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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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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송수권 - 산문에 기대어
2015년 12월 22일 20시 23분  조회:7003  추천:0  작성자: 죽림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 일러스트 잠산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75)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랑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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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송수권(宋秀權, 1940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우리들의 땅》 등이 있다. 문공부 예술상, 전라남도 문화상, 소월시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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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입구 시의 동산>「산문에 기대어」

 

<영월 김삿갓문학상 시비>「새벽은 부엌에서 온다」

 

 <장흥 장평 계명성문학공원>「시골길 또는 술통」

 

 
   
 

등단작 〈산문(山門)에 기대어〉

얼마 만인가, 이 산문 안에 다시 온 것이…… 젊은 날의 한 해를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산문에 기대어〉가 있었다.
산문(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 4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산문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 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졸시 〈산문에 기대어〉

이 시에서 내가 쓴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이다. 즉, 무주고혼이다. 야산 같은 데서 이장을 하다 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 하나를 보았을 때, 그 터럭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친다.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흰 띠에 매달아 물속에 처넣었다 건져 올린 후 열어 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출가할 때에는 머리를 깎는다. 땅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로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 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어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 해한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 의지이다.

〈산문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당시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어느 여관방에서 갱지에 갈겨쓴 채 10편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간으로부터 “자넨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야”란 우스갯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나의 이 시를 표절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은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주가를 엄청나게 상승시켰다. 이 시는 1966년 봄, 24세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 날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 형식의 엘레지다.


부카레스트 1934

동생 수종(秀鍾)은 나와는 세 살 터울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생이 죽은 것은 1966년 3월 초순이었다. 제대복을 입고 허무증을 안고 돌아온 그 이튿날로 놈은 한내천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언덕 밑에서 자살을 했다. 놈이 먹다 남은 수면제 알약들이 군복 깃을 타고 흘러 들찔레꽃처럼 아침 이슬에 젖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날부터 점을 치면 죽어서도 놈은 입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장가 갈래’였다. 동남간 쪽 어느 마을에 색시를 보아 두었다거니, 아무 데 마을 색시는 마음에 안 들고 업살이 꼈다거니 제 주제는 생각지도 않고 횡설수설 떠들어 댔다. 그래서 생넋들끼리 결혼도 시켰다.(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만다라의 바다》 《아내의 맨발》에 있는 ‘겨울나비’ 참조)

그러니 시간 망각하는 법을 배우라. 시간이 지닌 의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라. 감상적인 기록의 모든 흔적들을 억누르고 곧 사라져 버릴 명상, 어릴 적 추억도 가을도 짓밟힌 꽃잎도 향수마저 억누르라     
 — 〈부카레스트 1934〉 중에서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니 가슴 속에서 놈의 영원한 무덤을 파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짐승처럼 울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1962년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고 곧 공군에 입대, 1965년 12월에 제대했다. 놈은 그 이듬해 3월에 제대했다. 놈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나는 중학교 교단에 발령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에게도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부터 미친놈처럼 〈부카레스트 1934〉를 즐겨 외고 다녔으리라 싶다.

망각하는 것, 이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비슬거렸고 놈은 한 살배기였다. 그는 젖도 못 먹고 자란 놈이었다. 어머니는 놈이 걸을 때쯤 늘 젖무덤에다 고춧가루를 발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곤 했다. 그 대신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먹였다. 
전주 예수병원으로 순천 알렉산병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떠돌아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모성을 잃고 자란 형제였다. 놈은 비슬거리다 중학교 때 어질병이 나더니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할머니도 가고 어찌할 수 없이 서모가 들어왔다. 열 살 때 그 어머니도 가고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7년간을 담괴가 터진 옆구리를 붙들고 고름을 쏟아내던 어머니, 그 무덥던 여름날 방 안은 고름 냄새로 찌들어 내 코는 마비되었다. 지금도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것은 그 후유증이다. 옆집 채마밭 가에 핀 치자꽃, 봄철에 핀 철쭉(개꽃)꽃을 꺾어다가 병상의 화병에 꽂아 놓았던 일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놈은 시원찮은 몸을 이끌고 올라와 날품을 팔고 애꿎은 일을 하며 학비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치사하게도 그 엽전을 긁어먹고 시인이 된 놈이다. 그는 입대를 했고 나는 학교를 나와서도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섬 중학교로만 10여 년을 떠돌았다.


붉은 황톳길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흘러……
고향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못살고 굶주렸던 고향이지만 그러나 마음에 살아 있는 고향은 따뜻하기만 하다. 내 고향은 연산군 때였다던가 파발마를 놓은 역이 생겼대서 속성을 역둘리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의 최남단 고흥반도다. 고흥읍에서 서북으로 20리를 더 들어가는 두원반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다 허물어져 가고 있다. 학은 죽실(竹實)을 먹고 사는 영험한 새이다. 바로 이 새가 살았다는 골짜기여서 학림(鶴林) 마을이고, 이 마을에는 학산(鶴山)이 우뚝 솟아 있다. 학산을 넘어가면 사적굴이 있고 사적굴이 있는 동산을 넘다 보면 바로 보성만과 득량만이 건너다보이는 바다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60여 호쯤, 그저 고만고만한 집들이 양짝, 음짝, 당산마을을 이루면서 창창한 대숲 바람에 잠겨 있다. 나는 양짝마을에서 자랐다. 내 시에 대숲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서모가 지어준 새벽 밥을 먹고 20리 길을 통학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1학년이었다. 아침이 늦으면 많이 굶고 가기도 했는데 놈의 어질병은 거기서 오지 않았나 싶었다. 큰 고갯길만 해도 자시치고갯길과 송치고갯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질컥거리는 황톳길이었고 마차나 소달구지도 이따금 황토 수렁길에 처박히는 등 갖가지의 추억도 많다. 그때는 운동화가 없어 검정 말표 고무신을 끌고 다녔는데 어떤 날은 맨발로 고갯길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신발 도둑들에게 도둑맞으면 영락없이 이 꼴이었다. 이 길은 어두웠지만 언제나 신선하게 열려 있었고 무한대의 시간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항상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쳤고 내 유년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신화의 불빛에 젖은 황토를 떠올리게 한다.
읍내에서 두원반도의 끝 대전 해수욕장까지의 50리 길은 아스팔트로 뒤덮여 교통량도 예전 같지가 않다. 마을 뒤의 득량만은 4km의 고흥 방조제가 들어서서 바다를 가르며 녹동항까지 이어져 바다는 죽었다. 훗날 시인이 되어서야 맨 먼저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신화적인 축제 이야기들을 시로 써가기 시작했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졸시 〈시골길 또는 술통〉

이 시는 1975년 등단 이후인 1978년쯤 쓴 작품이지 싶다. 제1 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신화의 불빛이 따뜻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나의 삶은 이 불빛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얻은 셈이다. 그것은 곡선의 상법이며 황토의 길과 대숲 바람 소리, 뻘로 이루어지는 나의 시 세계와 일치한다.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나의 시는 이 원형적인 자궁 속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나의 문학은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다시 솟아나게 했고 근원적으로는 고독과 모성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임홍재 시인

1966년 10월 16일 나는 중등학교 채용 순위고사에 합격되어 고향 언저리에 있는 영주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1년 만에 나주중학교 교사, 그리고 8개월 만에 이 세상 끝섬이 어딘가를 물어 초도중학교로 자원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동생의 자살은 이렇듯 나를 짓눌렀으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여수항에서 여섯 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중학교였다. 무려 6년을 주저앉았다. 그리고 상록학원을 열어 간판을 걸고 야학도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무인도를 돌며 낚시하는 재미로 소일했으며 문학잡지 한 권 읽은 적이 없었다. 31세 때 이곳에서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영주중학교 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 6년 사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큰애의 교육을 걱정하여 육지로 발령 신청을 했는데 또다시 고향 언저리 섬이었다. 과감히 사표를 쓰고 1973년 봄부터 아내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선암사였고 남명 스님을 만나 중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런데 남명 스님은 괴짜승이었고 밤마다 막걸리를 한 되 이상 들이키고 닭 한 마리를 먹어야 잠을 이루었다. 중이 된다는 것도 쉽잖아 보여 몇 개월 만에 서울로 튀었다. 이때 절방에서 문학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해서 초안을 잡았던 것이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몇 편이었는데 2007년 《월간조선》 2월호에 나의 문학산실인 ‘벽안당’을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1976년 또다시 순위고사를 보아 합격하고 발령받은 곳이 지도라는 섬의 지명중학교였는데, 이때는 어엿한 시인 교사였다. 1975년 3월경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과 함께 문학사상 주최로 ‘YWCA’에서 합평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시인이 임홍재 시인이었다. 그는 〈서울신문〉에 〈바느질〉이란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 〈염전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인연으로 197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2백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고 방학 때면 서울에 가서 만났는데 박용래 시인과도 친교를 텄다. 그가 청계천 다리에서 실족사로 죽은 후 《여성동아》에 2회에 걸쳐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가 죽은 2개월 후에야 사무실에서 되돌아온 편지를 받고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라면 친구였다. 20대에 등단을 못 하고 30대 중반에 등단해서 내 나이 또래의 시인이 없는 터라 1960년대 시인들의 모임에 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처지가 되었다. 안성농고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참배하고 오면서 서럽게 쓴 시가 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
먹뱅이 남사당패 어디 갔나
남사당은 내 고향
내 몸은 아프다
소리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설설 끓는 동지 팥죽
저녁 한 끼 시장한 노을 위에
식어가는 가마솥 뚜껑 위에
안성(安城)세지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이 내린다
비나리패 고운 날라리 가락 속에
눈물범벅이 진 네 얼굴
곰뱅이 텄다 곰뱅이 텄다
70년대를 한판 걸쭉하게 놀아보자던
네 서러운 음성 위에
동녹이 슬어가는 유기전 놋그릇들 위에
눈이 내린다
어스레기* 황혼을 부른 말뚝 위에
 
