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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려면 진정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2015년 05월 20일 21시 44분  조회:4516  추천:0  작성자: 죽림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뭣하러 굳이 명상 모임에 찾아오는 겁니까? 당신은 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지 않죠? 만약 당신이 글쓰기 안으로 깊이 몰입할 수 있다면, 글쓰기가 당신을 필요한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나는 쉼표와 마침표, 물음표의 쓰임새를 배웠고, 배운대로 문법에 맞는 글을 쓰는 데만 골몰했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진부하고 재미가 없었다. 내가 썼던 글 어디에도 나만의 생각이나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선생님이 이런 걸 원할 것 같으니까 이렇게 써서 보여드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대부분의 작가들의시와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작품까지 죄다 읽었다고 자부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일상 현실과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소설을 읽고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평범한 것이 시란 말인가? 내가 매일 하는 그런 일이 시라고? 그때 무언가가 나의 뇌신경망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 나는 어느새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 실린 글을 써 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나는 먼저 내 가족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 안정된 삶의 방식을 가지려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당부하고 싶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시작할 때 이미 당신은 끝까지 그 일을 따라갈 깊은 안정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 나는 항상 똑같은 방법론을 주장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결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뿐더러 나 자신을 더욱 높은 이해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글쓰기를 배우는 길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실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수업을 할 때는 나는 학생들에게 '뼛속가지 내려가서 쓰라'고 요구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으라는 말이다.

첫 마음, 종이와 연필

나는 첫 번째 수업을 무척 좋아한다.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글 쓰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첫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첫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글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돌아가야 하는 자리일 것이다.

생각은 손이 움직이는 것보다 언제나 앞서 달려가기 때문이다.

노트에 글을 쓰지 않ㄴ고 직접 타자기로 치는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글쓰기는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작업이기에 사용하는 도구와 장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글쓰기도 명상과 같이 첫 생각과 만나서 거기서부터 글을 퍼낼 때 당신은 싸움에 나선 전사가 되어야 한다. 특히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감정과 에너지의 힘에 질려 겁을 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생각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가도록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

* 손을 계속 움직여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이것이 규칙이다. 목표에 닿기 위해서는 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목표는 첫 생각에 불을 활활 붙여 주는 것. 사회적 체면 또는 내명의 검열관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에너지의 심장부에 도달하는 것, 피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진자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는 것이다. 이규칙을 지티다 보면 괴팍하기 그지없는 우리 마음의 정체를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닳아빠진 사고의 끄트머리를 계속 탐색해야 한다.

첫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제일 먼저 '번쩍'하고 빛을 낸 불씨다. 이 불씨의 뿌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잠재력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불씨는 대개 우리 내부의 검열관에 의해 진화되어 버린다. 두 번, 세 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일상의 관념 세계로 다시 돌아와 맨 처음 피어난 신선한 불꽃과 교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첫 생각은 에고 또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논리적인 메커니즘에 얽매이지 않은 생각이다. 세계는 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식 차원을 넘어선 글을 쓸 때, 그것은 잇는 그대로 사물의 진실을 나타낸 것이 된다.

어째서 첫 생각에는 이처럼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첫 생각은 참신함 그리고 영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첫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그동안 겪어 온 감정과 사건과 정보가 밑바탕이 되어 발산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당신이 바로 지금, 현재에 존재할 때, 세상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멈추지 말고 써라.

글쓰기 훈련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 다시 말해 인내심과 공격하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세계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간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법칙은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와 소설을 방편으로 삼아 진정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무서운 적을 만나게 되더라도 계속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겹겹이 쌓여 있는 마음의 층을 벗겨내야만 합니다."   ---티벳 승려 초감 트롱파

 글 쓰기 훈련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게 하고, 자시 내면의 목소리와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옳았을 때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법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사업상의 서류이든 장편 소설이든 박사 논문이든 또는 여행기이든, 그 글에는 힘이 실리게 된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또 육상 선수들은 달리기가 힘들고 지겨워져도 달리는 행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습을 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열망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열망은 절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더욱이 규칙적으로 달리기 훈련을 하게 되면, 이 훈련 자체가 저항감을 잘라내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또 다른 훈련이 된다. 당신은 계속 달린다. 이렇게 한참 동안 달리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달리기를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목적지가 보이게 되면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골인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또 달려 보고 싶다는 갈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다. 일단 글쓰기에 빠지게 되면,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이제야 책상 앞에 앉게 되었는지 의아해질지도 모른다. 글쓰기도 훈련을 통해서만 실력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라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설 자리가 없어진다.

글을 쓸 때는 자신을 제한시키지 말라. 자신을 제한하는 순간 당신은 경직되고 얼어붙는다. 책상을 마주했을 때는 최소한의 제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라고만 하자. 그저 많은 글을 쓰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글을 쓰는 동안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제한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그러면 심리적 해방감을 준다. --글을 쓸 쑤록 나는 점점 더 확장되고 느슨해진다.

글쓰기에 몰입하는 학생들을 둘러볼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슬쩍 보기만 해도 그들이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그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충실하게 "현존"하고 있는지 여부를 금새 알아차린다. 진지하게 글에 빠져 있는 학생의 몸은 점점 느슨해진다.

달리기가 좋아서 잘 달리고 있을 때는 달리는 것에 대한 저항이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달리기를 위한 활동에 퍼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리는 사람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의 모든 것이 진정으로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게 된다.

* 헤엄을 칠 때나 배가 나아갈 때는 파도에 거슬러서는 안된다. 새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몸을 파도에 맡기면 내 몸이 파도와 일치감을 갖게 된다. 새가 창공을 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상황은 수도승이 수도를 할 때와 같다. 도를 닦으면서 그 상황에 몰입하면 어떠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모든 고통이 희열이 되어 고통과 내가 일치되어 무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외부와 나의 내부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와 안락을 느끼는 것과 같다.

