 정서로 드러내지 말고 사물로 드러냄으로써 이미지로 대신 드러내라는 뜻인데 현대시를 한마디로 이미지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서를 객관화, 이미지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다. 
; 그 때문에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이 부분에서 좌초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 정서의 도피는 단순한 詩法上의 문제보다 그 배경에 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前代적 미학에 대한 자각이 작용하고 있다. 

-정서의 문제 
;인간에게 있어 정서는 천부적인 것이다. 
;정서적 환기력은 인간 공유의 것이고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 
;설혹 천부적 정감대를 타고 났다고 해도 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끝내 아름다움 이상이 될 수는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름다움 이상의 것이 되지 못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나?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정서의 객관화, 즉 物化를 통한 이미지의 형상화다. 
ex.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때 
-가슴이 답답하다고 골백번 해봐야 답답하다는 이상을 드러낼 수는 없다. 
-"윙윙거리는 불벌떼를 
꿈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서정주[正午의 언덕에서] 
(시풀이;정서의 物化에 대한 해답을 곧 얻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불벌떼-꿀과 함께 독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꿀맛보다는 독침에 찔려 아픔이 훨 씬 강렬한 속성으로 작용한다. 

이 쏘아대는 불벌떼를 가슴으로 먹었다면 한 마리도 아닌 떼죽들이 가슴에 들어가 제마다 쏘아댔을 것이고 이쯤 되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빠개지거나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 이다. 이러한 아픔은 그냥 아프다는 사실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환 장할 아픔이다. 
-바로 이부분이 열쇠다. 아프다는 사실을 미당은 아프다는 말 대신 아픔을 가져다주는 대상 사물인 불벌떼를 동원함으로써 정서를 物化했던 것이 된다. 엘리엇의 지적처럼 정서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정서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불벌떼라는 사물을 빌어 드러냈던 것 이다. -계속-  


생각한 것을 생각한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생각은 觀念과 동의어로 생각해도 좋다. 대부분의 경우 관념은 固定的일 때가 많다. 그만큼 인지의 발달이나 과학적 해석은 모든 견해를 공식화하거나 획일화의 의미론적 고정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상상력이 개입할 틈이나 새로운 견해를 개입시켜 여지 를 봉쇄해 버리고 모든 견해가 규격화되거나 공식화로 굳어버려 모든 사물이나 존재, 또는 정신적인 지향까지도 의미의 틀에 구속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고정 관념의 포로가 되어 버 렸고 포로가 되어 있는 한 결코 새로운 의미의 창조를 불가능하게 했다. 시는 모방도 재현도 묘사도 아닌 창조적 경로를 통한 문화적 창조 행위다. 필연적으로 고정의 틀을 깨뜨리지 않 고는 창조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필사적으로 관념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 이 는 마치 엘리엇의 지적인 정서로부터의 도피와 같은 맥락에 잇대이게 된다. 

관념으로부터의 도피는 여러 경로로 통로를 모색한다. 
김춘수-이 통로를 관념의 제로지대로 설정함.=관념의 제로지대는 의미로부터의 도피의 뜻. 
→무의미의 시가 도출(독자들은 무의미의 시가 의미를 버린 시로 해석해서는 안됨) 
→의미로부터 도피하게 되면 '정서로부터의 도피'가 정서를 객관화했듯이 의미의 객관화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의미가 객관화하게 되면 곧 의미가 物化되는 과정 으로 이동된다. 여기에서 의미는 소멸되고 이미지가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된다. 달 리 말하면 정서를 이미지로 대체했듯이 의미, 즉 관념도 이미지해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관념의 제로지대는 의미가 소멸했기 때문에 관념은 존재성을 상실하고 비로소 새 로운 의미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의 의미는 고정관념으로 굳어버린 그런 의미가 아 니라 새로이 탄생하는 관념이다. 의미의 새로운 탄생은 곧 창조이다. 이 창조적 역 할의 의미에 의해 시가 탄생된다. 비로소 고정화한 틀이 깨뜨려지고 의미망에 갇 힌 모든 의미가 해방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자유연상이 이루어지고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탄생을 통해 태어나는 의미의 현현을 보게 된다. 

