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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의 제정과 방언의 생성
우리말의 표준어가 제정된 것은 1933년의 일이다. 그해 10월 29일 조선어학회에 의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표되면서 표준어가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이로써 표준화된 우리말이 세워진 것인데, 그렇다고 방언이 사라지거나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도 그것이 표준어로 정해지기 이전엔 어디까지나 방언이다. 표준어는 별도로 새롭게 만든 말이 아니라, 여러 방언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정한 것뿐이다. 1933년에 간행된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정한 표준어의 원칙은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이었다. 옛날 말이 아닌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서 지역적으로는 서울말, 계층적으로 중류계층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이렇게 표준어의 원칙이 정해지면서, 자연히 서울 지역이 아닌 말과 서울말 중에서 중류계층이 쓰지 않는 말은 방언이 되었다.
최근엔 ‘중류사회’란 문구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표준어 설정 기준에 계층 방언의 개념을 없애서 표준어 개념을 보다 단순, 명쾌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표준어의 품위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는 것인데, 이로써 서울말이 우선적으로 교양 있는 말이 될 자격까지 갖추게 되었다. 표준어의 제정으로 서울말은 이제 모든 지역 말을 압도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지역의 언어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구어체의 방언들은 변함없는 생명력을 지니며 지역인들에게 생생한 현장 언어로 널리 쓰인다. 표준어는 공용어의 필요에 따라 제정된 것이다.
모든 국민이 공통적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와 공공문서와 기타 공적 매체에서 사용할 공공 언어의 필요성에 따라 표준어가 제정된 것이다. 이러한 문서에는 문어체의 말들이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생활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구어체의 말들은 표준어의 간섭을 덜 받으며 생생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생활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이 방언들은 주로 토착어들이어서 시적으로도 뛰어난 언어자원의 역할을 한다.
지역의 생활 언어로서 방언은 우리의 소중한 언어자원이고, 기본적으로 정서적 감전이 큰 시적 언어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방언으로 쓴 시가 무조건 좋은 시가 될 리는 없다. 시도 발표되는 순간, 공적인 문서가 되므로 방언을 쓰면 우선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자 문인들이 이 안을 지지하고 따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표준어의 중요성에 대한 동감이자, 공적 문서로서 시의 성격에 대한 자임이다. 시도 기본적으론 표준어로 써야 한다. 또 방언은 특정 지역의 말이므로 지방색을 띠는 것이 많다. 따라서 방언의 사용은 특정한 정서를 가리켜서 시의 느낌을 협소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현장에 뿌리박혀 있는 이 높은 전도율의 방언은 시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언어 자원이다.
사실, 방언은 시인의 고향 말이므로 시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기층언어로서 자리 잡고 있다. 서울 태생이 아닌 시인들은 모두 생활 속에서 방언을 배우고 구사하며 성장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시인이 가장 잘 알고 애착이 가는 말들일 것이다. 모든 시인의 언어창고에는 그들의 고향 말인 방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그 달콤한 방언의 유혹을 절제하며 또 한편으론 그 방언의 매력을 살리는 것, 이 모순된 태도의 견지가 시인 앞에 놓인 방언 쓰임의 과제일 것이다. 이제 시인들이 이 방언의 이중적 성격을 어떻게 조절하며, 시에서 활용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쓰임새를 알아보도록 한다.
언어자원의 확대와 기표의 활용
한국 현대시의 문을 활짝 연 시인은 김소월이다. 그 전에 몇몇 시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 지용이 버티고 있지만, 현대시의 형식을 세우며, 현대시다운 언어를 부린 최초의 시인으로 김소월을 꼽는 것이 현대시사 서술의 순리일 것이다. 현대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소월의 언어는 서울말이 아닌 평안북도 정주 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 말로 시를 쓴 것인데,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정주 방언은 그의 시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한국의 ‘국민시’로 불릴 만한 이 명시에서 ‘즈려밟고’는 정주 방언이고, ‘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드리우리다’ 등의 서술어가 모두 정주 방언이다. 이 정주 방언은 결코 이 시의 향토성 조성에 기여하지 않는다. 이들 말 자체에 향토성이 배어 있지도 않다. 이 정주 방언들은 이 시에서 운율조성의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이 정주 방언들은 이 시의 소릿결을 아름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즈려밟고’에서 ‘려’라는 음절의 소리자질은 그 연의 첫 행에 구사된 ‘걸음걸음’에서의 ‘ㄹ’ 음과 호응하며 부드러운 말소리를 조성하고, 그것은 유연한 발걸음을 연상시킨다. 그 말소리와 행보는 이 연시의 인물에 아주 적합한 것이다. ‘즈려밟고’의 ‘즈’ 음절의 소리자질도 이 연의 다른 소리들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이 연의 소리공명을 극대화한다.