* 실제로 나는 글을 쓰면서 명상에 잠긴다. 마음이 어지러웠다가도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여 글에 몰입하게 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안락한 기분이 된다. 아무리 무서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글을 쓰게 되더라도 전혀 언짢은 기분이 되지 않는다. 마치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희열에 잠길 수 있다. --가끔 대단히 화가 나거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서 마음이 불안할 때는 안정제를 먹듯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현재를 벗어나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글을 쓰면서 회상되는 모든 과거는 행복한 감정을 일으키는 안정제가 되어 나의 마음을 차분하고 안락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 안정제, 차 한 잔, 조용한 음악 감상, 성인의 숨결과 다름 없다. (051206)

글쓰기는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야성이 숨 쉬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며 오직 그 순간 글 쓰는 사람과 다른 모든 것과의 연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글쓰기 훈련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논리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게 된다.

지금 당장 자리에 앉으라. 지금 당신의 마음에 달려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 말라.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아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 글을 쓸 때는 무조건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할 것인가? 평소에 거짓과 위선이 넘치는 마음의 소유자는 그의 글 조차 위선과 거짓으로 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람도 계속 글을 쓰면 되는가? 글을 씀으로서 저절로 자기 정화의 효력이 발생할 것인가? 자꾸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결국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가 될 것인가?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아니다.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판단력을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과 판단력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를 거쳐서 나온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퇴비를 섞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남긴 쓰레기더미는 자꾸 쌓여 간다.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경험들만을 수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린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삼기도 한다.

비옥한 토양은 단시일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필요하다. 유기적으로 이어진 인생의 모든 세부 항목들을 계속 뒤집고 도 뒤집어서 쓸데없는 찌꺼기들을 걸러 내야만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을 주었음에도 남보다 많은 분량의 글을 써내는 학생들이 있다. 물론 긴 글이라 해서 우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 그런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의 재료로서 탐색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런 학생들이야만로 그저 '나도 글을 써 보겠다'는 소망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훈련 과정을 충실히 거쳐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무래로 흙을 파내듯 자신의 마음을 자꾸 써래질해주고, 얕은 개울 같은 생각을 자꾸 뒤집어 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든 일이지만, 이런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고 해서 신경증적인 위험에 빠진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 내면의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 풍요의 정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주제에 대달려 거기에 맞는 퇴비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말해야만 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실체를 이루어낸 것이다. 퇴비에서 한송이 붉은 튤립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당신의 작을 힘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하게 만드는 건 "위대한 결정자" 입니다. 당신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신이, 당신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 즉 새, 나무, 하늘, 달, 그 밖의 무수한 생명의 흐름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만 위대한 결정자가 당신을 도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카타기리 선사

* 물과 공기를 거역하지 않으면 헤엄과 비행을 더 잘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주만물의 아주 작은 미물이다. 그러나 우주만물에 거역하지 않고 나아갈 때 우리는 거대한 에너지를 얻어 빨리, 강력하게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음과 같다. 각종 스포츠에서 이러한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윈드서핑. 파도타기. 스키, 스케이트 등 공기, 물, 중력 등의 우주에 존재하는 힘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해 준다.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마음과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결코 편하게 앉아서 사탕이나 먹으며 살겠다는 핑계거리로 삼지 말라. 우리는 계속해서 비료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발효시키고,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비료가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우리의 근육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위대한 우주의 조류를 타고 더 넓은 곳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인정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욕심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사람마다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 때를 만날 수도 있고,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고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써라.

예술적 안정성을 얻는 과정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글을 썼던 네가 지금처럼 멋진 글을 쓰게 되었다니 놀라워! 너를 보면 나 역시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

그녀는 온통 불평불만과 진부한 묘사 그리고 악에 받친 분노로 점철된 내 노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나는 정말 바보다'라는 생각을 하 때조차, 그 사실을 계속해서 글로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나는 내 인생의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나를 지탱하고 키워주고 있다는 믿음만은 늘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할 나만의 길이 하나 있을 거라는 신념은 놓치지 않았다. 비록 마음은 아무런 감흥없이 무간각하게 가라앉아 있거나 잡념들로 산만하게 채워져 있곤 했지만,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그런 산만한 마음과 그 동안 살았던 인생이 전부였다. 나는 거기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가 게으르며 불안정하고 자기혐오나 두려움에 쌓인 존재,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때 당신은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을 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별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풀어 놓아야 하며, 그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 주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이런 쓰레기와 퇴비에서 피어난 글쓰기만이 견고한 글이 된다. 당신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게 된다. 당신은 예술적 안정성을 지니게 된다. 안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바깥에서부터 쏟아지는 어떤 비평도 무섭지 않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런 인식이 생긴 뒤에는 아름다움과 다정한 배려, 명료한 진실을 선택할 수 있는 튼튼한 갑옷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려움을 등에 진 채 무작정 아름다움을 좇아 거칠게 달려가지 않게 된다.

습작을 위한 글감 노트 만들기

어떤 것이든 모두 글의 재료가 된다. 글을 쓰고 깊은 주제가 떠오르면 언제라도 노트에 적어두라. 그것이 한 단어이든 한 문장이든 이러한 목록들은 당싱이 다음에 글을 쓰고자 할 때 요긴하게 끄집어 내어 사용할 수 있는 글감이 될 것이다.

이처럼 목록을 만들어 보는 일은 글쓰기 훈련에 있어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글쓰기의 재료들을 찾아내는 훈련이 될 뿐 아니라, 글쓰기가 바로 당신의 인생과 그 인생에서 탄생하는 산물임을 깨닫게 한다.

이런 식으로 삶의 경험들을 삭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다. 이렇게 글감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육체는 자연스럽게 글쓰기 작업과 친숙해지고 지난 경험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 않았을 때조차 글쓰기는 끊임없이 당신의 삶 속에서 진행된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통해 양분을 흡수하고 태양열을 빨아들여, 점점 무성하고 진한 초록 잎을 지닌 식물로 자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단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한 가지 주제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이 쓰는 글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당신이 머물러 있는 길 위에서 계속 걸음을 떼면 된다.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종이 위를 달려가고 있으니까.

2. "기억이 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 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멈추지 말라. 계속 적어라. 그 모든 것이 당신이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게 만들라.