----旣成의 것, 旣存의 것이 버려진 곳에서 새로이 탄생하는 새로운 것, 그 새로운 것이 곧 시다. 여기에서 관념은 메타(meta)화 한다. 고정의 의미를 초월하거나 관념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숨어 있는 관념의 비의가 드러나기에 이르게 된다. 현대시를 한마디로 메타언어로 규정 하는 것은 바로 의미의 초월이나 비의의 발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게가 만난 
슬라브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나의 하나님]전문 

;[나의 하나님]의 일부가 보여주듯 고정화의 틀, 일상적 의미가 소멸된 관념으로부터 도피된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탄생하는 의미와 秘義가 교직된 채 한 편의 시를 성립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애라는 슬픔의 요소가 눈물이나 한숨 따위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슬픔 과는 전혀 상관성이 없는 '푸줏간에 걸린 살점'과 '놋쇠 항아리'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관념의 제로지대를 환기시킨다면 이 시는 훌 륭한 새로운 관념에 의해 의미역이 성립된다. 

푸줏간에 걸린 살점-현대인의 정신과 대응되는 육체적 상징물이다. 하나님이 인간 을 창조할 때는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구조를 인간형성의 원리로 적용시켰다. 그러나 현대 인들은 정신적 삶을 포기하고 육체적인 삶만을 추구하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러하다. 그래서 육체로 대표되는 폭력주의와 관능적 쾌락주의가 온 세계를 지배하기 에 이른다. 이러한 肉身主義는 하나님편에서 보면 충분히 정신상실의 비애가 될 수 있는 것 이다. 

놋쇠 항아리-놋쇠는 청동기시대의 최고의 값어치를 지닌 가치기준의 표상물이다. 이 점에서 현대 물신주의 대표적 척도인 黃金의 원형이 되고 놋쇠와 황금은 원형적 가치기 준에서 최상의 값어치라는 등가물이 된다. 이는 곧 청동을 황금으로 은유한 것으로서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를 말해줌과 동시에 물신주의에 의해 정신적 가치가 퇴화 내지 소멸됐음을 의 미하게 된다. 이 또한 하나님편에서 보면 충분히 비애의 요소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기법은 관념의 물화 및 메타화로서 현대시의 중심자리에 놓일 수 있는 시를 성립 시키는 기법이다. 


독자를 대상으로 한 창작 실기의 실제화 

시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흔히 즉흥시에 가까운 단어를 나열해 놓고 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여러 기법과 기술적 수사를 통한 다양한 방법론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시를 의도적인 제작으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의 발상차원의 단계(이또 게이찌의 8단계)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창가에 있는 나무를 볼 때 한 그루 나무가 그저 서 있구나 정도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저게 무슨 나무일까 의문을 곁들이거나 꼭 모양이 벌 서 있는 것 같지라고 표현할 경우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가지가 건성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흔들리고 있는가에 눈을 모아야 하는데 "나무가 춤을 추듯 흔들리는 구나" 했다면 일단 시적이라 할 수 있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이 바람에 스친 나무 잎사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그 결과 '아, 나뭇잎도 춤을 추는구나'한다든지 '수십 마리의 木魚가 가지 끝에 낚여 있구나'했다면 충분히 시적임---------여기까지는 해볼 만한 단계임(보는 데로)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시상을 본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1-4단계는 초보, 5-8단계는 시인으로서의 전문적이고 고도한 시각을 지녔을 때만이 가능한 차원 
;5-8단계는 적어도 시가 되려면 아직 아무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고, 그렇게 해석해 보지 못했고, 또 누구도 그렇게 느낀다거나 상상해 보지 못한, 분명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그 무엇으로 나무가 재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예를 통한 시의 8단계 

무슨 죄를 지었기에 
종일토록 벌을 서 있는가 
나무는 

-- 벌선 나무로 변용이 됨. 
창밖에 서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를 먼저 식별해야. 
식별하는 방법 2가지 
1. 무슨 종류인지 식별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식, 어떤 모습(무엇과 비슷하다-直觀) 
2. 경험. 곧 경험과 지식이 육안에 추가돼 더욱 구체적으로 사물을 해석한다는 뜻 
----육안에 지식, 경험, 상상력이 추가되게 되는데 지식과 경험과 상상력이 추가되면 비유가 성립됨 
ex. 은행나무 한 그루가 헐벗고 서 있다/ 아카시아 나무가 앙상한 뼈만 드러냈다 
-이것도 시적이나 "헐벗고나 앙상한 뼈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나목을 보았을 때 쓰는 비유다. 곧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유로서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때 비유는 비유의 효과가 없어져 버린 사비유가 되어 시 이전의 수사학적 비유 가 된다. 그래서 시가 되기 위해서는 

