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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에스프리
행복한 인형놀이
강 영 환
시가 뭘까? 무엇이어야 할까. 알 수 없다. 몇 십 년을 묻고 답해도 모르겠다. 변화무쌍한 시에 언제나 농락당한다. 그러고도 또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달려간다. 그게 행복이다. 이루지 못할 영원한 짝사랑이기에 늘 목마른 행복감이다. 고통이 주는 어불성설 행복이랄까.
시가 무엇인지 답을 모를 때 또는 답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가 의식되지 않는다. 시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다. 나에게 갇힌 시가 자유를 잃지 않게 되었을 때 시에 갇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내가 시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도 없다. 시가 지닌 권위로부터 객관적 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내게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나는 그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싶다. 순전히 일방적인 나의 결정일지 모르지만.
피카소는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 6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도 아마 그림을 의식하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된 사실을 말한 것이리라.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피카소가 그림에 쫒기지 않는 것처럼 나도 시에 쫒기지 않게 된 때문일 거라 생각이 든다. 이제는 원고청탁이 오지 않아도, 시가 씌여지지 않아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연유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딱히 시의 소재 선택을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사람의 일이든 자연의 일이든 그것들은 모두 내게 사랑스러운 일이며 내 삶의 일부이기에 취사선택할 독선은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시에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에 온갖 정성을 쏟아 집을 정리하고 시에게 온 마음을 열어 둔다. 시와 잘 놀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은 모두 내 시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기에 시 쓰기가 한층 밝아졌다. 나는 지금 시와 함께 잘 놀고 있다. 누가 뭐래도 시는 내 인형놀이다. 어떤 옷을 입힐 것인가 즐거워하고 놓아두고 싶은 곳에 둘 수 있는 나만의 자유를 만끽한다.
2012년에 펴낸 <물금나루>란 시집 뒤에 ‘분노의 시론’을 말한 적이 있다. 내 시는 분노가 낳은 산물이라고 했다. 지금도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내 시는 분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분노가 삭혀지고 절여져 젓갈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격한 감정이 지나간 뒤에 남는 그 허무 속에서 시를 기다리는 일에 또한 조급하지 않는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될 수 없고, 시가 시 이외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오든의 말을 잘 알고 있기에 내 영혼을 울리고 가는 작은 소리까지 경청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 시는 분노가 지나간 길에 남는 티끌이며 세찬 비가 남긴 바위 위 자국인 것이다.
언젠가 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부터 ‘어렵고 힘들면 까짓 거 시를 쓰지 않으면 된다’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엔 흥분하였다가 나중에는 그래 시가 생에서 대수가 아니라는 거다. 딸아이도 아빠가 시를 쓴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시란 결국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는 내게 그동안 젊은 시간들을 투자하여 혼자만 않는 가슴앓이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시와 노는 일이다. 즐겁게 희희낙락하며 함께 고민하기도 하고, 함께 울기도 하고, 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하며 자유롭고 싶은 내 멋대로인 시를 만나는 것이다.
시를 벗어나야 진정한 시가 보일 것이고, 멋진 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그를 지상에 불러 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의식하지 않고 쓰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연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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