*어스레기: 어린 송아지
                                      — 졸시 〈안성장터―홍재 시인에게〉


광주시대와 변산시대

섬으로만 떠돌다 1980년 3월에 광주로 입성했다. 근무하던 광주여고는 5·18이 일어난 도청 옆에 있었다. 입성 2개월 후에 5·18이 일어났고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젊은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계엄 당국으로부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어 광주여고 삐라 사건, 홍남순 변호사와 김지하 시인 석방 기념 YWCA 시낭송 사건 등으로 늙은 형사와 함께 똑같이 출근한 것이 무려 2년, 드디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광여중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젊은 광장에서〉라는 80여 행의 시는 시집에도 넣지 않았다. 이로부터 효광여중, 광주학생교원 연구사 등 광주시대 15년을 마감한 것이 1995년 8월 31일이었다. 교장 진급이 되지 않을 바에야 명퇴를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떠돌이병이 도져 방랑 끼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주도행을 서둘러, 평소 절친이던 현규하 시인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낸 책이 《남도의 맛과 멋》이었는데 초당대학교 김창진 교수로부터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도의 맛과 멋》의 서설을 읽고 감동받았는데 대학의 교양국어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의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마침 동해 난바다 서해 뻘바다 제주 바람바다라서 제주 겨울바람을 피하고 싶어 곧 육지부로 나와 출강을 했다. 이어 광주여대, 그리고 순천대 김길수 교수가 문창과가 설립된 초창기라면서 출강을 부탁해왔다.

서재를 서귀포에서 변산 뻘밭 가인 격포로 옮겨왔다. ‘낙산일출 월명낙조’란 말처럼 변산은 노을 속에 핀 연꽃밭이었다. 수년간 음식기행을 하고 다녔던 터라 무작정 이곳이 좋아 찾아든 것이다. 양우아파트 304호실, 그곳에서 생활은 행복했다. 밥을 퍼먹는 수저통에까지 노을이 기어들어 내가 밥을 먹는지 노을을 퍼먹는지 어리벙벙하고도 황홀한 순간―그 낙조란 지는 노을이 아니라 새로운 천지 창조의 시간임을 느꼈다. 이때 제9 시집인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을 냈고,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를 펴냈다.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의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大役事)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빨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 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대역사(大役事)〉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국토 산수 정신인 황토와 대(竹)에 이어 뻘의 정신을 마지막으로 천착하기로 했다. 그래서 격포 뻘밭을 선택했으리라. 광주시대까지를 황토와 대(竹)의 정신을 천착했다면 격포시대는 마지막 뻘을 캐기 시작한 뻘짓거리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집 17권은 이에서 한 치 반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지리산 시대

페로몬 냄새 질퍽한 뻘과 노을 속에 눈썹 날리며 살던 격포 바닷가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염창마을로 서재를 옮겨 온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이로부터 순천대학교 문창과 객원교수에서 정식교수로 특채된 행운을 얻어 학교에 상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생 팔자에 없는 교수가 되고, 그것도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졸업장도 없는 터였으니 행운이랄밖에.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라고 노상 군소리를 했던 아내도 봉급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네요.” 했다. 그것도 국립대학교 특채 1호 교수(해방 후 처음)라고 언론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40분. 격포의 노을과는 달리 섬진강의 강노을과 지리산의 산노을 또한 유정해서 이곳에서 환갑을 맞았고 2005년 8월 정년을 지나 2012년까지 무려 15년간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와 격포 시대 18년, 지리산 섬진강 시대 15년이 나의 삶 전체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은 나의 제2의 고향과도 다름없다. 1977년도에 섬인 지명중학교에서 육지로 상륙했던 곳이 구례중학교였고, 이곳에서 다시 1978년 섬학교인 금당중학교로 가기까지 2년을 살며 〈지리산 뻐꾹새〉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고단 산장 벽면에는 1976년 8월 개최했던 ‘산상시화전’ 사진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달궁길, 이 길은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수히도 넘나들었던 나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써진 것이 장편 서사시 《달궁아리랑》이고 후속작인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나의 ‘광주시대’에 제3 시집 《아도(啞陶)》(1985)에서 다룬 5·18 민주화 운동과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의 1894년 갑오·동학혁명 두 사건은 불과 60년의 시차로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이다. 여기에다가 불타는 섬 제주의 4·3사건을 더하면 현대사는 완전히 복원된다. 2014년도에는 4·3사건을 소재로 한 시집 《바람타는 섬》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는 1987년의 장편 서사시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연장선에 있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전국 음식 기행을 감행, 〈주간 동아〉에 2년간이나 연재 기행을 했으니 참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시집 《빨치산·1》에 실린 “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 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라는 시구는 빨치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과 문학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내의 맨발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내 뒤치다꺼리를 해온 건강했던 아내는 20년 만에 덜컥 백혈병이 났다. 사표를 던지고 내가 떠돌았을 때마다 악착스럽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생활을 꾸려 왔다. 한때는 함께 수박농사까지 지으면서 내가 엄두도 못낸 똥장군까지 짊어진 여자였다.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가 발표되기 전 1년간은 그랬다. 행방불명이 된 나를 찾으려고 막내 딸아이를 포대기에 짊어진 채 서울까지 온 아내에게 덜미가 잡혀 집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교수 봉급으로 집 한 채 마련하겠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의 맨발〉이라는 제목으로 투병기를 써 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식수술비까지 끌어왔다. 10년째인 지금도 아내는 시난고난한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다행히 올해는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2012년에 김삿갓문학상, 지난해에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여기저기서 특강료와 원고료, 인세 등이 들어와 행운이 겹친 탓이다. 나는 적잖은 상금을 받은 구상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밝힌 바대로 ‘종교는 개벽의 논리고 혁명은 정치의 논리며 시는 교화(깨달음)의 논리’라는 큰 교훈을 1980년대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전담 형사를 달고 다니면서도 혁명투사가 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와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 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아내의 맨발·3(갑골문자)〉

그녀는 성모병원 20층 무균실에서 투병을 끝내고 엘칸토 후원으로 선물 받은 환자용 구두를 신고 마침내 맨발을 가린 채 뚜벅뚜벅 지상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내는 10년 투병 끝에도 비실거리며 집을 사서 들어간다는 말을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가 집을 사 줄 때도 있네요.”라고.

이제 나의 삶도 저물어간다. 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삶도 문학도 팔자런가 싶다. 
엊그저께는 학교에서 불러 애들과 이마를 맞대며 특강 마무리를 했다. 사랑, 인연, 만남이란 지상에서 태어난 말이 아니라 하늘돌(운석)을 타고 내려온 말이라고 나의 시 〈파천무(破天舞)〉를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나를 문학으로 살게 해 준 것은 거기 있었던 휴지통과의 만남이었고 나의 삶을 이끌어준 평생의 은인은 질긴 인연의 학과장인 김길수 교수였다고!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 졸시 〈파천무〉 중에서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에서 《파천무》까지 16권과 시선집 《여승》 등 저서 50  여 권 출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문공부예술상, 금호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만해 님시인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김삿갓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옥천 정지용문학상 시비>「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

 

                    <매창공원>「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해남 땅끝 전망대>「땅끝 마을에서 부르는 노래」

 

 

 

 

 

 

 

 


송수권 시인이 2003년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아내 김연엽(53·金蓮葉)씨에게 바친 한 편의 詩 <연엽(蓮葉)에게>가 읽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듭니다. 

송 시인의 아내는 백혈병에 교통사고로 인한 과다출혈로 서울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이 때 의경들이 피를 나눠줘 목숨을 건졌습니다. 송 시인이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감사하다고 보낸 글의 일부를 옮겨보았습니다. 

저의 아내 연잎새 같은 이 여자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 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詩만 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시 쓰면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평생 타박했더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군요!"라며 울었습니다. 특별전형을 거쳐 발령통지서를 받고 "여보! 학위 없는 시인으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군요. 해방 후 시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라고 남들이 그러는군요!"라며 감격해 하더니 "그게 어찌 나의 공이예요, 당신 노력 때문이지 총장님께 인사나 잘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2년 후면 송 시인도 정년퇴직인데, 송 시인 거지 되는 꼴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며 생떼를 씁니다. 

지난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병간호를 하고 있는 시집간 딸 은경이의 친구가 2003년 9월 고등학교 1학년 학력평가 문제지(수능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들고 왔습니다. 언어영역 문제지에는 저의 詩《山門에 기대어》가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은경이의 친구가 자랑처럼 말하자 아내는 "너는 이제 알았니? 은경이 아빠의 詩, '지리산 뻐꾹새' 와 '여승'도 진작 수능시험에 출제되어 나갔어야!"라고 설명해주고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난 이제 죽어도 한은 없단다." 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큰 것이라고 모든 공을 주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 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 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 - 그 진실이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2억5천여만 원에 달하는 수술비가 부담스러워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숨을 거두면 시를 쓰지 않겠다”며 간절하게 설득한 끝에 김씨의 남동생의 골수를 이식 받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위한 아내의 희생이 그렇고 교수가 된 남편의 아내에게 대한 감사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공(功)을 서로에게 돌리는 겸손이 더욱 그렇습니다. 한 가닥 단비처럼 메마른 삶에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셔줍니다...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산문'은 절집어귀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 같은...

