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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2015년 07월 09일 21시 02분  조회:5174  추천:0  작성자: 죽림
시간

-김승희(1952~ )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색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을 편들지는 않으리.

죽음과 生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 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하략)


어렸을 때 시간은 신비 그 자체이고, 삶을 비옥한 꿈의 대지로 가꾼다.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아 옳은 행동만을 일삼는 어린 인류는 천진무구한 채로 시간이란 말[馬]의 고삐를 틀어쥐고 달린다. 시간은 “금색의 깃발”로 나부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의 고삐를 틀어쥘 수가 없다. 순간들의 연쇄는 질서를 잃은 채 엉킨다.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제멋대로 달려가는 시간들! 누구나 시간이란 유한자원을 까먹으며 나이를 먹는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유한자산을 강탈하고, 노화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닿으면서 생의 주기라는 원을 닫는다. <장석주·시인>

김승희 시모음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 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 싶다.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세계사.1995. 

~~~~~~~~~~~~~~~~~~~~~~~~~~~~~~~~~~~~~~~~~~~~~~~~~~~~~~~ 

늑대를 타고 달아난 여인 


나는 새로운 것이 보고 싶었다. 
설거지가 끝나지 않은 역사말고 ,정말 새로운 것.설거 
지감 냄새가 묻지 않은 그런 새로운 것.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구마구 올라갔다. 
투명 유리 엘리베이터 창 아래로 
하늘이 마구마구 내려갔다. 

믿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내가 올라갔어도 믿을 수 없으 
리만큼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넝마 한 벌---하 
늘과 설거지감---산하.환멸만큼 정숙한 칼이 또 있을까. 
있음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리니까. 

아아,난 새로운 것을 보려면 
그 믿을 수 없는 높이의 옥상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뛰--어--내--려? 
뛰--어--내--려!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세계사. 

~~~~~~~~~~~~~~~~~~~~~~~~~~~~~~~~~~~~~~~~~~~~~~~~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 


시집 ; 달걀속의 생 

~~~~~~~~~~~~~~~~~~~~~~~~~~~~~~~~~~~~ 

달걀 속의 生.2 


냉장고 문을 열면 달걀 한 줄이 
온순히 꽂혀 있지, 
차고 희고 순결한 것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난 그것들을 쉽게 먹을 순 없을 것 같애 

교외선을 타고 갈곳없이 방황하던 무렵, 
어느 시골 국민학교 앞에서 
초라한 행상아줌마가 팔고 있던 
수십 마리의 그 노란 병아리들, 
마분지곽 속에서 바글바글 끓다가 
마분지곽 위로 보글보글 기어오르던 
그런 노란 것들이 
(생명의 중심은 그렇게 따스한 것) 
살아서 즐겁다고 꼬물거리던 모습이 
살아서 불행하다고 늘상 암송하고 있던 
나의 눈에 문득 눈물처럼 다가와 고이고 

그렇다면 나는 여태 부화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을까, 
아아,얼마나 슬픈가, 
차가운 냉장칸 맨 윗줄에서 
달걀껍질 속의 흰자위와 노른자위는 
무슨 꿈들을 꾸고 있을까,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실에서 
입원비 걱정을 하고 있는 우리 가난한 형제들처럼 
흰자위와 노른자위도 
무슨 그런 절망의 의논들을 하고 있을 것인가 

사계절 전천후 냉장고 
하얀 문을 조용히 열면 
추운 달걀들의 속삭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엄마 엄마 안아줘요 따스한 품속에 
어미닭에 안기지 못하고 만 달걀들처럼 
희망소비자 가격보다 더 싸게 팔려온 
너희들처럼 
나도 역시 여권이 분실된 사람 
희망의 온도가 차츰 내려갈 때 
오히려 절망은 조용하고 초연해지는 것 같지. 


시집 ; 달걀속의 生 / 문학사상사. 

~~~~~~~~~~~~~~~~~~~~~~~~~~~~~~~~~~~~~~~~~~~~~~~~~~~ 

달걀 속의 生5 


달걀을 보면 
알 수 있지. 
아, 저렇게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조그맣게 차갑게 
두 눈을 감고 
아, 어찌해, 
저리도 못다한 
벙어리사랑을. 

외치고 싶고 
깨지고 싶어도 
시간의 실금이 온 몸에 강물처럼 퍼지기를 
기다려, 배꼽 같은 씨눈이 
노른자위를 먹어치워 
아, 그 안에서 원무처럼 일어서는 
열애 같은 혁명을 기다려. 

달걀을 보면 
눈물이 어리지. 
아, 저렇게 미해방의 절벽 위에서 
꿈꾸는 사람! 


시집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미래사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다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은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은 또한 믿을 수 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소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여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 

바늘 뗏목 


바늘 하나로 만든 뗏목이다 

바늘 하나의 뗏목을 타고 
반도가 흔들린다 

바늘 하나의 뗏목에 오천만이 
매어달려 
우르르 출렁거린다 

바늘 하나의 뗏목으로 아디까지 갈 수 있을까 

바늘 하나의 뗏목으로 내일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팔꽃 모가지같이 시든 오천만 나팔꽃 내 모가지가 
바늘 하나의 뗏목에 매어달려 표류하고 있다 

모가지까지 물이 차오르는 시간 

누가 나를 세기말의 홍수 위에 꽃꽂이를 했는가 

~~~~~~~~~~~~~~~~~~~~~~~~~~~~~~~~~~~~~~~~~~~~~~~~~~~~~~~~~ 

시계풀의 편지 * 4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 

너에게 


너는 산이 되어라 

산이 되어 달아나지 마라 

산이 되어 다가오지 마라 

너는 

너는 

산이 되어 

산이 되어 

달아나지 마라 
다가오지 마라 

산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한국문학 / 1999 겨울호 

~~~~~~~~~~~~~~~~~~~~~~~~~~~~~~~~~~~~ 

그림 속의 물 


사랑스런 플란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예술의 말[馬]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현대의 이마를 바로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미학 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 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다리를 깎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銀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강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현대의 고장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죄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죄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 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과육이 
웬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강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강은 깊이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싹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강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 아래엔 강이 흐르고 
금세 금세 
훤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강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무거움 가벼움 솟아오름 


무거움을 버리고 
무거움을 도망쳐서 
이르는 어느 가벼움이 있다 해도 
무거움을 버리고 
무거움을 도망쳐서 이르는 
가벼움에서 어느 날개를 이룰 것인가 

무거움을 다하여 
손톱이 빠지도록 무거움을 다한 다음 
업이 스러질 때 
업이 스러진 그 빈자리에 
솟아오르는 가벼움의 날갯짓이 있으면 

그러므로 바닥이여 
바닥에서 
바닥에 닿은 다음에야 올라갈 수 있음이니 
바닥에 닿았다가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바닥이여 바닥에서 고통의, 상처의 
장대 높이뛰기를 할 수 있도록 