이 연은 ‘ㅅ’ 음과 ‘ㄱ’ 음의 반복이 두드러지는데, 그 사이에 ‘ㅈ’ 음이 개입되면서 새로운 느낌의 말소리를 조성하여 소리변화를 일으키면서,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느낌을 유발한다. ‘즈려밟고’는 서울말로는 ‘세게’라는 뜻을 지닌 정주 방언이다. ‘즈려밟고’ 대신 ‘세게 밟고’라는 서울말을 넣고 이 대목을 읽어보면 소리반복은 강화되지만, 소릿결의 아름다움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소월은 천부적인 언어감각으로 이 연에서 단 하나의 정주 방언을 개입시켜 기막힌 운율을 조성하고 있다.
‘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서울말은 각각 ‘드리리다’ ‘뿌리리다’ ‘흘리리다’이다. 동사나 형용사에 ‘우’ 음이 첨가되는 것은 평북 방언에서 자주 나타나는 음운 현상이다. 이 정주 방언들은 서울말과 달리 모두 5음절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음절 수의 시어는 이 시의 율격을 7.5조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소릿결도 한층 아름답게 조성한다. 이 세 개의 서술어는 기본적으로 ‘ㄹ’ 음이 반복되고 있는 말들인데, 여기에 ‘우’라는 모음이 첨가되어 ‘ㄹ’ 음의 부드러운 소릿결을 강화한다. 여기에다 ‘이’ 모음의 연속으로 어색한 소리반복이 발생하는 말에 ‘우’ 음의 개입으로 모음의 변화가 나타나 자연스럽고 유쾌한 소리 흐름을 조성한다.
소월은 평안북도 정주 방언을 바탕으로 시를 썼지만, 그가 구사한 정주 방언들은 평안도의 향토색을 드러내는 어휘들이 아니다. 평북 방언은 특유의 어미를 지니고 있고 바로 그곳에서 평북의 지역색이 드러나는데, 적어도 소월의 명시 중에는 그러한 어법을 드러내는 작품이 별로 없다.
소월은 정주 방언을 시의 언어자원으로 넓게 활용하면서 그 방언의 기표에 주의를 기울여 시의 율격을 조성하는 데 사용했다. 소월 시는 매우 아름다운 소릿결을 드러내어 마치 음악처럼 의미를 파악하기 이전에 그 선율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 음악성에 정주 방언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정주 방언은 그의 시에 음악성을 부여하고, 소월에 의해 정주 방언은 한층 아름다운 말로 거듭난다.
정주 방언의 기표를 활용하는 기법은 백석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소월이 정주 방언의 기표를 율격 조성에 활용하였다면, 백석은 이제 의미와 정서 조성에 활용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백석은 정주 출신이며 소월이 다녔던 정주의 오산학교 출신이다. 백석은 학창시절 소월을 몹시 동경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석은 소월과 10살 터울의 동향, 동문 후배이다.