시인은 남동생을 잃고 마음이 무척 헛헛했다 한다.

산문은 이승과 저승, 속세와 절집을 가르는 갈림길이겠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그이 시를 읽노라면,

박재삼의 밤바다...가 중첩된다.

 

박재삼은 1950년대의 가난이고,
송수권은 한 20년 뒤의 가난인데,

참 이나라의 가난의 한은 깊다.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저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세석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지리산 뻐꾹새 역시 절창이다.

그 하염없는 눈물이

세석까지 타오르는 시각으로 눈물겹다.

 

푸른 이내를 적시는

방울소리 뚝 끊어지고

어느 강물에 시치미도 흘려 버리고

그린 듯이 하늘 가에

나의 매는 섰어라.(그리움, 전문)

 

절절한 그리움은

기러기든, 매든 하늘 가를 우러르는 눈매에 잡히는 것은 모두 서럽다.

이녘과 뚝, 끊어지는 인연은

푸른 안개 적셔진 온 세상을 서럽게 운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게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情, 부분)

 

딸을 가진 기분은 어떨까?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월, 월, 혀를 내둘러 놓고는

냅다 뛴다(정, 부분)

 

이런 귀염상 가득한 딸의 애교를 보면, 어떤 사상도 다 놓아지지 않을까?

 

김수영이 생계를 위해 닭을 기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인상파 회고전'에서 수영을 만난다.

그리고 삶의 비애를 시로 쓴다.

 

일금 삼십 원을 들고 서서

닭의 밑구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서 있는

이젠 이 짓도 그만둘 거라며

두 손 짝짝 털고

무덤 쪽으로 가고 있는 수영의

검은 얼굴... (수영의 닭장, 부분)

 

김용직은 평론에서 송수권과 박재삼을 마주 대본다.

 

재삼은 수권이 심각하게 의식해야할 시인이었다.

그는 이미 50년대에 한국적인 정조를 그 씨날로 할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송수권이 시의 발판으로 삼은

지방의 독특한 말씨, 그 감칠맛이 있는 느낌까지가

교묘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의 기가 펄럭이는 연대에 시단 진출을 한 것이 송수권.(145)

 

이 시집엔 없으나,

난 그의 '여승'이 참 정겨웁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를 쓴다. (여승, 전문)

 

 

비로소 인간으로서 상대를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

우연히 만난 여승의 추억은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 같이>

에서 영랑이 찾던 <시의 가슴>을 경쾌하면서도 진하게 느끼게 한다.

 

남도 가락이 유장한

서편제 풍의 송수권의 시는,

그 배경에 깔린 한과 함께

바닷가 비릿한 사람들의 한을 오롯이 담아내는 시를 쓴 사람이다.

 

지리산 뻐꾹새가

섬진강 줄기따라

울음울며 내리다

남해 다다라

섬 하나에 막혀 솟구친

그런 울음으로 가득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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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인물 문학상 제정 타당한가” 군-문학단체 갈등 심화 
● 이슈분석… 고흥 ‘송수권문학상’ 제정 논란 

문학회 “생존작가 이름 내건 문학상은 잘못” 철회 촉구
고흥군, 여론 수렴·의회 검토 거쳐 결정…명칭 진행키로


입력날짜 : 2015. 08.05. 18:24

고흥군이 최근 추진한 ‘송수권문학상’을 놓고 일부 지역문학단체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5일 군에 따르면 문학상은 지난 4월 ‘송수권 시 문학상 운영 조례’ 공포와 함께 시 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위원 위촉을 마무리 짓고 문학상 운영위원회의를 열어 문학상 공모분야와 시상계획, 공모안 등 운영전반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면서 본격화 됐다.

이후 지난달 전국 학교와 언론 등에 홍보를 진행해 왔다.

군은 오는 10월 한달 동안 작품공모 심사를 거쳐 오는 11월에 문학상 시상식과 시낭송대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

공모자격은 2014년 10월1일부터 오는 9월30일까지 출간된 시집으로 기성부문은 시집 1권, 신인부문은 시 10편을 접수 받게 되며 시 분야 최고상인 대상수상자에게는 3천만원이 수여될 예정이다.

◇문학단체 “문학상 보다 문학관이 우선”

이같은 고흥군의 계획에 대해 지역 문학단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고흥문학회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행정 관청이 주관해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해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며 문학상 제정을 중단할 것을 군에 요구했다.

이어 고흥문학회는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하는 것이 통례”라며 “생존 문학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학상 제정을 행정기관이 추진하다보니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 문학현실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며 “고흥은 문학상 제정보다 문학관 건립이 더 시급하고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회는 “만약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역사성을 띤 이순신이나 목일신·한하운 문학상 등으로 변경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백경 고흥문학회 사무국장은 “송수권문학상 제정 소식을 들은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소속 회원·임원 등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며 “문단 내에서도 이번 파행적인 문학상에 대해 불만이 있는 만큼 공론화에 힘써 되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군 “작가정신 훼손 주장 동의할 수 없다”

고흥군은 이에 대해 입법 예고 기간을 거쳐 의회 검토까지 모두 거쳐서 결정된 사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군 관계자는 “송수권 작가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학시인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추진하게 됐다”며 “문학상 이름을 가지고 일부 생존한 작가의 숭고한 정신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전국 문학상을 일제히 조사했고 실제 국내에서 생존작가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도 다수 있다”며 “의회검토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모두 협의를 거쳐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순신·목일신·한하운 문학상 등 명칭 변경에 대해서는 지역과의 연관성 여부와 이미 관련된 일부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어 불가능 하다고 못 박았다. 

이 관계자는 “처음으로 진행되는 행사인 만큼 우선 행사를 치른 뒤 장단점을 평가하고 논의점을 찾아야 한다”며 “명칭변경은 섣부른 판단으로 변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흥=신용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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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고흥문학회                                   
수신: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제목: 송수권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추가 - 송수권 시문학상  논란  KBC 광주방송 관련  인터뷰

 

 


1. 존경하는 선생님은 우리문단에 기둥입니다. 국가창조문학의 진작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시는 작가님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2. 금번 고흥군청이 제정·시행코자 하고 있는 송수권문학상에 대하여 고흥 문인 및 전국 문인들의 고견을 경청하여 고흥문학회에서 첨부와 같이 성명서를 송부하오니, 예향의 고장, 우리 고흥의 발전과 우리문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고흥군청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한국문인협회와 회원님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첨부: 
1) 성명서 1부
2)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의견 1부
3) 마음을 열면 세상 소리가 들린다 1부
4) 우리의 화두는 바른 길이다 1부. “끝”


2015년 7월 31일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형식



 1) 성명서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Ⅰ.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흔히들 “문학은 예술의 장자”라 한다. 내 고향 고흥군에서 최초 문학상 제정의 부당함에 대하여 고흥문학회 회원 및 전국 문인들의 연대와 응원을 요청한다. 고흥문학회는 고흥을 사랑하는 문인들과 출향 향우 문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입니다.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한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 (이하 S문학상이라 칭함) 제정이 심히 부당하여 고흥군 출신 문학인들은 매우 유감스럽고 불편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먼저 훌륭한 송수권 시인이 내 고향 선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S문학상 제정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첫째, S시인은 생존해 계신 분이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어느 사회단체나 그 문중에서는 간혹 그런 사례는 있으나 행정 관청이 주관하여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 S시인의 문학상 제정은 전국 문학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함이 통례로 되어 있기에, 이번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 문학인들의 업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다. 문인들은 누구나 이를 알기 때문에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례1] 박경리 (1926~2008) 문학상 제정
생전에 문학상 제정을 고사하신 박경리 선생의 문학상은 강원도와 원주시의 후원으로 2011년에 제정되었다.

[사례2] 조정래(1943~ ) 선생은 고향에서 문학상 제정을 거론하였으나 선생의 고사로 추진하지 않고 있음. 

[사례3] 역사의 흐름과 문인들의 여론을 무시한 H시의 생존한 L작가에 대한 문학상 및 문학관 건립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전 군민의 빈축에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생존 작가 이름을 내건 최초 문학상 만든 이외수 <사람, 사람들 이야기>.

[참고 자료 2] 'L문학상’은 생존 작가의 이름을 딴 최초의 문학상이라고 문단에서는 말한다. 문단에는 문학상 제정에 관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유명 문인이라도 주위에서 문학상 제정 제안이 오면 ‘겸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사후에 제자들이 고인이 된 작가의 유지를 받들어 상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낮추는 게 미덕인 문단 분위기에다 문학상 제정이 생존 작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둘째, 행정 기관인 고흥군청에서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인 문학 현실에 반하는 결정으로 군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S시인의 고고한 문학정신을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셋째, S시인을 우상화하여 어느 문중의 위상을 높인다는 의혹이 확산될 소지가 크다.

[사례] 충청도의 B시에서는 작고한 L작가의 생가를 매입하여 그 작가의 문학관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해당 군민과 향리문학인들이 공공문학관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을 우상화하는 문학관 건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산 되었다.

Ⅱ. 고흥군민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드리는 호소

1, 고흥문학관 건립이 시급하고 우선적 사업이다.

아직 고흥에는 문학관이 없음으로 문학관을 건립하여 고흥 출신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인들의 각 장르별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함이 예향의 고향, 고흥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2. 고흥 문학상 제정은 고흥을 빛내고 문학의 얼을 심은 역사적 인물에서 제정함이 옳은 일이다.

가, 이순신 문학상 (가칭)
이순신 장군은 재임 22년 중 내 고향 고흥에서 12년을 재임한 세계적인 영웅이며 훌륭한 시인이다.