헐벗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추위에 떨며 
더운 체온을 꿈꾸고 있다 
→춥겠다고 하지않고 그 반대로 '더운 체온을 꿈꾼다'고 진술함으로써 사실을 사실 보다 새로운 사실로 이동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다든지 

아카시아 앙상한 가지가 
오돌오돌 떨며 
소름이 돋혀있다. 
→아카시아의 속성을 빌어 사실을 새로운 사실로 재구성해 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 은 나무를 그대로 보지 않고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주는 것이 되어 시적 진술의 초보적 단계에 해당되게 된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연상상상의 작용- 나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흔히 바람 때문으로 봄 
봄 하면 꽃을 떠올리 
비하면 우산 
꽃 하면 나비 
시가 사실의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은유에서의 치환이 요구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변용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역시 은유에서의 병치(竝置)다. 

시의 발상차원의 3차 단계는 바로 치환이나 병치를 동원,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 게 하는 단계란 뜻이 되는데 여기에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곁들이면 천태만태가 된다. 보기 에 따라서는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춤을 추는 것같기도 하고, 머리칼을 흩날리는 것 같기 도 하고 또는 마치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빗질 같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무가 춤을 추 고 있구나'한다든지 '머리칼을 흩뜨리고 있구나'했다면 일단 비유는 성립되나 이 또한 흔히 쓰는 비유로서 새로운 감동을 주기에는 모자란다. 그러나 '나무가 검은 구름을 슬어내기 위 해 빗자루가 되었구나'한다면 훌륭히 시가 성립된다.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 / 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가로수가 하늘을 쓰는 빗자루로 변용되어 단순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 라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전혀 다른 사물로 태어나게 된다. 전혀 다 른 사물로 태어났다면 이는 곧 변용이 되고 동시에 가로수가 아니라 빗자루로 그 의미 또 한 이동되게 되는데 이는 변용과 치환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흔히 현대시를 정의할 때 변용과 치환의 미학이라고들 말한다. 또 현대시의 표현 기술을 말할 때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비유와 상징은 곧 3차 단계에서의 변용과 치환에 해 당된다. 그리고 이는 시의 발상차원의 3단계는 현대적 해석의 낯설게 쓰기에 해당되는 단계 라고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용과 치환은 본래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그 모 습이나 의미가 이동되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바람이 부니까 나뭇잎이 움직인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무가 손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러면 신선한 감정이 생긴다. 

가지와 가지 사이 
험한길 마다않고 
도폿자락 펄럭이며 찾아온 손을 
나무들은 손을 흔들어 
전송하고 있었다. 

;바람은 '손님'으로 변용/ 나뭇가지가 흔들린 사실이 손님을 전송한 사실로 바뀌어 새 사실이 탄생함. 시는 관념을 버리고 사물로 변용하거나 새로운 관념을 끌어냈을 때 비로소 성공적으 로 형상화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나무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세밀히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을 일탈하거나 초월하는 시력도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흔히 말하는 구상화(具象化)를 요구한 것이 된다. 현대 시를 일컬어 형상화 작업이라고 한다. 새 모습으로 꾸며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 를 회화(繪 )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대의 시각 문명에 걸맞게 시도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 로 생각한 것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란 주문이었던 것이 된다. 그것이 곧 형상화이고 이 형상 화는 곧 구상화 작업에 의존된다. 그리고 구상화되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더없이 요구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4단계는 이러한 현대시에 있어서의 형상화와 구상화의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지 않지만 그 생명력을 승화시킨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드러내라는 주문이다. 나무의 생명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이고 정신 적인 것, 곧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 사상과 같은 것들, 일테면 관념과 같은 것이나 우리의 가 슴에 가득히 서려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정서 같은 것들도 다 모습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 에 형상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그대로 

사랑이여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여 

한다든지, 또는 느낀 그대로 

오, 가슴 아픈 사랑이여 
끝끝내 채워지지도 
채울 수도 없는 사랑이여 
↓↓↓↓↓ 
했다면 느낀 대로는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생각한 것을, 느낀 것을 모 습으로 구체화, 형상화하라는 주문이니 모양새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썻다 지우고 
지웠다 쓴 
이름 하나. 

