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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김남조 - 정념(情念)의 기(旗)
2015년 12월 18일 01시 37분  조회:3994  추천:0  작성자: 죽림


정념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펄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작자 소개 



김남조(金南祚: 1927 - ) 대구 출생. 서울대 사대 국어과 졸업. 숙명 여대 교수, 1951년 첫 시 집 '목숨'으로 등단. 종교적인 심성으로 인간의 사랑과 인내, 신의 은총 등을 노래. 40 년대 노천명의 뒤를 이은 50년대의 여류 시인. 시집 '풍림(楓林)의 음악'(1963), '사랑 초서'(1974), '동행'(1980), '바람 세례'(1988) < 깨어나소서 주여>(1989), <그리움처럼 빛처럼>(1989), <겨울꽃>(1990), <믿음을 위하여>(1991) 등이 있음 

작품 경향 : 김남조 시의 정신적 지주는 카톨릭의 사랑, 인내,계율이다. 따라서 , 거의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신에 대한 은총과 인간의 사랑, 그리고 밝고 경건한 삶에 대한 예찬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법 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성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강조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리듬 때문이다. 

요점 정리 





성격 종교적, 기원적 

심상 시각적, 비유적, 상징적 심상 

어조 고독, 고뇌, 비애를 극복하려는 기원 

표현 직유와 상징에 의한 표현 

주제 순수한 삶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기원 

구성 : 제1연 - 약하고 고독하며 번민하는 존재로서의 자신 
제2연 - 인간이기에 겪어야 할 한계 - 혼란, 열기 : 번민, 갈등, 욕망 등 
제3연 - 인간세계로부터 음악세계로 나아감(평화, 안정) 
제4연 - 내면세계의 평화를 성취하고 싶은 마음 -고요히 다스리는 내면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일 
제5연 - 단순한 애정의 대상자가 아닌 모랫벌 같은 마음씨를 가진 벗을 찾음 
- 벗 : 번뇌, 열정으로부터 초탈한 존재 
제6연 - 1연 1행의 반복(소망의 강조) 
제7연 - 소망의 경지에 가기 위해 울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는 나 





어휘와 구절 


보이는 이 없는 시공에/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 아무도 '나(기)'를 보아 주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홀로 자신의 고독을 느끼면서, 신의 존재 앞에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왔다는 의미로 신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고독한 시적 자아의 자성(自省)의 자세를 보여 준다. 

스스로의/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비애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번민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암시한다. '혼란'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열기'는 신에 대한 투명한 의식을 가로막는 인간적인 욕망을 암시. 순수한 인간적 삶을 위한 깊은 애정. 

나에게 원이 있다면/뉘우침 없는 일몰이 ; '내'가 희구하는 것은 뉘우침이 없는 시간 내지는 세월이나 순수한 삶이라는 의미이다. 즉 뉘우침이 없는 하루하루가 꽃잎처럼 쌓이는 삶,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벗은 없을까. ; 순수한 삶을 갈망하는 내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만한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지닌 존재는 없는 것을까하는 의미이다. 

때로 울고/때로 기도드린다. ; 신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구절로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에 대한 절망 때문에 울고, 신에 의한 구원을 갈구한다는 의미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마음 속에 움직이는 갈등, 번민을 넘어서서 영혼의 순수함과 평화를 얻고자 하는 소망을 노래한 시이다. 마음을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비유하여, 간절한 소망과 기도의 자세를 가시적(可視的)으로 형상화했다. 
김남조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는 `사랑'이다. 초기시에서는 섬세한 감성과 정감으로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았고, 후기시에 와서는 종교적 성향이 짙어지면서 사랑의 의미를 지상적(地上的)인 것에서 보다 근원적, 초월적인 방향으로 심화시키는 쪽으로 변화했다. 위의 작품에는 이러한 후기시로 옮겨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에서 시상의 주축이 되는 두 요소는 `스스로의 / 혼란과 열기'라는 구절과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 고요한 꽃잎인 양 쌓여가는 / 그 일'이라는 구절 속에 담겨 있다. 앞의 것이 인간 존재의 욕망, 번민, 갈등에 해당한다면, 뒤의 것은 이러한 것들을 고요하게 다스리고 고요한 내면 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마음을 은유하여 표현한 기(旗)는 바로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앞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후자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노래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일반적인 연가(戀歌)의 님과 달리 뜨거운 애정의 상대자가 아니라 모든 열정으로부터 초탈한 마음을 지닌 벗이다. 즉 열정을 초월하고, 지극한 비애조차도 잔잔하게 다스려서 `맑게 가라앉은 /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에까지 도달한 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경지가 곧 이 작품이 지향하는 궁극적 지점이다. [해설: 김흥규] 