발포는 이순신 장군이 첫 부임지로 재임 2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하시고 다시 돌아와 나라를 지켰던 유서 깊은 4포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합심하여 발포순신 문학상을 제정한다면 고흥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장 빛나는 무형문화재가 될 것이며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나, 목일신 문학상 (가칭)
대한민국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모든 사람은 목일신 시인의 노래를 기억하고 부르는 국민적인 시인이다. 이런 훌륭한 분의 문학상 제정도 무시하고 30년이나 후배인 생존한 S시인의 문학상을 군민의 혈세로 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 한하운 문학상 (가칭) 등
한하운 문학상 제정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 정서로 보나 고흥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다. 

3, 문학상 제정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

[사례1] 고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지역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자 강진군이 추진한 영랑문학상과 해남군이 추진한 고산문학상은 얼마나 고고하고 보기 좋은가.

[사례2] 담양군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으나 송순(1493~1582) 문학상을 재정하여 진행 중임.

Ⅲ. 비판의 글

고흥군청 관계자의 S시인에 대한 넋 나간 호평

관계자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서정 시인이자 김소월 시인의 맥을 잇는 순수문학의 대가인 평전 송수권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동요작가인 목일신(1913~1986) 선생과 함께..." 라 하였으나, S시인은 시 문학적 기여도가 설영 있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문구는 대한민국의 문학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문학의 고장을 운운함은 예향 고흥의 문학전통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학인들 및 군민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Ⅳ. 우리의 결연한 요구

1,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의 혈세로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2, 만악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상기에 제시한 이순신문학상, 목일신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등등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과 고흥 향우, 고흥 문인들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2015. 7. 31

고흥을 사랑하는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 형 식 





                             
2)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의견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이름 석자를 남기기를 원한다.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有皮 人死有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다. 이는 중국의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王彦章傳)에서 유래된 말이다. 梁나라가 멸망할 때 唐帝가 왕언장의 무용을 아껴 자신의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왕언장은 아침에 양나라, 저녁에 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사람들을 대하겠는가 하고 거절 했다. 하여,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왕언장은 생전에 글을 배우지 못해 거의 문자를 알지 못 했슴에도 세상 사는 이치를 알아 언제나 이를 즐겨 인용 하고 살았는데 하물며 글을 쓰는 문인들이야 말을해서 무엇하랴.

우리는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고 한다. 문학인 역시 그렇다. 그래서 문학을 예술의 장자라고 하지않는가 .더 거슬러 올라가 업적에 대한 평가가 왜 사후의 세상에 맡겨저야 하는지 그시원을 찿아가 보자.

장자는 남화경에서 神人無功 , 聖人無名, 至人無己라 하여 신인은 공을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으며, 지인은 자기가 없다고 했다. 장자가 성인은 열자, 멕고야 신인 이라 거명하면서도 지인의 자리를 비워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자리가 본인의 자리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후 선택에 맡긴것이다. 그릇은 비워야 채워지고 명예는 사양의 미덕으로 빛이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이된 존경 받는 분들이 자신의 평가를 사후에 맡긴 근원을 나는 장자의 남화경 에서 부터 찿는다.

고래로 우리삶의 흔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것이 묵시적인 불문률로 되어 있다.역사를 더듬어 보자.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의 원효대사.혜초.백걸선생, 고려의 일연 .죽림칠현.황희.맹사성, 조선조에는 이율곡 .이퇴계.이순신 . 한석봉 .김삿갓, 현대에 들어 윤동주. 윤봉길.방정환. 이중섭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이들은 생존시 우상화 되기를 거부하고 사후에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위인들은 한결같이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었다.

송수권 시인은 우리고장을 빛낼 훌륭한 시인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하고 시행코자 하는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은

첫째, 송시인이 생존하고 있는 분이라는 것과둘째,헐세를 낭비하여 한시인을 우상화 하려 함은 송시인의 고고한 문학 정신을 훼손 하는 처사임을 지적한다.

셋째,송시인이 예향의 고장 고흥의 역사적인 인물로 우리문단에 더 큰 별이 되도록 길을 잡아 주어야 한다. 한갓 여름밤에 유성잔치가 되지 않도록 송수권 시인을 사랑하는 고흥문학회가 한국 문인들의 고견을 들어 직언하는 바이다.분수를 아는것이 참된 도를 아는 것이다.

회장 김형식


3) 마음을 열면 세상 소리가 들린다 (김형식)

조선왕조실록은 1977년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세종이 집권 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뭐냐하면 태종실록 이었다.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도 궁금 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란 신하가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십시요"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러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 선대왕의 기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 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것 아니냐 "하며 선왕의 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황희 정승이 나셨다.
"마마 보지 마십시요"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것이고 그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는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도록 교지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랬다.
이말을 세종이 들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않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어느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보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실록은 인류의 보물이 되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해 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읽어야 한다.
천하의 주인인 세종께서 신하의 진언을 옳다고 판단하고 따랐다는 사실이다.이를 무시하고 선대왕의 기록을 보고 주관적인 판단하에 국사를 펼쳐 갔다면 그를 모신 사관은 어떻게 했을까?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을까, 있*을* 수*있*었*을*까? 깊이 생각 해 볼 일이다. 세종대왕님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마음을 열면 세상의 소리가 들린다. 세종께서는 세상의 바른 소리를 들었다. 탐진치를 버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러야 한다.
 

4) 우리의 화두는 바른 길이다 (김형식)

길이란 하나로 통한다. 
바른 길은 두개일 수가 없다. 
가고자 하는 길이 잘못 된 길이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옳지 않는 길을 알면서도,모르면서도 다닐 수는 있으나 
그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면 역사가 반듯이 바로 잡을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오늘 나는 젊은 학창 시절부터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이분의 시 한편을 꺼내 본다.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이다. 
8월이 시작되는 일요일 비가 주걱주걱 내리는 처마 밑에 앉아 
고향으로 가는 바른 길을 따라 가며 아름다운 이시를 읊조려 본다. 

가지 않는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갈래 길이 있었지요.
한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겠기에 . . . 

그러다가 한 길을 택하였지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길에는 풀이 우거지고 사람의 발자취가 적었지요. . . 

생존 하고 계신 S시인의 문학상 제정및 시행은
그 길이 고흥군청이 결정한 일이라 할지라도 바른 길이 아니면 
우리가, 본인이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글이 좋아 사랑 받았던 이광수, 서정주 선생님을 떠 올려 본다. 
당시 그분들은 친일이 무엇인지 몰랐을까. 

그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화두는 바른 길이다.
눈밝은 민중들이 청언하고 있는데도 귀를 막고 모른척 한다면 
그책임을 본인이 안고 가야 한다.

이 청언은 우리곁에 남을 것이다. 역사가 기록 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마음과 인격이"먼저 무너졌기 때문에 로마가 무너졌다고 한다.
존경하는 S시인의 고귀한 문학 정신이 바른 길에서 더욱 빛이 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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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시 전문 월간지 <현대시학>과 <현대시>가 8월호에 이례적으로 합동 성명서를 실었다.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성명은 전남 고흥군이 제정해 다음달 시행을 앞둔 제1회 고흥군 송수권 시문학상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개선’과 ‘거듭남’을 희망했는데, 상의 이름과 운영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고언으로 읽힌다.

 

두 잡지가 송수권 시문학상을 걱정하는 가장 큰 까닭은 송 시인이 생존 시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송수권(75) 시인은 고흥 태생으로 순천사범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5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작이 잘 알려진 ‘산문(山門)에 기대어’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로 시작하는 서정적이며 리드미컬한 작품이다.

 

<현대시학>과 <현대시>는 살아 있는 시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우리 시단에서는 금기와 같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시단에는 1950년대에 등단한 이들을 비롯해 송 시인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오랜 원로 시인들이 여럿 있는바, 이번 문학상 제정은 “선배 및 동료 시인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에 어긋난다”고 덧붙였다.

 

송수권 시인은 물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통해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은 만큼 그의 이름을 단 문학상 제정이 아예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다. 편운 조병화(1921~2003) 시인 생전인 1991년부터 시상을 한 편운문학상 같은 선례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며 부적절한 사례라 보아야 한다. 고흥 지역 문인 모임 고흥문학회가 “적절치 않다”며 상의 철회를 요구하는 민원을 고흥군에 제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송수권 시문학상의 문제는 더 있다. 고흥군이 조례 제정을 거쳐 밝힌 상의 시행 요강을 보면 기성 시인의 경우 시집 한권을, 신인은 시 10편을 ‘응모’하도록 되어 있다. 시인 자신이 응모할 수도 있고 다른 이가 ‘추천 응모’를 할 수도 있다. 상을 받고 싶으면 신청하라는 것이다. 두 잡지는 이런 선정 방식이 “시인들의 자존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고흥군은 또 송수권 시인의 시를 암송해 겨루는 시 낭송대회를 마련해 시상한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로, 문학을 사유화하는 것”이라고 두 잡지는 비판했다.