업을 다하여, 업 때문에 , 업을 다하도록 
누덕누덕 수천 번 꿰맨 날개만이 더 진실하리니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닥이여 바닥에서 
무거움의 사슬들이 
짤랑짤랑 가벼운 빛의 음악이 되는 그날까지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세계사 

~~~~~~~~~~~~~~~~~~~~~~~~~~~~~~~~~~~~~~~~~~ 

눈물의 노래 


네 눈물은 아름답구나, 다이아몬드 같다. 
밤의 검은 이파리가 너울거리는 
나무 아래서 
나는 너에게 말했다. 

이 눈물은 다이아몬드가 아니에요. 
석탄입니다. 
너는 고통으로 초췌한 얼굴을 들어 
나에게 말했다. 
석탄만한 절망이 없다면 
다이아몬드가 나올 리 없지, 이런 말을 
너에게 했는지 안했는지 
어렴풋한 기억의 모서리가 지워져 있다. 

조그만 빨래집게 두 개가 
물먹은 솜 같은 커다란 빨래를 
가냘픈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앙상한 네개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면서 
빨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벌을 받고 있는 중일까. 

그때 나는 너의 눈물을 기억해 낸 거야. 
다이아몬드 두 방울이 
석탄덩어리를 꽉 잡고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그렁그렁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 두 방울. 
눈물은 꿈을 닮는다는데 
네 눈물은 탄광 속에 이글거리는 생명의 불꽃 
다이아몬드 날개를 가진 것 같다.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세계사. 

~~~~~~~~~~~~~~~~~~~~~~~~~~~~~~~~~~~~~~~~~~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의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시집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미래사. 

~~~~~~~~~~~~~~~~~~~~~~~ 

멍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어 팔려온 
시금치는 
그렇게 푸르지가 않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심하게 멍든 것 같은 표정을 줄 뿐이다. 

바람이 되다만 사랑이 
희망이 되다만 낙망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이 
혁명이 되다만 울부짖음이 
저런 정박의 멍이 된 것일까? 

푸른 멍이 자신의 상처를 이길 수 
없을 때 
멍은 멍에가 되어 
한밤을 개집 속에서 슬프게 울부짖어야 한다. 
멍 
멍.멍 
멍.멍.멍. 
멍멍멍 울부짖는 엄을 나는 기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이 되다만 멍들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들이 
개벽이 되다만 희망들이 
다른 언어로 꽃피어남(울기)을 
찾을 때까지 

나는 더 멍들의 멍에를 걸머지고 
이 토막난 변시체 같은 
희망의 빈민굴을 좀더 사랑할 
작정이다. 
멍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멍들게 
하는 것들을 좀더 질기게 
비웃어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멍이 멍.멍을 초월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반동을 낳을 때까지. 

~~~~~~~~~~~~~~~~~~~~~~~~~~~~~~~~~~~~~ 

아네모네 꽃이 핀 날부터.1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렇게 神氣가 오릅니까?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토록 검은 질료에서 주황빛 신이 불려 나옵니까? 

옛날부터 늘 그래 왔습니까? 
목숨을 지나서도 타오르는 
무슨 한 덩어리 불이 있겠습니까? 

너무 모욕받았는데 너무 큰 모욕이 내려왔는데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괴로운데 이렇게 괴로워도 
토막난 늑대의 이글거리는 횃불처럼 
뭉쳐서 뭉쳐서 화려하게 꿈을 꿔도 되겠습니까?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세계사.1995. 

~~~~~~~~~~~~~~~~~~~~~~~~~~~~~~~~~ 

하나를 위하여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웠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 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시집 ; 달걀속의 生 / 문학사상사. 

~~~~~~~~~~~~~~~~~~~~~~~~~~~~~~~~~~~~ 

견딤의 형식 


모두 저기, 저, 강을 쳐다본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기, 저, 
산을 쳐다본다 
평원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벌판의 끝, 
저기, 저 지평선을 바라본다 
강과 산과 지평선-그곳에서 언제나 무한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무한이 오는 곳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한 번 태어나서 
한번은 꼭 죽기 때문이다 
한번만 사는 삶인데 
한 번밖에 못사는 삶인데 
여기, 이렇게, 아무래도 남루한 냄비 속이 
너무 좁지 않는냐 하고 

물음 대신, 울음 대신으로 저기, 저, 먼 곳을 끝없이 힘을 다해 
훨, 훨,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 
비행기가 날아가는 저 하늘을, 구름이 흘러가는 저기 
저곳을, 
저기, 저, 방금 사라지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랫가락 사이를.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공옥진에게 


나는 병신입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이 슬픈 몸을 움직여 
이 절뚝거리고 비비적대는 
우스운 몸뚱아리를 움직여 
한 판 춤을 추다가 
서리맞은 이 목숨이 허,허,웃을 
진한 춤을 추다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놀아야 
어디까지 놀아야 
우리는 가는 것인가 

춤이란 뭐냐하면 
곱게 가다듬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장육부가 움직여줘야 
징그럽게 이뻐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건드리는대로 
춤을 추시오, 
팔자병신은 팔자병신대로 
문둥병신은 문둥병신대로 
육갑이 풀리는대로 춤을 추시오, 
뒤엉키는 살아 있음의 
신명나는 곡선대로- 

生卽願이요, 
生卽怨이니, 
여기는 아쟁과 장고가 부르는 
미친 살풀이판이요 
히,히- 

~~~~~~~~~~~~~~~~~~~~~~~~~~~~~~~~~~~ 

떠도는 환유 . 1 


몇 장마인지 알지 못할 
장마비가 연일연일 내리고 있다, 
창이 좁아서인지 
세상이 위태하리만치 어두워진다, 
어둡고 긴, 무슨 포식의, 
동물 창자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ㅡ여보세요, 여보세요, 
여긴 너무 어두워요, 말 좀 해봐요, 
ㅡ말하면 뭘하니? 넌 날 볼 수가 없잖아. 
ㅡ그래도 괜찮아요, 말하면 밝아질 테니까요. 







세상엔 벽이 되려는 창과 싸우는 사람과 

창이 되려는 벽과 싸우는 사람, 

그렇게 두 진영의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자택인 듯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 나, 나라는 나가비는 

영구 임대주택인 듯이, 아니, 아니, 

임시 임대주택인 듯이 生을 대하며 

조만간 흘러가 버리고 말 것 같다, 

너무 쉽게 흘러가 주는 것은 아닐까? 




가끔씩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투덜대기나 하면서 ..... 

위조여권 같은 말을 따라서 

출렁출렁.....글썽글썽..... 

~~~~~~~~~~~~~~~~~~~~~~~~~~~~~~~~~~~~~~~~ 

얼굴 



검은 눈 
고요한 입 
발가벗은 피부 
비 내리는 산 
한계선 
예민한, 슬픔, 이마, 가득 찬 모래, 
신경이 푸른 신경이 훤히 드러난 
양쪽 뇌관 
눈썹 
미세한 파도, 구름 울음, 속눈썹 
코 
입, 상처 
얼굴 
벌거벗은 
항상 바람이 지나가는...... 