〈진달래꽃〉을 잇는 명연시인 이 작품은 1938년 3월 《여성》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진달래꽃〉과 달리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표된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표되고, 1936년 10월 여기에 맞춰 표준어 사정안이 만들어지고,
다시 1937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개정안이 발표되는데, 이 시점부터 우리 시는 현저하게 철자법을 맞추고 표준말을 쓰게 된다. 백석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시기 이후에 그의 시에는 방언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시 세계의 변화가 한 몫을 차지하기도 한다. 위의 시에는 아주 맑고 투명한 표준어가 구사되어 있고, 그 위에 ‘나타샤’라는 러시아 인명도 구사되어 이국적인 정서까지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표준말 일색의 언어에 ‘마가리’와 ‘고조곤히’란 평북 방언이 구사되고 있다. 왜 백석은 러시아 인명까지 동원한 이 세련된 연시에 굳이 이러한 평북 방언들을 사용했을까? ‘마가리’는 ‘오막살이, 오두막집’이란 뜻의 평북 방언이다. ‘마가리’란 말은 ‘막+아리’의 형태를 지닌 말로 짐작된다. ‘막’은 ‘幕’이고, ‘아리’는 ‘살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메아리’가 ‘메살이’ 곧 ‘산에서 사는 것’이란 뜻에서 온 말이다. ‘막아리’는 막처럼 임시로 대충 지은 집, 곧 오막살이를 가리키는 말인 셈인데, 이 말이 연철되어 ‘마가리’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아리’가 ‘마가리’가 되는 순간 그 어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마가리’란 말은 평북 방언이지만, 매우 이국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다. ‘마가리’가 ‘오두막집’의 평북 방언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외래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향토색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이 이국적 정감의 평북 방언이 ‘흰 눈’과 ‘흰 당나귀’와 ‘흰 살결의 러시아 여자’가 어우러져 빚어내고 있는 이 순결하고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정조를 더욱 극대화한다.
만약 ‘마가리’ 대신 ‘오두막집’이란 표준어를 사용했다면, 이 시는 말의 균형이 깨지면서 아주 어색한 시가 되었을 것이다. 눈 내리는 날, 나타샤와 함께 하얀 당나귀를 타고 더러운 세상을 뒤로한 채 저 세속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 살 곳으로 ‘마가리’는 아주 안성맞춤의 집이다. ‘고조곤히’라는 평북 방언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고조곤히’는 표준어로는 ‘고요히’이다. 나타샤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나의 사랑 전언에 응답하는 순간의 분위기를 말할 때 ‘고조곤히’란 말이 사용되는데, 이 말은 ‘고요히’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고요히’란 말은 정적의 상황만을 드러내지만, ‘고조곤히’란 말은 푸근하고 다정한 느낌까지 드러낸다. ‘고요히’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고조곤히’는 친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고존곤히’는 나에 대한 연정으로 충만한 나타샤의 마음과 잘 어울리는 말이며, 이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앙증맞고 다감한 울음소리인 ‘응앙응앙’이라는 의성어와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 시에서 절제되어 쓰인 이 두 개의 평북 방언은 다른 표준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이 시의 정조를 극대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방언에 끼어 있는 지역색을 탈피하고, 그 기표에 주의하면서 시의 언어자원으로 널리 활용하는 시적 태도는 오늘의 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앞서 살펴본 두 편의 시가 방언의 소릿결을 활용하였다면, 다음과 같은 시에서는 방언의 소리를 비유적으로 활용하여 재미있는 상상력을 펼친다.
이 시에서는 ‘알라뱄어요?’라는 어린아이의 육성이 경상 방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상 방언은 호남, 이북방언과 함께 지역색이 매우 짙게 드러나는 말인데, 이 시에서 경상 방언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활용된다. 시인은 ‘알라’라는 기표로부터 흥미로운 상상력을 펼쳐낸다. ‘알라’라는 경상 방언은 ‘어린아이’라는 말이 줄어들면서 생긴 말일 것이다. ‘어린아이>얼라>알라’의 과정을 거치며 정일근 시인이 사는 경상도 울산 지역의 방언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알라를 어린아이란 뜻과는 상관없이 그 말소리에 주목하여 ‘알라’에서 ‘알’이란 의미를 건져내고, 거기서 다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떠올리고, 더 나아가 이슬람의 ‘알라신’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방언을 시의 펀(pun)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 말놀이에는 아이는 신이 점지해 주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어, 말의 신묘함을 새삼 돌이켜 보게 한다.