 

송수권 시문학상은 대상 상금이 3천만원이고 우수상(2명)과 장려상(3명)을 포함한 상금 총액이 6500만원에 이른다. 시 낭송대회 상금도 대상 100만원을 비롯해 총액 680만원으로 결코 작지 않은 액수다. 여기에다 심사비와 시상식 등 운영비를 합하면 1억원 안팎 예산이 쓰일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최재봉 선임기자

지자체들 사이에 자기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제정 바람이 분 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다른 분야가 아닌 문학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일단 고마운 노릇이지만, 문학상 난립 및 경쟁과 과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문학적 성과가 의심스러운 이의 이름으로 상이 주어지거나, 반대로 수상자쪽 자격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다. 고흥군이 좋은 뜻으로 마련한 문학상이 출발부터 잡음과 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시단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렇잖아도 최근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로 눈총을 받는 한국문학이 생존 시인 문학상 제정으로 또 한번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무엇보다 송수권 시인 자신의 지혜로운 판단이 요구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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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인물에 문학상 제정 사례 없다” 

고흥군이 추진하고 있는 ‘송수권 문학상’ 제정을 놓고 일부 지역 문학단체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고흥문학회는 5일 “행정관청이 주관해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며 송수권문학상 제정 철회를 군에 요구했다.


고흥문학회는 “문학상 제정은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하는 것이 통례”라며 “생존 문학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문학상 제정을 행정기관이 추진하다보니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 문학현실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고흥은 문학상 제정보다 문학관 건립이 더 시급하고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회 관계자는 “고흥 출신으로 작고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왜 하필 생존해 계신 분 이름의 문학상을 제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자칫 송수권 시인의 문학정신까지도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학회는 고흥군에 이같은 내용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다른 문학단체들에도 이같은 사실을 알릴 방침이다.


이에 대해 고흥군은 군민의견 수렴과 의회 검토까지 모두 거쳐서 결정된 사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흥군 관계자는 “생존작가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고 생존작가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도 다수 있다”며 “의회검토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모두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어떤 이유에서 이런 민원을 냈는지 모르지만 민원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학상 제정의 취지대로 상세히 설명하겠다”고 덧붙였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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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수권 문학상 철회 성명서' 관련된 '고흥군청 회신' 글입니다

 

 

 

 

 

성명서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Ⅰ. 송수권문학상을 철회하라!

 

 흔히들 “문학은 예술의 장자”라 한다. 내 고향 고흥군에서 최초 문학상 제정의 부당함에 대하여 고흥문학회 회원 및 전국 문인들의 연대와 응원을 요청한다. 고흥문학회는 고흥을 사랑하는 문인들과 출향 향우 문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입니다.

 

 금번 고흥군에서 제정한 송수권 시인의 문학상 (이하 S문학상이라 칭함) 제정이 심히 부당하여 고흥군 출신 문학인들은 매우 유감스럽고 불편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먼저 훌륭한 송수권 시인이 내 고향 선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S문학상 제정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거론한다.

 

첫째, S시인은 생존해 계신 분이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어느 사회단체나 그 문중에서는 간혹 그런 사례는 있으나 행정 관청이 주관하여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우상화한 사례는 없다. S시인의 문학상 제정은 전국 문학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상 제정은 고래로 문학적 공로가 현격하고 추앙받는 고인을 대상으로 제정함이 통례로 되어 있기에, 이번 문학상 제정은 적절치 않다. 문학인들의 업적은 사후에 평가 받는다. 문인들은 누구나 이를 알기 때문에 시공에 매이지 않고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례1] 박경리 (1926~2008) 문학상 제정

생전에 문학상 제정을 고사하신 박경리 선생의 문학상은 강원도와 원주시의 후원으로 2011년에 제정되었다.

 

[사례2] 조정래(1943~ ) 선생은 고향에서 문학상 제정을 거론하였으나 선생의 고사로 추진하지 않고 있음.

 

[사례3] 역사의 흐름과 문인들의 여론을 무시한 H시의 생존한 L작가에 대한 문학상 및 문학관 건립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전 군민의 빈축에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생존 작가 이름을 내건 최초 문학상 만든 이외수 <사람, 사람들 이야기>.

     

[참고 자료 2] '이외수문학상’은 생존 작가의 이름을 딴 최초의 문학상이라고 문단에서는 말한다. 문단에는 문학상 제정에 관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유명 문인이라도 주위에서 문학상 제정 제안이 오면 ‘겸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사후에 제자들이 고인이 된 작가의 유지를 받들어 상을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낮추는 게 미덕인 문단 분위기에다 문학상 제정이 생존 작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둘째, 행정 기관인 고흥군청에서 역사적 흐름과 보편적인 문학 현실에 반하는 결정으로 군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S시인의 고고한 문학정신을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셋째, S시인을 우상화하여 어느 문중의 위상을 높인다는 의혹이 확산될 소지가 크다.

 

[사례] 충청도의 B시에서는 작고한 L작가의 생가를 매입하여 그 작가의 문학관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해당 군민과 향리문학인들이 공공문학관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을 우상화하는 문학관 건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산 되었다.

 

Ⅱ. 고흥군민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드리는 호소

 

1, 고흥문학관 건립이 시급하고 우선적 사업이다.

 

 아직 고흥에는 문학관이 없음으로 문학관을 건립하여 고흥 출신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인들의 각 장르별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함이 예향의 고향, 고흥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2. 고흥 문학상 제정은 고흥을 빛내고 문학의 얼을 심은 역사적 인물에서 제정함이 옳은 일이다.

 

가, 이순신 문학상 (가칭)

 이순신 장군은 재임 22년 중 내 고향 고흥에서 12년을 재임한 세계적인 영웅이며 훌륭한 시인이다.

 

 발포는 이순신 장군이 첫 부임지로 재임 2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하시고 다시 돌아와 나라를 지켰던 유서 깊은 4포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합심하여 발포순신 문학상을 제정한다면 고흥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장 빛나는 무형문화재가 될 것이며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나, 목일신 문학상 (가칭)

 대한민국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모든 사람은 목일신 시인의 노래를 기억하고 부르는 국민적인 시인이다. 이런 훌륭한 분의 문학상 제정도 무시하고 30년이나 후배인 생존한 S시인의 문학상을 군민의 혈세로 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 한하운 문학상 (가칭) 등

 한하운 문학상 제정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 정서로 보나 고흥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다. 

  

3, 문학상 제정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

 

[사례1] 고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지역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자 강진군이 추진한영랑문학상과 해남군이 추진한 고산문학상은 얼마나 고고하고 보기 좋은가.

 

[사례2] 담양군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으나 송순(1493~1582) 문학상을 재정하여 진행 중임.

 

Ⅲ. 비판의 글

 

고흥군청 관계자의 S시인에 대한 넋 나간 호평

 

 관계자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서정 시인이자 김소월 시인의 맥을 잇는 순수문학의 대가인 평전 송수권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동요작가인 목일신(1913~1986) 선생과 함께..." 라 하였으나, S시인은 시 문학적 기여도가 설영 있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문구는 대한민국의 문학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문학의 고장을 운운함은 예향 고흥의 문학전통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문학인들 및 군민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Ⅳ. 우리의 결연한 요구

 

1,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의 혈세로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2, 만악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상기에 제시한 이순신문학상, 목일신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등등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과 고흥 향우, 고흥 문인들과 전국 문학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2015. 8. 6

 

                      고흥을 사랑하는

고 흥 문 학 회 회장 김 형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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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날, 가까운 데서 송수권 시인이 특강을 한다고 하여 퇴근길에 들렀다. 학생들을 위한 강연이었다. 나는 아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미술학원 가는 둘째를 이웃에게 부탁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계획대로 100여 분을 강연했다. 원고는 “나의 詩와 고향 또는 불교적 상상력 - 삶과 죽음은 하나”였다. 원고 안에  <山門에 기대어, 연비, 인연, 여승, 꿈꾸는 섬, 시골길 또는 술통, 종소리, 퉁> 등의 작품을 스크랩하듯 실었다.

 

강연의 절반은 시에 접근하는, 시를 바라보는 이야기였다. 그 나머지는 시를 읽기도 하고, 남의 시를 말하기도 하면서 요즘 시를 쓰는 일이 고달프다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 내내 잡고 놓지 않은 것은 시인과 “상상력”과 시의 “서정성”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눈빛을 맞추고, 시인이 멍청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자신은 시골에서 논을 매시인 송수권.jpg다 온 사람 정도로 불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요즘의 시인들은 주머니에 유전자 지도를 넣고 다닌다는 말을 던졌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상상의 방식이 구닥다리가 되었는데 아직 서정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반문하였다. 벤야민이 “서정시는 죽었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도시서정이니, 테크노에 눈뜬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주류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소 힘을 주어서 말하였는데, 문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 인간성의 회복, 인간성의 옹호”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새벽닭이 되어서 세상의 빛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전히 시의 본령은 노래이며 서정이고 인문학이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깥이 아니라 내면의 풍경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이 언어의 표현미를 다룬다고 하지만, 문학은 정신의 미를 확장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것이 유용할 지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있는 공간과 시간’은 과거의 것이라고 하였다. ‘없는 것, 없는 공간’을 드러내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라고 하였다. 서정주의 <동천>이나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말 하였다. 그것은 양념 정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의 충격을 이야기하였었다. 머리로 충격을 주는 시, 가슴으로 충격을 주는 시가 있다고 하였다. 감정 없는 것을 지향하는 최근 시의 경향을 우려하였다. 시인들의 시 쓰는 전략은 대략 30개 정도 되는데 그 코드들이 이미 낡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부한 것에 기대지 마라, 공부를 해라, 책을 읽어라, 단계를 넘어라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시에, 한때 “준엄한 정신”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최첨단의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그것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시인은 인습, 그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시대에 시인은 만여 명 쯤 되는데, 부단히 노력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깨어나가는 시인은 백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언어를 비비고 정신을 주입하는 시인은 드물다고 하였다. 인문학 코드의 실종이라고 하였다. 등단을 꿈꾸면서 이름을 그 어느 말석에 올리고, 즐기는 시를 창작해 보겠다는 소위 “아줌마부대들”을 경계하였다. 슈거코팅 시, 대중문화코팅 시, 언어가 공허한 시, 알맹이가 없는 시, 창작정신이 없는 시를 경계하였다. 참담한 시대여서,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짓이 되는 시대여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라고 거듭 아이들에게 권하였다.

