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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선일보》시기의 시작품
《북향》시기가 막을 내려서부터 몇년후인 《만선일보》시기에 오면 우리 시의 수준은 질적인 변모를 보여준다. 따라서 광복전 우리 시문학의 전성기는 《만선일보》시기라 할수 있다.
《만선일보(滿鮮日報)》시기에는 당연히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과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에 수록된 시작품들이 포함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시선집이 중심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재 발굴된 《만선일보》의 자료가 실제 발행되었던 전체량의 절반도 채 되지 않기때문에 선집의 대표성이 특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선일보》는 1937년 10월 21일 기존의 우리글신문이였던 《간도일보(間島日報)》(1920년대 창간)와 《만몽일보(滿蒙日報)》(1933년 창간)를 통합하여 창간한 신문으로 당시에는 유일하게 존재했던 우리글 신문이였다. 그러나 《일본의 국책적 견지에서 만주국에 있는 조선인의 지도기관》1)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 전부가 일본의 국책에 따른것은 물론 아니였다. 현존하는 자료는 1939년 12월 1일부터 1942년 10월분까지인데 그중에서도 1939년 12월 1일부터 1940년 9월 30일까지만 영인본으로 간행되여있고 나머지는 결호가 많은데다가 마이크로필림형태로 소수의 도서관에 소장되여있다. 따라서 이 신문만을 가지고 이 시기 조선족의 시가문학을 검토한다면 전반적인 고찰이라 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우리 시문학작품을 모아놓은 시선집 2권이 있어 그러한 결함을 다소나마 극복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은 1943년(康德九年) 9월에 당시 신경(현재의 장춘)의 제일협화구락부문화부에서 간행했고 편집자는 박팔양(朴八陽)이다. 그리고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은 그 한달후인 1943년 10월에 당시 간도 연길에 있던 예문당(藝文堂)에서 간행했고 편집자는 김조규(金朝奎)였다. 두 편집자의 권위성으로 보나 간행된 시간으로 보나 이 두 시선집은 현존하는 《만선일보》의 자료보다 훨씬 대표성을 지닌다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두 시선집에 수록된 시작품을 주요 텍스트로 하면서 《만선일보》에 게재된 여타 작품들도 참고하여 론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론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같은 시기 평자들의 재만조선인시인과 시작품에 대한 평가를 짚고넘어가는것도 의미가 있을듯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김우철(金友哲)의 《만주 조선어시단과 시인》2)이다.
이 글에서 김우철은 《今日 우리가 作爲하고잇는 詩는 本能陶醉의 山새 울음도 안이오, 哀傷에 함초롬히 저저 時世를 詠嘆하는 風月調의 그것도 안이오ꠏꠏ 單純한 感情의 素朴한 表白도 안이다. 今日의 詩人은 自己가 營爲하고잇는 時代에 對하야 無意識일수 업스며 <아리스토레쓰>以後의 <詩學>에 對해서 無關心일수 업스며 文字의 機能과 表現方法(形式)이며 그박게도 새로운 言語의 採擇 밋 創造에 骨머리를 알어야 한다.》고 전제하고나서 1939년과 1940년년초 사이에 《滿鮮日報》를 통해 발표된 재만조선인 시인과 시작품에 대해 일일이 평을 달고있다.
그는 1년간 약 40명에 가까운 시인들의 시작품 70여편이 선을 보였다고 하면서 그중에서 특히 咸永基, 李達根, 韓竹松, 鳴泉, 姜海心(姜彬) 등 5명 시인의 시작품이 그 량이나 질로 보아 《殊釉甲》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咸永基의 《養蜂》, 《안테나》, 《風景》, 《生活》, 《春雪》, 《肖像》 등 6편을 《회심의 가작》으로 보고 그중에서도 《養蜂》과 《風景》에 대해서는 《<이로니-칼>한 戱畵詩를 보는양십다. 哲學하는 詩人ꠏꠏ그의 詩는 쓰여진 部分보다 쓰여지지 안흔 部分에서 더 만히 讀者의 心絃을 울린다. <포에-지>를 만히 가진 이 詩는 <슬픔>을 슬퍼하지 안흐매로 不幸한 詩人일다. 누구는 말하리라. 그의 詩에는 詩的音律이 업다고. 그러나 그의 詩엔 散文에서 區別할수 잇는 獨自의 內在的 音律이 潛流하고잇슴을 본다.》며 극찬하고있다. 여기에 그가 인용한 咸永基의 《肖像》 일부를 보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스물한해가 沙漠風가티 -야니 나려간 草原에 낫서른 女人 하나 玉指環을 내여 내 가슴에 뭇기로 情火는 보채여 貴한 선물을 태우는 季節을 宣하다.