김남조의 시는 수직·수평의 구도가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 기둥, 깃발' 등이 그것이다. 이 시에서는 깃발을 통해 화자의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기(旗)'는 이중성을 지닌다. 지상에 박혀 있으면서도 하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상은 한계 상황이고 하늘은 자유의 공간이다. 인간이 지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숙명이다. 그런데도 지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내부에 존재하는 것도 인간 조건이다. 이런 인간 존재의 모습을 '기'로 표상한 것이다. 

제목의 '정(情)'과 '염(念)'은 이런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데, 인간적 삶의 모습이 '정'이라면 '염'은 초월적 삶의 모습이다. 인간적 고뇌와 초월에의 기도를 함께 지니고 살아가는 화자는 그대로 '정념의 기'가 되는 셈이다. 

이 시의 기독교적 성격도 이런 구도 속에 형상화되는데, 기도와 인고의 성숙한 모습은 하늘을 향한 끊임없는 지향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화자는 하늘에 쉽게 도달하려는 염원을 가지지 않느다. 꽃잎이 쌓여 가듯, 비애가 무겁게 가라앉듯, 하나씩 쌓아 가며 마침내 하늘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 속에는 수없는 눈물과 기도가 쌓여 간다. 그리하여 깃대도 더욱 단단해져 간다. 

김남조 시의 기도와 고독, 인내의 모습은 이런 구도 속에서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사랑과 염원의 깃발로 표상하고 있다. 붙박인 푯대 끝에서 먼 곳을 향해 가냘픈 기폭을 나부끼고 선 존재, 바라보는 곳은 아득히 멀고, 나를 바라보는 이가 없는 허허로운 공간에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부끼고 있다. 정념의 대상은 멀기만 하고 나는 알아줄 이 없는 고독한 모습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치솟아 오르는 정념의 열기는 스스로만 타 가눌 수 없다. 눈 오는 거리에 서면 아득히 그늘이 드리워지고 마음은 안식에 젖는다. 눈이 자아내는 고요와 안식과 서정의 분위기에 젖기도 한다. 

뉘우침 없이 종말을 맞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보아주지 않아도 내면에 가득히 쌓아 올린 순결한 그리움, 차곡차곡 쌓인 애뜻한 고독감, 그것은 꽃잎처럼 쌓여 가는 일몰(日沒)의 광경과 같으며,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비애감에 젖어 있는 사람, 명랑하지 않지만 성숙한 슬픔의 소유자, 그 맑은 애상(哀傷)을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벗으로 사귀고 싶다. 

나는 정념으로 나부끼는 깃발. 보는 이 없어도 나대로 고뇌하고 기원하며, 고통으로 울기도 하고 때로 순결한 영원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나의 고독한 실존.('한국 현대시 제대로 읽기'. 송승환) 
김남조(金南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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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예술가명 : 김남조(金南祚)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생몰년도 : 1927년~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전공 : 시
 
김남조 시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의 계율이다. 이 때문에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긍정과 윤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종교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배경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욱 짙고 깊이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한편 기법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성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승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리듬 때문이다. 
김남조는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들어갔는데,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특히 <목숨>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뜨거운 인간적 목소리가 조화된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두 번째 시집 <나아드의 향유>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념이 한층 더 강조되고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이후의 시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정조를 짙게 깔면서 더욱 심화된 종교적 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열의 표출보다는 한껏 내면화된 기독교적 심연 가운데서 절제와 인고를 배우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시는 시집 <겨울 바다>에 이르러 정감의 세계를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통해 묘사해내면서 더욱 정갈해진다. 감각적인 언어와 동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구어내고 있는 시 정신의 풍요로움은 정념의 시를 추구해온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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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전집
(서문당,1983)]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김남조는 일본 큐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사범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인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1954년부터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회 자유문학가협회 문학상, 제2회 오월문예상, 제7회 시인협회상, 제33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발간된 시집은 모두 30여 권으로, 비교적 다작(多作)의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목숨>, <나아드의 향유> 외에도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 <잠시, 그리고 영원히>, <김남조 시집> 등을 대표시집으로 꼽을 수 있다. 1983년 서문당에서 <김남조 시전집>이 간행된 바 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약력
 