 

최근에 발표한 “달궁아리랑”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였다. 시인이 늘 시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시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하고 치열한 시를 써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나서 하동 송림 모래밭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포 세 발을 쐈다고 하는 토벌대장 차일혁의 사연에 눈이 갔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민중적 유대감에 대하여 부려놓은 것을 내가 읽고 있는 동안, 그는 그의 절창 <산문(山門)에 기대어>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부뚜막에 앉아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둔 그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음성 어디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그에게 남동생이 아주 짧게 스쳐갔으리라. 비가(悲歌)를 말하면서 김광균과 정지용과 박목월과 신라의 고승 월명사를 또 이야기하였다. 

 

그는 다비식 광경을 노래한 시 <연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인간의 죽음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다, 인간은 꽃이거나 소리이거나 빛으로거나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였다. 그의 시 <인연(因緣)>을 아이들에게 낭송해 주었다. 김소월의 시처럼 맹아리 없는 시로서 이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함민복의 시 <구혼>을 구술하여 아이들에게 받아 적게 하였다. 지난한 세월을 출근하는 얼굴과 상상력의 작동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 전라도 지역의 사찰을 불태우라고 하였을 때, 어느 장교가 화엄사 대웅전의 문짝 하나를 떼어 내어서 태우고는 완전 소각을 보고하였다가 나중에 처형당하였다는 이야기를 여담으로 하였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인사나 하고 갈까 하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 첫 장마 비가 굵게 내리고 있었다. 시인이 나와서 담뱃불을 붙이며 나를 보길래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였다. 말을 조금 이었다. 아이들이 몇몇 와서 질문을 하고 웃고 돌아가고서, 시인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 시집 <꿈꾸는 섬>에 사인을 하나 받았다. 그러면서 다시 담배를 무시길래 물었다. 사모님은 좀 어떠하십니까, 늘 그러지 뭐, 늘 그려. 비가 많은데 어찌 가시겠습니까, 차는 가져왔습니까. 고속버스로 왔지, 택시 하나 잡아서 동대구 가서 가면 되지 뭐. 그러는 동안에 다음 소설 특강한다는 작가가 왔다 갔다 하고 분주하였다. 멀리에서 온 시인을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비가 오는데 제가 차로 동대구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바깥의 운동장에 두었던 내 차를 몰고 왔다. 시인은 여전히 혼자서 다시 담배를 물고 비를 피해서 서 있었다. 

 

빗방울이 더 세게 차를 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문태준은 아직 전통 서정 시인이라고 하였고, 만일 시를 쓰려거든 오래 남을 시를 쓰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시가 고단한 때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던진 질문 몇 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의 출발 시간까지 다 기다리지 못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나누고는 돌아왔다. 빗속에 시인을 남겨 두고 돌아왔다. 그가 한국의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오늘은 저 비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들도, 특강을 들은 어른들도 그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시인은 순천에서 서너 시간을 달려와서 100여 분 강의를 하고 다시 광주로 서너 시간을 달려 갈 모양이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송수권 시인의 뒷모습이 고단하게 느껴졌다. 목우(木偶)의 무표정과 어수룩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의 절창 <산문(山門)에 기대어>, <여승(女僧)>,  <인연(因緣)>이다.

 

*  *  *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인연(因緣)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었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밑에 잎새들 푸르러

컹컹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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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낭송을 백혈병으로 의식을 잃고 투병중이신 송수권 교수의 부인께 바칩니다.
저는 송시인님을 잘 모릅니다.얼마전 어느사이트에 올려진 소식을 통해 
이렇게 가슴아픈 사연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낭송을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작품에 많은 누를 끼쳤지만 
더이상 어찌할수 없어 이대로 올립니다.
부디 이 사연을 통해 같은 피를 가진분이 계시다면 한분이라도 가슴이 동요되어 
부인께 조금이라도 생명을 보태드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시를 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만큼 누군가의 생명또한 진실로 사랑하겠기에........ 
***아래 송시인님의 길지만 가슴아픈 사연을 그대로 올립니다.
시간이 되시더라도 꼭 읽어 보시고  퍼가셔서 널리 알려주시면 더더욱 고맙겠습니다.***



연엽(蓮葉)에게

시-송수권
/낭송-전향미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거두어 가소서.

                                
  
"다시 시를 쓰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송수권 시 '山門에 기대어'를 통해 
먼저 죽은 동생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표현했던 송수권 시인(64·순천대 교수)이 
이번에는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아내 김연엽(53·金蓮葉)씨에게 바치는 한 편의 詩로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하고 있다
송 시인은 아내의 이름을 딴 시 ‘연엽(蓮葉)에게’에서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라며 절규했다.
그는 최근 서울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에 자신의 아내에게 피를 나눠준 
서울 동대문·종암·성북경찰서의경 18명에 대한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덧붙여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노래한 시를 공개했다. 
시인의 아내는 지난 5월 백혈병에 교통사고로 인한 과다 출혈로 
서울 소재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이 때 의경들이 피를 나눠줘 목숨을 구했다.
시인은 “아내는 어려운 시절 30리 길을 걸어서 수박을 이고 날라 나를 시인으로 만들더니 
28년간 보험회사를 다니며 나를 또 다시 교수로 만들었다”면서  
“전문학교(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를 나와 학위조차 없는 내가 
순전히 아내의 노력만으로 시를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 됐다”고 밝혔다. 
시인은 그러나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 다시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때도 다시 시를 쓴다면 도끼로 나의 손가락을 찍어버리겠다”고 
아내의 병상에서 절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시란 피 한 방울 보다 값 없음을 알았다”면서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가  언어로 하는 말장난(詩)보다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2억5000여만원에 달하는 수술비가 부담스러워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숨을 거두면 시를 쓰지 않겠다”며 간절하게 설득한 끝에 
다음달 김씨의 남동생 인태(47)씨의 골수를 이식 받기로 했다. 
아내 김씨는 그동안 "2년 후면 당신도 정년퇴직인데, 당신 거지 되는 꼴을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며 극구 이식을 거부해 온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송 시인은 75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내에 바치는 시와 편지 

서울지방경찰청장님께 올리는 글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립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봉직하고 있는  송수권 시인(교수)입니다. 
저의 아내는 몇 개 월째 백혈병으로 입원하여 AB형 피를 수혈하며 살고 있습니다.
동대문 경찰서 방범 순찰대 (의경) 중대장님께 감사합니다. 
종암경찰서 중대장님 감사합니다.성북경찰서 중대장님 감사합니다. 
저의 아내는 몇 개월 째 서울대병원을 거쳐 
지금은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AB형 피를 받아먹으며 지금껏 연명하고 있습니다.
AB형 피를 수혈해주신 동대문 경찰서 손승홍, 임춘추, 양상렬, 최원석, 김은광, 
권경민 의경님께 백골난망, 이렇게 엎드려 큰절 올립니다. 
종암경찰서 김민수, 문종민 이강산, 최의규, 김희동, 전인성 의경님들께 큰절 올립니다. 
성북 경찰서 의경 선현철, 김준석, 김두영, 최진영, 이진욱, 양승욱 의경님께도 
삼가 큰절 올립니다. 
지난 추석연휴절엔 저의 아내는 AB형 혈소판의 피를 수혈하지 못해 내출혈로 
온몸에 피멍울 반점으로 얼룩져 누워 있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주기도문을 외우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저의 아내 이름은 김연엽(金蓮葉)-어여쁜 연잎새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침상의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아내의 맨발바닥을 빨며 
다음과 같은 통곡을 했습니다. (내용낭송시와 같음 삭제)
저의 아내 연잎새 같은 이 여자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詩만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시 쓰면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평생 타박했더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군요!>라고 울었습니다. 
특별전형을 거쳐 발령통지서를 받고 <여보! 학위 없는 시인으로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군요. 해방 후 시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라고 
남들이 그러는군요!>라고 감격해 하더니, <그게, 어찌 나의 공이예요, 당신 노력 때문이지.......
총장님께 인사나 잘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2년 후면
송시인도 정년퇴직인데, 송시인 거러지 되는 꼴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고 
생떼를 씁니다. 지난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병간호를 하고 있는 시집간 딸 은경이의 친구가 
2003년 9월 고등학교1학년 학력평가 문제지 (수능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들고 왔습니다. 
언어영역 문제지에는 저의 詩《山門에 기대어》가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은경이의 친구가 자랑처럼 말하자 아내는<너는 이제 알았니? 은경이 아빠의 詩, 
'지리산 뻐꾹새'와 '여승'도 진작 수능시험에 출제되어 나갔어야!>라고 설명해 주고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난 이제 죽어도 한은 없단다> 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큰 것이라고 모든 공을 주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
그 진실이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강의가 끝나고
내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저의 집필실 마당; 감나무에 올라가 가을볕에 물든
단감을 따고 있습니다. 햇과일이 나오면 그렇게도 아내가 좋아했던 단감입니다. 
아내와 함께 다음에 집을 한 채 사면 감나무부터 심자했는데, 이렇게 비록 남의 집
감나무이긴 하지만 감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감처럼 붉은 피가 아내의 혈소판에서 
생성되어 AB형 피를 앞으로는  빌어먹지 말았으면 싶습니다. 골수이식까지는 아직도
피가 필요한데 하느님도 정말 무심하십니다. 이 짐승스러운 시인의 피를 저당잡고 
죽게 할 일이지, 왜 하필 아내입니까? 저에겐 죄가 많지만 순결한 아내의 피가 왜 
필요하답니까? 저를 살려두고 만일에 아내가 죽는다면 저는 다시는 부질없는 詩를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도 시를 쓴다면 저는 도끼로 저의 손가락을 찍어버리겠다고 
아내의 병상 밑에서 이를 악뭅니다. 청장님, 귀 산하의 동대문 경찰서장님, 종암 경찰서장님, 
성북 경찰서장님 그리고 소속 중대장님, AB형 피를 주신 18명의 의경님께 진심으로
은혜의 감사를 드리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내내 평안과 함께 건투를 빕니다. 

