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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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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53분  조회:6041  추천:0  작성자: 죽림

누가 끝을 보았나

          - 이상백 -


  겨울강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말자

  물이 넘칠 때도
  강이라 했고
  흐르던 물이 말라 버리던 때도
  우리는 강이라 불렀는데

  지금
  얼음 어는 마음이라 하여
  우리가
  여기를 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물이 물로 이어지고
  길이 길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들 중에서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의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金宗三)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누나의 얼굴

        - 윤동주 -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뜨면

공장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을 부비면서

공장에 간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한참 지면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 들어

집으로 온다.


 누른 포도잎

            - 오일도 -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누룩

    - 이성부 -

 

  누룩 한 덩어리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누항요(陋巷遙)

           - 신경림 -

 

이제 그만둘까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

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

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리,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

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이내 어둠은 옛날의 소꿉동무처럼 다가오고,

발길 따라 깊숙한 골목 여인숙 찾아 들어가면

 눅눅하고 퀴퀴해서 한결 편해지는 잠자리.

꿈인 듯 생시인 듯 들리리, 네가 가 잠들 곳 또한

 이같이 익숙한 곳 편안한 곳이라는 소리가, 먼데서.

 
 * 陋巷遙(누항요)는 '좁고 더러운 거리(자기가 사는 동네를 
 말하기도 함)를 거닒'이라는 뜻 *

 

 

 

눈(雪)

    - 허 유 -

  
얼마 전 
고향의 고가(古家)를 처분(處分)하면서부터 
시름시름 앓아 왔다.

 

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보랏빛깔의 아픔이 번져 와 
나를 더욱 앓게 하고, 
그것은 시나브로 나를 때리고 갔다.

그리고 
눈이 왔다.

 

도회(都會)의 눈은 고향의 눈 보다는 품질(品質)이 못하지만, 
그런대로 예쁘고 고맙다.

 

문득, 십년(十年)째 죽어 있는 친구 하나 
생각히운다.


 

 

눈 

   - 구르몽 -


시몬, 눈은 그대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그대 무릎처럼 희다.

 

시몬, 그대 손은 눈처럼 차갑다.
시몬, 그대 마음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불꽃의 입맞춤으로 받아 녹는다.
그대 마음은 이별의 입맞춤에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서 슬프다.
그대 이마는 밤색 머리칼 아래 슬프다.

 

시몬, 그대 동생인 눈은 안뜰에서 잠잔다.
시몬, 그대는 나의 눈, 또한 내 사랑이다.
 

 

 

  - 신대철 -

 

  자운영꽃이 꼭꼭 숨어 핀 풀숲을 헤맸어. 자운영꽃 같았어. 풀뱀이었어.
풋고추 같았어. 고추밭이었어. 빨간 고추만 골라 땄어. 고추를 씹다 보니
뱀이었어. 혹시 불꿈은 꾸지 않았어? 불을 움켜쥔 채 사람들이 쫓기지
않았어? 불만 버리라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리면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릴 순 없다고 그랬지. 손가락이 타 뜰어가도 불을 놓지 않았어.
온몸에 불이 붙었어. 지글지글거리는 불덩어리였어. 불을 보고 싶어. 불을
키우는 아이를.

 

 

 


     - 김수영 -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신동집 -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
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 백학기 -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시인들이
  사는 나라에
  눈이 내린다
  정오에 그쳤다가
  눈이 내린다
  1910년 독립문 주변에 내려
  잠시 등을 끈 시인들이
  묻는다 지금도
  눈이 내리는가고

  눈이 내리는가고
  마적의 눈이 내리는가고

 

 

 

눈길
    - 고은 -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눈 길 
    - 박남준 -


그 눈길을 걸어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플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족으로만 젖어 가던 날이 있었다

 

 

눈길속의 카츄샤

       - 박봉우 -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눈물
      - 김현승 -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눈물사위

     - 문형렬 -


  하늘을 높이 던져라
  슬픔마저 법도가 있느냐?
  마음껏 소리 없는 사람살인데
  한 손 뽑아 구름을 펼치나니
  마음은 짤랑짤랑 홀로 사라지고
  다른 손을 휘돌려 흙을 뿌리나니
  맴돌며 솟구치는 우리의 살갗이 아닌가
  산을 밟고, 강을 버려
  어깨 위로 늘어지는 황토 길마다
  깔깔거리는 시간의 꽃아
  재금발로 재금재금 재주 부려 차던진다 아하
  들끓는 사랑이로다 앞길이
  지나온 길만 같으면
  앞길이 지나온 길만 같으면 에헤
  에헤 넘어가는가 흙을 넘어가는가
  너는 모르겠네 에헤 에헤 물을 넘어가는가
  네 몸 깊이 일군 소금밭으로,
  모르겠네 모르겠네
  녹아나는 기다림마저 넘어가는가
  넘어라!
  까짓 넘어가라 넋까지 넘어
  탁 풀어 불질러 다시 맺지 않으리니.

 

 

 

눈물에 대하여

      - 김세완 -

 


  모든 눈물은
  빛나는 나라에서 올 것
  그리고 돌아보지 말 것
  스스로 거두지 말 것이며
  다만 눈물로 빛나기만 할 것.

  눈물은 눈물끼리
  껍데기는 껍데기끼리 모여
  하나가 될 때
  눈물은 어두워지지 않고
  살아서 빛나는 튼튼한
  이름 하나를 남길지니
  껍데기뿐인 눈물은
  껍데기의 나라로 돌아가고
  모든 돌아보는 것들은 다시 오지 말고
  스스로 거두는 것들만 어둠의 땅에 오래 남아
  씨앗을 뿌릴 것.

  그리하여 부르면 대답하는
  눈물 하나로 우뚝 솟을 것.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눈보라 
         - 김동리 -
 

연기 낀 오막도 
때묻은 베개도 
어머니의 주름살마저 
잊어야 가리

 

돌아서면 허허벌판 
눈보라 땅끝까지 휩쓰는 속에 
나는 혼자 가야 한다 
어디라도 가야 한다

 

있는 것은 다 버리자 
버리고 가야 한다 
사랑 앓는 지구여 너는

 

눈보라 싣고 지금 어디로 굴러가나

 

 

 

눈바람

      - 김양식 -

 

  내가 펄펄 쏟아지는 흰 눈발에
  서투른 눈바람 나서
  너를 찾아 나섰더니

  먼 발치에 네 집 바라뵈는 고갯길을
  단숨에 뛰어오른 사슴의 숨결만큼
  내 가쁜 발길이 채 넘어서기도 전에

  너는 벌써 날 앞질러 눈바람 나서
  그 싱그런 하늘 바람 왼통 품에 끼고

  천년 푸르른 솔나무 위를
  학이 되어 휠휠 날고 있었다.

 

 

 

눈이내리느니

      - 김동환 -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도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발귀에 실어 곱게도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密輸入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깔리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흰 눈이 내리느니 보-얀 눈이

북새로 가는 이사꾼 짐 위에

말없이 함박같은 눈이 잘도 내리느니.