너를 한번도 더듬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손가락에 묻어 있는 
피, 바람이 지나가며......피 
얼굴의 피..... 
항상 노출된, 바람 속, 덧없이, 벌거벗은 
결코 달아날 수가 없는 

피 
얼굴 
뿌리칠 수 없는 
진달래 


1999다층,여름호 

~~~~~~~~~~~~~~~~~~~~~~~~~~~ 

미완성을 위한 연가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햐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 

솟구쳐 오르기 1 


억압을 뚫지 않으면 
억압을 
억압을 
억압을 

악업이 되어 
악업이 
악업이 
악업이 

두려 우리라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절벽의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하늘 높이 
장대 높이 뛰기를 해 보았으면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 
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을 때까지 

아, 삶이란 그런 장대 높이 뛰기의 날개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상처의 그물을 피할 수도 없지만 
상처의 그물 아래 갇혀 살 수도 없어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 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억압을 악업을 
그렇게 솟아올라 
아, 한 번 푸르게 물리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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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쳐 오르기. 10 


황금의 별을 나는 배웠다, 
어린 시절의 별자리여, 
마음속 어느 혼 속에 
고통의 상처가 있어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별, 
혼돈과 함께 태어나는 황금의 별이 있다고 
나는 배웠고 
그 말은 나를 매혹하였다 

혼 속에 상처를 간직하지 않으면 
무엇이 나를 별이게 하겠는가? 
나는 고요히, 울면서, 
인생이 나에게 주는 모든 쓰디쓴 혼돈 
모든 쓰디쓴 상처 
그 상처의 악령들을 나는 사랑하였다, 
인생을 구제하는 건 
상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의 
오케스트라, 
그 상처의 오케스트라 속에서만 터져나오는 
황금의 별들의 찬란한 음악 

상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처의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존재의 곡예만큼 
장엄한 것이 있을까? 
불의 운명을 피하니 물의 운명이 나오고 
물의 운명을 피하니 
가시덤불 언덕을 구르는 형벌이 나왔던 
옛날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처음 만난 운명을 피하지 말라던 
황금의 별의 잉태를 믿으라던 

가끔은 운명의 길이 텅 비고 
아무것도 광채나는 것은 없어 
공허가 길을 메우고 
허공이 길 위에 내려와 
내 길을 지우니 
어디로 갈까 
갈 곳도 없는 지평선이 나를 가두더라 

사랑도 나침반을 잃고 
슬픔은 바다의 파도와도 같고 
기억은 곪은 상처와도 같이 
무거운 독거미의 액을 뿌리고 있으니 
무엇을 보고 존재의 황금의 별을 믿어야 
할 것인가, 
홀로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모든 것은 아프고 아프다 
모든 존재는 아프고 
아픈 것은 나쁜 것을 뛰어넘지 못할 때 
꿈은 사악해지기도 하더라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을 나에게 
다오, 
그것을 쥐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황금의 별을 만지리라, 
혼 속에 있는 고통이여 
혼돈 속에 있는 황금의 별이여 


시집"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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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4 
-눈보라 속에는 


눈보라 속에는 손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다가오 
는 손 누가 추워하나 누가 아파하나 하얀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손들이 들어 있다 눈보라 속에는 눈들이 들어 있 
다 환부를 읽으려고 다가오는 눈 누가 아파하나 누가 다 
쳤는가 하얀 눈보라 속에는 고요한 눈들이 들어 있다 눈 
보라 속에는 귀들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달려오는 
귀 누가 울고 있나 누가 빌고 있나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귀들이 들어 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 
천안관세음 숭숭 구멍 뚫린 가슴에서 하얀 눈보라 깃털 
같은 붕대가 화안히 화안히 흩어져 나오는..... 


시집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2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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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거친 파도가 바위섬을 삼킬 듯이 몰아칠 때 
세계의 집에서 지붕들이 고요히 벗겨지고 
유리창들이 환상의 격투로 부서질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삶은 거기에서 발레리나, 발뒤꿈치를 힘껏 높여들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춤추는 발레리나, 
관절이 연결된 척추 마디에 삐걱거림의 꽃송이가 
벙글어지듯 솟아나고 
바알갛게 신음하는 복숭아뼈를 견디며 
바닥을 차고 올라가는 하얀 높이로의 힘겨운 이행 
벌레리나의 춤이 그 연루된 뼈들의 고통을 잊을 때 
꽃이 고통의 연루로 피어난다는 것을 잊을 수 있을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목 없는 닭이 어두운 구름을 앞질러 날아가는 
새떼들을 쳐다보는 시선으로 
주전자 입에서 펄펄 날아가는 흰 김을 바라볼 때 
혁명은 힘겨운 척추뼈와 복사뼈 사이의 연루에 있고 
목 없는 닭의 떨리는 눈 속에 있고 
하얀 김이 펄펄 나며 하늘을 조금 밀어내고 있는 
그 공기의 힘겨운 파장 속에 있고 
환상이 상심과 더불어 솟구쳐 일어나고 
사랑이 한번만 사랑일 때 
혁명이 한번만 혁명일 때 
주전자 뚜껑이 팔팔 끓어오르는 김의 힘에 밀려 
딱, 하고 저절로 벗겨져 떨어질 때 


시집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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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3 
- 고엽제 이야기 


나르키서스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남자 
에코는 그만을 사랑하는 여자 

그가 말한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에코는 따라서 말한다 
사랑해줘요. 

그가 말한다 
제발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 
그녀는 말한다 
가까이 오세요! 

나르키서스는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 
에코는 그의 말을 (잘못) 따라하는 여자 

모든 사랑에는 혀의 고엽제가 들어 있다 
혀를 말리는 하얀 약이 키스할 때마다 배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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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4 
- 눈보라 속에는 


눈보라 속에는 손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다가오 
는 손 누가 추워하나 누가 아파하나 하얀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손들이 들어 있다 눈보라 속에는 눈들이 들어 있 
다 환부를 읽으려고 다가오는 눈 누가 아파하나 누가 다 
쳤는가 하얀 눈보라 속에는 고요한 눈들이 들어 있다 눈 
보라 속에는 귀들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달려오는 
귀 누가 울고 있나 누가 빌고 있나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귀들이 들어 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춘수 
천안관세음 숭숭 구멍 뚫린 가슴에서 하얀 눈보라 깃털 
같은 붕대가 화안히 화안히 흩어져 나오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 

꿈과 상처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였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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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간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색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을 편들지 않으리. 
죽음과 생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라. 
지금은 빛나고 휘날리는 金색의 깃발. 
그러나 곧 
정적이 와버리는 것을. 


시선집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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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오 


살면 살수록 
왜 자꾸만 더 낙제하는 기분이 되나. 
봄에 꽃이 피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세탁소 창문 앞에 내걸린 
깨끗하게 건조세탁된 옷들을 
바라볼 때도 그렇지. 
혼자만 나 혼자서만 
왜 마감기일이 넘은 원고를 붙들고 있나. 
내가 갔을 때는 
왜 언제나 백화점의 바겐세일 기간은 
끝나 있어야 하나. 

가을이 되어 꽃잎이 떨어질 때도, 
광화문을 지나다가 
회전꼬챙이에 꿰여 빙빙 돌아가는 
캔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바라볼 때도, 
시인 황지우가 선거 후 낙향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왜 나는 자꾸만 더 낙제하는 기분이 되나. 
사랑에도 
꿈에도 
난 늘 낙제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삶은 더한층 눈부시고 
내 것이 아닌 연인을 바라볼 때처럼 
울고싶도록 더욱 다가들고만 싶은가. 


시집 ; 달걀속의 生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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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구름의 주소 



내가 나를 버려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아직 나 속에 
머무른다 
내가 아직 나와 헤어지지 못했기에 
나는 나라는 고유명사 속에 
숙박처럼 묵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 바깥과 
바깥으로 들어나가고 싶은 안이 
서로를 더욱 그리워하는 듯 
하늘과 나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불지르고 있는 여름 

전생에서 오는 디딤돌 같은 
흰구름과 
내 생으로 가는 디딤돌 같은 
흰구름이 
잠시 만나 
모두 나를 혈연인 듯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 
구름의 숙박소 
그 안에 깃들인 흰 여름의 성하 같은 
나의 목숨을 
일박이일쯤 되나, 
아니, 어쩌면, 
혹은, 삼박사일쯤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시집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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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5 
-결혼식의 사랑 


성채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낀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시집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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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풀의 편지 3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하늘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사람에겐 하늘이 액자만하다는 것을 
액자보다 더 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을까 
그는 정말 몰랐을까. 

상처 안에 또 하나의 상처 
그 안에 골목같은 상처. 그 안에 
창살만한 상처. 
그 아래 몽고반점만한 사랑. 

하늘이 푸른 것은 아직도 꿈꾸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하늘은 때때로 몽고반점처럼 
푸르르고 
죽고 싶도록 멍든 사람들이 
멍든 빛깔로만 
사랑을 칠하고 있는 
살고 싶도록 푸르른 하늘 

하늘이 푸르른 것은 
그런 멍든 사람들이 
하늘을 등지고 
푸른 언덕 위에 가슴을 대고 
아아 가만가만 
자신의 파아란 상처를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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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이 밥을 차린다 


식탁이 밥을 차린다 
밥이 나를 먹는다 
칫솔이 나를 양치질한다 
거울이 나를 잡는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이 되고 
쎄미나 룸이 되고 
흡혈귀의 키스가 되고 
극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거울이 된다 
캘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니나리찌가 나를 뿌린다 
CNN이 나를 시청한다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 
신발이 나를 신는다 
길이 나를 걸어간다 
신용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신용카드가 나를 분실신고 한다 
시계가 나를 몰아 간다 저속 기어로 혹은 고속 기어로 
내 몸은 갈 데까지 가 보자고 한다 
비타민 외판원을 나는 거절한다 
낮에는 진통제를 먹고 
밤에는 수면제를 먹으면 된다 
부두에 서 있고 싶다 
다시 부두에... 
씨티은행 지점장이 한강변에 음독자살을 하고 
시력이 나쁜 나는 그 기사를 읽기 위해 
신문지를 얼굴 가까이에 댄다 
신문지가 얼굴을 와락 잡아당겨 
내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신문이 된다 
몸에서 활자가 벗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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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13일의 사랑 


그런 사랑 
13월 13일 같은 그런 사랑 
토끼와 거북이가 뒤로 달리는 경주를 하고 
싱그러운 초원 위에 뒹굴고 노는 그런 사랑 
동서남북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방향을 지우고 놀다가 
끝내는 이름도 얼굴도 잃어버리는 
낙원 같은 그런 사랑 
토마토 한복판을 가운데로 잘라내 
똑똑 떨어지는 붉은 태양혈을 배꼽에 칠하고 
응애 놀이를 하며 다시 태어나는 그런 사랑 
우리는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당신은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 
안하는 그런 사랑 
인디언 추장을 만나 손을 잡고 
바람의 질주를 그리며 달리는 그런 사랑 
세상의 달력을 잊어버리는 
총, 성경, 질병을 잊어버리는 그런 사랑 
탈주하는 사랑 
탈주를 웃는 사랑 
탈주조차를 잊어버리는 사랑 
눈보라처럼 부웅할 방향 자체가 없는 그런 사랑 
반대로 달려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즐거워서 원기 왕성해지는 
13월 13일만 같은 그런 사랑 

13월 13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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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나무 아래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아래 휘여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말이야,꼭 미친 듯이 뛰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어. 

그래서 난 새해 같은 것이 오면 
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서서 
자신을 봐야 하니까. 
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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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波息笛(만파식적) 
-남편에게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 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두 개의 대나무가 묶이어 있다 
서로간의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생기지, 
그 빈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동물들처럼 
서로의 돌기를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의 목을 조르는 것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피리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 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시집 : 왼손을 위한 협주곡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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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쳐 오르기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죽었는가 
이젠 정말 죽었구나 
했을 때 
나는 
떠 
오 
르 
고 
있었다 

지상의 가장 끝에서 
혼자 본 
아침 
해 
백경의 장엄한 숨쉬기처럼 
물방울 분수를 조용히 내뿜으며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어 
고통의 신의 하사품을 받는 것처럼 
고 
요 
하 
게 

가라앉는 행복조차 빼앗기고 
아아, 또 살아났구나 
휴우~ ~ ~ 하고 말하려는 것처럼 
솟구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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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쳐오르기10 


황금의 별을 나는 배웠다, 
어린 시절의 별자리여, 
마음속 어느 혼 속에 
고통의 상처가 있어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별, 
혼돈과 함께 태어나는 황금의 별이 있다고 
나는 배웠고 
그 말은 나를 매혹하였다. 

혼 속에 상처를 간직하지 않으면 
무엇이 나를 별이게 하겠는가? 
나는 고요히, 울면서, 
인생이 나에게 주는 모든 쓰디쓴 혼돈 
모든 쓰디쓴 상처 
그 상처의 악령들을 나는 사랑하였다, 
인생을 구제하는 건 
상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의 
오케스트라, 
그 상처의 오케스트라 속에서만 터져 나오는 
황금의 별들의 찬란한 음악 

상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데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처의 장대 높이 뛰기를 하는 
존재의 곡예만큼 
장엄한 것이 있을까? 
불의 운명을 피하니 물의 운명이 나오고 
물의 운명을 피하니 
가시덤불 언덕을 구르는 형벌이 나왔던 
옛날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처음 만난 운명을 피하지 말라던 
황금의 별의 잉태를 믿으라던 

가끔은 운명의 길이 텅 비고 
아무것도 광채 나는 것은 없어 
공허가 길을 메우고 
허공이 길 위에 내려와 
내 길을 지우니 
어디로 갈까 
갈 곳도 없는 지평선이 나를 가두더라 

사랑도 나침반을 잃고 
슬픔은 바다의 파도와도 같고 
기억은 곪은 상처와도 같이 
무거운 독거미의 액을 뿌리고 있으니 
무엇을 보고 존재의 황금의 별을 믿어야 
할 것인가, 
홀로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모든 것은 아프고 아프다 
모든 존재는 아프고 
아픈 것은 나쁜 것을 뛰어 넘지 못할 때 
꿈은 사악해지기도 하더라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을 나에게 
다오, 
그것을 쥐고 하늘 높이 
뛰어 올라 
황금의 별을 만지리라, 
혼 속에 있는 고통이여 
혼돈 속에 있는 황금의 별이여 