방언 사용의 시적 기반과 현장감 증대
백석의 시를 얼마간 연상시키는 이 시는 장이 서는 날의 시골집 풍경이 아주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른 새벽 장을 나설 때의 집안 풍경과 저녁이 되어 장을 보고 집안으로 돌아올 때의 집 앞 풍경 묘사가 아주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싸리문과 성황당이라는 설치물, 나귀라는 탈것과 운송수단, 그리고 반달이라는 자연물의 제시는 독자들을 시골 풍경으로 인도한다. 추석이란 시간 배경은 대추와 밤, 그리고 반달에 빗댄 절편과 어우러지며 장날의 느낌을 고조시킨다. 이 시 여기저기에 배치된 여러 소도구들은 이 시의 장날 풍경이 시골에서 벌어지는 곳임을 명시한다. 매우 산뜻하게 그려져 있는 이 장면 묘사는 사진보다 더 선명한 시골풍경을 보여주지만, 이 그림엽서 같은 풍경에서 시골냄새가 덜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돈사야’ ‘가차워지면’ ‘찹쌀개’ 등의 방언들이 위력을 발휘한다. 이 세 개의 방언으로 인해 이 시에는 비로소 시골의 체취가 풍기게 된다. 그렇다고 이 시골이 어느 특정의 지역 공간을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 개의 방언은 방언임이 분명하지만, 어느 지역 방언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전에 ‘돈사야’는 충남 방언, ‘찹쌀개’는 경상 방언으로 등재되어 있고, ‘가찹다’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쓰는 방언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시엔 여러 지역 방언들이 뒤섞여 있는 셈이다. 시인은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이 아닌 말 세 개를 쓴 것이다.
이 비표준말로 이 시는 서울이 아닌 어느 시골의 체취를 풍기게 된다. 이 세 개의 방언은 모두 생활 현장에서 쓰는 말들이다. ‘찹쌀개’는 생활 속에서 친근한 동물이고, ‘가찹다(가깝다)’와 ‘돈사다(팔다)’는 일상에서 자주 쓰는 입말이다. 이 구어체의 생활언어가 방언으로 구사됨으로써 이 시는 시골 장날의 정서를 아주 생생히 전해주게 된다.
이 시도 시골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구사된 언어는 시 속 인물인 한 씨의 육성을 제외하면 모두 표준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골 사람의 인상과 성격과 풍경을 드러내는 말들인 ‘눈깜작이’ ‘조쌀하다’ ‘논꼬’ 등이 모두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표준말이며, ‘눈부처’란 제목 역시 표준어이다. 시인은 대상을 적시하고 묘사하는 말들을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표준어에서 찾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시는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이 배경을 옮기며 벌이는 행동을 서술하고 있는, 다분히 서사적인 특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배경을 제시하고 인물의 행동을 드러내는 서사에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서술이 중요하므로 방언이 끼어들 수 없다.
서사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언술이 인물의 육성인데, 이 시에선 그 육성이 방언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시에서 인물의 육성은 딱 두 번 제시되고, 그 언술만이 이 시에 나타난 유일한 방언이다. 그 육성의 방언은 문장 전체로 이루어져 있는 대화체의 언어여서 특정 지역을 명확히 가리키게 된다. ‘뭐요?, 이려?, 해유?’ 같은 종결어미는 이 방언이 충청 지역의 말임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충청 방언은 말수가 적고, 뜻을 직접 전하기보다 안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함축된 말투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또 망자를 앞에 둔 망연한 상황에서 큰 울림을 준다. 놀라고 슬픈 상황 속에서도 자기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함으로써 독자들은 그 감정에 더욱 몰입되고 북받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을 다 안다는 이심전심의 의미를 전해주기도 한다. 늘 부지런하게 살던 고향 이웃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시는 죽음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간명한 서사로 처리하고, 그 서사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눈부처’라는 말의 이미지로 그린 것이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그 못지않게 충청도 방언의 개성을 잘 살린 것도 매우 돋보이는 것이다.