 

 

 

  눈 오는 날

       - 조상기 -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어둑한 종소리에
  귀 밝은 내 사랑은
  측백나무 그늘에 앉아 있더니

  가랑잎 밟고 오던 기억이 아파
  바람의 깃을 접어
  등피를 닦는다.

  얼마나 큰 무지개를 잡으면
  바람의 뒷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여름내 무성했던
  우리들 꽃밭에 가서
  동그라미 음계를 그리고 오는
  내 새끼 비둘기들이여.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눈오는 밤에

       - 김용호 -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눈은 내리네

         - 박용철 -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눈꽃

     - 김상배 - 

 

첫눈 내린 날
포장 술집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오줌이 마려운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눈꽃 
핀 나무 아래에서
아내의 흰 엉덩이를 보았네
참 아름다웠네
살맛이 있네

 

 

 

나그네
        -  박목월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 한용운 -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한하운 -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 양주동 -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 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와 자유를 
 그의 형제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쓸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나, 
숨결있고 생명있는 
 이 나랏 사람 - 
아아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러하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 은

“맨 어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 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이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 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에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 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사랑이었네라

       - 권국명 -

 

  나는 피였네라,
  처음은 다만 붉음만이었다가
  다음은 조금씩 풀리는
  아픔이었다가,
  석남꽃 허리에 아픔이었다가,
  이 어지러운 햇살 속에
  핏줄 터져 황홀히 흘리는
  피였네라,
  내 피는 남산을 적시고
  남산과 대천세계를 적시고
  그래도 죽지 않는 더운 사랑이었네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김소월 -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 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나는 잠들고 싶어요

      - 배경란 -


  나는 잠들고 싶어요
  천사들이 내 머리 곁에 와서 지켜보아요
  하늘나라에는 금빛 포도송이 백합같은 마차가 달려가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두려워 죽을 수도 없어요
  산소가 없으니 이 지상에 살 수도 없어요

  삶과 죽음 속에
  나는 함께 잠겨 있어요
  가슴은 날으지 못하는 새처럼 아프고 눈물겨워요

  나는 깊이깊이 잠들고 싶어요
  천사들과 함께 오--랜 꿈 속에서 하늘나라 그네를 타고 싶네요.

 

 

 

나는 천 줄기 바람 

              - 인디언 전래 시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면 압니다.

내 무덤 앞에 서지 마세요 
풀도 깎지 마세요

 

나는 그 곳에 없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자고 있지 않아요

 

나는 불어대는 천 개의 
바람 입니다 
나는 흰 눈 위 반짝이는 
광채 입니다

 

나는 곡식을 여물게 하는 
햇볕입니다 
나는 당신의 고요한 아침에 
내리는 가을비 입니다

 

나는 새들의 날개 받쳐주는 
하늘 자락입니다 
나는 무덤 위에 내리는 
부드러운 별빛 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지도 
울지도 마세요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 황정순 -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받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었으면 좋겠어

개울물 소리 졸졸 거리면 더 좋을거야


잠 없는 난 곤히 자는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을 들고
당신 팔에 안겨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쭉 펴보며
내가 당신 하나 둘 체조시킬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랫동안 입맞춤 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할꺼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놓고
파릇한 야채 띄워 파른한 야채죽으로 해야지
아마 당신 깔깔한 입안이
솜사탕 문듯 할거야
이때 나즉히 모짜르트를 올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즐럿을 내리고
꽃무늬 박히 찾잔 두개에 가득 담아
잉크냄새 막 나는 신문을 볼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넘어 
당신의 눈빛을 나는 읽겠지
눈을 감고 천천히 다가 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수 있어
그럼 난 강아지처럼 부벼볼거야 
그래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히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배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응석쟁이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가
어쩌면 그 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거야

 

나, 나 , 늙으면 당신과 함께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어 울고 싶어
장작불 같은 내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에 너무 박찬 그대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꺼야

 

겨울엔 백화점 가서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히 스웨터를 살거야
재빛모자 두개사서 하나씩 쓰고
경병 찻집으로 나가 볼거야
눈이 내릴까
눈이 오면 좋겠다 그치

 

봄엔 당신 연베이지 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영화를 보러 갈가
드라이빙 미스테이지 같은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즐럿 보온병에 담아들고 낙엽 밟으로 가야지
저 벤칭 앉아 사진한장 찍을가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둬야지

 

그리고 서점에 가는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럼에 들러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거야
당신 읽어주는 한줄 한줄에
난 푹 빠져 잠이 들겠지
난 당신 책 읽는 모습을 보며
화선지 속에 내 가슴속에
당신의 모습을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거야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 품에 안겨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 조종현 -

 

  1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2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새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

  3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 성춘복 -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흐트러진 강줄기를 따라 하늘이 지쳐 간다.

  어둠에 밀렸던 가슴
  바람에 휘몰리면
  강을 따라 하늘도 잇대어
  펄럭일 듯한 나래 같다지만

  나를 떠나보내는 언덕엔
  하늘과 강 사이를 거슬러
  허우적이며 가슴을 딛고 일어서는
  내개만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밤마다 찢겼던 고뇌의 옷깃들이
  이제는 더 알 것도 없는 아늑한 기슭의
  검소한 차림에 쏠리워
  들뜸도 없는 걸음걸이로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면,

  강물에 흘렸던 마음이
  모든 것을 침묵케 하는 다른 마음의 상여로
  입김 가신 찬 스스로의 동혈을 지향하고
  아픔을 참고 피를 쏟으며
  나를 떠나보내는 강으로 이끌리워
  되살아 오르는 게 아닌가.

  강 너머엔
  강과 하늘로 어울린
  또 하나의 내가 소리치며
  짙은 어둠의 그림자로 비쳐간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무
     - 박목월 -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鳥致院)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於口)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公州)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門)을 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溫陽)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默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나무   
       - 이재무 -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 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나무

     - 김윤성 -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황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졸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따.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혼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나무

    - 최영철 -


  삭둑 잘라 불을 지르고
  삭둑 잘라 다리를 놓고
  삭둑 잘라 간판을 세우고
  삭둑 잘라 이빨을 후빌 때
  나무는 가만히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 이외의 뜬구름도
  뜬구름만큼의 행복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곤
  그래도 나무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제자리걸음의
  뜬구름뿐이다 뜬구름처럼 가냘픈
  행복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따위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흘러가거나 지겨울 뿐인 행복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믿기 위해서는
  나무라도 몇 그루 서있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둥실 떠있는 내일일지라도

  그러나 나무들은 가만히 서 있지 않다
  이제 나무들도 하품
  일렬종대가 아니면 이열횡대로
  이제 나무들도 바가지
  근육통이 아니면 과민성대장으로
  아니면 모두가 알다시피 만성빈혈이든가
  이쯤에서 해산을 명령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기강이 문제
  설마 제까짓 것들이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성큼성큼 걸어와 내 목을 찍어누르지는 않겠지
  더 이상 큰코 다치기 전에
  그러나 나무들도 온몸이 가렵다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