3.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글을 써보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을 확장시켜야 한다.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글을 적어 보라. 이어서 끝으로,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 보라.

6.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라. 지금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그런 다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글로 담는다. 당신의 방 한 구석일 수도 있고, 여름 내내 앉아 쉬던 나무 그루터기일 수도 있고, 동네 가게일 수도 있다. 읽는 사람이 마치 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그 장소를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표현 때문이 아니라, 글에 나타난 세부 묘사를 통해 당신이 그 장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어야 한다.

글이 안 써질 때도 글을 쓰는 법

"훈련"이란 언제나 잔인한 단어다. 나는 이 단어를 가지고 나의 게으름을 토벌하려 했지만, 소원대로 효과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폭군과 저항군 사이의 싸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하지만 그 싸움의 한 구석에서,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실제적인 마음이 조용히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 마음이 노트로 옮겨져 더 깊고 평화로운 곳에서부터 나온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실제적인 마음이란 이성적인 마음의 상태?

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 두 개의 마음이 같이 살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이 동시에 글에 표현된다. 더구나 우리는 이 두 싸움꾼들을 언제까지나 묶어 두고 억누를 재간이 없다. 억누를수록 이 싸움꾼들은 더욱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시동안 그들이 노트에 대고 소리치는 것을 허락해 줄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글쓰기 속을 빠져들라. 싸움을 걸어 오는 목소리들에게 글 쓰는 공간을 허락하고 나면 그들의 불만이 너무도 빠르게 사그라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욕구불만을 터뜨리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소리지르기. 노래부르기. 운동. 화풀이. 종교적 의식행위.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서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글쓰기 작업은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이며, 엄숙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서 고독한 글쓰기에 전념하기보다는, 친구와 멋진 식당에 앉아 인간의 인내심에 대해 토론하거나 글쓰기의 고통을 위로해줄 상대를 찾아가는 데 마음이 이끌리게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는 단순한 임무를 스스로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을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선가의 말

--글을 쓰기 싫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글을 쓰기 시작해버리면 된다.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습작 시절부터 "자기 속의 작가"를 내면의 편집자 또는 검열관과 분리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작가가 자유롭게 호흡하고, 탐험하며 표현할 공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하는 말은 늙은 술주정뱅이가 뒤에서 종알거리는 그렇고 그런 허튼 소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별 의미도 없는 말에 귀를 기울여 쓸데없이 그의 힘을 키워 주는 바보짓을 하지 말라.

눈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직접 경험한 것만이 체험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도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수업 계획을 미리 세워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에 겁먹지 않고 항상 열린 마음응로 충실하려 애쓴다. 그리고 매번 이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결이 있다면, 마음을 계속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모든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리라 결심했다. 나는 흑인 학생들만 다니는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대리교사였다.

 "아이들 책상 밑을 보세요. 바닥이 온통 신발에서 묻어 온 흙 때문에 아주 지저분하죠. 정말 좋은 신호예요. 봄이 왔다는 신호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처음으로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재능이나 잠재력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재능과 실력은 훈련을 거쳐가면서 커지는 법이다.

비만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드디어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필요한 정보를 충족시킬 책을 구하러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운동법이 적힌 책을 읽는 것 가지고는 절대 살을 뺄 수 없는 법이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운동을 해야 한다.

공교육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잘못은 타고난 시인이자 소설가인 어린 학생들에게서, 그들의 문학을 빼앗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문학 수업은, 어린들이게 문학 작품을 읽게 한 다음 곧바로 문학에 '대해서'만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생각, 그것을 착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글이 견고하며 영구불변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사람들이 나와 내 작품을 똑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낭송한 시는 내가 아니다. 설령 시에서 '나'라는 단어를 들먹인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우리는 한 순간에 얼어붙어 있던 자신과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신선하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더 이상 내면에 있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자유롭게 된다. 이전까지 싸움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당신을 도울 것이다.

나와 내가 쓴 작품을 별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려라

인도에 가면 자동차를 먹은 요기가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말에 우리는 '왜?'라고 끊임없이 묻거나 옷을 고를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를 종이 위에 쏟아붓도록 해야 한다.작가는 두려움 넚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써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와 인생 그리고 정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자동차를 먹는 사람을 창조해 낼 정도로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만이 개미를 코끼리로 만들고 남자를 여자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각각의 분리되어 있는 형태들을 무너뜨리고 모든 형태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공통된 무언가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은유란 논리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은유를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각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한발 물러서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을 계속 기록해보라. 이런 연습은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줄 뿐 아니라 창조력을 키워 준다.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 생각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느 한 순간 생각이 비약적으로 튀어오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섬광같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영감의 근원은 만물의 근원과 맞닿아 있기에 자연히 그것들의 공통적인 법칙과 본질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그는 정작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단 한 자도 종이 위에 써 내려갈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종이 위에 자신의 감정을 풀어 내기도 전에 세상을 향해 어떤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질러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글 쓰는 이를 경직시켜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당신의 감정은 밖으로 표출되고 싶어한다. 그것이 당신 생각에 방해받기 전에, 솟아나는 감정을 일단 종이 위에 표현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조절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때그때 솟아 나오는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가라.

누구나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처럼 종이 위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 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 서투르고 꼴사나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당신은 지금 스스로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절대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대로 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글쓰기가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당신의 쓰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다가가도록 한다.

어느 순간, 비참하고 불만투성이고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전반적으로 침체된 기분이 들 때, 나는 이런 것을 그저 하나의 감정으로 인식한다. 나는 이런 감정도 결국 변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감정이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떤 장소를 찾아가게 하고 친구를 원하게 만드는 에너지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다.

글을 쓰는 데는 당신의 온몸, 즉 심장과 내장과 두 팔 모두가 동원되어야 한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그러나 엄청난 분량의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여유를 주자. 자신의 목소리가 지닌 힘을 믿는 법을 배우자. 자연히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방향 설정을 하고 목적지가 어딘지 알게 될 것이다.

강박관념을 탐구하라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강밥관념들을 목록으로 정리해 본다. 목록 내용은 자꾸 변하는데 숫자는 언제나 불어난다. 어떤 것은 고맙게도 아예 잊혀지기도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다. 자주 출몰해서 괴롭히는 것,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야기로 엮는다.