~~~~~~~~~~~~~~~~~~~~~~~~~~~~~~~~~~~~ 

황혼이면 


황혼이면 
밥상을 부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던 
한 여류작가가 
생각나지, 
언제부턴가 하루하루란 사는 것이 아니었고 
힘껏 견뎌야만 하는 
무엇이었지, 

푸른 목숨의 그리움 
있는 대로 선혈처럼 다 배어나오는 
저 미친 하늘 
일그러진 얼굴을 원흉처럼 거느린 채 

치마폭일랑은 치렁치렁 
난파의 깃발처럼 펄럭이며 
아아, 머리칼은 욱조아 묶은 채로 
그대로 두고 말까, 
괴물의 마수처럼 훨훨 이글거리며 
제 슬픔의 또아리를 
힘껏 틀고 있으라고, 
밤은 모르는 남자로부터 매일 오는 
연서처럼 
상냥하고도 은밀한 것, 
두근거리며 드럼, 드럼, 드럼, 
위험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인가 

나는 
더이상 산이 안 보이는 
그런 산 위에 서 있고 싶다. 

가라, 가서 
루마니아 폴카를 
피가 절이도록 루마니아폴카를 
추며 잊으며 돌아오지 말까, 
음악이 공범이 될 때까지 
춤이 정사가 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절벽이 안 보이는 그런 절벽 위에 
춤추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래 서 있었다, 
춤을 추지는 않고 
별빛이 내내 뼈에 시릴 때까지- 