              - 이은경 -


한 치씩 더 자란 나무가지와 한 치씩 더 뻗은 바람의 머리칼이
어울렸구나 동해 앞바다 몰래 빠져나와 나풀나풀 생모시를 흔드는 바람아
새벽이면 엎드려 두 손 모으고 나무야 나무야 높이 솟아라 천 번 만 번
외우는 소망의 뜰에 말쑥한 몸매로 여린 가지 흔들려고 너는 왔구나 치솟는
빌딩의 모서리 토막토막 잘린 칼바람 무서워 무서워 왁자지껄 끓어 오른
전열 속의 불바람 지겨워 지겨워 달려 와서 등 식히는 고가 대청마루에
쏴아 하고 울음 쏟는 동해 바람아 주름접힌 내 눈 언저리 적셔 놓고
문지르고 다시 적시는 나무가지 사이로 흘러 온 바람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 류근 -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 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나무에게

      - 박일 -


  1
  열 개의 손가락으로도 잡지 못해, 너의 마음은
  밤의 빗장을 열고 어둠 곁을 지나면
  한 움쿰씩 잡풀은 뜯겨지고
  뜯겨진 자리에서 잡풀은 흩날린다

  시간은 더듬거리며 찾아들고
  아침을 향해 오르는 빛
  새들은 용감히 어둠을 쪼아댄다

  2
  눈을 떠라 나무여
  겨울 숲을 떠나는 새들 소리를 들으라
  뿌리에 감긴 내면의 인식을 떨치고
  스스로 키를 넘는 혼들을 보아라
  내부를 가득 차오르던 고요를 버리고
  불멸로 치닫는 빛살의 파도
  얼어붙은 하늘을 새들은 쪼아댄다

  눈을 떠라 나무여
  귀를 열고 외쳐라
  침묵과 마주하지 말고
  심층에 굴착하는 뿌리 힘으로
  바깥보다 더 굳게 서야 한다
  나무여

  3
  너와 함께라면
  바람 앞이라도 끄덕 없다
  무너질 줄 모르는 성
  둘레에 쌓고
  잠을 청한다

  잠시 빈 손으로
  수없이 재깍거리며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꿈을 꾼다
  가지마다 혼들이 살아있는
  꿈을


 

 

나무 안의 절

        - 이성선 -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꽃구름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나무와 마음

       - 이은상 -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쉬고 뜻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꺽어면 눈물 흘리죠.

꽃피고 잎 퍼져 향기 피우며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들도 찾아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 처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게 자라나
 집집이 기둥들보 되어 주지요.

나무와 사람들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나뭇잎

       - 송향섭 -


겨울에 갇혀 
인내하던 
대지의 푸른 생명

 

봄을 견디다 못해 
나무 등걸을 타고

 

넓고 푸른 자유를 향해 
하늘로 오르지만

 

나무 끝에 막혀 
가지를 서성이다가 
잎으로 터져 나온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밖으로 나오자마자 
저리도 너울 너울 춤을 출까

 

 

나비

  - 유경환 -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나래 아프면 청무우밭 쉬고 나래 지치면 절벽을 찾고 나래 부러지면 남빛 강에 떨어져  죽고...

  나래... 그 부드러운 나래 한 쌍으로 하늘치며,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나비의 꿈,

눈부신 햇덩이 훈장으로 붙이고 하늘로 녹아 버릴 나비의 가슴.

  비바람 가려서 달밤을 날고 달밤을 나를 땐 전설 꽃무늬, 노을 속 지날땐 불꽃무늬, 남빛 강 건널 땐 청동무늬, 모래처럼 쏟아진 별무리 밤하늘이 흘리고 간 나비의 유언.

  끝없는 잠, 숨 죽은 밤 하늘 어디서든지, 반드시 고운 여인 하나
죽어가리라는  어지러운 춤, 하늘에서 흩뿌리는 눈물 하늘에 흐느끼는 나비의 시.

  뉘 시켜서 아니라 스스로 그 작은 목숨 걸고 나래치는 아름다운 넋 풀잎에 이슬지듯 소리도 없이 남 몰래 나래치며 사라질 너, 너에게 끝 있음을 노래 부르고 나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불러라.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청산에 불 붙으면 나래에 불 당기고 불보래 속에서 나래를 쳐라.

 

 

 

나비 
          - 윤곤강-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밑 --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의 맥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재주도
한 옛날의 꿈 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진다.

 

 

 

나비와 광장

        - 김규동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나비의 여행(아가의 방·5)

         - 정한모 -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나부

   - 장윤우 -

 

  벗긴 채 양접시 위에
  뉘어 있는 물고기의
  끄 싱싱한 몸집
  나이프로
  찍어
  식욕을 돋구고 싶은
  화실의 오전

  난로 위에선
  뜨거운 오차가
  욕망을 뿜어 올리고
  화가는
  퍽 탐욕스런 눈으로
  벌겋게 이곳 저곳을 핥는다.

  뒤채는 누드의
  밉게 볼록한 아랫께
  검스레한
  신의 애교를 시새워
  밖엔
  몸부림치는 눈발

  흰 겨울에
  하얀 접시 위에서
  물고기는 그 흰 몸체를
  뜨겁게 숨쉬고
  있다.

 

 

나사.1

          - 성찬경 -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숫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숫나사를 주으면 기분 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쭈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숫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나의 방

      - 배인환 -


  셋방살이를 할 때 내 방이 없었다.
  식구가 한 방에서 살았기에
  내 방은 없었다.
  그 방은 우리 모두의 방이었다.

  전세집을 얻었을 때도
  내 방은 없었다.
  이미 아이들이 커서
  큰놈에게 양보해야 했다.

  집을 샀어도 내 방은 없다.
  딸 아이가 하나를 더 차지했다.
  셋방도 주어야 했다.

  아내가 세금을 내러갈 때
  시장에 갈 때
  또는 피치 못할 일로
  집을 비울 때
  그때를 대비해서
  셋방을 주었다.

  셋방을 주면서도 내 방은 없다.
  아내와 같이 방을 쓴다.

 

 

나의 시

     - 이형기 -

 

  나의 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다.
  먼 길을 가다 말고
  잠시 다리를 쉬는 풀섶에

  흐르는 실개천
  쳐다보는 흰 구름

  또는 해질 무렵 산허리에 어리는
  저녁 안개처럼 덧없이 가볍다.

  아, 보랏빛 안개 서린 희노애락
  먼 길을 가며 보는 강산풍경...

  일모와 더불어 귀로에 오르는
  내 이웃들의 단란을 빌고

  외로운 사람의
  불을 끈 창변에
  서늘한 달빛같이 스미고 싶다.

  여류한 세월에 물같이 흐르는
  흘러서 마지 않는 온갖 인연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싶다.