바로 이 강박증의 변두리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조해 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을 괴롭히던 강박증에 일부러 에너지를 쏟아 부어 보라. 이제 우리는 강박증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가지는 강박증 가운데 하나는 내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다. 어찌나 강박증이 심한지, 유태인에 대한 글은 이 정도 썼으면 됐다고 스스로를 달애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다른 쓸거리들도 얼마든 많지 않은가. 하지만 가족에 대해서 쓰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나는 또 다른 억압감에 시달린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무언가를 회피하려는 데 소모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억누를수록 그와 관계없는 일상 생활의 다른 부분까지 억압받는 느낌에 빠지곤 한다.

다이어트, 알콜, 초콜릿, 압박감의 실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강박 충동의 조정을 받는다. 강박증은 엄청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글쟁이 친구들 대부분이 글 쓰는 일에 대해 강박증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글에 대한 강박증도 음식에 대한 강박증과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예술가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절대 그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예술 작업에 얽매이고 창작에 대한 강박증에 빠지는 것이 술을 마시거나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는 일 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 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은 직접 글을 써서 풀어 내야 한다.

세부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인생이란 너무도 다양해서 만약 당신이 사물의 과거와 현재의 진정한 모습을 세세하게 써 내려갈 수 있다면 당신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우리의 삶은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의미없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 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케이크를 구우려면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 -그저 당신의 상황과 진실을 적어 내려 가라.

세부 묘사를 사용하면 당신이 느끼는 환희나 슬픔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전달하려는 감정이 어떤 맛인지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면, 그것을 맛보고 싶어하는 미식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일상 생활이 그의 첫 번째 인생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 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본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거나 비옷을 꺼내 입고 또는 신문으로 머리를 가닌 채 걸음을 서두른다. 하지만 작가는 노트와 펜을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리고 웅덩이를 바라본다. 웅덩이를 채우는 빗물과 가장자리에서 튕기는 물방울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작가가 되려면 엉뚱하고 미련해지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일까? 바보만이 비를 맞으며 웅덩이를 지켜볼 테니까. 똑똑한 사람이라면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 비를 피할 것이다. 하지만 바보는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거나 시간에 맞추어 직장에 도착하는 것보다 빗물이 고이는 웅덩이에 훨씬 흥미를 느낀다.

결국 당신은 돈을 버는 일보다 글을 쓰기 위해 바보가 되는 것도 무릅쓰는 글쟁이의 인생에 더 많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글을 쓸 시간이 많을 때 나는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반대로 시간에 쫓겨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일도 못하고 있는데 세금고지서가 날아오면 그야말로 거지가 된 기분이다.

월급쟁이들은 시간과 돈을 맞바꿔, 일한 시간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은 조상으로부터 돌려받은 땅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 그 땅을 팔라고 하면, 제정신이 있는 작가라면 결코 그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땅을 팔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조용히 안식을 하고 꿈을 꾸는 데 필요한 장소는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있다. 그 느림보가 당신의 모든 것을 팔아 버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당신에게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이마에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응시하게 만든다.

글쓰기는 육체적인 노동이다

진짜 글쓰기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껌을 씹지 않는다. 대신에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리고 호흡이 아주 깊어진다. 글을 쓰는 손은 느슨해지고, 그들의 몸은 몇 킬로미터를 내쳐 달려도 좋을 만큼 잘 이완되어 있다.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보라. 작가가 영감을 받고 글을 써 내려가던 순간의 호흡이 생생히 느껴질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불후의 명작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위스키를 마셔서는 안 된다. 대신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소리내어 읽고 또 읽어 당신 몸을 그들의 운율에 맞춰 춤추게 만들어야 한다.

잘 쓰고 싶다면 잘 들어라.

"노래를 잘 부르는 비결은 청음입니다. 당신은 먼저 제대로 듣는 법부터 배워야겠어요."

 만약 음악을 온전하게 듣는다면 그것이 온몸을 채우게 되고, 자연히 입을 열어 노래할 때 음악이 자동적으로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말이었다.

글쓰기 역시 90퍼센트는 듣기에 달려 있다. 열심히 들으면 당신을 채우고 있는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자연히 나중에 글을 쓸 때, 당신은 그 내면의 소리를 저절로 분출시킬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듣게 된다면, 글쓰기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당신은 그저 식탁 건너 편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가 내는 소리와 의자와 문이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 너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

계절이 만들어 내는 음향과 바람에 실려오고 있는 온갖 색상의 음향을 받아들여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당신이 있는 곳에 귀를 열어 두어라. 귀로만 듣지 말고 온몸으로, 당신의 위장과 심장과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들어라.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

열심히 들어주되 어떠한 비평도 가하지 않는 이런 듣기 훈련은 당신의 내면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진정한 의미와 영상을 일깨워 준다. 이런 식의 청취 훈련은 당신의 현실과 당신 주변의 현실을 반영하는 아주 선명한 거울이 되어 준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곤을 움직여라.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그저 듣고, 읽고, 쓰라. 당신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씩 당신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051208)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이런 경우에는 문제가 글을 읽는 독자에게 있다기보다는 글쓰기 방법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 버린 나머지 원래 하고자 하던 이야기의 방향을 망각하고 본래의 줄거리에서 멀어져 버렸을 때 일어난다.

또한, 작가 스스로 글의 방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는 채 글을 써 내려가거나, 다루고 있는 글의 소재에 밀착되어 있지 못한 경우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부분이 생기면 글의 초점이 흐려지고 결국에는 독자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윤곽이 흐릿해지면, 그 틈새로 독자들의 정신은 그 작품이 아닌 다른 속으로 새어나가고 마는 것이다.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방황한다면, 독자 역시 방황하게 된다.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그 목표에 집중해 매달려야 한다. 만약 당신의 마음과 글이 목표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있다면, 원래 돌아가야 할 자리로 부드럽게 잡아당겨야 한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얼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묘사도 자신이 정한 방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서 글의 방향과 한없이 멀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최고의 작품은 감상적인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감상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착각에 빠진 작가, 우리는 작가라는 사실이 살아있게 만드는 구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살아있기 위한 조건이란 따로 없으며 삶과 글쓰기가 두 개의 다른 명제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시는 건강했지만 나는 건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멋지다고 말해 줘요,"라고 했던 말 뒤에 있는 추한 내 모습을 본 것이다.