시집 : 미완성을 위한 연가 / 나남.1987. 

~~~~~~~~~~~~~~~~~~~~~~~~~~~~~~~~~~~~~~~~~~ 

유서를 쓰며 


내 뼈에 가득 찬 
죄악을 비우기 위하여 
나는 유서를 씁니다, 
독한 청산가리 같은 잉크에 
내 넋의 봇을 적셔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어봅니다, 

선언합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에게, 
시시한 추억들, 
못 잊을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유품을 나누어놓고 
이것이 최후라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문틈을 샅샅이 레이스로 봉합니다, 
그리고 가스마개를 틀고 
더러운 부엌바닥에 
냉정히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나 젊기에 
더 살고 싶다는 푸르른 나의 육신에 
못을 탕--탕--박고 
망치를 허공으로 던져버립니다, 
살점이 튀고 
아까운 피가 양수처럼 따뜻이 고입니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니은--디귿!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 

번개처럼 일어나 
창문을 열어봅니다, 
달빛이 初雪처럼 흘러내립니다, 
나의 해골을 집어들고 
달빛을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마십니다, 
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유서를 쓰며 


詩集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흰 노트를 사러 가며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소복소복 흰 종이 위에 
넋을 묻고 울어야 합니다. 

황혼이 무서운 곡조로 
저벅저벅 자살미사를 집전하는 
우리의 불길한 도회의 지붕밑을 지나 
나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면죄부를 잔뜩 사는 
탐욕스런 노파처럼 
나는 흰 노트를 무섭도록 많이 삽니다. 

간호부-수녀-어머니- 
흰 노트는 피에 젖은 나의 정수리를 
자기의 가슴으로 자애롭게 껴안고 
하얀 붕대로 환부를 감아주듯 
조심조심 물어봅니다. 
고독이 두렵지 않다면 
너는 과연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고통스러운가고 

세상에는 너무나 무능하여 
성스럽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능한 순정으로 
무능한 순정으로 
흰 노트는 나를 위해 
정말 몸을 바칩니다.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미칠 듯한 순정으로 
미칠 듯한 순정으로 
또박또박 흰 종이 위에 
나는 또 내 슬픔의 새끼들을 수북이 낳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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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유언 한 채 


11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한점 화엄같이 전화기를 껴안고 
목숨은 그냥 두고 전화기를 그보다 더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색 불이 붙은 것도 모른 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 빛 불타오르는 화염에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한 잎 화엄 잎사귀에 매달려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이 베어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척추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불꽃이 머리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느끼며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자는 
불타는 머리카락 난폭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펄럭거리는 화염이 얼굴을 와락 베어먹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일생을, 그 한 마디, 
사랑한다는 
그 말속에 
묻으며 
여자는 
그 한마디에 
결혼식과 장례식과 묘지명을 
순식간에 다 쓰고 
떨 
어 
지 
는 
순 
간 
의 
그 
여 
자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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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8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난 날/김승희 


당신은― 날-― 금요일에 구해 주셨지요 
식인종들로부터― 
그래서 주인님은 나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이셨지요 
주인님을― 만난― 날이 
내 이름이 되었어요 
주인님을 만나기 전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영광이었어요 

이제 나는 프라이데이예요 
맨발에는 가죽 신발이 덮이었고 
순진무구한 눈동자에는 벌레 같은 문자들이 
기어들어 왔어요 
내 이름은 프라이데이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종언이고 
저주였어요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뉴멕시코 광활한 땅, 망망대지에 푸에블로 인디언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이에요 
보호 구역에서 애도 중인 폐선 자기를 애도하는…… 
과도한 애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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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1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한 여자가 횡단보도 건너 저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있다, 
나는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이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앉아 있다, 
붉은 신호등이 이렇게 모르는 두 여자를 
잠잠히 마주보게 만든 그 고유의 순간 

초침이 두 여자의 얼굴 위로 사각사각 지나가며 
사과껍질을 얇게 벗겨내듯 
과도 칼의 저미는 움직임이 얼굴 위에 느껴진다 
유의해서 보아야 할 아무 특이한 점이 없는데도 
무언가에 끌려서 
벙어리 지뢰처럼 서로를 긴장에 차서 바라본 그 순간 

붉은 신호등이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고 
급히 전진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질주해 나가야 할 이 진군의 시간 
얼핏 스치며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녀의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뒷차들은 빵빵 경적을 울려대며 
일 분 일 초에 일생을 건 사람들처럼 미친 늑대의 소리를 내지른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초에 목숨을 건 미친 늑대들인 것이다 
그녀의 차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흘깃 들여다본다 
백합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 
왼쪽 콧구멍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붉은 피는 아까 전부터 흘러내렸는지 
미색 가을 정장 윗도리 가슴 편에 
아르다운 꽃다발이 뭉클뭉클 피어올라 있다 
급성 뇌출혈, 
가슴에서 뭉게뭉게 꽃피어 올라가는 꽃다발 헌정의 순간 

그녀도 집에 닦지 못한 식기를 한아름 싱크대 위에 
버려두고 도망치듯 나온 여자였을까, 
강의 준비를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아홉시 수업에 늦지 않게 당도하려고 
미친 듯 페달을 밟던 여자였을까, 
더이상 경쟁려기 없다는 말을 그저께 들었던, 
시부모로부터 네가 인간이냐는 말을 어저께 들었던, 
친정 어머니로부터 전세값이 올랐는데 
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어쩌면 좋으냐는 말을 
아침에 들었던 
그 여자였을까,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더 기어갈 수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다 끝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진다 
내 차는 그녀의 차를 스쳐 지나가며 
소리쳐 물어본다 
왜 그렇게 핸들을 꽉 잡고 있는 거냐고, 
당신의 사랑은 더 갈 수 없었던 거냐고, 
거기서 멈추어버린 어떤 피로, 어떤 갈망, 
미친 코다에 대한 그리움이 
또 내 차를 미친듯이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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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웃음이란 상징적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씨앗 중의 하나---보들레르 

바보 산수 
정자에서 네 팔을 벌리고 낮잠을 즐기는 
바보 산수 
빨래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동네 영감이 있는 
바보 산수 
엿장수를 반기는 즐거운 아이들의 웃는 
바보 산수 

중력의 악마를 뿌리 채 뽑아내려는 듯 
질질 끌고 가다가 
휘두른 듯이 내려친 자루 걸레 
그 봉 걸레에 먹을 듬뿍 찍어 
병풍 위로 질질 끌고 다니며 
불굴의 한 획으로 
웃고 달려가는 잇달아 파고들며 웃고 달려가는 
달아날수록 웃고 덤벼드는 뭉클뭉클한 천千의 산맥을 
그린 
걸레 수묵 

후려치는 봉 걸레 
빗자루를 타고 달려가는 
웃는 웃음 
그 웃음의 산맥을 타고 달려가는 
꿈틀대는 웃는 웃음 
그 웃음 
빗자루가 휘갈리는 그 웃음 
바보 웃음 


시집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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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상치들이 있는 풍경 


도시의 창가에 유리창 가에 상치들이 상치들이 상치들 
이 푸른 귀를 맛대고 푸른 뺨을 맞대고 푸른 숨 맞대고 
푸른 입을 맞대고 팔 하얗게 드러난 팔 파랗게 드러난 힘 
줄 팔 하얗게 드러난 팔꿈치들을 맞대고 뺨 한곳엔 흙이 
묻어 뺨 한곳엔 물이 묻어 뺨 한곳엔 햇살이 묻어.....무 
언가 옹알이 내 귀가 아알지 못할 옹알이 나른한 말들 숨 
결들 꿈결들인 양......상치 밭에서 깜박 잠들었네 내 뺨 
에 절 한 채 지어놓고 내가 도망갔네 도망간 나를 찾아 
굳이 길을 떠나야 할 것은 뭔가? 


시집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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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직, 얼굴 위에서 
미처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일방적인 해고통고와도 같이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 아, 안녕......하고 
말을 맺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다, 
우린 좀더 사랑했어야 하고 
우린 좀더 진지한 고통을 
나누어야 했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우린 좀더 불을 통과하는 뜨거운 