 

 

 

나의 손

      - 황명걸 -

 

  서른 하고도 넷
  예수의 수명인 나이에
  아직 철들지 못한 가장
  몸은 약해빠졌고
  마음은 모질지 못한데다
  손까지 희고 가늘다
  부끄러워라
  어쩌다 아내보다 고운 나의 손이여
  그 손으로
  한 조각 목문패 한 뼘 땅이 없음을 개탄할 수 없다
  오직 굵은 매듭에
  소나무 등걸 같은 피부의
  아내의 손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길 모퉁이
  구두수선장이의 갈라지고 굳은 살 박힌 손을
  닯아야 한다 닮아야 한다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마돈나'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挑)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 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에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나의 형상

      - 박이도 -

 

  밤사이
  하나님은 쉬지 않고
  나의 형상을 새로이 지으신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풀섶에 숨은 이슬
  햇살에 꿰어 매듯
  사랑을 엮어 주네
  밤사이 진 감꽃들이
  하얗게 웃음짓는따
  못다한 결백의 생명으로
  내 형상을 짓는다

  아, 밤사이
  내가 무엇을 꿈꾸었나
  어둠에 빠져 허위적이며
  먼 데만을 향해
  손짓을 하였구나

  이 아침의 밝음을 두고
  이슬의 총명과
  감꽃의 결백을 두고
  나의 참 형상을 두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
            - 김춘수 -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나하나 꽃피어 

      - 조동화 -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

                 - 고광현 -

         
  더러는 일당을 손에 쥐고
  더러는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빈 손 가득
  솟구치는 노여움 퍼쥐고 돌아오는 밤

  더 이상 뿌리 내릴 곳 없어
  막막한 그리움
  낮게 엉겨붙은 산비탈 무허가 모퉁이
  무성하게 널려 자란 잡초밭 위에
  어쩌다 궂은 비라도 쏟아지는 밤이면

  눈물겨운 사람들
  튕겨오르는 흙탕물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비포장도로 양 옆
  값싼 우산의 행렬로
  값비싼 마음들을 기다리는
  끈끈한 사랑의 도열을 보았는가

  팍팍한 가슴
  시퍼렇게 타오르는 칸델라 불빛 밑에
  가난처럼 설익은 과일 몇 알,
  단칸방 여섯 식구의 누런 웃음을 담아
  못난 마누라
  마른 버짐 가득한 꿈 꾸는 눈동자를 찾는
  못난 시대 풋풋한 희망을 보았는까

  젖어가는 세상
  늦은 저녁 빗줄기 사이로
  저 아래 평지의 불빛 몸살나게 반짝이고,
  그렇다
  바라는 건 다만
  하루하루의 일자리나 더 이상 쫓겨갈 수 없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아니라
  그대의 질긴 노동의 불빛이
  몸살나 뒤척이는 땅
  정직하게 갈아 뉘는 것이다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 이활 -

 

  애정에 괸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는 일력 밑에서
  달은
  거울 속에 부서지는
  지구의 반란과 마주 서 있다.

  홍소처럼
  무너진 교당의 유적 위에
  달을 불러다 놓고
  그가 저지른 범죄를 심문하기 위하여
  '메피스트'는 시의 여백에서
  그를 고문하는 시인이었다.

  그때도
  실상은
  꾸겨진 얼굴을 그대로 포장하고
  달은
  하늘에 목을 걸고 있었다.
  옷을 베낀
  '브르똥'의 진실처럼.

 

 

 

낙엽 

    - 구르몽 -


시몬..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시몬, 나무 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
이끼며 돌이며 오솔길을 덮은 낙엽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빛깔은 상냥하고, 모습은 쓸쓸해
덧없이 낙엽은 버려져 땅 위에 딩군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저녁 나절 낙엽의 모습은 쓸쓸해
바람에 불릴 때, 낙엽은 속삭이듯 소리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서로 몸을 의지하리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
서로 몸을 의지하리 이미 밤은 깊고 바람이 몸에 차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 이난오 -

 

떠나 보내는 빗길이 아프게 젖어있다 
마지막 배웅으로 눈물은 부서지는데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은 가슴을 태운다 
가까운 듯 머언 세월 속에 목이 메는 풀벌레는 
흔적을 지우며 살아온 한생의 막을 내리는가 
싸늘해진 계절의 끝자락은 지나고 있다

 

지난 여름에 푸르던 추억을 접고 있다 
마른잎 글썽이며 노랗게 서걱이는데 
만나질 수 없는 모습으로 아슬히 묻힌다 
들릴 듯 한 머언 신음으로 다가오는 애처러움 
한켠씩 쌓이는 한 서린 벼랑길 내 작은 가슴 속에 
낙화하는 퇴색한 노을 자락 하얗게 타고 있다

 

 

 

낙엽(1) /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둥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 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쫏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낙엽끼리 모여산다 
             - 조병화 -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낙엽에게

          - 이희철 -

 

  떨어져 가야 하는 까닭을
  다시 알고 싶다.

  마치 층계를 내려가는
  얼마나 오랜 순간이기에
  나의 눈이 머물러 있는 공간을 지나는지
  알고 싶다.

  공간은 너의 뒤에서 하나 둘 제 위치를 마련하고
  텅 빈 배경을 이웃한
  어디쯤 나는 있는가.

  낙엽이여
  나를 부르지 말라.
  나의 안에서 넘치고 있는
  엄숙한 가을을 향하여
  참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마련된
  기도의 말씀으로
  떨어져 오라.

 


     낙조

      - 이태극 -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열리더니,
  아차차, 채운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을 따라 웃는고.

 

 

 

낙타
         - 이한직 -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이야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 직한 동물원의 오후.

 

 


낙타의 꿈

     - 이문재 -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훌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낙화
   - 조지훈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낙화

         - 이형기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걱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박목월 -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

     - 이호우 -

 

  벌 나빈 알 리 없는
  깊은 산 곳을 가려

  안으로 다스리는
  청자빛 맑은 향기

  종이에 물이 스미듯
  미소 같은 정이여.

 

 

 

난파선

        - 황윤헌 -

 

   7.불의 변주

  ... 기적은 아름다웠다.

  노오란 빛을 퍼뜨리는 달이 뜨고
  불꽃처럼 아편꽃처럼 헤일 수 없이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밤이 차가운 손끝에 머물렀다.
  마른 잎을 모아 불을 피웠다.

  차가운 손에서 불이 부활을 변주하듯 익사한 늙은 수부가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되풀이 되고, 묘패가 없는 짙푸른 바닷 속에서 숱하게 신화를
조상하던 늙은 수부의 손이 파아란 불을 피우며 아득히 침몰했던 범선을
꽃보라치는 풍토를 변모시킨다.

  늙은 비둘기를 추방한 땅
  먼 하늘에서
  분노에 찬 제신의 북소리가 울려오고
  산과 숲과 벌건 바위가
  무너져내리더라도
  ... 기적은 눈부셨다.

  짙은 꽃내 풍기는 도취 속에서
  늙은 수부는 범선을 타는 꽃보라치는 풍토로 간다.
  ...

  불로 변신하는 마른 잎에 쪼이는
  차가운 손이 부신 기적에 떨고

  --늙은 수부는 깊은 잠속에 묻혀 버린다.

  하얀 꽃가루가
  소리도 없이 휴식을 밟고 흩어진다.