-《肖像》의 일부
이어 리달근(李達根)의 작품에 대해서는 《코리탑은한 書齋의 詩帖이 안이라 健康한 生活의 詩》라 하면서 《健康한 生活이 잇고 素朴한, 그러나 剛直한 表現이 잇고 젊은이의 脈을 두다리는 感情의 山脈이 줄기차게 덧다》고 평가하고 “아프로 詩學에 對한 探究와 技法의 鍊磨를 企待려 조흔 結實을 하리라 밋는다.”고 희망사항도 놓치지 않고있다. 이런 평가와 더불어 인용한 《저물무렵》이라는 이달근의 작품은 역시 당시 재만조선인 시인들의 현실인식의 자세와 생활태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저녁 煙香 妖女마냥 村落에 머리 불(풀)무렵 버섯가티 도다난 草舍는 夕映에 올라 손風琴 하나 펼 자리도 업는 좁은 欄干엔 潮水마냥 한 가난이 밀려오고
映窓을 고 흘러간 하늘가에는
鄕愁가 물새 되여 靜寂을 고
가난에 저리운 고닯은 얼골은
새로운 太陽을 마즈러 항아리에 빠진다.
思念의 馬車를 《오-로라-》로 몰고십허도 굴레를 쓴 가난한 말(馬)이 疲勞하다
아하 希望하는 思念아 툭 터져다오
저 山밋 옹달샘 솟듯이도
말발굽 달리는 七百里 遼東벌가티도!
이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달픈 삶의 모습들-《潮水마냥 한 가난》, 《鄕愁》, 《굴레를 쓴 가난한 말(馬)》과도 같은 억눌린 의식, 그런속에서도 《希望하는 思念을 툭 터》쳐보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 시작품에는 잘 형상화되여있다.
한죽송(韓竹松)의 요절에 대해 김우철은 《悲哀를 悲哀로박게 그러케박게 더 表白할줄을 모르는 이 歌人은 리마냥 울다가 울다가 제풀에 짓쳐 죽어갓다.》고 보면서 《詩人이 凡俗한 感傷에서 自己의 魂을 건지지 못하고 自己의 才致에 自己陶醉되여잇스면 平生 自己의 價値를 發見하야 向上시키지 못하고 安價한 詩的法悅에 生理되고마는게 일상》이라고 비판하고있다.3) 문학의 사회성 내지는 사회적가치를 강조하고있는셈이다.
그러니까 김우철은 시작품의 사회적 혹은 현실적인 의미를 강조한 동시에 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미를 두고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에 보아도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직 이민시인으로서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소흘히 다룬 한계를 보여주고있다. 사실 오늘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족시인들의 시작행위에 있어서 문학적인 공통성보다는 오히려 지역적, 민족적 특수성이 강조되여야 하였고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도 김우철의 한계성과는 관계없이 시인들의 시작행위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뚜렷이 드러나고있다.
따라서 《이민족의 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노력은 그들(조선족-필자)로 하여금 문화적유산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한것은 물론 외부의 변화로부터 비교적초연할수 있게 하였으며 그 결과 문화적유산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할수 있었던것이다. 정작 본토인 한반도에서는 밀려드는 외래사조에 의해 원래의 문화가 상당부분 변질되고있었지만 만주에서는 그런 외풍으로부터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4)라는 조규익의 분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보여진다.
1) 이민지의 서정
조선족의 문학은 이민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우리의 력사가 이민의 력사이기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민의 정서가 이민시인들의 시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쉽게 짐작할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시작품에는 이민의 정서를 표현한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김조규(金朝奎)의 《胡弓》5)의 경우 이국적인 정서와 이민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고있다.