길들을 함께 
다녀보았어야 했다 

언젠가 하얀 문이 
그렇게 닫혀지고 말겠지,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항력적인 - 하얀- 
단절이-우리의- 
얼굴 위에 수면마스크처럼 
조용히 드리워지고, 
비단끈으로 된 하얀 망사처럼 
보슬보슬한 음악이 
엘리베이터 천정 위에서 
세뇌라도 하듯이, 자근자근 소근소근 
속삭여대겠지, 
잊어버려, 이젠 다 끝장이 났어, 
잊어버리라고, 낄, 낄, 낄......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언제나 마지막 문은 
그렇게 닫혀지고 마는 법, 
언제나 지고 있는 노름패처럼 
열쇠도 없다, 
열쇠도 없이 
그렇게 우리 홀로 승천의 문 안에 갇혀져야 하는가, 
그렇게 홀로 갇혀 
멍청히 승천의 길로 올라가야 하는가...... 


시집 : 미완성을 위한 연가.나남.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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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상처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였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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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의 잠 


어느 날 
새들의 임금님이 
우리의 땅에 내려왔다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누가 이카루스인가. 
모두들 한 번 날아보아라」 
태양 가까이 날아 
날개가 불태워져버린 아이에게만 
불멸의 날개를 주겠다. 
납이 아니고 
뼈와 뼈의 날개, 
녹을 수 없고 썩지도 않는 날개 

그러나 지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아이가 귀가 있어 
그것을 듣겠으며 
어느 날개가 천재가 있어 
태양까지 날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이카루스만이 영원하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者는 
이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 지금은 
시인도 청년도 
사슴도 독수리도 아무도 날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아무도 날지 않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하늘 속에서 태양은 아름답고 
태양 속에서 생명은 불타지만 
그러나 이카루스, 
이카루스는 잠을 자네 
파도와 회색바위 위에서 
이카루스, 
모든 이카루스는 아무도 잠깨지 않네 
아무도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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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내가 죽어 있을 동안이라도 
더욱더욱 자라야 한다고, 
환상이란 상심이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이라도 
몰래몰래 자라야 한다고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묻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도괴된 복도 속에 통조림 깡통이 하나 파묻혀 있다, 
미를 헤치고 통조림 깡통을 들여다보면 인스턴트 
평화라고 뚜껑에 대문자로 적히어 있다,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나,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 된 너, 
평화는 불사신과 같이 방부처리되어 있어서 당신이 통 
조림 깡통을 땄을 때는 화두처럼 목 없는 닭 한 마리 
평화롭게 온 세상 그지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으니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환상이란천벌 같은 거지만 
화분 속에는 사막식물이라는 
선인장 화초가 심겨져 있고 
화초인지 아닌지 
그 선인장은 백년 동안에 한 번만 
꽃피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 
선인장 몸 위엔 
갈퀴쇠 같은 물음표만 녹색으로 가시 돋쳐 
왜? 왜? 왜? 라고 
눈동자를 찌를 듯이 거울면으로 
육박한다, 

난수표 같은 절망은 자금회전이 안 됩니다,이곳에선 
희망만이 현금유통되고 있어요, 희망을 환불하려고 거 
울창구 앞으로 다가서면 희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돈푼인지, 거대한 절망의 허물 수 없는 어음에 비한 
다면 희망이란 얼마나 소소한 푼돈인지,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물을 준다, 이 생에선 그 꽃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주고, 절망에 죽 
음을 보탠 그 몸짓으로밖에 나는 그 선인장 꽃을 가꿀 
줄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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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 주신 말 


인연은 재앙이니라- 
내가 너무 배가 고파 
어두움 속에서 
달덩이같이 삭발한 그리움을 
하나 걸어두었더니 
꿈인듯 생시인듯 
이상한 향기나는 白馬가 날아와 
내가 하늘을 타고 갔느니라- 
오색 구름 속에 황금궤가 홀연히 
걸려 있는데 
너무 곱고 너무 신령하여 
내가 그만 외상으로 너희들을 
사오고 말았더니라- 

인연은 재앙이니라- 
뭉게뭉게 퍼져가는 암세포처럼 
시시각각 외상값은 계속 불어나 
강아지같이 불쌍한 내 새끼들아, 
너희가 갚아야 하느니라, 
맷돌을 목에 걸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광견병 든 개처럼 맞아서 죽더라도 
잔인한 것은 내가 아니다 
흡혈귀는 -나는-아니다 

고문처럼 질긴 
철천지의 사랑- 
이 무슨 원한의 달콤한 
피냄새-나는 
아니다-내 착한 새끼들아 
인연은 후환이니라- 


시집 : 큰소리로 살아있다 외쳐라 / 청하/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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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식당 


오후 세 시의 식당은 
들숨과 날숨이 뒤바뀐 시간 
폐에 바람이 가득찬 풍금 건반이 저절로 홀로 
유령의 건반을 눌러보는 시간 
의사 가운을 입은 주방 아주머니들이 
하얀 빵 모자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채 
식당 테이블에 나와 앉아 밥을 먹는 시간 
큰 양푼에 맛있게 무친 나물을 넣고 
한번 더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여러개의 김나는 팔뚝들이 들락날락하며 
함께 나누어 맛인는 시간 
의사가 환자가 되는 시간 
환자가 의사가 되는 시간 
링겔꽅은 왼팔을 흔들며 무어라 말을 하려 
......ㄱ ㄴ ㄷ ㄹ...... 하던 마지막 임종의 얼굴이 스치는데 
남에게 국그릇을 퍼주던 김나는 팔뚝들이 
자기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가는 
여인들의 맛있는 시간 
이사도라 덩컨이 차를 출발시키다 스카프에 목이 졸려 
죽은 나이, 마흔 아홉, 오후 3시, 
혼자 앉아 점심이나 먹는 나의 시간 
정신박약의 당나귀가 어흥어흥 우는 시간 
주방에선 양배추 끓이는 냄새가 자욱 올라오고 
양배추들이 요오드크롬을 바르며 혼자 죽는 시간 
알듯 말듯한 애도의 시간 
활짝 펼쳐진 절정의 부채처럼 
다 펼쳐진 부재의 시간 


시인세계 ; 2002 가을 창간호-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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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나무 아래의 즉흥 


하얗고 단단하고 깨끗한 여름날 
우리들은 게오르그 브라끄의 해안에 있으면서 
사유 안에 
하나의 급한 흰 나무를 갖는다. 
흰 나무는 그네다. 
불꽃의 날아가는 맨발에 올라 
내 일상은 훨훨 비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우리는 하나의 붉은 사과를 나눠먹으며 
타오르는 해안의 태양 옆길을 간다. 

아아,나는 너와 오래오래 만나고 싶어. 
십오 분. 이십 분. 
한 시간이 아닌 
죽음과도 같이 긴 시간을,꿈의 시간을 
예쁜 칼처럼 너를 지니고 
헤어지지 않고 있고 싶어 
언제나 서로 함께 
불꽃 속에 살아 
언제나 서로 함께 살아있고 싶어. 

사랑은 죽음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푸른 바람을 달리며 
대양을 횡단하고 
대양을 버린다. 
밝은 아이들의 목소리에 
오후 바다의 빛나는 머리칼은 와 감기고 
돌아온 해안에서 
우리는 보다 직접적이고 견고한 죽음과 만난다. 
검게 그을은 얼굴을 들고 
우리의 입술은 
이제 보다 우수한 미소를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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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間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식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쌍무를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거슬 편들지는 않으리. 
죽음과 生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라. 
지금은 빛나고 휘날리는 金색의 깃발. 
그러나 곧 
정적이 와버리는 것을.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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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계단 


계단은 올라가는 것이거나 내려가는 것이지만 
어느쪽으로 가야만 피난이 되는지를 알 수 없을 때 

냉담신자처럼 
아직 어떤 방향에도 확실히 속하지 않는다면 

불과 
불 
사이 

세상은 온통 연기가 앞을 가리운 
최루탄 장막의 무성영화 

에취 에에취 기침을 하면서 
엉엉 훌쩍훌쩍 눈물 닦으며 

이쪽으로 가본들 
저쪽으로 가본들 

피난은 멀고 
불은 가까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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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온통 벌거숭이로 피를 칠하고 있을 때 
난 알 것 같았어, 
왜 별이 아름다운지를, 
난 알아질 것 같았어, 
만일 구름의 너울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태양을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를, 

밤에 마지막 외침처럼 황량한 마음으로 
지붕 위에 서 있으면 
먼데 있는 사람아, 말하려므나 
내가 평화처럼 혹은 구원처럼 
금빛이더라고, 
신비한 금선이 아득히 흘러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꿈꾸게 되는지를,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울부짖는 하나의 욕설처럼 추악해질 때 
난 알고 말았어 
별과 神은 왜 그토록 멀리 있어야 하는지를, 
모든 성당의 창문에는 
왜 천연색의 색유리가 끼여 있는지를, 

오늘 애가 여기 천벌의 화형으로 
지새우는 불이 
어디엔가 먼 사람에겐 
아마도 위안처럼 정다우리니 
생각해 보아,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별은,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왜 우리에겐 그토록 간격의 탐닉이 
필요한 것인가를 