방언은 어릴 때 습득한 말이어서 유년의 경험과 밀착되어 있고, 또 원초적인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방언, 특히 지역색이 드러나는 방언은 유년 시절의 경험을 그린 시에 구사될 때 실감이 나고 공감도 얻게 된다. 또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감정들, 가령, 모성, 이성, 꿈과 같은 제재를 다룰 때, 또는 삶과 죽음 같은 아주 근원적인 감정을 다룰 때 방언의 구사가 자연스러워진다.
이 시는 시작부터 끝까지 방언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것도 어휘, 구문, 문장 등 언어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면적으로 구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 그 완강한 방언은 시의 전언과 하나가 되어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의미를 한층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이 통속적인 이야기가 시로 전이되고 있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방언구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에서 방언이 시의 언어로 승화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학창시절의 실제 경험과 결부되어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은 유년과 소년 시절의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특히 교실에서 수업과 친구나 이성과의 교제는 모두에게 아주 민감한 경험들인데, 이 시에는 그것들 모두가 들어 있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가시리〉에 대한 패러디, 국어선생과 여학생의 실명 제시 등은 이 추억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임을 알려 준다.
여기에 방언이 입혀짐으로써 이 생생한 이야기들이 더욱 현장감 있는 스토리로 승화된다. 이 시에서 방언은 독자들을 유년의 학창시절로 되돌리고, 그 시절의 해맑았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가혹한 세파에 시달리고 추잡한 현실에 상처받기 이전의 꿈 많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한다. 유년의 경험에 밀착되어 있는 방언은 유년 시절의 꿈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 시의 성인화자가 여전히 방언으로 지난 시절을 전할 때, 그는 유년의 꿈으로 가득한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그 ‘꿈의 거울’이 깨졌음을 말하는 순간이 바로 방언의 마지막 발화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속의 때 묻은 세계, 혹은 인공의 세계를 여전히 방언으로 말할 때, 그것은 공감도 상실하고, 방언의 순수성도 잃어버리기 쉽다.
율격의 형성과 낯섦의 미학
방언은 표준어가 아닌 말이다. 표준어가 현재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지금은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말이므로 방언이란, 계층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서울 밖에서 쓰는 과거의 말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방언이란 결국 고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어가 특정 지역에 계속 잔존해서 방언이 되고, 일부는 다시 음운변화를 거쳐 방언이 된다.
물론 고어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방언도 있지만, 방언의 주류는 고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방언의 구사는 고어를 되살려 쓰는 셈이 된다. 고어는 현재 쓰는 말이 아니어서, 시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말이 될 수 있다. 시어의 ‘낯설게 하기’의 미학을 달성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또 현재 우리말의 뿌리에 해당하는 고어는 우리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고어에는 지금은 사라진 성조가 있는데, 그 성조가 잔존한 방언 중 하나가 경상 방언이다. 경상 방언의 독특한 억양이 그 흔적이다. 그래서 경상 방언의 구사는 억양이 동반되고, 시에서 독특한 율격을 형성하게 된다.
경상도 방언에선 ‘오빠’를 ‘오라베’라고 하는데, ‘오라베’라는 말에는 억양이 배어 있다. ‘오라베’란 말의 경상도 발음은 ‘라’에 강세가 놓이며, 그래서 ‘라’에서 자연히 억양이 높아진다. 그 억양을 그대로 살리며 오라베라는 고향 말을 부를 때 앞이 칵 막히도록 좋다고 시인은 말한다. 경상도 방언의 그 독특한 억양이 그 방언의 매력이고, 그런 말에서 바로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의 고향 말의 매력과 그 말에 배어 있는 고향의 정취를 말하는 것인데, 글자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오라베’와 ‘칵’이라는 방언에서 강한 악센트가 발생하게 되며, 그것이 이 시의 운율을 조성하게 된다.