胡弓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山 하나 없다
둘러보아야 기인 地平線 슬픈 葬列처럼 黃昏이 흐느낀다.
저녁이 되여도 눈을 못뜨는 이마을의 들窓과
胡弓의 줄만 골으는 瞑目한 이 마을의 思想과
胡弓
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불상한 曲調
기집애야 웨 燈盞을 고일줄 몰으느뇨?
늬 노래 듯고 어둠이 점점 걸어오는 데 오호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
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밤새 늣길려느뇨? 胡弓
(자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黃河로 나리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胡弓》의 전문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당연히 《胡弓》이다. 화자의 정감을 호궁에 기탁하여 토로하고있다 하겠는데 그 의미는 전통적인 시작품처럼 그렇게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거의 전부가 상징과 은유로 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암시하는 시행이 있다. 둘째행과 마지막행이다. 둘째행에서 화자는 호궁을 보며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山 하나 없다》고 했다. 이민지의 삶에서 느끼는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행에서는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까지를 반복한다. 이 시의 기본적인 정서요 느낌이라 하겠다. 이 두행의 기본적인 정서는 어둠과 슬픔이다. 그리고 이질감이다. 제3행의 이미지 또한 그러한 이질감과 슬픔의 반복이다. 그리고 《胡弓/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불상한 曲調》라는 두행을 통하여 슬픔의 강도를 높여놓고 이번에는 호궁을 《기집애》로 바꿔 부른다. 호궁이라는 사물을 의인화시킴으로써 등잔을 고르는 일과 호궁이라는 사물의 련관성을 돌출해내는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호궁이 울므로써 어둠을 끌어오는 행위는 고향의 추억이 되겠고 등잔을 골라 어둠을 밀어내는 행위는 반대로 《들窓》속에서의 삶이 될것이다. 이어지는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는 표현은 고향의 추억과 현재의 삶에 대한 적응이라는 의미를 대조시킴으로써 사실상 앞의 두행에 대한 반복이 된다.
아래의 《(자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黃河로 나리라)》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듯이 결국 호궁의 고향은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황하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시인은 일차적으로 호궁이라는 중국인을 상징하는 악기를 등장시킴으로써 동북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삶을 념두에 두고있는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인 조선족 이주민의 삶을 호궁이라는 이미지로써 표현한것이라 해야 맞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라는 두행의 의미는 오히려 조선인 이미지에 가깝기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늣길려느뇨? 胡弓》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라는 마지막행의 표현은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암울한 삶과 슬픈 운명의 이미지가 되는것이다.
김달진(金達鎭)의 《룡정(龍井)》6) 또한 이민지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車窓밖 豆滿江이 너무 빨러 섭섭했다
흐린 하늘 落葉이 날리는 늦가을 오후
馬車바퀴가 길을 내는 찔걱찔걱한 검은 진흙길
힌 조히쪽으로 네귀에 어찔러 발라놓은
창경 창경
알수 없는 말소리가 귀가로 지나가고
때묻은 검은 다부산즈자락이 나부끼고
어디서 호떡굽는 냄새가 난다.
시악시요 아 異國의 젊은 시악시요
아장아장 걸어오는 쪼막발 시악시요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
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
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
黃昏 길거리로 허렁허렁 헤매이는 흰옷자락 그림자는
서른 내가슴에 허렁허렁 떠오르는 조상네의 그림자.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
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
난생 처음으로 馬車도 타 보았다.
胡弓 소리도 들어 보았다.