~~~~~~~~~~~~~~~~~~~ 

호텔 자유로 


자유로는 이제 호텔이 되었다 
자유로에서 자유는 이렇게도 많이 밀리고 있다. 
싱싱한 브로콜리 같은 아침의 얼굴이여 
누가 이 아침의 얼굴을 식물인간으로 눌러 놓았나 
자유로에서 밀리는 것은 정말 자유만이 아니다 

때묻은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가슴에 안고 
아가야, 아가야, 젖 줄까, 베개를 토닥이며 돌아다니던 
그 미친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붉은 그리움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움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움이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을 때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미치거나 식물인간이 되어서 반쯤 졸거나 반쯤 자는 길.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그랫으리라. 깃발은 들었고 
자유는 밀리고. 황토재 떠나 황룡촌 지나 
첩첩 그리움은 막혀가고. 보은 지나 금강이여.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도 어려웠으리라 
자유로에 점점 떨어진 푸른 알들이여 
녹두 꽃잎들이여...... 

호텔 자유로. 인디언 담요에 몸을 두르고 
김밥과 샌드우위치를 찬합에 놓고 먹으며 
그렇게도 싫어했던 실려가는 삶에 대해 
실려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밀려 있는 자유에 대해 
밀려 가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또다시 언젠가 피어날 녹두꽃에 대해 
피기도 전에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동자에 대해...... 

실린 곳 :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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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이 가혹하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신발을 신고 나설 때마다 난 어떤 본능을 다치는 
것만 같아, 골절, 뼈 뼈 뼈가 어긋 물린 것 같고 어떤 때는 
도에 지나쳐 피 피 피가 
길 위에 흘러내려 나의 길을 모가지로 감고 엉겨 저지하는 것 같아, 
신발에서 길을 갈라내지 못하면 
미친 듯이 신발의 길에 먹힐지도 모른다 
신발에서 발을 추려내지 못하면 
어쩌면 신발에서 발목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또 신발의 중독에서 깨어난 발 
발가죽의 중독에서 깨어난 뼈들조차 
더 시끄러운 이 내란의 길목에 서서 

꿈이여, 잠시 잠시만 더, 그래도, 이 가죽 부대 같은 신발 안에 
뭉쳐 있지 않겠니? 신발을 들고 날아가는 저 눈부신 태고의 날개가 
하얀 자갈밭에서 알을 깨치고 날아가는 
태양빛의 뜨거운 새처럼 
고요히 중심의 원시 신화 속으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나의 발은 아직 할 일이 많고 
나의 발은 아직 더 가고 싶은 길이 있단다 

그리하여 엘칸토 금강 에스콰이어 비제바노 브랑누아를 넘어 
레스모아 미스미스터 엘레강스 허쉬파피 랜드로바를 지나 
갔습니다 
구두 대(大) 바겐에 가면 나에게 맞는 신발을 어쩌면 구할 수 있으리라~ 
모두 신발이 뼈에 마치고 근육은 구두에 대들고 
발톱은 구두 가죽을 찢고 한 발 가득 무성한 털은 
솟구쳐 나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범주를 벗어난 모래와 엉긴 피가 
나의 신발 너머 길 가득 수북이 넘치고 있으니 
모든 신발이 수상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은 천적이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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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길 위에서 