작가인 우리는 늘 의지할 것을 찾아다닌다. 동료들로부터,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안심하려 든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작품에 대해 보내는 타인의 칭찬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매 순간 무엇엔가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한 지원과 격려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칭찬을 해 주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은 별볼일 없고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쓸데없는 믿음만 키워가려 한다.

나는 전남편이 나를 칭찬하려 들염 한 번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그가 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지곤 했다.

내가 칭찬을 하면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분이군요. 학생들에게 뭔가 긍정적인 말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다른 선생님들과 똑같아요."

누군가 당신을 칭찬해 준다면,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겸연쩍더라도, 계속 숨을 둘이마시고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칭찬을 받는 것이 이렇게도 좋다는 것을 반드시 느껴 보아야 한다. 자신을 향한 긍정적이고 솔직한 격려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여유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니까.

꿈에 대해 써라.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인생의 종점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환영처럼 펼쳐졌다. 쓰레기 같은 글나부랭이 속에 파묻혀 손에는 얼마 되지 않는 마지막 시들을 부여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며, 누군가에게 그 시를 읽어 달라고 애걸하는 내 모습이.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하라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이 '주어-동사-목적어-의 틀에 짜 맞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신선한 세상과 만날 수 있으며, 글쓰기에 색다른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지나친 우월감에 빠져 있다.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도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그들만의 삶이 있다. 개미는 자기들만의 도시를 만든다. 개들도 그들만의 삶을 살아간다. 식물은 숨을 쉰다. 나무는 우리들보다 훨씬 오랜 수명을 가지고 산다.

인간이 고양이나 개 또는 파리를 주체로 삼아 "개가 고양이를 본다"라는 식의 문장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는 인간의 언어 구조 속에 한정된,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양식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터는 "나는 지금 모든 존재와 함께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만이 분리된 듯 "나는 깨달았는데, 너는 못 깨닫는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소통하는 법을 많이 알 게 될수록, 당신은 글을 쓸 때 상황에 따라서는 구문론이라는 틀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때로는 이처럼 문장 구조를 깨고 글을 씀으로써 우리가 말라고자 하는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글쓰기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이 하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 주라는 뜻이다. 당신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이다.

 글쓰기는 심리학 논문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독자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의 골짜기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글에서 "이건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식으로 무언가에 "대하여" 라는 단어를 볼 때 나는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든다.

때로는 평범한 진술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도 있다. 사진을 들여다보듯 하나하나 선명하고 분명한 어휘로 써야 한다. 심지어 에세이를 쓸 때도 평범한 진술이 한층 더 생생한 글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이야기 바깥에 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야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말은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은 절대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이야기에 당신만의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다.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이다.

그냥 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물에도 인간과 똑같이 이름이 있다. "창가의 꽃"이 아니라 "창가의 제라늄"으로 묘사하는 편이 훨씬 좋다. "제라늄"이라는 단어 하나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그 꽃의 존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도와 준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원에서 같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리고 있었다.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 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걷닥, 내가 아는 식물들인 산딸나무나 개나리를 보면 그 장소에 더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줄 때 느끼는 기분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증명인 것만 같다.

우리가 우리 코앞에 있는 사물에 더 가까이 갈수록, 그 사물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 많이 가르쳐 줄 것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같이 글쓰기 수업을 받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능한 빨리 알아 두라. 그러면 자신이 속해 있는 모임의 성격을 빨리 파악하게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 토론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몰입하기

선 명상법에 行禪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을 배우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명상법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발뒤꿈치와 바닥에 맞닿아 있는 발까락을 들어 1인치 정도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 쉬면서 아주 천천히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는다.

이렇게 느린 동작을 하다보면 사소한 발걸음 하나하나도 온몸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디딜 때마다 공기와 창문, 햇빛의 존재도 느끼게 된다. 만약 바닥이 없다면, 하늘이 없다면, 생명의 원천인 물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델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관통하고 있다. 계절조차도 우리의 걸음을 지탱하게 해 준다.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을 잡는 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기본 정보만을 다룬 묘사는, 그 안에 든 비범함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만약 그가 사고로 죽었다면 내 인생마저 흔들렸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물망처럼 얽혀서 서로의 우주를 창조해내고 있다. 누군가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에게 슬픈 파장을 남기게 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친절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먼저 자신에게 친절할 때에만 세상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찻잔 또는 바위 언덕, 하늘이나 개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대상들에게 선의의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초월적인 세계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이야기꾼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 나간다.

우리가 글 쓰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탐욕과 질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경탄하고 애착을 가지기 위해서다.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작가들은 새로운 글감을 찾아낸다.

말하기는 혼자서 펜과 종이만을 상대로 보내야 하는 길고 긴 창작의 시간에 앞서 하는 준비운동이다. 당신이 수없이 누군가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한 학생이 말했다. "전 요즘 헤밍웨이만 읽어요. 헤밍웨이를 닮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두려워요. 나 자신의 목소리는 잃어 버리고 점점 헤밍웨이를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늘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하려 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살려 내지 못한다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글쓰기는 공통체의 산물이다.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작가는 절대 불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그들은 한 작가에게 다가가,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자신에게서 빠져 나와 다른 누군가의 피부 속으로 옮겨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는 뜻이다. 남의 글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신을 더 크게 해 줄 뿐 절대 남의 것을 탐내기만 하는 도둑고양이로 만들지 않는다. 다른 작가가 쓴 글이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 것으로 변해 가면, 당신은 글을 쓸 때 그것들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나의 생각이나 내가 쓰는 글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아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그냥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글쓰기는 다른 작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절대 질투심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대단한 작품을 썼다면,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당신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다른 작가들을 나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그들은 훌륭한데, 나는 형편없어"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도 하지 말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작품은 좋아지기 힘들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만 훌륭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는 글쟁이들이야>" 이런 지나친 자만심으로는 절대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 작품에 대한 비평에도 귀를 막게 만든다.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어 두 팔로 세계 전체를 담는 글을 써야 한다. 거친 황야에서 홀로 떨어져 글을 쓸 때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같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만이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은 자기 본위에서 나온 우월감일 뿐이다.