1921년 경북 대구 출생
1944년 일본 후코오카시 큐슈여고 졸업
1948년 <연합신문>에 <잔상>, <서울대 시보>에 <성숙> 등을 발표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 마산 성지여고·마산고 교사
1953년 이화여고 교사 / 서울대·성균관대·숙명여대 등 강사
1955년 숙명여대 전임강사
1958년 숙명여대 조교수
1961년 숙명여대 부교수
1964년 숙명여대 교수
1981년 가톨릭문인회 회장
198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 교육개혁심의회 위원
1986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1987년 방송위원회 위원
198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1990년 제12차 서울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93년 숙명여대 정년퇴임 · 명예교수
2000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상훈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상 - <나무와 바람>
1963년 오월문예상 - <풍림>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1985년 서울시문화상
198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2년 3·1문화상
1993년 국민훈장모란장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0년 지구문학상(일본 제정)
 
 
    저서
 
 
 
• 시집
<목숨>(1953) <나아드의 향유>(1956)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1967) <달과 해 사이>(1967) <설일>(1971) <사랑초서>(1974) <동행>(1976) <빛과 고요>(1982) <시로 쓴 김대건 신부>(1983)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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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드의 향유
(산호장,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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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시집
(상아출판사,1967)]
 
 
• 단편소설집
<아름다운 사람들>(1984)
•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4) <시간의 은모래>(1966) <그래도 못다 한 말>(1968)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 <여럿이 혼자서>(1972)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7) <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79) <사랑의 말>(1983) <생각하는 불꽃>(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1)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작품세계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
 
(……) 나와 시는 동거인의 관계이다. 둘은 오랜만에 민감한 사이였고, 무수한 시행착오와 갈등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얼마간 화친의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전날엔 긴장과 탄력을 유지했다 한다면, 이즈음은 헐렁한 사이로 편하고 자연스럽다. 오십 년 이상의 연륜을 포개면서 갈등과 격돌, 체념과 관용의 곡절들 끝에 겨우 다투지 않게 된 부부나 연인 사이처럼 되었음이 근래의 실정이다.
“미국엘 가서 사막을 보았어.” 내가 말을 건네면 그는 대답한다. “알고 있어. 나도 함께 갔으니까”라고. 
이럴 때 나는 따뜻해진다. 귀국해 그간에 미루어 둔 글과 다른 일거리들을 떠올렸으나 민망하게도 며칠간 쉬어버린다. 쉬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여행을 함께 다닌 이들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충격과 감동을 그칠 새 없이 안겨주던 대륙의 산하, 그 절묘한 풍광들을 떠올렸다. 도처에서 영원성의 모상을 그리고 소멸과 탄생의 거대한 드라마를 볼 수 있었으며 대자연에도 아니, 대자연에야말로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누적되어오고, 현재에도 끓는 용암이 그 자신의 살결을 뒤덮거나 거대한 수림을 일시에 불사르는 일이 생겨남을 알게도 되었다. (……)
문학은 종이 위에 먹을 적시는 서술이기 전에 분명한 획을 그으며 지나가는 삶 자체일 것이다. 물론 현장성이 곧 문학인 건 아니다. 그러나 문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관념 과잉과 체험 공백 등은 심각한 허점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준령과 절벽을 모르며, 살아있는 진실의 중심을 꿰뚫는 일에선 그 먼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
창작이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시와 시인의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찾아내는 일, 그 중요 부분을 포기하게 되기에 말이다. 미래의 시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찾아내는 이로 하여금 빛나는 탄생이 될 것이기에 시인은 끝없이 새로운 진실에 육박해야 한다. 밝은 눈에만 보이게 될, 청결한 출생들……. 이를 찾으면서 분발하는 이들 중에 부디 나도 있으려 하느니.
- ‘나의 시는 나의 동거인이다’, 김남조,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김남조>, 문학사상사, 2002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평론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가령 이육사는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올 초인’이란 그의 시구와 더불어 광야에 말 달리는 선구자, 민족의 앞날을 내다본 예언자의 풍모로서, 윤동주는 고뇌하는 나르시시스트, 청교도적 순결성을 지닌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지? 또 김수영-하면, 비리와 팽팽히 대결하려는 반골정신의 표본쯤으로 독자들에게는 알려져 있다고 본다.
이런 뜻으로, 필자는 시인 김남조를 시의 전당을 지키는 여사제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시, 기도의 시를 누구보다도 많이 또 철저하게 써온 이 시인은, 들끓어 오르는 정념을 순백의 사제복으로 감싸고, 영과 육의 갈등,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과의 양면성을 변증법적으로 합일시키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이도 생각되는 것이다. (……)
김남조의 등단은, 여느 시인들처럼 누구의 추천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그의 시가 실렸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시집을 간행함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졌다는 데 묘미가 있다. 단독으로 시집을 간행했다고 해서 문단인의 관심을 끈다거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는, 처음부터 완성도가 높은, 만만찮은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폐침윤을 앓고 있던 젊은 여성의 감수성, 이성에 대한 막연한 설렘, 전화(戰火)로 황폐하게 된 조국의 산하, 피난민의 물결과 생존의 몸부림,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으로 삶의 절실함을 목청 높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연계정보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관련도서
 