어디 가서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고 싶고나
1련과 2련에서는 이국적인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첫행 《車窓밖 豆滿江이 너무 빨러 섭섭했다》의 이미지이다. 현실적으로 룡정에서는 두만강을 볼수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만강은 두만강을 건너온 이주민의 심경을 드러낸것이 된다. 그런데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에서 《새론 옛故鄕》은 아마도 여기가 고구려의 옛땅이였다는 사실을 념두에 두었을것이다. 이점은 3련의 내용과 맞물려있다. 소위 《호인(胡人)》들속에서 발견한 《흰옷자락 그림자》를 보며 《조상네의 그림자》를 떠올린것은 이주해온 이땅이 전혀 낮설지만은 않으며 따라서 여기가 이주민이 뿌리를 내릴 새로운 고향이 될수가 있음을 암시하고있는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민자의 처지는 《서른 내가슴》이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불행하고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면서라도 달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생존의 의지가 담겨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시인들의 정서속에는 이국땅과 이국인에 대한 편견도 동시에 존재하고있으며 그런 정서나 편견은 시작품에도 표현된다. 가령 상기 작품의 제2련에서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라는 시구에는 이민지 원주민과 이민지의 자연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표현되고있는데 비록 이민자로서 그러한 사람과 자연에 적응하기 이전의 주관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선입견, 즉 《거치른 만주땅》《미련한 만주인》이라는 선입견이 은연중에 드러난것이다.
유치환(柳致環)의 《합이빈도리공원(哈爾濱道裡公園)》7)에서는 그러한 이미지가 보다 뚜렷하게 표현된다. 《五月도 섯달갓치 흐리고 슬푼 季候/사람의 솜씨로 며진 밧 하나 업시/크나큰 느름나무만 하늘도 어두이 들어서서/머리우에 가마귀 終日을 바람에 우짓는》 등의 표현은 거치른 땅의 이미지다. 그만큼 이주민에게 있어 《만주》라고 하는 이민지는 춥고 거칠고 음산한 땅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록 자연현상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조선땅에서 이주해온 이들에게 있어 그러한 자연은 불모의 땅이고 차가운 기후가 되였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것은 이들이 이러한 춥고 거친 땅에 이주해올수밖에 없는 현실과 운명이 한결 더 춥고 외로웠을것이다.
그러한 느낌과 정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김북원(金北原)의 《봄을 기다린다》8)에서 답을 찾을수가 있다.
바라다 보아야 끝없는 地平이 끝없는 地平이
하이얀 눈속에 가로누어 봄을 기다린다.
도로기 쥐어매고 마음 거든이 벌판에 서면
눈부신 索漠이 視野에 서린다.
호졸하니 마을의 面貌가
그러나 덤직한 이야기가
마을의 斑史가
한줄기 香煙속에 풀린다.
꼬지깨의 草原이
故鄕의 平原이 되고
高梁의 平原이
벼이삭의 바다가 되는동안
내사 수염과 靑春을 바꾸었고
안해는 새아이의 어머니가 되였다.
잔뼈가 굵어진 故鄕말이뇨
洛東江물을 에워 젖처럼 마시며
아매사 할배사 살엇드란들
그것이야 아스런 옛이약이지.
오붓이 點點한 우중충한 집옹이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
봄을 기다린다.
비록 오색기가 만주국의 국기였으니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봄을 기다린다》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땅에서의 삶이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찬 삶이 되였다고 하였으니 조금은 현실순응적이라는 혐의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친일시라고 보면 안될것이다. 오히려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대를 이어 살아가려는 민족생존의 의지가 담겨있다 해야 할것이다. 그러니까 이민지의 자연환경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은 다분히 적응의 문제였음을 확인시켜주는셈이다. 따라서 이제 고향땅에서 쫓겨난 서러움이 조금씩 잊혀져감에 따라 그러한 불쾌감도 조금씩 색이 바래지며 심지어 이민지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낼수가 있었던것이다.
이는 곧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잔뼈가 굵어진 故鄕》은 《아스런 옛이약이》가 되였고 화자는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에서 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운명이요 처지임을 자인하고있는것이다. 이것은 숙명적론인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을 확인하는 생존의 의지이다. 윤해영(尹海榮)이 《해란강(海蘭江)》9)에서 이민지의 대표적인 강인 해란강을 《寂寞한 江이로다./거룩한 江이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강으로 인식하고 노래하고있는것도 이와 같은 차원이라 하겠다. 이민지의 자연과 좀더 가까워지고 이제 곧 하나가 되여감을 뜻하는것이다.