2003년 10월 2일
국립순천대학교 교수 
송수권 올림  

   

         
 
 

 

 

 

고흥군

 

수신자: 고흥군 도양읍 도덕면 오마신흥길 49-1 고흥문학회 김백경 귀하

 

제목: 송수권 시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 의견 회신

 

고흥문학 회원님들의 고흥 군정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귀단체 (고흥문학회)에서 지난 2015년 7월30일 고흥군에 접수한 송수권 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에 대한 의견을 붙임과 같이 회신합니다.

 

붙임 성명서 회신 결과 1부 끝.

 

 

 

 

고흥군수 (직인) 생략

 

 

 

 

 

 

 

고흥문학회 송수권 시문학상 제정 및 시행 반대 성명서 회신

 

1, 접수

 

접수일: 2015.7.30(목)

민원단체: 고흥문학회

내용

 

① 송수권문학상은 제정 시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생존한 작가의 대한 문학상 사례는 없다

 

② 만약, 중단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해야 한다.

 

③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 군민, 문인, 향우, 전국 문학인들에게 입장표명

 

 

 

2, 회신 내용

 

민원①: 송수권 문학상 제정 시행을 즉작 중단해야 한다. 생존한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사례는 없다.

 

회신,

 

송수권 시인은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전통주의적 서정시 창작에 골몰하며 가장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시인으로 정지용,서정주,김영랑, 김소월 등 전통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임.

 

수록: 목포대 김선태 교수 (열린 시책 2015), 문학평론가 고형진 교수 (주원 문학광장 2013),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 (월간조선 2007)

 

이의 우리 군에서는 한국 최고 서정시인이며 남도 대표 서정시인인 우리 군 출신 송수권 시인의 문학 정신과 성과 업적을 기리고 예향 고흥을 널리 알리고자 고흥군 송수권 시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게 되었음.

 

한편 다양한 문학 자원을 발굴하기 위하여 다른 자치단체에서도 학술포럼. 인물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생존한 문인의 문학세계와 정신을 함께 공유하며 고흥의 위상과 문학적 품격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본 문학상을 추진하게 되었음.

 

생존한 작가의 문학상 제정 사례는 김승옥문학상, 김우종문학상, 이외수문학상등이 있음.

 

민원②: 만약, 중단 할 수 없다면, 문학상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 시행 해야 한다. 이수신 문학상, 목일신 문학상, 한하운 문학상 등

 

회신

 

송수권 시문학상은 이미 군의회에서 의결 조례로 제정되어 운영하고 있음.

 

현재 동 조례에 따라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 의거 작품공모 중에 있으며 작품 접수는 9월1일~9월30일까지로 10월 중 작품 심사를 거쳐 11월 문학상 시상과 함께 시낭송 대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있음.

 

운영위원회의 구성: 7명 (광주, 전남 국문과 문예창작) 교수, 군의회 의원, 지역문인 단체, 공무원)

 

따라서 현재 작품 응모자들의 관심과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가운데 문학상 명칭을 변경할 경우 문학상 신뢰를 훼손우려가 있어 명칭 변경은 어려운 상황임.

 

민원③: 송수권 시인과 고흥문화원은 고흥군민과 향우, 문인들과 전국문학인들에게 입장 표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회신

 

우리 군에서는 한국 최고 서정시인이며 남도 대표 서정시인인 우리 군 출신 송수권 시인의 문학 정신을 함께 공유하고 송수권 시문학상이 순수문학 신인 작가 등 훌륭한 문학인을 배출하는 등용문으로 자리 매김되기를 기대함.

 

참고로 고흥문화원은 본문학상과는 관련이 없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宋秀權 시인의 호는 평전平田이며,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다. 고흥중학교와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으며,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수상작 「山門에 기대어」 등). 시집으로는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제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창작과비평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집 『달궁아리랑』(종려나무, 2010), 제13시집 『남도의 밤식탁』(작가, 2012), 제14시집 『빨치산』(고요아침, 2012), 제15시집 『퉁』(서정시학, 2013), 제16시집 

『사구시의 노래』(고요아침, 2013) 제17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 2014)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는 『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2007)과, 그밖에 5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한 바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고,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만해님시인상(2011), 김삿갓문학상(2012), 구상문학상(2013) 등을 수상했다. 전 순천대학교 교수이며,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송수권은 1975년 우리 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의 하나로 꼽히는 시 「산문에 기대어」가 『문학사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40년에 육박하는 기간 동안 조금도 쉼 없는 시적 열정을 드러내며 우리 서정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그가 시를 써나간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산업화를 겪어 왔고, 우리 시단 역시 그에 대응하는 현실주의 시와 여러 실험 시들을 쏟아냈지만, 송수권 시인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이 부리던 손때 묻은 전통시의 연장을 들고 우직하게 전통시의 우물을 파고들어가 마침내 가장 깊고 맑은 전통 서정시의 물을 길어 올렸다. 그의 시는 좁게는 소월, 영랑, 백석, 미당으로 이어지는 전통 서정시의 미학과 형식을 잇고 있지만, 넓게는 정지용과 이용악 시의 언어와 심상까지 품고 있어 우리 전통시의 그릇을 크게 확장해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인은 40년에 가까운 오랫동안 여러 시세계를 탐색해 나갔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놓지 않고 응시했던 하나의 시선은 우리 겨레의 심성이다. 그의 시는 남도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는 이 지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 강산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유람하면서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는 진정한 정신세계를 통찰해 내었다. 한과 이별의 미학에 머물렀던 우리 전통시의 미학을 넘어 그것을 묵묵히 껴안으며 형성된 넉넉한 품새의 넓은 도량과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아름다움을 절절한 언어로 그려내어 우리 겨레의 진정한 혼을 일깨운 것은 송수권 시인이 얻은 득의의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우리 토착어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사전에서 잠자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들, 또 지역에서만 맴돌고 있는 정감 넘치고 감칠맛 나는 우리말들이 그의 시 안에서 더욱 빛나는 언어로 거듭나고 있다.

― 고형진, 고려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송수권 시인은 그동안 서정성과 현실성을 고루 갖춘 작품을 창작해온 남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정성에 치우치는 시는 대책 없는 순정이 되기 쉽고, 현실성에 치우친 시는 메마른 이념에 불과할 터, 송수권 시인은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정적 현실, 혹은 현실적 서정의 시학을 구축해왔다. 달궁 아리랑도 그러한 조화의 시학이 도달한 큰 봉우리이다. 이 대작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사석에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깜냥엔 한국문학 통일시대를 내다보면서 지리산 서사를 써 보았다네. 태백산맥도 비껴간 지리산을 정면으로 도전해 본 것이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된 대가급 시인의 건강한 문학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달궁 아리랑은 한국시가 잃어버렸던 가열찬 역사성, 혹은 오롯한 문학성의 귀환을 의미한다.

― 이형권, 충남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제주 4·3 사건이란 무엇인가?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을 하고 미군정 시대에 재등장한 친일세력들이 그들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남조선노동당은 그것을 격렬하게 반대를 했던 것이다. 친미, 또는 친일 잔존세력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그 격렬했던 사상과 이념 투쟁 사이에서, 그 어느 노선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르는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되었던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는 달궁 아리랑과 빨치산에 이은 세 번째 장편 대서사시집이며, 일제식민시대를 거쳐서, 남북분단과 좌우 이념투쟁에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상처와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노老 시인의 정신이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기념비적인 대서사시로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가 있듯이, 우리 한국문학사도 이제는 송수권 시인이라는 대서사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를 연재하게 된 것을 우리 애지 편집위원들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애지 편집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이승희, 안서현 일동)

 

 

 

시인의 말

 

 

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어 지면 역사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남국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한라 여신들이 빚어낸 신화의 땅에서 벌어진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제주에 와서 신화와 역사가 혼돈되어 현실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분리되고 깨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두려워진다.

 

2014년 6월 6일 화북 포구에서 

송 수권

 

 

서시

 

바람타는 섬

 

산 살림 갯 살림 먹을 것은 늘지 않고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딸은 배고파 징징거렸다

옷은 헤지고 다래 넝쿨로 엮은 정당빌립 쓰고

말테우리로 산밭 고갯길 그 삼대 숲에

말 울음소리 들릴 때 

하루 해 저물고

설문대 어멍은 한 발은 관탈섬에 걸고

한 발은 범섬에 고근산을 깔자리로 걸고 주저 않아

먹감물빛 오늘도 빨래를 하고 갈옷을 깁는다

아우야 너는 이 설움 아느냐

우리가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것을

그러니 외지에서 공부를 하고 온

네 형도 믿을 건 못 된단다

 

우리들 어멍이 빨랫돌을 두드리는 동안

바람 부는 날 저 영실에 올라보아라

그 아이들 헐벗고 서서 밥 달라 칭얼거리는 

울음소리

네 귀가 있다면 듣고  두 눈이 있다면

똑똑히 보아라

이 아이들 몸에  어떤 잡신이 묻어오고

이 아이들 몸에 어떤 문신이 새겨지는가를

 

백록담에 흰 사슴이 뛰어놀고

노루목에서 암노루 수노루 캥캥거릴 때

올레길 담 구멍으로

제주 바다는 한밤 내 소리쳐 울었다

소리쳐 울지 않는 날은 바람 불지 않는 날

바람 불지 않으면 영등 할미도

딸을 앞세우고 온다.