<김남조 시전집>, 김남조, 서문당, 1991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김남조>, 김남조, 문학사상사, 2002
<한국현대시연구>,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한국현대여류시에 나타난 애정의식 연구: 모윤숙, 노천명, 김남조, 홍윤숙 시를 중심으로>, 김복순, 서울여대 박사논문, 1990
 

 

 

 

 
대시인의 냉철한 작가 정신과
표절 논란 뒤에 숨은 신경숙

자기복제마저 용납하지 않는 작가 vs
                                       창피를 모르는 몸
 
  강다연기자 
 
   
▲ 김남조 시인

시인 김남조는 최근 ‘예술의 기쁨’ 개관식 겸 ‘제29회 김세중조각상’시상식에서, “나는 60년 동안 900편의 시를 썼지만, 그 어느 한 구절도 지금에 다시 쓰면 안 된다”며, “남의 작품을 따다 쓸 때 ‘표절’이라 해서 그의 문학은 끝나고, 세상에서 말하는 절도행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글이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작가로서, 이 사태를 묵과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 공식 태도를 밝힌 것이다.

자기복제마저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작가 정신을 보임으로써 후배 작가들의 본보기가 될법한 발언이다. 다만, 신경숙이 그의 말을 새겨들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기쁨을 아는 몸”을 표절했으니 이제 “부끄러움을 아는 몸”이 되어야 하는 게 맞는 순서가 아닌가.

침묵하는 문화권력

문화연대와 인문학협동조합은 지난 15일,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를 주제로 끝장 토론회를 열었으나 '창비'와 '문학동네'는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문학동네'는 신경숙의 작품을 가장 많이 출판해 낸 곳이다. 지난 6월, 신경숙의 표절 행위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낸 비평가들에게 사전 협의도 없이 지상 좌담회를 제안했다 거절당한 후 더이상 성찰이나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어, 지상 좌담회 제안은 역시 “정치적 쇼”일 뿐이었다는 냉소만 키웠다.

신경숙과 창비, 문학동네의 반성을 촉구하는 문학계

   
▲ 이명원 평론가

하지만 문학계 반응은 직설적이고, 날 섰다. 신경숙이 인기 작가인 만큼 표절 시비를 더 확실히 가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신경숙이) 작가 개인으로서 표절을 인정하고 절필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숙의 작품이 이미 30여 개국에 번역돼 있는 만큼, 그의 표절 문제를 묵인하는 건 한국 문학의 수준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이어 조정래 작가도 "운동선수만 은퇴가 있는 게 아니라, 예술가도 '아 도저히 능력이 안 되겠다' 싶으면 깨끗이 돌아서야 한다”며 신경숙의 절필을 촉구했다.