윤해영은 특별히 그러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시적인 관심을 많이 보이고있다. 앞의 《해란강》에서 화자는 자신의 현재 삶의 현장을 찬미하고있다면 《오랑캐고개》라는 작품에서는 오랑캐고개를 3단계 력사의 상징적이미지로 그리고있다. 《二十年前》에 오랑캐고개는 《豆滿江 건너 北間島 이도군 들의/아담찬 한숨의 關門이엇다.》고 했다. 간도이주민들은 대개 두만강을 건넌후 이 오랑캐고개를 넘어 북간도땅에 들어섰던것이다. 그리고 《十年前》, 이 고개는 《밀수군 절믄이들의/恐怖의 關門》이였다고 했다. 그만큼 이주민의 삶이 어려웠다는것을 의미할것이다. 그리고, 《오날 이고개엔/五色旗 날부》낀다고 했다.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가고 희망의 기쁜 노래만이 넘치는 고개가 되였다는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어용적인 작품의 혐의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냥 현실에 순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괴뢰만주국의 현재 삶을 어느 정도 찬미하는 의미가 드러난다. 그만큼 만주국의 정치문화적담론의 영향이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1938년10)에 쓴 작품임을 전제하면 그 심각성이 짐작될것이다.
윤해영의 정체성 확인은 력사에 대한 감개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발해고지(渤海古址)》11)라는 작품이 이에 속한다. 자신이 현재 영위하고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옛날옛적 조상의 땅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것이다. 특히 《기와 片片 어루만저/懷古에 잠기우면/저 언덕 밧가는 農夫/그 時節 百姓인듯!》라는 표현은 시인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천청송(千靑松)의 《先驅民》12)에서 선구민을 통한 력사의 회고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좀더 궁극적인 확인의 방식이라 할수가 있다. 작품에서는 《移住民》《酒幕》《雪夜》《江東》《墓地》 등 5장에 걸쳐 이주민의 고난사를 회고제시하고있다. 《移住民》과 《酒幕》에서는 이주민이 오랑캐령을 넘어 북간도에 들어와 불모의 땅을 개간하는 모습과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서러움을 표현하고있다. 특히 《낫선 첫이 서글푸기에/닭이 홰를 처도 날이 새어도/흑탕갓치 취할 胡酒가 되게 그리웟겟다.》는 표현에서 이주민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어 《雪夜》에서는 불모의 땅에 정착한 이주민의 단조롭고 고적한 삶의 양상들이 한 가정의 지극히 민족적인 표상들을 통해 드러난다. 사실 이 장에 나오는 가족의 삶은 조선의 어느 화전민가족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작연에도 그럭계도 이런날 밤/호우적이 마을에 들어 섯드라오.》라는 표현은 이들이 호우적이 득실거리는 불모지의 이주민 가족임을 금방 확인시켜준다. 그에 이은 《江東》이라는 장에서는 그러한 불모의 땅에서마저 삶을 보존하기 어려워 강동의 아라사(러시아)에 나간 랑군을 시름겹게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고있다. 물론 화자의 랑군이 강동에 간것은 단순히 돈 벌기 위해 갔을수도 있지만 력사적으로 강동땅 즉 쏘련 원동지역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랑군이 독립운동가 혹은 반일투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장인 《墓地》는 너무나도 슬픈 이주민의 운명을 제시하고있다.
靜穩의 집
무덤은 너무나 寂廖하다
하도 故鄕을 그렷기
넉시나마 南을 向했도다
외로운 밤엔
별빗치 慰撫의 손을 나린다는데
墓標업는 무덤들이
옹기 옹기 정잡(답)계(게) 둘너안젓구나!
눈보라 사나웁든
매듭만흔 歷史를 이얘기 하는거냐.13)
죽어서마저 고향이, 고국땅이 그리워 《넉시나마 남을 향》했다는 표현이야말로 이주민의 슬픈 운명의 상징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또한 《墓標업는 무덤들이/옹기 옹기 정답게 둘너안젓구나!》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 화자는 묘지를 또다른 이주민의 삶으로 인식하고있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이는 곧 이주민의 제2의 고향이 바로 여기, 북간도땅임을 확인시켜주고있기도 하다.