이 시는 지금까지 발표된 우리의 현대시 가운데 방언의 구사가 가장 완강한 작품일 것이다. 구어체의 경상 방언을 녹음이라도 하듯 그대로 옮겨 적어 놓고 있다. 마치 무대에서 인물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구어체의 경상 방언이 토로됨으로써 그 억양까지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아이고’는 서울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쓰는 감탄사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자잘궃에라’라는 경상 방언으로 인해, 이 말은 경상방언 특유의 강한 억양이 실려 전해진다. 그리하여 ‘놀람’의 감탄이 그 어느 표준말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발언에서도 완강한 경상 방언으로 인해 시종일관 경상 방언의 억양이 실림으로써 고저와 강약이 있는 운율감이 형성된다.
운율을 조성하는 이 방언들은 그 완강함으로 인해 시의 이해를 가로막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평명한 이 시의 의미를 신선하게 전하는 측면도 있다. ‘자잘궃다’는 ‘아주 자잘한 것을 귀엽게 보았을 때 쓰는 말’이라고 시인이 시의 주석에서 친절하게 밝히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쓰는 말 중에 ‘장난궃다(장난기가 있다)’란 말이 있다. ‘자잘궃다’란 말은 이 말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나 짐작된다. ‘삽짝가새’는 ‘사립문가’의 경상 방언인데, 고어에서 온 말이다. 사립문의 고어로 ‘삽’이 쓰였고,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의 고어는 ‘’인데 여기에 ‘에’가 붙어 ‘가새’가 되어 경상 방언으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깨굼발비’는 ‘깨금발+비’의 형태를 지닌 말로서 비유적으로 형성된 말이다.
가늘고 짧게 내리는 비를 지칭하는 말로 ‘실비’와 ‘여우비’ 같은 말이 있는데, ‘깨금발비’는 이보다 더 짧은 동안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조어의 상상이 섬세하고 기발하다. 이러한 방언들은 지역 안의 풍속이나 의식과 연관되어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우비’에 해당하는 말을 북쪽 지역에선 ‘해비(햇비)’라고 한다. 같은 뜻의 말이 지역적으로 다르게 쓰이는 것인데, 모두 비유적으로 파생된 말이다. 이러한 비유의 생성은 지역의 특성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이로써 다양한 방언이 생성되고, 그 방언들은 새로운 시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에서 “오―매”는 앞서 살펴본 시의 ‘아이고’와 같은 감탄사인데, 전라도 방언인 이 말은 ‘아이고’와는 억양이 완전히 다르다. 이 시를 방언의 억양에 맞춰 읽을 때 놀람의 감탄은 매우 극대화된다. “오―매”에서 발생하는 ‘놀람’의 정서는 ‘아이고’에서의 그것과는 또 미세하게 다르다. “오―매”는 ‘아이고’보다 놀람의 순간적 폭발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깜짝 놀람의 강도가 더 빠르고 더 크게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장광에 감잎이 날리는 것을 보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고, 추석과 월동 준비에 걱정하는 누이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계절변화에서 가을은 갑자기 찾아온다. 오랜 무더위와 장마가 끝날 줄 모르게 진행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높고 대기가 맑아지며, 날씨가 선선해지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이 갑작스러운 가을의 도래가 바로 “오―매”라는 감탄사에 실려 있으며, 그때의 감탄은 전라도 방언의 억양을 통해 비로소 전해진다. 이 시에서는 그 억양이 세 번 반복되고, 그것이 이 시의 운율을 형성한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가장 미흡하고 소홀한 요소는 운율이다. 소월에서 시작한 한국의 현대시는 아름다운 운율을 내장한 채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운율이 점점 희미해져 최근에는 거의 흔적만 남긴 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운율의 약화는 시의 산문화를 촉진시켜 시의 정서적 함량을 축소시키고, 시 특유의 현장성과 구비적 전달력을 떨어트린다. 한국시에 놓인 이러한 운율의 위기 앞에서 방언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는 없겠지만, 넓은 언어자원으로서 방언이 지닌 그 무한한 기표와 독특한 억양들은 현대시 운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좋은 질료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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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진 hjko@korea.ac.kr / 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 1988년 《현대시학》(평론) 등단. 저서로 《시인의 샘》 《현대시의 서사지향성과 미적 구조》 《또 하나의 실제》 《백석 시 바로 읽기》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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