가려져 있던 표절 의혹

신경숙의 단편 '전설'의 일부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번역본을 표절했다는 이응준의 주장은, 많은 이들이 의혹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누가 썼는지도 기억 안 나는 글을 몇 문장이나 거의 그대로 외우고 있기란 쉽지 않다.

이후 ‘엄마를 부탁해’(오길순의 ‘사모곡’ 표절 의혹), ’딸기밭’ (안승준의 ‘살아는 있는 것이오’ 표절 의혹),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표절 의혹), ‘작별인사’( 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표절 의혹)도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레이더에 걸려, 표절 논란이 더이상 묻히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됐다.

하지만 신경숙의 글을 좋아했던 독자들의 배신감과 분노를 읽지 못하고, '전설'을 출판한 ‘창비’는 "몇몇 유사성을 근거로 표절 운운은 문제가 있다.", “('전설'과 '우국' 중에) 굳이 따진다면 신경숙 작가가 오히려 더 낫다”는 황당한 입장을 발표해 환멸을 키웠다. 진실을 철저히 조사하기보단, 출판사의 매출을 지탱하는 스타 작가를 두둔하는 쪽을 택하며
“이미 과거의 ‘창비’가 아니다”,
“‘창비’가 아니라 ‘창피’다”라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었다.

작가와 출판사의 자정 능력을 믿는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이대로 잠잠해지지 않길 바란다. 문학계 대선배들과 평론가들의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표절은 범죄 행위이며, 표절로써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도 독자들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창비'와 '문학동네'뿐 아니라 다른 출판사와 작가들도 표절을 방지하고 근절할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길 바란다. 독자들은 조금 부족하고 수수해도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베낀 것이 아니라, 그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개성 있는 글을 원한다.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시상식 및 개관식

   

▲김남조 시인(김세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세중조각상 시상식과 ''예술의 기쁨' 개관식장에서.

젊은 시절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해 문학소년·소녀들의 우상이었던 김남조 시인(전 숙명여대 교수/김세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은 80대 후반인 지금도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겨울바다>, <그대 있음에> 등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자 교수였고, 유엔탑과 광화문 충무공 동상 등을 세운 조각가 고 김세중 전 서울대 교수의 부인이기도 한 그는 김세중 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다.

오는 14일, 예술인들의 둥지이자 무대가 될 문화공간 ‘예술의 기쁨’.(용산구 효창원로 70길 35) 개관식과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시상식을 앞두고 따로 인터뷰 스케쥴을 잡기 어려울 만큼 바쁜 김남조 시인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분명한 발음과 흐트러짐 없는 말투로 ‘예술의 기쁨’이 모든 분야 예술가들에게 장벽이나 문턱 없는 공간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달했다.

‘예술의 기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직접 지으셨는데, 예술 행위가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는 걸 단적으로 잘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세중 조각상이 29년째 시상되고 있지만, 3~40대 청년들은 수상자를 뽑는 5~60대에 밀려 장이 없었습니다. 그 지대가 너무 허전해 청년 조각상을 만들었고, 한국미술연구가들에게 시상하는 한국미술저작·출판상도 만들었습니다. 최근엔 저작물이 별로 없는데, 책이 잘 안 되는 시기니까요. 수상자의 수가 70명 가까이 되다 보니 내 생전에 그분들의 둥지를 마련해서 서로 만나고, 회의도 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문인들이 와서 출판기념회 하는 것도 좋고, 연극이나 서예 등의 분야 사람들이 대관하기 쉽게, 부담 없는 선에서 대관료도 책정했어요. 춘하추동 냉방·난방을 잘할 테니 와서 행사를 벌였으면 싶습니다.

김세중 선생님이 조각가였고, 김세중기념사업회에서 공간을 만들었는데요. 미술관으로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김세중 기념사업회에서 만들긴 했지만 김세중 미술관으로 붙이지 않고 ‘예술의 기쁨’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사실 ‘미술관’으로 이름을 붙이고 조건대로 정비하면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포기했어요. 미술관에서 문학행사를 한다면 거부감 느낄 것 같아서. 구청에서 좋은 건물에 강당을 만들고, 은행에서 건물 한 층을 내어 좋은 공간을 만들어도 그런 공간에서는 시인들이 시낭송할 의욕을 느끼지 않거든요. 편안한 마음으로 오라고, 예술 전반에 대해 열려있는 공간이란 뜻으로 ‘예술의 기쁨’이라고 붙였습니다.