 

 

 

난초(蘭草)

       - 정지용 -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난초(蘭草)
        - 이병기 -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르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날참새를 씹으며

         - 정양 -

 

  피묻은 입술을 닦아내면서
  날참새를 씹어 먹는다.
  오늘은 누구 흉을 볼꺼나
  산산히 찢어발기며
  웃어버리자, 참새집
  지난 가을 노래도 부르고
  철 지난 또 무슨 노래로
  질긴 살맛을 뱉아버리자.
  질기디 질긴 사랑은 원수는
  날참새는 죽어도 못뜯는 박민평
  이가 약하고 위가 약하고 비위 틀려서
  더는 못견딜 피비린내를
  내가 씹으마, 참새집
  너는 마시고 노래하고
  보고 싶으면 임방울이도 목이 쉬더라.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열두번도 더 목이 쉬는 술.
  목이 쉬는 대목은 분질러 놓고
  마셔라, 매운 재처럼 귀가 삭는다.
  마셔라, 마시면 피가 썩는 술
  가을 햇살 쪼아먹고 피가 썩은 새.
  독한 햇살이 익어
  네 가슴에도 피가 썩느냐,
  술잔마다 목청마다 피가 묻는다.

 

 

 

남강

    - 양왕용 -

 

  대나무 숲은
  강물 찍어내고 있다.
  도동쪽에서
  이른 봄 아침부터 늦가을 저녁까지
  들리던
  황소의 울음도
  강물 찍어내고 있다.
  다리 아래 떠 있는
  또 하나의 다리.
  판문점 댐 공사
  아직 멀었지만
  평거의 무우밭에는
  서리가 내렸는데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온 시가가 불 밝히는
  그 하늘의 한 주간
  곡마단의 나팔
  어울리지 않게 울려도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 -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 봉방 
               - 백 석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근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 
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새갈기

        - 이은봉 -


  남새를 갈아보려는 것이다
  장독대 옆 두어 평 남짓
  그것도 땅뙈기라고 흙을 고르다 보면
  연탄재만 풀풀 날려다니고
  그저 콘크리트 비닐조각들
  그래도 그냥 말 수야 있겠냐며
  뭣이라도 좀 심어보자는 것이다

  하기는 요만치의 농사라도
  이 산번지에서나 지을 수 있는 일
  누이와 뒷방 아줌마와 함께
  치닫는 가슴 옥죄며
  되지않게 나는
  둑을 치고 이랑을 돋워보는 것이다
  아직은 건강한 지구의 뒤켠
  오래오래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도시의 한쪽 끝
  버티고 서서
  한바탕 신명을 돋워보는 것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남해 금산
           - 이성복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엇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행길

     - 강인한 -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오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지어 날아가는 남행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이 눈이 내린다.

 

 

 

  납작 납짝

            - 김혜순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렵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수근수근.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낮달

    - 조병화 -

 

세월이 잃고 간 빚처럼

낮하늘에 달이 한 조각 떨어져있다.

 

 

낮달로 슬리며

         - 이태수 -

 

  서녘에 슬리는 낮달
  섶나무 그늘에 내려와
  푸새들과 흔들리는 푸새들의 꿈.
  여름 한낮의
  멎은 바람 가슴에 안기어
  땀 흘리는 한동안
  잠시 보이는 안개꽃, 지는 꽃보라.
  섶나무 뿌리만하게 발 뻗는
  나의 꿈, 뜬구름.
  풀섶에 묻히고
  낮달로 슬리는 내 이마의 그늘.

 

 

 

낮별

     - 김종해 -

 

아이들을 따라 어린이놀이터에 나왔습니다

새힘은 아홉 살 새별은 일곱 살

그네를 탑니다

이삭은 여섯 살 이솝은 네 살

시소를 탑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탑니다

번갈아 이웃동네 하늘까지 날아오릅니다

장마가 끝난 하늘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랗게 낮별 되어 떠오릅니다

철봉에 매달린 나는 떨어질 것 같습니다

아니들은 새처럼 날아와

낮에 떨어지는 별동을 떠받쳐 줍니다

할 - 아 - 버 - 지!

나는 깜짝 놀라 철봉을 더 힘껏 쥡니다

 

 

 

낮잠속 얼굴.11

     - 석병호 -


  하늘 저 쪽
  가리운 햇살 속
  신음 소리에 남은 얼굴
  벙글다 만 한잎 꽃으로 남아
  긴 강물 소리에 흐느낀다.

  속살이 흔들리는 가을 소리
  찬 바람 쌓이는 겨울 물소리

  비에 젖은 숙인 이마엔
  바람이 스쳐 가고
  날마다 별빛 모으는 눈물 한점
  산마루 넘는 상여 소리에 젖는다.
  얼굴은 슬프게 슬프게 뜨오고 있다.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한 -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

 


낡은 집

     - 이용악 -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느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한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 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늑대

     - 이윤택 -

 

  빈들 마구 달렸어
  갯바닥 풀섶 꾀꼬리알 훔치고
  낮게 나는 새 모조리 잡아 먹었어
  표범과 만나 돌밭 당당히 뒹굴었고
  없는가
  숲이 썩고 있어
  부러진 상수리 옆구리 불 새고 있어
  보이지 않아
  도사리고 앉은 나무들 웅웅 매맞는 소리
  어디 있는가
  생솔가지 불타는 불
  황홀하게 쓰러지는 휘파람소리
  밤에 핀 포도알 알알이 삼키며
  눈부신 아랫도리 벗어 던졌어

 

 

 

능금
       - 김춘수 -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내가 우는 까닭을

          - 배경란 -


       묻지 말아요

  내가 우는 까닭을 묻지 말아요

  새가 우는 마음을 그가 말을 할까요

  그 아유를 어찌 우리가 다 알까요

  바이오린의 한 개의 현이 끊어져

  음악은 그 악기 속에서 아름답게, 온전히 울지 못합니다

  인생의 일도 그러하지요

  그런데 인생이 어찌 말로써 이해될까요

  이 밤에 깊이 우는 자

  그는 삶을, 누구를 깊이 울고

  또한 깊이 사랑하지요.


 

 

내가 없는 나의 꿈
             - 박상순 -


내 꿈속에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자루 없는 도끼 
 액자 속의 푸른 꽃 
 장롱 속의 좀벌레

 들것에 실려간 여인 
 미루나무 개천가에 숨은 조약돌 
 자루 없는 도끼를 앞마당에 파묻고 
 둘러앉은 사람들 
 이제 몇 남지 않은 최후의 가족들을 위하여 
 도주의 시간을 묻던 
 푸른 손의 사람들

 장롱 속의 좀벌레가 
 감춰진 내 외투를 사각사각 갉으며 
 수천 개의 돌이 쌓인 
 수천 개의 작은 방 
 그 닫혀진 방에 구멍을 내고

 오늘도 내 꿈속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파묻은 도끼 
 푸른 잎에 가려진 얼굴 
 구멍난 풍경 속의 규칙들만 보이고

 어디에도 내가 없는 
 내 꿈 속에도 내가 없는 
 나의 꿈

 

 


     내가 살던 광주.5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 김주관 -

 

  어젯밤 꿈 속에서
  물길을 건너가는
  학 한 마리를 보았지요
  산허리를 휘어 감은
  살아있는 눈을 보았지요
  호젓하게 춘설차를 끓이는 당신을 만났지요
  호미를 농민들이
  무등산으로 몰려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생에 단 한번 화갑 때 붓을 쉬었다는
  당신의 의연함을

  이즈음 사람들은 잊고 있지요
  정신을 배우던 그 옛날도 가고
  이제는 살아가는 맛도 잃어버린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사
  언제든 밤이면 내려와
  시도 읽어주고 차도 끓여 주세요
  의제여
  이제는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만날 수 있겠지요.