* 나와 남, 나의 내부와 외부의 만물과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커다란 자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함께 도움을 주고 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아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언제까지나 자신만을 의지하고 밀고 나가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 두고,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조언한다. 작품을 자신만의 습작 노트에 사장시키지 말라. 바깥으로 꺼내 놓아라 .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 버려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자신만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다.

먹잇감을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어떤 글을 쓰겠다고 계획했을 때 동물처럼 행동해보자. 동물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동물처럼 당신이 쓰려는 이야기의 먹잇감을 하나씩 비축해 두자. 어떤 방법이든지 상관없다. 일상의 찌꺼기에서 발굴해내든지, 도서관을 찾아가든지, 정신의 정원으로 나가든지 마음대로 하다.

무엇이 되었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라. 논리적인 마음은 꺼 버려라. 마음을 비워 놓고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껴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 버려 두라.

자신을 믿어라.

세상이란 언제나 흑백으로 갈라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우리 인생이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명확하게 인생을 표현해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이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질문 하나를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잘된 일이다. 하지만 즉시 더 깊은 단계로 내려가 바로 그 다음 줄에서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

글쓰기는 안개에 싸여 있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설사 확실하지 않을 때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라. 이런 훈련은, 문장을 훨씬 힘차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한동안 나는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하얗게 텅 비어서 창문 밖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랑은 느낀적도 있었다. 글을 쓰는 대신 내내 이런 상태로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작업실에 대하여

나느 글쓰기 공간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약간 지저분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공간을 볼 때 그 공간의 주인인 작가는 아주 비옥하고 힘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완벽하게 꾸며 놓은 작업실에 갈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그 곳의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적 조절력의 필요성을 외적 환경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의 창조성이 완전히 그 반대편, 즉 조절력을 포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순례하라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어떤 장소에 오래 살 게 되면 그 장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항상 흥미롭다. 새로운 장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선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해 준다.

충분하다고 느낄 때 한번 더

글쓰기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될 때, 조금만 더 자신을 밀고 나가 보라. 당신이 종점이라 생각하는 곳이 실은 초입에 들어선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대문이다. 항상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당신은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

나는 작가다. 작가는 많은 시간을 홀로 글을 쓰는 데 보낸다. 또한 사회라는 틀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아침이면 일터로 향하거나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분주하다. 예술가는 제도가 만들어 낸 사회의 바깥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하얀 종이는 앞에 있는데, 마음을 불확실하고 사고는 연약하기만 하고 감각은 무디고 둔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조절력을 잃어 버린 글쓰기. 결과물은 어디에서 나올지 확실치 않은 글쓰기는 무지와 암흑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과 정명으로 부딪칠 때. 이러한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쳐 주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나아가게 만든다. 이런 두려움의 회오리바람에서부터 진정한 천재의 목소리가 탄생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안고 산다"라는 사실에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라. 결국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민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발 아래 깔린 시켄트와 혹독한 폭풍에 짓이겨진 마른 풀들마저도 다정스레 바라보게 한다. 예전에는 추하게 생각했던 주변의 사물들을 이제는 손으로 만지게 되고, 사물의 세부를 있는 그대로 보아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 사물이 여기 있다는 사실. 우리 인생을 싸고 있는 일부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의심과 의문은 고문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전적으로 매달려 심혈을 기울였다면, 그 일은 그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준다. 의심은 굽히지 않는 불국의 정신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이다.

의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의혹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았자 고통과 부정적인 마음만 만나게 될 뿐이다. 당신은 열심히 글을 쓰려고 하는데 당신 글의 문제점만 집어 내는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다.

비평가가 지껄이는 말에는 신경 쓸 것 없다. 거기에는 당신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대신 자신의 글쓰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라.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인내심과 유머 감각을 키우라.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고 저 너머에 있는 광활한 인생을 바라보라.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부터 글쓰기는 좋은 것이며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 게 해 주어야 한다. 글쓰기를 적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글쓰기는 당신의 친구다. 글쓰기는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당신이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버릴 수는 있어도 글쓰기가 당신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글쓰기 과정은 인생과 생명력의 끊임없는 자원이다. 때때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지리멸렬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탈리. 넌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거야. 너는 글을 써야 해."

만약 내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간다면, 그 말을 듣는다. 만약 자기파괴적이거나 게으름뱅이라면, 그 말을 듣지 않고 우울증에 대해 계속 힘을 키워갈 것이다. 내 그 말을 들으면 나는 인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언제나 나를 유연하게 해주었고, 참된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었던 순간들과 만난다. 심지어 내가 이른 아침 자동차로 붐비는 고속도로를 묘사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 혼잡한 도로에 대한 글 속에서 평화로움과 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다. 아침이면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고어비달은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은 글을 잘 쓰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최고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니까.

장대 위에서 발을 떼라

장대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태로운데, 이제 거기에서 발을 떼라니. 하지만 더 나가기 원한다면 그 끄트머리에서 발을 떼야만 한다. 성공적인 글을 썼다고 해서 결코 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실패한 글을 썼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또는 큰 실패를 맛보았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고 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당신은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만이 당신을 건강하게 또 살아 있게 지탱해 준다.

왜 글을 쓰는가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어서. 
나의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면 그에 의해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테니까.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왕따가 될 것 같아서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을 느끼게 되어
글을 쓰는 일을 통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어서
글을 쓰면 남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줄테니까.