김세중 선생님의 조각상도 존중하고 김남조 선생님의 분야인 문학 쪽도 염두에 두신 공간인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그걸 강조할 마음은 없습니다. ‘예술의 기쁨’ 건물은 그리 크지 않고, 총 건평이 230~240평 정도입니다. 강당은 조금 크게 지어서 150석 정도 됩니다만, 작은 방에서 작은 모임을 할 수 있게 하다 보니 김세중 교수 작품은 다른 장소에 두고 여기에 가져오지 않았어요. 김남조에 대한 자료집도 하나 놓지 않았죠. 그 집에서 60년 살다 이사 나왔으니 이제 다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여생을 살까 합니다. 노인이 하나 있으면 사람들의 접근도 편하지 않을 거고, 주방 등으로 평수가 깎이는 것도 원치 않아요.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 외관.(용산구 효창원로 70길 35)

이번에 개관하면서 청년조각상 수상자들의 전시회를 엽니다. 약 26명이 작품을 냈고, 대강당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도록 벽에 걸 수 있거나 규모가 작은 것들만 받았습니다. 역대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 전시는 30주년이 되는 내년에 하려 해요. 청년조각상 수상작가들이 아주 우수합니다.

음악도 세계적으로 칭찬받는 이들이 있듯, 조각 분야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문학은 상도 많은데 다른 분야는 상이 적어서. (상대적으로 시상의 변별력이 크죠) 상 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지는 않아요. 누적된 재능있는 이들 중에서 26년을 뽑다 보니 그중 훌륭한 작가가 많고, 올 해도 그 이들이 좋은 작품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세중 교수 작품들과 함께 한 자리에 놓는 것은 우리가 삼가기로 했어요. 그들의 잔치로, 그들의 친구와 부모가 와서 보게 하고, 전시 기간도 6개월로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어쩌면 전시 기간은 조금 줄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계절인 가을에서 초겨울까지 그분들이 작품을 자랑할 수 있도록. 조각가들은 개인전을 열기에도 어려운가봅디다. 좋은 화랑은 희망자가 밀려있고 중개 수수료도 비싸고요. 우리는 그런 거 일체 없고,(기자 주 - 전시는 하되 작품 매매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인 듯하다) 직접 보고 판단하도록 했거든요. 지금 다 걸어놨어요. 작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겸손하게 가장자리에 쭉 놨어요.

◇예술의 기쁨에서 어려운 예술가들 와서 마음껏 작품을 펼쳐 보이길

그간 수상했던 청년조각상 수상자 26명이 모두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지요?

3명은 외국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우수한 작가들이에요. 그들의 작품을 각각 하나씩 대형 스크린에 영상으로도 비춰줍니다. 총 16분쯤 걸리는데, 그게 재밌다며 오는 이들도 있다고 해요. 현대 조각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공부하는 이들이 원할 땐 자료를 찾아볼 수 있게, 앞으로 수상자들 자료를 체계 있게 정리하려 합니다. 행사 없을 때 김세중 교수 작품도 차츰 몇 개 정도는 가져와서 상설전시 해야겠죠. 올해 상을 받는 이완이란 사람은 나이가 어려요. 내가 본 적은 없지만, 리움에서도 전시를 했다 하고. 수상자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작가들이에요. 대부분 교수고. 우스갯소리지만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탔다고 하면 교수되기 쉽다는 말도 있어요.