이름 대신 
말갛게 가슴만 
닳아버렸다. 

상금도 버리지 못한 
보석보다 귀한 
지우개 하나. 

했다면 사랑이 지우개라는 사물로 변용됨으로써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화를 담담하게 된 다. 곧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으로서의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빌어 형 상화됐다는 뜻이 된다. 정서의 경우도 같은 이치다. 

열아홉 난 계집애의 
시장끼 
꽃피는 날엔 
춘궁기의 배고품을 
배 아닌 가슴으로 앓았다. 

---사랑의 결핍이라는 정서적 해석이; '열아홉 난 계집애의 가슴으로 앓는 시장끼'로 구상화 됨으로써 가슴으로 해석하는 사랑의 정서가 사물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나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눈에 보이는 사물로 대체, 형상으로 드러내면 되기 때문이다. 

수술로는 
절개해 낼 수 없는 
종양 
욋과병원 창들이 
가지들의 터진 살갗으로 
핏빛 얼룩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문명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순수 무구한 자연의 생명력으로서의 개 화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의 개화는 곧 나무의 생명력의 표출이고 또 이 생명력의 표출로 서의 모든 개화는 생명력의 승화에 해당된다. 이렇게 되면 나무의 생명력과 승화는 개화라는 가시적 형상화로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시의 발상차원의 5단계가 내면적 이고도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게 회화화하라는 주문이란 걸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문에 드러내기에 알맞은 사물을 발견, 이로써 형상화하 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이나 견자시학에의 의존이라고 할 수 있다. 

견자는 일찍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랭보의 말이다. 시인은 발견자여야 한다 는 뜻으로 한 이 말 속엔 첫째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시각의 소유자가 아니라,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드러나지 않고 가려진 부분가지를 발견해 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꼭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견자라고 했는데 앞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드러내주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가지들이 터진 살갗 은 개화를 뜻하고 개화는 나무의 생명력 내지는 생명력의 승화를 의미한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고 그 때문에 견자적 시각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思想을 본다. 
--논리의 초월적 단계,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성립되는 또 다른 논리를 성립시킴 

나무는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종일 발돋움하며 
팔을 내뻗고 있었다. 

---나무의 사상도 생명력과 같이 불가시의 형이상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항용의 시각엔 포착되지도, 포착할 수도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발견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초 나무의 사상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부 득이 사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인 쪽에서 사상을 만들어 집어넣든지 끄집어내어 보여주 든지, 그렇게 꾸밀 수밖에 없게 된다. 

나무가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발돋움한 것은 구윈의 시사가 된다. 그것은 하늘이 久遠의 세계이자 구원(救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영원한 삶의 추구이고 그럼으로써 소멸로 부터 초월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무는 상승지향 이미지를 대표하는 원형상징의 표상 으로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희망한 것이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곧 나무를 나 무로서만 본 것이아니고 나무의 원형상징을 빌어 상승지향 이미지로서의 나무가 구원의 표 상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곧 사물을 사물로서만 해석하지 말고 초월된 모습까지를 포착하고 또 드러나지 않는 내면계까지도 투시, 새로움을 발견해 냄으로써 새로 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무료하면 
종일 가지로 그네를 뛰며 놀다가 
그도 심심하면 
껑충껑충 토끼걸음으로 
몰래 그늘을 뛰쳐나갔다 
햇볕에 놀라 되돌아오는 바람.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역시 불가시의 것이다. 바람은 모습이 없다. 그러나 위의 예시와 같이 바람으로 하여금 그네를 뛰게 하고 또 토끼걸음으로 껑충껑충 그늘을 뛰쳐나갔다 되돌 아오게 하여 動態化하면 바람의 모습이나 행위가 의인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여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 자체를 보고자 하지말고 바람에 모습이나 행위를 부여해야 한다. 앞 단계에서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화, 시 각화하듯이 무형인, 그래서 불가시의 바람도 사물의 모습으로 변용하거나 의인화하여 모습을 부여함으로써 형상으로 드러나게 했을 때 바람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의 형상화이고 또 그렇게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꾸미는 것이 변용이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나무가 가리키는 
손 끝 저쪽 
수림의 향수가 
자운으로 피어나고 
피어나 일몰로도 지워지지 않는 
계절 밖 