글쓰기가 인생을 치료하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글쓰기 자체가 치료술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연을 당한 사람이 초콜릿을 사랑의 대체물로 여겨 마구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오면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초콜릿 먹는 것을 중지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애정결핍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가 흐지부지 중단할 수도 있다. 글쓰기는 치료술보다 훨씬 심오하다. 그래서 당신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든지, 글쓰는 행위를 부정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깊이 불사르며 글쓰기 속으로 몰입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에고는 내가 영원히 살아 있고, 사람들 또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가 한순간의 찰라이며 유한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진실은 나에게 더없이 큰 상처다. 내가 느끼는 모든 기쁨의 가장자리에도 이 상처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는 외롭고, 이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내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나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미쳤고, 정신분열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미친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어리석은 일에 빠지기보다는 이 사실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려 한다.

나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 주기 위해서, 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당신의 입술과 혀에서 나온 말에 형태를 잡아주기 위해 글을 쓴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을 당신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노력하며,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을 이해하기 위새, 그리고 그 공간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부족한 나의 작품만이 내가 가진 점부가 되어 버리는, 그런 완전한 고립 속에서도 글을 쓴다. 나는 이해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게다가 책상과 노트에서 떨어져 나 자신의 인생으로 얼굴을 돌려야만 할 때도 많다. 그리고 상처를 받으면서 그 상처를 이겨 내는 동안에도 글을 쓴다. 그 상처가 나를 강하게 만든다.

관통하는 글 쓰기

우리는 모두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글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관통하는 글쓰기만이, 흐르는 피가 땅에 스며들 듯 다른 곳으로 침투해 들어 가는 힘이 생긴다.

세상에는 많은 현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문제에 당신이 지나치게 빠져 있다면, 세상에는 수많은 현실이 있음을 꼭 기억해두라. 우리에게는 그냥 살아가는 우리 삶이 있다. 우리는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것이며, 그냥 비와 식탁과 음악과 종이 컵과 소나무를 만지고 싶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거나 친구와 같이 공동 글쓰기를 시도하다 보면 자기 안에만 깊이 처박혀 있는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가로 살아남기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 대해 우리가 품은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 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작품 속과 작품 바깥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비공격의 실천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 기술대로 살아야만 한다.

자신이 쓴 글에서 떠나라

사업가가 되려면 우선 먼저 위대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두려움을 떨쳐내야 하면,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다. 글을 쓰는 동안 모든 것을 집중시켜야 하며, 그 다음에는 아무 미련 없이 자기가 쓴 글을 고객에게 넘겨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빠르게 글을 쓰게 되면 실제로 자기제어가 통하지 않게 된다. 내 경우는 처음에 쓰려고 했던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대중은 진실의 단면을 보고 싶어 한다. 내가 만든 '글쓰기 창구'는 대중성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시인이나 작가에게 특별한 관심과 지원을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암암리에 글쓰는 행위에 대한 내밀한 꿈과 존경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초원을 떠나라

가끔 처음부터 문장 구조도 완벽하고 서술력도 좋으며 세부묘사도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글에는 계절마다 불어오는 태풍, 혹독한 겨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들의 글쓰기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잇는 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개척지를 개간하고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한다.

어느 화요일 저녁에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그 학생들은 내가 흔들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모두 글쓰기의 기본이 단단하게 잡혀져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 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 버린 바보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름대로 내 요구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흔들고 싶었지만 흔들 수 없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수업이었다.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

데이비드는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통념적인 사고 너머로 비상하고 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땅에 착지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단단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발견한 특별한 시야를 명료하게 펼쳐 보여 주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 익숙한 땅을 박차고 날아오름으로써 자신에게 더 많은 공간을 허락해 준 것이다. 정확한 문장에만 집착했다면 뻔한 정교함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소와 양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와 양을 탁 트인 황야에 풀어 놓는 것이다. 글쓰기에서도 커다란 들판이 필요하다. 너무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당신은 자시만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규칙적인 연습은 창조력을 마비시킨다.

다른 운동이 그렇듯, 글쓰리를 발전시키는 데는 연습만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글쓰기 훈련은 시간 속에 엄청난 압력을 가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펜을 끄적거리면서 언제 시간이 끝날까 자꾸 시계만 쳐다보게 될 것이다.

"매일 글을 쓰라." 이 규칙대로 실행하는데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의무감으로 했기 때문이다. 규칙만 따지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단지 규칙에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는 것처럼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는 없다. 이 때는 글쓰기를 중단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갈증을 느껴,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 다음 글쓰기로 돌아가라.

걱정하지 말라. 이것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어 낭비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만약 오랜 시간에 걸쳐 썼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글쓰기에 충분히 몰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오직 연습 시간의 경과로만 채우고 있다면, 당신은 평생을 연습해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때로는 더 멀리 가기 위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신의 규칙대로 미리 단정하지 말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 있는 존재와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규란 남을 다치게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굳이 법규를 들먹이지 않아도 항상 경우에 맞는 일을 하는 법이다. 규칙에 얽매이면 글쓰기에 필요한 진짜 현실이라는 반석을 얻지 못한다. 규칙으로 자신을 마비시키지 말라.

글쓰기 속으로 깊이 들어기지 못하면 결국에는 글쓰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시간이 흘러 다시 규칙을 지키는 착실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진실은 말하지 않게 된다. 글쓰기 훈련에 자신을 충식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몰입하는 사람만이 자기 인생에도 몰입할 수 있다.

글쓰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할 신성한 임무가 있으며, 그 임무는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작가로서의 우리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우리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넓어진다. 이런 이유로,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글을 쓰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도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내가 매일 접촉하는 것들 안에 함께 서서 계속 글을 쓰는 것만이 내 가슴을 열 게  준다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나로 하여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도록 깊은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준다. --내가 종이에 대고 연필을 끄적일 때, 질기고 단단한 마음 속 생각을 부수어 낼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렇듯,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믿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잇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외로움을 이용하라

"고독에 익술해질 수 있을까요?"

"고독에는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물어뜯습니다. 우리는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고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는 자신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글쓰기는 지독하게 외로운 것이다. 누가 이 글을 읽어 줄까?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세요? 아니면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세요?"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

벌거벗은 자만이 진실을 쓸 수 있다.