 

 

 

내 꿈속의 나비는

       - 박이문 -

 

  내 꿈속의 나비는
  꿈
  나비 속의 꿈에서
  나를 보고
  나는 나비 속의 그림자
  나비의
  꿈속의 나의
  그림자
  껍데기
  나는
  그늘
  속의
  그늘
  껍데기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현실의 껍데기
  속의
  꿈의
  꿈

 

 

 

내 노동으로

       - 신동문 -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이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내님의 사랑은 
           - 이태석 신부님 -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봄바람에 아롱대는 언덕 저편 아지랑이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푸른 물결 흰파도 곱게 물든 저녁노을
사랑하는 그대여 내품에 돌아오라 
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
 
내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가을바람에 떨어진 비에 젖은 작은 낙엽
내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새하얀 눈길 위로 남겨지는 발자욱들 
 
사랑하는 그대여 내품에 돌아오라
그대 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
우~우~~
우~~우우우우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 서정주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룩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기어 드는 소리, ......

 

 

내림굿

        - 이승하 -


  찔레꽃 떨어지는 새벽의 마을에서
  살아왔다 앓아왔다 내 사람아
  계면조의 울음일랑 묻어 두고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방울을 흔들며
  내 애간장 태울 대로 다 태워, 에라
  되집고 돌아서 널뛰듯 춤을 추랴

  헤매던 넋 하나 돌아오고 있다
  서러움에 지펴 이렇듯 몸 쑤시면
  차라리 악에 받쳐 세찬 도리질이야
  같이 죽어 영원히 같이 살 것을
  눈 못 감고 죽은 너는 먹장구름이야
  내 얼굴에 퍼붓는 너는 굵은 빗방울이야

  고샅을 돌아나오면 꼭 네 생각이 났다
  피었다 지고 졌다 또 피어나는
  찔레꽃 산길에서 하나가 되었던들
  오냐, 남치마 일월대 홍철릭 신칼
  내가 살아 삶의 내력을 풀어 간다면
  너는 다가와 죽음의 내력을 들려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팔 휘저으며
  왔느냐 어디를 갔다가 예 왔느냐
  수많은 영육 밤의 수렁에 빠졌는데
  얼마를 더 살겠다고 굿당 앞에 서
  튀는 율동이 되어, 만개한 꽃송이 되어
  햇살을 향한 인무라니... 내 사람아.

 

 

 

내 마음은
         - 김동명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귀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내 소녀(少女)

        - 오일도(吳一島) -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내소사 연가

         - 우미자 -


  한다발 꽃 향기로 오시나요
  전나무숲 푸른 이끼 속
  결 고운 숨소리로 오시나요.

  연두빛 목마른 4월
  차오르는 샘물로 오시나요.

  청운암 대숲에 이는
  차고 싱싱한 바람
  소리로 오시나요.

  능가산 지네 바위에 올라보면
  죽도 앞바다
  비단폭같은 아침을
  물밀어가는 몇 척의 고깃배...
  그리움되어 떠나가면

  섬 하나 팔베개 하고
  안개 속으로 눕는데

  어느 꿈으로 오시나요
  청솔가지 매운 연기
  눈물 속으로 오시나요.

  등잔불의 심지
  천길 만길 뽑아 올리는
  심연으로 오시나요.

  상한 갈비뼈
  마디마디 구멍을 뚫어
  내가 불던
  밤하늘 피리소리로 오시나요
  나의 님.

 

 

 

내 아직 적막에

        - 김원길 -


      길들지 못해

  미닫이에 푸른 달빛
  날 놀라게 해

  일어나 빈 방에
  좌불처럼 앉다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버레소리 잦아지는
  시오리 밤길

  달 아래 그대 문 앞
  다다름이여.

  그대 뜨락 꽃내음만
  훔쳐 맡다가

  달 흐르는 여울길
  돌아오나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냄비보살 마하살

         - 반칠환 -


허름한 시골 함바 집 식탁 위

처억 이름 모를 냄비가 앉았다 간

검은 궁둥이 자국을 본다

손으로 쓸어보지만

검댕은 묻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바쁘고 속이 타도

궁둥 걸음밖에 할 수 없었을

어떤 아낙의 모습 선연하다

눈물 나게 뜨거워 달아났다가도

가슴 시리면 다시 그 불판 그리워

엉덩이부터 들이댔을 서러운 조강지처

평생 끓이느니 제 속이요

쏟느니 제 창자였을

저 아낙의 팔자는 어느 사주에

적혀 있던 걸까

팔만사천 번 찌개를 끓였어도

죄다 남의 입에 떠 넣고

빈 입만 덩그라니 웃었으리라 

 


 냉이꽃

      - 이근배 -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냉이를 캐며

      - 민영 -

 

  -귀염이 엄마에게

  오늘은 언 땅의
  냉이를 캐며
  내 손톱이 여린 것을
  서러워하네.

  바람은 등에 업은
  어린 것을 후리고
  몸 묶인 그이로부터는
  소식이 없네.

  바람아 불어라
  쌩쌩 불어라
  들판에 햇살 비쳐
  새 울 때까지.

 

 


노경(老境)

         - 구상 -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도락(道樂)으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不滅)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노년환각

       - 이형기 -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수목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듯 하루 해가 저물어
  그곳에 등의자를 내려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싸락눈
  표백된 비극의 분말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노래

     - 김용주 -


  여름이네요.
  땀에 밴 목소리로
  매미가 울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사람은 땅에 끼어 있고
  산은 바위에 눌려 있고

  내 앞에서는
  둥근 하늘이 떠올라 샛노랗게 익어 터지네요.

  무슨 일이죠?

 

 

노래

     - 윤지용 -


    1. 새날 새아침

  우리는 늘 새날 새 아침을
  노래한다.
  노래하고 싶어 살아간다.

    2. 해

  새날 새 아침은
  해의 날이다.
  달, 별보다는 아무래도
  해를 바라보고
  노래함이 더 희망적이다.

    3. 산

  산은 점잖다.
  점잖게 앉아 있어
  산은 언제나 산이 된다.
  산을 닮아야 하는 것은
  청소년에게 있지만
  나이 들어 산은 비로소
  산으로 보인다.
  산아, 우리의 산아
  산으로 앉아 산처럼 사는
  산, 산, 산아...

    4. 강

  강은 바다보다 넓지 않아서
  좋다.
  강은 강으로 남아 언제나
  강으로 흐른다.
  누구나 강에 나오면
  쉽게 맨발이 되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우리의 아들을 이어
  이웃을 만든다.
  제 모습 제 노래로 흐르는
  강은
  바다처럼 넓지 않아서
  제격이다.

    5. 고향 마을

  고향 마을에 다다르면
  눈물이 난다.
  봄바람이 눈에 든듯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
  살구꽃 핀
  마을 어귀에서
  목놓아 울음 울던
  우리의 어린시절
  석이, 용이 그리고 순이야
  이 땅의 작고 어린 풀잎들아...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길
  왠지, 까닭모를 눈물이 난다.