역촌동 →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 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 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 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 

천년을 목에 걸고 


내 마음에 한 그림자 있으니 
천년을 기다려도 다 지워지지 않아라 

마음을 묘비의 뚜껑삼아 
밤마다 그림자의 획을 새기니, 

죽어가는 인형을 안고 병원 복도를 서성이는 
여인이여, 여인의 품안에 
병든 꽃의 목숨은 너무도 희미하여 
물 한 모금 달라고 
끝으로 말하지도 못했노라, 

넋나간 유령처럼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 여인의 가슴에 
십자처럼 선명한 유혈의 검은 장미는 
한 잎 두 잎 
독 묻은 꽃 이파리 너울댈 때마다 
뭉텅뭉텅 여인의 살을 베혀갔노라, 

아직도 다 가지 못했노라, 
천년을 더 한다 해도 다 가지는 못할, 

내 마음에 한 그림자 있으니 
마음을 묘비의 뚜껑삼아 밤마다 그리노라 

~~~~~~~~~~~~~~~~~~~~~~~~~~~~~~~~~~~~~~~~~~~~ 

우표 한 장의 사랑 


가을이면 문득 작년에 넣어둔 
옷장 속의 긴 코트를 꺼내 입고 
바람처럼 괜히 
길 모퉁이로 나서지, 
하얀 장미꽃 그림자 같이 
초췌한 양광陽光 속을 걸어가다 보면 
호주머니 속에 작게 접힌 
작년의 종이쪽지가 손에 잡히지, 
나프탈린 냄새로 절여진 
불쌍한 내 사랑, 
하얀 방부제 속에 파묻혀 
일 년이나 일년동안이나 
창백하게 봉인된 금지된 내 사랑, 

가을 햇빛 아래 
이 종이쪽지를 건네준 사람이 
누구였던가 난 잊어버렸지만 
이 종이쪽지를 쓴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덧없이 향기로왔던지를 
난 기억할 수 없지만 
가을 햇빛 아래 
가을 햇빛 아래 
차마 그 종이쪽지를 꺼내 
그리운 전화번호를 읽어볼 수 없다 하여도 

국립박물관 4층 불교회화실 
진열장 속에 보관되 있던 
은으로 쓴 화엄경을 난 기억할 수 있네, 
어두운 청색 감지 위에 
은으로 쓴 화엄경, 
너무도 풍부한 슬픔 위에 
화려하게 자수된 
불멸의 은빛 극락조, 
그렇게 영원한 것은 
어둠 속에 차디차게 빛나며 
작년의 긴 코트 호주머니 속에 
반짝반짝 금석문처럼 남아 

하얀 장미꽃 그림자 같이 
초췌한 가을햇빛 속을 걸어가다 보면 
그대여-그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대여-그대는 어떻게 갔을까 
알고 싶지만 알 수가 없고 
보고 싶지만 다시 볼 수가 없어 
여름 사랑이면 힘껏 
껴안을 수가 있지만 
여름사랑이면 뜨겁게 부딪칠 수가 있지만 
가을사랑이여 가을사랑이여 
나뭇잎 그림자 아래 종적조차 없으니 
그대여-어디로 가야 그대를 
그대여- 어디로 가야 그대를, 
어찌해도 그대에게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어 
우표 한 장의 그리움으로 
막막히 집을 나서 
천지사방 바람처럼 허공을 헤매일지라도 
난 호주머니 속의 그 종이쪽지를 
결코 꺼내어 읽지 않으니 

가을이면 
내 얼굴은 
점점 더 비석을 닮아가고 
가을이면 내 사랑은 
점점 더 
우표 한 장의 그리움을 닮아 
정처없이 정처없이 
바람의 가출을 일삼고 있음이여 


시집 : 미완성을 위한 연가 / 나남 

~~~~~~~~~~~~~~~~~~~~~~~~~~~~~~~~~~~~ 

땅에 떨어진 눈썹 


신의 연습장 위에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 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물음표, 

뒤주 안에 갇힌 왕자가 
어둠 속에 날아다니는 들불 도깨비불에 
홀려 
퍼얼펄 옷을 찢어버릴 때의 
피의 급류처럼 
때때로 내 몸속으로도 그런 광기 젖은 
물음표의 급류들이 뚫고 
지나가느니--- 

신령님이 세상과 하늘에 대해 
가장 붉은 글을 적으실 때에 
흰 뼈 
내 두개골의 가장 무심한 흰 뼈를 
그의 연필심으로 바치고 싶었었지, 
그리고 나머지 나의 몸은 
강물 어느 모든 강물 위에 누워 
말없음표처럼 
평화를 사랑하리라고...... 

나는 하나의 초라한 물음표, 
신의 나라에는, 물음표 가진 문장이 
필요없다 하여서, 
나는 하나의 
더디 지워지는...... 울음표...... 


왼손을 위한 협주곡 / 민음사, 2002 

~~~~~~~~~~~~~~~~~~~~~~~~~~~~~~~~~~~~~~~ 

촛 불 



하얀 무지개, 
전신에 온통 흰 멍이 들어서-------- 

침묵으로 견디며 
채찍을 맞고있는 사람처럼 

화려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내 몸속의 부처가 눈을 뜰 것처럼, 

슬픔이 성대해진다---------- 


시집 : 왼손을 위한 협주곡 

~~~~~~~~~~~~~~~~~~~~~~~~~~~~~~~~~~~ 

슬픔의 날품팔이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열심히 날품을 팔면서, 
돌아오는 것은 없지만 
돌아오는 것을 믿는 것은 야비한 일이라는 
정신적인 금언까지 믿으면서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바퀴벌레처럼 순정적으로 

시대는 바야흐로 교환의 시대여서 내가 가진 것으로 품을 팔아야 남이 가진 것을 얻어낼 수가 있지요, 나는 무엇을 가졌던가, 무엇을 가졌길래 무엇으로 나를 팔아넘길 수가 있을까, 나는 교환가치도 없고 생산가치도 없고 소비가치도 없는 그리하여 어디 가서도 교환이 안 되는, 교환불능의 순정이라는 자본만을 가진, 한 마리의 저능한 바퀴벌레처럼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되는 대로 날품을 팔면서 
팔 것이 없어서 슬픔을 팔면서, 
하얀 적십자병원 뜨락에 
힘없이 서서 

자기 피를 팔려고 
서성이는 사람들, 
어서어서 피를 팔아 
국밥 한 그릇 사먹기가 소원인 사람들, 
그것조차 아슬아슬 차례가 안 오는 
사람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슬픔을 팔아 끼니를 사고 
슬픔을 팔아 별빛을 사며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바퀴벌레처럼 굴욕적으로 


시집 ;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대학원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이상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 

시집 

「태양 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을 냈으며, 

산문집 

「33세의 팡세」「남자들은 모른다」「냄비는 둥둥」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을 펴냈다 


김승희:1952년 광주출생. 
시집<태양미사>(1979) 
<왼손을 위한 협주곡>(1983) 
<미완성을 위한 연가>(1987) 
<달걀 속의 生>(1989)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1991) 
제 5회 <소월시문학상 >수상(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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