일주일에 하루 2시간씩 8주 동안 만나는 글쓰기 워크숍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우리는 4시간에 이르는 글쓰기 마라톤 시간을 가진다. 다른 사람들과 하루종일 글쓰기 훈련을 가져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수업에 참가하는 수강생 모두가 자진해서 하루를 내는 데 동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찬성을 하면 다음에는 수업 수케줄을 짠다. 예를 들어 10분간 한 번, 20분간 두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시간 동안 글쓰기를 한다.

첫 번째 10분간 모두가 글을 쓴다. 다음에는 각자가 썼던 글을 차례대로 읽는다. 글에 대해 비평하는 시간은 없다. 그냥 자신이 쓴 글을 읽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차례를 넘기면 된다.

이 수업의 특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기 때문에 의식이란 것을 챙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며, 어떤 비평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잠시 후 당신은 자신의 목소리가 해체되어 가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또는 교실 맞은 편에 있는 누군가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글을 발표하는 동안에는 어떤 평도 없기 때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음 번 글쓰는 시간에 그 사람에게 글로써 알려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 작품에 평을 하지 않는 이 방식은 글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겠다는 건강한 욕구를 만들어 준다. 말하고 싶은 에너지를 다음 번 글쓰기에 쏟아 붓는 것이다. 쉬지 않고, 쓰고 읽고 쓰고 읽는 것을 반복하는 이 방법은 내부의 검열관을 잘라 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글로 나타내게 만드는 엄청난 자유를 허용해 준다.

맨 처음 마라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매우 긴장한다. 아무 쓸 말이 없으면 어쩔까 하고 의혹과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당신은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과 더불어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쓸 수 있구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라톤 수업은 자신을 열어 보는 대단한 경험이다. 이 수업을 한 직후에는 벌거벗은 느낌. 제어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자기 방어라는 외투에 커다란 구멍이 꿇린 기분. 벌거벗은 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기분을 갖게 된다.

죄선을 한 직후에도 나는 종종 마라톤 수업이 끝났을 때처럼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혼자서 오랜 시간 동안 글쓰기를 할 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찾아온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열어 보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을 벌거벗기고 해체시키는 기분, 하지만 이것도 괜찮으니 받아들이라. 벌거벗은 자만이 어느 것에도 왜곡되지 않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자주 경험하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있다. 아주 뛰어난 글을 써 놓고도 정작 글을 쓴 사람은 그 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현상이다. 나와 다른 학생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 없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좋은 글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하고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가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조금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자신이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학대를 받거나 짓밟힌 사람을 볼 때보다도 더 심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목소리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 일이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이 어찌나 강한지, 많은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글로 옮겨놓고 나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정직한 고결함과 세심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해 내는,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과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글이 우수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모두가 부처입니다. 나는 당신이 부처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겠죠. 당신이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할 때, 당신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 좋은 글을 썼음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진정한 재능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을 치워버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작업이 아름답고 창의적인 인간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끌어안아야만 한다. 때로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깨달음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장하는 허풍쟁이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뭔가 천재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바깥으로 발산시켜야만 한다는 뜻이다. 내면에 있는 풍요로움을 외부에 있는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예술가들이 바라면서도 다가서기 힘든, 고요한 평화와 확심감을 얻는 열쇠다.

작품을 평가하는 스스로의 잣대를 가져라.

한 작품을 백 사람이 읽으면 백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보는 시각과 관심의 초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런 다음에 결정을 내려라.

이때 나오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참다운 작품이고 목소리다. 여기에는 불변하는 규칙 같은 것은 없다. 작품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어떤 점을 드러내고 싶은가?

작품 속에서 발가벗는다는 것은 자신을 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을 노출할 때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아주 힘들어진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얼어붙어서 아무 것도 노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어붙으면 나쁜 글밖에 나오지 않는다.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두고 읽어 보는 것이다. 만약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잠시 미루어 보라. 세월이 지나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 당신의 눈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시가 보일지도 모른다.

 고쳐 쓰기

자기가 쓴 글을 쓰자마자 다시 읽어 보지는 말라. 자기가 쓴 글을 자시 읽어보기 전에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 작품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매료되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된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슬쓰리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한 달 후 당신은 그 시절 당신이 썼던 노트를 읽으며 그 글의 훌륭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 서로를 깨닫고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작품이다.

다시 읽는 도중 좋은 글이 보이면 동그라미 표시를 하라. 이런 글은 다음 작품의 도입 부분으로 이용하거나 또는 그 자체를 하나의 시로 삼아도 좋다.

만약 글을 쓸 때 당신이 진정으로 글 속에 있었다면, 글로써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제는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썼던 언어들을 더 그럴싸한 다른 언어로 고치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를 벌거벗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시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조금도 과장시키거나 공격하는 일 없이 그저 수용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창작자를 마음껏 풀어 놓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절하게, 관습에 맞게,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질서를 부여해야겠다."라는 태도를 삼가라. 만약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함정을 파겠다는 것과 똑같다.

원고 수정 작업은 '새롭게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쓴 글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먼저 전체 그림을 다시 본 다음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부 묘사를 첨가하면 된다.

자신이 쓴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은 표시를 해두라. 이것들을 글감 목록에 적어 놓으면 다음 번 다시 글을 쓸 때 그 중 하나를 잡아서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다. 또 표시를 해둔 글은 그 문장에 대한 기억을 강화해 훗날 필요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이 떠오르도록 만든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잇던 별개의 부분들이 뭉쳐져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카타기리는 위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술가가 명화를 보면 자신도 명화를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는다. 예술가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발산한다. 하지만 카타기리는 이 영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요한 평화와 접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접촉을 이루지 못할 경우 예술가는 파멸한다고 했다. 사실 알코올 중독과 자살, 정신병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킨 예술가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옮기고 나서

저자는 자유롭게 글을 쓰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글쓰기란 자신만의 솔직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길이며, 굴극적으로 인생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돌이켜보며 인생을 완성시켜 나가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진짜 보물들이다.

이 책은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더욱 높여 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유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키워가는 끊임없는 훈련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게 되었기 때문이다.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또한 좋았다.

수많은 얼굴들이 하니씩 선명하게 내 눈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또렷하게 내 가슴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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