 

 

노래여 노래여

          - 이근배 - 

                 

푸른 강변에서 
피 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처럼 
어두운 산하에 피고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치는 
눈 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의 길목에 
핏금진 벽은 서고 
먼 산정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 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 것일까 
 
차고 슬픈 자유의 저녁에 
나는 달빛 목금을 탄다 
어느 날인가, 강가에서 
연가의 꽃잎을 따서 띄워 보내고 
바위처럼 캄캄히 돌아선 시간 
그 미학의 물결 위에 
영원처럼 오랜 조국을 탄주한다


노래여 
바람 부는 세계의 내안에서 
눈물이 마른 나의 노래여 
너는 알리라 
저 피안의 기슭으로 배를 저어간 
늙은 사공의 안부를

 

그 사공이 심은 비명의 나무와 
거기 매어둔 피 묻은 전설을


그리고 노래여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유역에서 
풀리는 조국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내가 띄우는 배의 의미를 
노래여, 슬프도록 알리라 
 
밤을 대안하여 
날고 있는 후조
고요가 떠밀리는 야영의 기슭에 
병정의 편애는 잠이 든다


그 때, 풀꽃들의 일화 위에 떨어지는 
푸른 별의 사변
찢긴 날개로 피 흐르며 
귀소하는 후조의 가슴에 
향수는 탄흔처럼 박혀든다


아, 오늘도 돌아누운 산하의 
외로운 초병이여 
시방 안개와 어둠의 벌판을 지나 
늙은 사공의 등불은 
어디쯤 세계의 창을 밝히는가


목마른 나무의 음성처럼 
바람에 울고 있는 노래는 
강물 풀리는 저 대안의 기슭에서 
떠나간 시간의 꽃으로 피는구나.

 

 

 

노부부

         - 정호승 -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못 눠서 고민이다

어머니는 관장약을 사러 또 약국에 다녀오신다

내가 저녁을 먹다 말고

두루마리 휴지처럼 가벼운 아버지를 안방으로 모시고 가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늙은 팬티를 벗기신다

옆으로 누워야지 바로 누으면 되능교

잔소리를 몇번 늘어놓으시다가

아버지 항문 깊숙이 관장약을 밀어넣으신다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안 나온다고 밥도 안 먹는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될 때가 있다

노인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사촌여동생은

돌이 된 노인들의 똥을 후벼파낼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아버지는 기어이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녀오신다

이제 똥 나왔능교 시원한교

아버지는 못내 말이 없으시다

어머니는 굽은 등을 더 굽혀 설거지를 하시다가

너거 아버지 지금 똥 눴단다

못내 기쁘신 표정이다

 

 

노을

    - 이제하 -

 

  1
  장돌뱅이 차림을 하고 꼭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저기만큼 걸어가고 있어,
  어릴 적 동뫼로 산소 가던 일, 할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가던 일들을 거푸 생각하며
  낯이 붉어 재개재개 따라 언덕 마루
  까지 와 보면 거기 고운 자줏빛으로
  텅 비어 있는..... 텅 비어 있는...

  2
  처음에 말씀이 있었읍니다
  저 푸른 하늘은
  그 님의 맑으신
  말씀입니다

  어머니 날 낳으셨지만
  어머니 또한 그 하늘의
  따뜻한 말씀
  세월이 자꼬자꼬 흘러가면은
  그리운 여자는 허리 그늘에
  긴 강을 두르고, 새끼들 머리 위론
  포장이나 치고
  나 죽으면 아무데도 안가겠어요
  어굴한 누님의 설운 이웃의
  숨결 어리어 떠도는 공중의

  나도 자줏빛 한 덩이
  말씀이 되어
  그때처럼 멀 멀
  밀리겠어요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배 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한 구죽죽한 어촌보다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 가고

전설에 읽어 본 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곳은 남십자성이 비춰 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 식물처럼 발목을 에워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의 路程에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

 

 

녹동 묘지에서/김광균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어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꽃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났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논개 
     - 변영로 -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농무
  신 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서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博川 최정순 -

 

늘 부대끼며 살아도 알지 못하듯

서로간 살길 찾아 무심할 때

나 위해 두 발 포근히 감싸 주었어

 
내가 어디를 가거나

긴긴 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늘 곁에서 위로해 주었지

  

어느 섬 모퉁이 돌아가거나

산 비탈 억센 길 팍팍하게 오를 때

아무 조건 없이 옆에서 지켜 주었어

 
내 얼굴 파도 같은 주름살 늘고

흰 백발 서리처럼 내릴 때에도

나 위하여 늙은 몸둥이 된 너였지

 
씻기는 은하의 별무리 찾아 떠나면

눈 시린 아침 파란 편지 빼곡히 쓰고

나는 수줍은 새색씨처럼 반겨했었어.


 

 

  너

   - 이시영 -

 

  불러다오
  밤이 깊다
  벌레들이 밤이슬에 뒤척이며
  하나의 별을 애타게 부르듯이
  새들이 마지막 남은 가지에 앉아
  위태로이 나무를 부르듯이
  그렇게 나를 불러다오
  부르는 곳을 찾아
  모르는 너를 찾아
  밤 벌판에 떨면서
  날 밝기 전에
  나는 무엇이 되어 서고 싶구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걷고 싶구나
  처음으로 가는 길을
  끝없는 길을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 이은상 -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너는 지금 어디 있나
 누더기 한폭 걸치고
 토막(土幕) 속에 누워 있나
 네 소원 이룰 길 없어
 네 거리를 헤매나.

오는 아침도 수없이 떠나가는 봇짐들 
 어디론지 살 길을 찾아 헤매는 무리들일랑
 그 속에 너도 섞여서
 앞선 마루를 넘어갔다.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낙조보다도 더 쓸쓸한 조국아

 긴긴 밤 가얏고 소리마냥
 가슴을 파고드는 네 이름아
 새 봄날 도리화(桃李花)같이
 활짝 한번 피워 주렴.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무도 슬픈 사실-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 박팔양(朴八陽) -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나라에 태어난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속에 그리면서

찬 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너 없음으로

         - 오세영 -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 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너의 겨울 뒤에서

          - 김동원 -


  너의 빨간 목도리 뒤에 서 있는
  가늘고 하얀 겨울,
  겨울 따라 찾아가면
  하얀 눈꽃은 지고,
  붉은 입술에 모여 있는
  너의 옥같은 소리를 만난다.

  너의 분홍빛 가슴에 감추어진
  눈물같은 사랑,
  사랑 따라 찾아가면
  하얀 강물은 눕고,
  자주빛 사탕처럼 무너지는
  너의 하얀 이빨을 만난다.

  하얀 지체를 뿌리면서,
  눈을 감은 채
  금빛으로 물드는 언덕이여.
  하늘과 땅을 건너
  맨발로 달려오는 슬픈 봄이여.
  너, 이조의 여인처럼 울고 있는
  수직의 분화구여.