- 나무 저쪽의 세계는 나무가 향수 하는 세계, 혹은 향수가 자운으로 물든 채색된 세계, 채 색되어 일몰에도 지워지지 않는 세계, 그것은 현상학적 물질계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도 형이 상적인 빗물질계, 즉 초월계이거나 절대 세계가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눈으로 보는 세계 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항용의 세계이고 그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세계는 가시권밖의 세 계는 곧, 정신적으로 포착된 세계로서 절대 세계, 초월세계와같은 형이상적 세계가 된다. 나 무가 항시 서서 발돋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지향으로 볼 수 있고, 이 드러나지 않는 세 계지향을 보는 것이 바로 나무 저쪽의 세계를 보는 시인의 견자적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마 지막 단계에서는 이러한 형이상적 세계를 볼줄 아는 시력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 
(시감상) 

과목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명멸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과목]전문 


1연-- 과목에 과일이 무르익어가는 것을 보면 계절이나 우주의 섭리를 깨닫고, 놀라움을 드 러내는 시다. 그래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과물과, 과물이 열려 성숙해 가는 불 가시의 생명력가지를 투시하는 시각이 동원되고 있다. 
2연--계절 앞에 선 나무 그대로를 보면서 그 속에서 자연의 여러 조건을 극복해 가는 또 다 른 생명력을 읽어내고 있다. 발상차원의 단계에서 보면 5,6단계에 해당됨. 
3연--계절의 소멸 속에서 빛깔과 무게로 영글어 가는 생명력과 그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나 신의 은총까지를 투시함으로써 발상차원의 7,8단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162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22 시를 쉽게 쓰는 요령...하지만 쉽지만 않은 요령 2015-05-20 0 4042
521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2015-05-20 0 5078
520 무엇을 쓸려면 진정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2015-05-20 0 4515
519 동시조 창작에서 도움되는 동시조 례문 모음 2015-05-20 0 4105
518 동시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어나라 2015-05-20 0 3803
517 동시조를 잘 쓰려면 2015-05-20 0 4735
516 <사랑법> 시모음 2015-05-19 1 3543
515 현대시 이렇게 쓰자 2015-05-18 0 4183
514 詩佛 - 王維 2015-05-18 0 3674
513 李箱을 다시 떠올리다 2015-05-17 0 5804
512 산문은 환유적으로... 시는 은유적으로... 2015-05-17 0 3908
511 현대시와 현대시조에 관하여 2015-05-17 0 3807
510 시와 시인 명언 32 2015-05-16 0 4800
509 屎屎的 詩 2015-05-16 0 3646
508 <스승의 날> 시모음 2015-05-15 0 4000
507 황지우 시모음 2015-05-15 0 5204
506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인... 2015-05-15 0 3520
505 윤동주 시와 독후감 쓰기 2015-05-15 0 5439
504 방랑풍류시인 - 김삿갓 2015-05-15 1 4971
503 요절한 시인 - 기형도, 그의 주옥같은 시는 우리 손에 고이고이 들려 있을것이다... 2015-05-15 0 3558
502 김삿갓과 詩 2015-05-15 0 3965
501 소설쓰기 = 감농군 되라, 시쓰기 = 보석세공자 되라 2015-05-13 0 4691
500 시쓰기 요령 2015-05-13 1 3259
499 시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아ㅠ... 2015-05-13 0 3998
498 동시 짓기 2015-05-13 0 4109
497 시쓰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2015-05-13 0 4324
496 잘못된 시쓰기 류형 2015-05-13 0 3478
495 시쓰기 네가지 류형 2015-05-13 0 3728
494 시쓰기와 정신 치유법 2015-05-12 0 4007
493 詩의 첫줄은 神이 주는것... 2015-05-12 0 3686
492 시쓰기와 기타... 2015-05-12 0 3972
491 시쓰기 즐거움 2015-05-12 0 4146
490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2015-05-12 0 4217
489 시쓰기 넋두리 2015-05-12 0 4317
488 五感의 詩쓰기 2015-05-12 0 3773
487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2015-05-12 0 3622
486 좋은 시를 쓰려면 2015-05-12 0 3848
485 시는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2015-05-12 0 4033
484 <개미> 시모음 2015-05-10 0 3916
483 <오체투지> 시모음 2015-05-10 0 3798
‹처음  이전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