음악회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죠, 작은 음악회. 특히 연극 쪽으로 마음을 많이 썼어요. 연극의 희곡은 어렵게 신춘문예 관문을 뚫어도 대체로 문장이 대화로 되어 있어서, 배우가 발성해서 사람들 앞에서 대사를 발표하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요. 시집이나 소설은 책으로도 나오지만요. 아주 어려워서 무대를 못 가지는 연극인 중에 우수한 사람이 많거든요. 내가 특별히 아는 인맥은 없지만, 좋은 연극 지도자들에게 내 뜻을 말하면 우수하지만 어려운 이들이 여기 오겠지요. 몇십 명이라도 여기 함께 앉고, 그 앞에서 공연하도록 스크린이라든지 좌석을 작게, 재밌게 해놨지요.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 실내

건축할 때 오래된 나무를 살리기 위해 중정을 만드셨다 들었습니다.

1955년엔 내가 숙명여대 교수가 됐고 결혼도 하고 조그만 집, 이 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이후 이층집으로 만들었다가, 가슴 아프지만 이번에 그걸 다 헐어버리고 이걸 지었어요. 옛날에 여기 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아카시아 나무 같은 건 베어버리고 한 그루만 남겨뒀어요. 그게 굴참나무예요. 5~600년 됐다고 해요. 이 나무 중간 허리쯤에 얕은 유리지붕을 씌우고 그 아래를 온실로 몇 해 썼더니 나무가 좀 상했더라고요. 그래서 에버랜드에 계시는, 식물 쪽에 경험 많은 분을 청해서 말을 들었더니 문제를 얘길 해주더군요. 16cm 정도가 이미 아주 안 좋다고, 그래도 지금부터 살릴 수 있다고 해서 링거도 꽂아 줬어요. 그러고 나니 이 나무가 이 집의 주인이고 어른이라 생각하게 됐지요. 이 나무를 우리 집에선 끔찍이 존경하고, 집을 지을 때도 나무 밑 흙을 다치지 않게 했죠. 정문으로 들어오면 나무가 서 있고, 나무 뒤에 건물이 있게 설계했고요. 그래서 나무는 잘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백 년 더 가겠지요.

‘예술의 기쁨’은 전 장르의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잖아요. 대관료도 저렴하게 책정하셨고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예술의 기쁨에서 행사를 열고 싶을 것 같은데, 경쟁이 몰릴 때 심사 기준은 있겠지요?

좋은 질문이네요. 아직은 행사 청탁을 안 받고 있어요. 죄송하게도 올해는 자체 전시나 행사로 채우려고 해요. 집 짓는 것과 개관하는 것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일단 열어놓고 나서 신청이 들어오면 되도록 그분들을 편하게 모시겠지만, 최소한도 예술성에 대해 고려는 할까 합니다.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은 올 수 없을 거예요.

   
▲'예술의 기쁨' 작은공간. 공연을 비롯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위한 공간이다.

올해는 손님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하지만, 내년부턴 줄겠지요. 대관 시작하면 첫 회부터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한 번만 길이 열리면 많은 인재가 찾아오지 않겠어요. 가령 누가 연극을 했을 때 친구들이 와서 봤는데 ‘나도 여기서 공연하고 싶다’든지, 시낭송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지요. 그런 희망이 모이면, 문학은 내가 봐도 알지만 다른 분야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들어서 좋은 작품으로 골라야지요.

지금 좋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건 아니더라도 장래성을 볼 겁니다. 명품이 오길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명품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뜻하는 거예요. 시라면, 신인이지만 좋은 작품을 가져와서 읽으면 참 좋지요. 친구들도 와서 함께하고. 희망 있는 젊은 작가들을 선정하고. 그렇게 몇 년 지나면 좋은 역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김세중 조각상 1회 수상자이신 심문섭 선생님이 ‘예술의 기쁨’ 개관으로 “그야말로 우리 집이 생겼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여태까지 성곡미술관이나 백범김구기념관 등 바깥에서 시상식을 했잖아요. 올 해 김세중 조각상은 더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참 좋은 말입니다. 수상자들이 이 집을 상속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 사람들도 와서 같이 어울리라는 건데, 신문섭 선생이 여기에 애를 많이 쓰셨어요. 자주 와서 이번 전시도 진두지휘했고요.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활달하고 성품도 좋지만, 두뇌도 굉장히 좋은 분이에요. 많이 도와줬죠.