  나는 지금,
  하얀 눈꽃이 되어
  너의 따뜻한 겨울 속으로
  죽음처럼 떨어져 간다.

 

 

 

너의 시를 읽는 밤엔

             - 이기철 -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마을의 불빛 꺼지고
  동촌을 지나는 바람이 들깨꽃 잎새들을 땅으로 지게 했다.
  세상은 고요하고 자성은 더디게 찾아와서
  잠들어야 할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나의 마음 속을 찢어 놓았다.
  질경이 잎새가 뼈만 남기고 하얗게 선화지처럼 바래지는 날
  나는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개념만 무성한 대학 노-트를 가방에 넣고
  또 하나의 패배를 가꾸기 위하여
  대동과 만촌동을 기계처럼 오고갔다.
  작년의 겨울땅을 얼리고 녹인 이 바람도
  물여뀌 잎새는 피었다 지고
  떨어질 것 다 떨어져 흙이 되는 가을에도
  은화와 지폐는 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관습은 허위와 껍질로 튼튼하게 잠겨 있어
  질타의 물을 끓이며 풀리는 고뇌의 가마솥에 앉으면
  참으로 헛된 일에 몸 바친 부질없는 시간들이
  후회와 자책으로 밀려오지만
  자책은 또 다른 새벽을 오게 하고
  그러나 모든 사람 다 잠들고 나면
  누가 이 가을 빈 들에 남아
  쥐똥열매라고 불러 줄 수 있을까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들판 가운데 초가 한 채가 무너지고
  미처 귀소하지 못한 저녁새 한 마리
  참담한 별빛 하날 하늘에서 따 내렸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 어느곳에 있느냐...(사랑하는 딸 혜란에게)   

                        - 임화 -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집어 얼굴을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여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여
해 저므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
이야기 소리 귀에 쟁쟁한
그리운 동무들을 생각하여
어느 먼 곳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벌써 무성하던
나뭇잎은 떨어져
매운 바람은
마른 가지에 울고
낯익은 길들은
모두 다 눈 속에 뭍혀
귀 기우리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얼음장 터지는 소리

아버지는 지금
물소리 맑던 락동강에서
악독한 원쑤들의 손으로
불타고 허물어진
숱한 마을과 도시를 지나
우리들의 사랑하던
서울과 평양을 거쳐
절벽으로 첩첩한 한과
천리 장강이 여울마다 우는
자강도 깊은 산골에 와서
어데메에 있는가 모를
너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전선으로 가는 길 역에서
우리는 간단 말조차
나눌 사이도 없이
너는 전라도로
나는 경상도로 
떠나갔다.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서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넋건지기   - 서홍관 -
     --저에게 풀잎 하나를 건네 주신다면
     어머니! 제가 지구를 들어 보일께요


  오늘은 기뻐요.
  농약이 뿌려진 풀잎 사이에서도
  어린 방아깨비가 곤히
  잠들었잖아요.

  이렇게 많은 벼들이
  일렁이고 있어요.
  지난 여름 홍수에 그토록 시달리고도
  까실한 볼들을 장난치듯
  내게 부벼대는 걸 보세요.

  들길을 걷노라면
  찰랑거리는 논물에는
  물달개비 향기가 좋은데
  잎잎이 붙은 물잠자리들이
  달빛에 잠이 깰까 걱정되네요.

  밤이슬을 털고 일어서는
  개똥벌레의 불빛을 타고
  나의 몸이 파르르르 떠올라가네요.
  하늘에 별이 되어
  따스하게 흐르네요.

 

 

네거리의 순이

              - 임화 -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 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 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 곳에 가득 한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보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 번째 별

         - 정진규 -

 

별 밥을 먹으면 별이 될 것이다

무엇이나 만지면 별이 될 것이다

어둠을 만지면 별이 될것이다

별나무,별새,별집,별학교,별나라,

별술,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별처럼 취하는 것!

별처럼 깨어나는 것!

취해서도 어둠 세상의 빛이 되는 술!

그런 술 공장 주인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먹고 사는 밥은

지금 내가 마시고 사는 술은

질이 좋지 않다

도망만 치게 한다

나는 배가 부르면 부를수록

비겁해진다

나는 취하면 취할수록

가짜가 되고 있다

그렇다

별밥을 먹으면 별술을 마시면

별똥을 쌀 것이다

똥도 쓸만하게 될 것이다

진짜가 될 것이다

그리운 별똥!

 

 

 

님의 침묵
           -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芩)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숨결이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名)과 평화(平和)을 좋아하십니다.
약자(弱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이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僕從)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님의 뒷 모습

           - 博川 최정순 -

 

까닭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 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 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님에게

    - 김소월 -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 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 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들에 헤메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 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 업은 베겟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님이 오시는지

                 - 박문호 -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길 님이 오시는가

갈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췰까

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내 마음은 외로워 한 없이 떠돌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만 차오네

 

백합화 꿈꾸는 들녘을 지나

달빛 먼길 내님이 오시는가

풀물에 배인 치마 끌고 오는 소리

꽃향기 헤치고 님이 오시는가

내맘은 떨리어 끝 없이 헤매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이 이네

바람이 이네.

 

 

 

늙은 새

      - 김왕노 - 

 

제 털을 다 뽑아 자식 둥지 다 만들어주어 헐벗고 추운 겨울 새 한 마리 가고 있다. 리어카에 폐휴지며 빈 박스 가득 싣고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 동행하는 것은 빈 박스로 잠깐 포장된 새벽, 리어카에 가듯 실린 폐휴지의 미미한 온기, 그리고 호구지책인 녹슨 리어카 , 역주행하는 저 아찔한 순간들, 늙은 새의 희미한 그림자, 제 털을 다 뽑아주어 살이 다 들어난, 뼈가 앙상한 새 한 마리, 날지 못하는 새 한 마리 길을 역주행 중이다. 마주쳐오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뜨거운 욕설을 쏟아놓지만 김 오르는 밥 한 그릇이 진수성찬이고, 밥 한 그릇 눈부신 아침이 천국의 시간이므로 그 곳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사업실패로 어디로 간지 모르는 아들, 집 나간 며느리, 뿔뿔이 흩어져간 손자, 근심 걱정 없다는 저승으로 먼저 간 남편의 생각이 밤마다 가슴 깊이 얼음으로 파고들지만 저렇게 살아 있다가 기적같이 다시 털이 자라면, 또 아낌없이 뽑아주어야겠다고 마음 다지는 늙은 새 한 마리, 제 생을 끌고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 털 없는 늙은 새 한 마리 가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홀로 가고 있다.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 강경화 -

 

  서리내린 저 밭의 배추잎 끝에서
  이제 나는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추위가 몰려 오면 흙벽에
  제 눈만한 창문을 내고
  울며 울리는 사람들.
  날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안 보일지라도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삽날이 밀려와
  내 집 밑둥을 자르고
  밤마다 흙더미 사이로 별이 보이면
  내 사랑은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가을 빛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잘 있거라. 누런 들판아, 탱자나무야
  속삭이는 낙엽소리와 연기 내음도 두고
  캄캄한 땅 속에서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 김춘수 -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같은 것, 물장군같은 것,
  거머리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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