함형수의 《歸國》14)만큼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뼈아프게 표현하고있는 작품도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 여기서 귀국은 조선땅에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자는 고국의 사람들이 자신이 갔던 곳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상념은 오히려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데에 미친다. 이처럼 이제 자신은 더이상 고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은 정체성의 분렬에서 비롯되는것이다. 《먼- 하늘 테서/총과 칼의 수풀을 헤염처/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뭇럿스나/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肉體엿도다》라는 표현은 정체성의 분렬을 야기시킨 일종의 련옥(煉獄)행과도 같은 체험을 보여준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갔었던 그곳에서의 체험에 대한 개괄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체험은 이제 삶 자체가 되여버렸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言語를 배웟고 새로운 行動을 배웟고
새로운 나라(國)와 새로운 世界와 새로운 肉體와를 어덧나니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로다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라는 표현은 앞의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표현을 좀더 강하게 드러낸것이라 볼수 있는데 그만큼 화자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었음을 강조한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화자는 고국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현장에 적응된 새로운 정체성의 소유자가 되였다는 의미로 파악되는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이 될것이다.
중국인 원주민과의 조화로운 상생은 이주민 생존의 중요한 요인이라 할수 있다. 조학래(趙鶴來)의 《滿洲에서》(獻詩)15)는 그러한 이주민의 지혜와 생존욕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여기서 괄호안에 표기된 (獻詩)라는 메시지는 이 작품을 수록한 시집이 1943년에 간행된 것이고 또 기본적으로 만주국 건국 10돐을 기념하면서 편집된 시집이여서 괴뢰만주국 건국에 바치는 시라는 혐의가 있으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작품에는 만주국이라는 국체에 대해서보다는 만주국내 중국인 원주민에 대한 감사의 메세지가 더 뚜렷하다.
가슴은 샛발간 장미로 얼켜
닙히 질가 두려워 대견히도 간직함니다
언덕은 숨고
작나무 바람잔 벌판
난대서 손수건 흔드는 당신들이어
고향도 집도 모두 버리엇슴니다.
언제든지 고웁고 아름다운
장미 송이를 안고
먼 동산으로
시들지 안는 세월을 차저왓슴니다.
당신들이 항용 조와하고
그리워 하시든……
이주민에게 있어 현재 삶의 현장은 사실 남의 나라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이 바로 중국인 원주민이다. 따라서 이주민의 립장에서 중국인 원주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인지상정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땅을 통치하는 정부가 고국의 땅을 강점한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라는데 문제가 있겠는데, 그러나 일제에 대해 추호의 불만이나 저항의 감정을 드러낼수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라고 강요받는 상황에서 정부에게가 아닌 이땅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러낸것은 오히려 정직한 자세였다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한편 향수, 혹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이민지의 서정중에 빠뜨릴수 없는 내용이 된다. 또한 고국에 대한 향수는 정체성 확인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사상이요 정서이기도 하다. 이주민은 언제나 민족적정체성과 국민적정체성이라고 하는 2중의 정체성을 소유할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즉 우리 조선족이주민은 단군의 후예라는 민족적정체성을 타고났으면서 동시에 만주국이라고 하는 하나의 새로운 강역(疆域)내에 몸담고살면서 만주땅의 자연지리적환경과 만주국이 추구하는 정치와 문화적인 담론이라고 하는 인문적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향수, 혹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의 자연적인 로출이면서 동시에 정체성 확인의 한 형태가 되는것이다.
한편 향수는 인간에게 있어, 특히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이라 할수 있는 정서이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 오래 있게 되면 고향이 그리워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그리움은 강해지며 또 고향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음속에 부각되는것이 자연스럽다. 이때의 고향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현실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할수도 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온 원인이 고향을 잃었기때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과거의 고향에 대비되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부정적일수밖에 없다. 조선족 이주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던것은 실향의식이였다. 타의나 혹은 자의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타의에 의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안타까움으로 시화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애절함은 당연히 일종의 저항이나 적어도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볼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비록 이런 시작품속에서 드러난 저항의식은 발견되지 않더라도, 진한 향수 그 자체가 고향을 등지고 고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일제와 그 친일 특권계층에 대한 무언의 항거이고 분노의 표현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 류형에 속하는 시들로서 제목이 고향이나 고국과 관련된 시작품만 해도 김병기(金炳基)의 《그리운 故鄕》16), 최봉록(崔奉錄)의 《思鄕》17), 조학래의 《鄕愁》18), 송철이(宋鐵伊)의 《故鄕》19), 박상훈(朴相勳)의 《離鄕》20), 유치환(柳致環)의 《歸故》21), 함형수(咸亨洙)의 《歸國》22), 김달진의 《鄕愁》23)를 비롯해 다수 있거니와 고향이나 고국의 이미지, 향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다루고있는 시작품은 더구나 무수히 많다.