셋째 아드님인 김범 씨와 며느님인 유현미 씨도 예술가이니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업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상금이 부족하다든지, 유지가 안 될 때는 가족들이 거기에 대해 짐을 져야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그렇게 되지 않게 운영하고자 해요. 가족이 관리에 개입하는 것보단 능력 있는 직원을 쓸 겁니다. 우리 가정은 ‘예술의 기쁨’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어요. 말하자면 아들들은 소유권도 없고 거주권도 없어요. 여기 와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런 차단장치를 마련하셨군요. 실제 운영은 김세중 기념사업회에서 하는 겁니까?

기념사업회라는 게, 김세중 교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대에서 퇴직금이 나왔는데 난 차마 쓸 수 없다고 했더니 머리 좋은 이어령 선생이 “조각가들은 작업도 힘들고, 작품을 집에 둘 공간도 없고, 작품 제작비도 많이 드니까 제작비를 지원하자”고 했어요.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그럭저럭 잘돼 온 것 같아요.

◇이 공간은 예술가들을 위한 나의 선물

많은 시집을 내 오셨는데, 요즘도 시를 쓰고 계신지요?

네, 지난해에도 <심장은 아프다>를 내긴 했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시인이니 누가 내 시를 칭찬해주면 좋지만, 어떤 이가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냈다더라 하는 식의 미담같이 자랑스러운 듯 비치는 건 부끄러워서요. 내가 여기서 떠나더라도 그대로 재밌게 운영하면서 내 선물이라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장차라도, 가능하면 기본운영을 유지하고 싶어요. 우리가 재단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것도 기록해서 서류로 옮겨놓게 진행하는데, 그런 데 필요한 최소의 인력, 최소의 냉·난방비만 들여서요.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 후엔 운영이 순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집이 사랑받게 되고, 이용자와의 유대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개관하느라)많이 힘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보람으로 생각할 겁니다.

대관 심사 기준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심사’라는 말은 강박감을 줄 수 있으니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예술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원로 시인의 배려에 ‘예술의 기쁨’의 분위기가 어떻게 운영될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는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 씨, 제26회 김세중 청년조각상 수상자는 영상예술가 이완 씨, 제18회 한국미술저작·출판상 수상자는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김홍희 씨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여성이 두 명이나 수상자 명단에 올라와 있어 눈길을 끈다.

최만린, 심문섭,서도호, 김태곤, 정현, 이용덕, 이불, 임송자, 강태성 등 역대 수상자를 일부만 꼽아도, 김세중 기념사업회가 세심히 선정한 작가들의 활약과 명성을 알 수 있다. 2015년 시상식은 7월 14일 오후 5시, 용산구 효창동에 신축한 ‘예술의 기쁨’에서 진행된다.

김남조 시인

   
▲김남조 시인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숙', '잔상' 으로 데뷔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2000.06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1998 한국방송공사 이사
1992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 소장

수상
2014.05 제25회 김달진문학상
2007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2000 제2회 자랑스런 미술인상 공로부문

주로 연가풍(戀歌風)이면서도 신앙적 삶을 고백하는 시를 썼다.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 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등을 펴냈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87)·〈그대 사랑 앞에〉(1987)·〈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8) 등을 펴냈다. <출처:브리테니커 백과사전>

 
 

김남조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김남조

1927. 9. 25 대구~.

시인·수필가.

주로 연가풍(戀歌風)이면서도 신앙적 삶을 고백하는 시를 썼다.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산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 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등을 펴냈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톨릭의 박애정신과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했고, 언어의 조탁을 통한 유연한 리듬과 잘 짜인 시형의 아름다움은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1958년 시집 〈나무와 바람〉으로 자유문협문학상, 1963년 시집 〈풍림의 음악〉으로 오월문예상, 1975년 시집 〈사랑의 초서〉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고, 1984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87)·〈그대 사랑 앞에〉(1987)·〈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8) 등을 펴냈다.

 

 

 

 

 

 

 

 

 

 

 

 

 

 

 

 

 

 

 
 


김남조 시 모음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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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
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아가(雅歌) 2 

김남조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
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
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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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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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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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상심수첩

김남조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
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
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
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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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詩人)

김남조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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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
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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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
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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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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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
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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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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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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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
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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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남조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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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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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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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
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
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
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
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
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
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

 

 

김남조 시비 목숨

위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93  -세미원

 

 

목숨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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