천청송의 《드메》와 《書堂》24)의 경우 고향의 이미지, 그리고 고향에서의 삶의 기억이 처절히도 아름답게 그려지고있다. 《드메》는 벽지에 있었던 화자 고향의 이미지가 되겠고 《書堂》은 그러한 춥지만 정다운 고향의 이미지와 어린시절 서당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추억이 뻐꾸기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재생된것이다. 《드메》의 《내 鄕愁도/차거운데//이런밤엔 으례 뻐꾸기가 울었다.》는 표현에 담겨진 차거움과 서러움의 이미지, 《書堂》의 《이런날밤엔 으례 마을처녀들이/서당방 사잇문에 옥수수처럼 열린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추억의 편린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만큼 이주민의 향수가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류치환의 《편지》25)는 편지라고 하는 고향 혹은 고국과의 통신수단을 매개체로 하여 향수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다.
(전략)
한나절 가도 드날이 업서
마을엔 그뉘나 사는지 마는지
개도 안짓고
닥도 안울고
앗든 消息
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
《편지》의 후반부이다. 앞부분의 정답던 추억에 이어지는 이 례문은 고향의 피폐상을 암시한것이라 할수 있다. 《개도 안짓고/닥도 안울고》라는 표현에는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하겠는데, 마지막 련의 《앗든 消息/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는 고향의 불길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이 암시된다. 그리고 편지라는 표제가 이 마지막 행에서 제시되고있기때문에 그러한 예측은 한결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흔히 말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과는 전혀 반대의 암시이고 또 그러한 암시를 제시하기 이전의 표현들이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이기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주민 시인의 시상속에는 이주민 자신들의 현재 삶의 환경, 생존의 문제와 고국에 두고온 고향땅과 고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공존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이주민의 정체성이기때문이다.
송철리(宋鐵利)의 《도라지》는 고향과 고국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수 있다.
도라지 피면 八月도 피고
八月이 피면 향수도 피드라
산,
물,
길,
돌쇠,
갓난이,
삽살개,
하염업시 쓰러보는 파-란 송이에
무지개마냥 아롱지는 흘러간 옛마슬.
그러나
도라지 지면 八月도 지고
八月이 지면 향수도 지드라.
《도라지》의 전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에게 있어 팔월과 팔월에 피는 도라지꽃은 향수이다. 팔월의 도라지꽃에 무지개마냥 《흘러간 옛마슬(을)》이 아롱지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팔월과 팔월에 피는 도라지꽃은 시인의 내면에 각인되여있던 옛날의 고향을 떠올리며 따라서 팔월과 팔월의 도라지꽃은 옛날의 고향으로 치환되면서 향수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그 옛날 고향의 모습은 다름아닌 《산,/물,/길,/돌쇠,/갓난이,/삽살개》인데 이는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히 고향을 떠난 이주농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미지들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정서가 담겨진듯싶은 이 작품이 보다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결 더 절박감과 근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 원인은 그 마지막 련의 의미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라지 지고 팔월이 짐과 아울러 향수도 진다 함은 이제 고향은 단순히 떠나온 고향이 아니라 다시는 갈수 없는 상실한 고향이 되고말았음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이것을 좀더 확장해석하면 이와 같은 고향상실의 의미는 곧 고향을 상실하게 만든 일제와 친일지배층에 대한 일종의 불만 내지는 분노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우리 시인들은 이민지의 서정을 통해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 확인은 향수의 표현에까지 연장되여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드러내고있다. 우리 문학이 이민문학으로 출발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대목이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3)|작성자 반벽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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