바람 불면 며눌아기 앞세우고

사나운 물길 거슬러 온다.

그래서 사시장철 바다는 설레었고

사람들은 그  바람 속에서 아기 구덕을 메고

몽생이 떼 몰며

흙을 다졌다

 

흙속에 씨감자를 넣고

설문대 어멍 잠시 허리 펴고 숨 고를 때

그 숨비 소리 오름 오름을 새어 나와

저 바다의 물 이랑에도 숨이 차서

그 소리 가득했다

 

오늘도 마파람이 우리들의 지붕을 더 튼튼히 얽는다.

하루의  휴식까지도 노동에 바치며

파도가 부풀며 높아진 때도 젖 빨리는 아이들은

구덕 안에서 자기 몫의 햇빛을 깔고 누워

빨리빨리 잠이 든다.

바다 밑 용문잠 같은 전복을 더 많이 따라고

지금 죽어가는 노인들도 더 빨리 죽는다.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네 자랐던 산남山南땅 토산 마을

4·3 사건 때는 어린이와 여자들만의 마을로

국민반 반장도 우리는 그 윗마을에서

돌하르방 하나를 꾸어 왔더란다.

아우야 오늘도 마약 같은 안개가 다시 부풀고

흐린 바다는 수평선을 놓아주지 않는구나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저 유도화와 마주수馬珠樹 떼의 여름을 지나

이제 또 겨울이 오면

우리들의 무서운 잠과 하루를 최저로 살아

쌓아온 목숨들 그중의 몇 낱은

저 관목지대에까지 나가 묘지를 깔고 누워 잠들리라

결코 묘지 안에서조차 잠들 수 없는 눈썹

썩으세요 빨리 썩으세요 어머니

그 뻣세디 뻣센 말끝으로

갈옷에 뚝뚝 지는 핏물자국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아우야 오랜 슬픔으로 짝짝거리며 오는

저 뭍의 껌 씹는 계집애들 앞에서

만 원짜리 관광으로 우리는 쉽게 길들여지는

조랑말이 아니란다.

그 보다는 우리들의 들먹숨 저 노란

유채꽃밭들의 대군단大軍團이 막을 내리고

어느 날 수평선은 느닷없이 메밀밭 고랑을 달려나와

우리를 놀라게 했을 때

마라도 끝 이어도를 넘어가던

네 삼촌 뱃머리를 찾는 일이란다

사시장철 소금밭이 쓰러져서 우는 갈매기

그 갈매기를  따라가는 일이란다

 

아우야 사랑하는 아우야

그 어느 곳에도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우리는  바다 쪽에 귀를 묻는 일이란다.

죽을 때도 만조 때

바다에서 구덕을 메고 오는 어머니가 당도하기 전에

빨리빨리 죽어가는 일이란다

비탈길에 말똥이 피듯이

다공질多孔質의 돌담에

빗물이 빨리빨리 날아가 버리듯이

 

그 구멍 속에서 바람과 함께 솟아난 삼을나와

거센 파도를 헤쳐 온 벽랑국의  세 처녀와 짝을 이루는

한 피붙이로 해안 곳곳 마을 올레 길을 만들고

이모가 되고 고모가 되고 누이와 함께 모커리에 살며

빙떡에 혼을 말아

천왕 닭이 울고 지왕 닭이 운 이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아우야 사랑하는 나의 아우야

너는 이 뜻 알겠느냐

 

네 형이 버리고 떠난 산남 땅 토산* 마을

빈집 정낭엔 

아직도 세 개의 걸대가 걸려 있구나

 

 

* 토산리(마을) : 4·3 당시 18~40살 청장년들이 한꺼번에 희생되어 ‘무남촌’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1948년 12월 18-19일 이틀 동안 군인들에 의해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학살된 토산리 주민은 125명(남자 101명, 여자 24명)에 이른다. 

 

 

흑룡만리黑龍萬里*

 

우리항공에서 전세 낸 헬리콥터는 5천5백리

흑룡만리

한라산 중산간 마을들의 밭 다믈을 따라 돌고 있다

K 화백의 말에 따르면 불타버린 마을들의 돌담이 보이고

밭담을 두른 초원 지대의 조랑말 떼도 한가롭다

 

무장대를 따라 죽창을 들고 번을 선 새시방*도

산으로 주먹밥을 날랐던 가시어멍*도

지금은 모두 저 밭 다믈 안에 돌아와 한 가족으로 누웠다

더러는 살아남은 늙은 아낙들 그 돌담 안에서

가을 씨앗을 들이는지 수눌음*이 한창이다

 

추석 무렵의 소분*이 잘 된 어느 날 나도 머리 깎고 돌아와

저 무덤들 사이

一家를 이루고 싶다

 

헬리콥터는 산간 마을들을 돌아 해안으로 내려간다

공장 굴뚝 대신 해안 마을 부두 곳곳에 서 있는

붉은 등대들이 가을 바람에 깃발처럼 펄럭인다

멀리 우도와 가파도가 물파랑 속에 뒤집혔다 일어선다

 

천제연 폭포와 정방폭포를 보는 것이 탐라 천 년

제주의 속살을 보는 듯하고

구럼비 마을 불도저의 흙먼지가 들썩이는 풍경이

지나 온 길 어느 밭담 안에서 본

납골당 무덤을 짓는 모습 같아 나는 잠시 외면한다 

 

흑룡만리

바람타는 섬

물나라의 가을이 깊어 간다

 

 

* 흑룡만리黑龍萬里 : 고 김영돈 교수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황룡만리장성, 제주의 중산간, 상잣, 중잣, 하잣, 밭담과 골목골목 돌담들의 5천5백리를 환해장성環海長成 흑룡만리黑龍萬里로 표현했다(잣:성城, 돌담).

* 새시방 : 새 서방.

* 가시어멍 : 장모.

* 수눌음 : 품앗이(두레, 수놀음이라고도 한다).

* 소분 : 벌초.

 

 

수눌음*

 

잠녀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설문대가 바닷속에서 솟았듯이

수직의 깊이로만 그들은 바닥을 긁는다

한라산이 그녀의 치마 속에서 솟았고

4백여 오름오름이 그 헤진 치마폭 구멍 속에서

쏟아져 쌓인 흙이었듯이

수직으로만 오름을 오르고

수직으로만 한라산을 오른다

용천수가 땅 속에서 솟아나듯이

제주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모두 삶의 길이

그 바닥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걸대를 정낭에 걸어 안을 비워 놓고

애기 구덕 하나는 밭가에 부려 놓고

허리에 멱서리를 차고서

바닥을 긁어 씨감자를 묻듯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섬을

바다가 늘 수평선으로 빨랫줄을 치듯이

안보다는 밖을 더 튼튼히 얽어

올레길을 만들고 돌담을 쌓는다

유채꽃이 아름다운 빌레밭 

오늘은 저녁 노을의 양파밭을 깔고 앉은

그 밭담 안의 수놀음 풍경이 물까마귀들 같이 정겹다

 

* 수눌음 : 품앗이(두레), 수놀음.

 

 

정낭

― 닫힘과 열림

 

 

 

헌저* 옵서.

 

 

 

 

여피* 갔수다.

 

 

 

 

 

늴* 다시 오라봅서.

 

 

 

 

 

 

 

* 헌저 : 어서.

* 여피 : 이웃.

* 늴 : 내일.

 

 

김굴산金窟山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다랑쉬

다랑쉬에 달이 오르면

물항아리에 달이 잠긴 듯

놋요강을 깔고 앉은 처녀의 궁둥이를 보듯

말랑말랑한 사랑을 나누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런 시각에만 애월엔 또 애터진 달이 떠오른다

 

이런 관음증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한다

 

내 친구 김굴산은

그런 밤

다랑쉬 깊은 굴 속에서 태어났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대가 무너지던 날 아침

산에서 내려온 가족들이 면 호적계에 들러서

면서기가 어물쩡 지어준 이름이다

 

1948년 11월에서 이듬해 봄까지

솥덕을 걸어놓고 차조와 메밀 미음도 동나고

할머니는 생미역 한 두름 걷어 오겠다며

해안 마을 4km, 야간 통행 저지선을 넘다가

서북청년단 토벌대들의 총구멍에 숨졌다

 

그 김굴산이 오늘은 한라병원 영안실에 누워

다랑쉬에 뜬 달을 바라보며

밤 깊어 찾아 오는 문상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성읍 민속촌에서 일박

 

전깃불이 없으므로

촛불을 켜야 하리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가 아름답다’는

어느 시인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밖에서는 봄비가 오는지

바래선이 아름다운 초가지붕 추녀 끝

지신물* 내리는 소리가

천금 같은 밤이다.

 

읽던 책을 도로 덮고

측간으로 내려가 뒷물하다 본다.

모슬포에서 먹고 온 자리물회

친구네 집 굅시*에서 먹은 홀아방떡

노오란 차조밥 한 그릇 같은 그것을

씨돼지 한 마리가 킁킁 잘도 받아먹는다.

 

이것을 귀엽다고 해야 하나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한라산 빗질 바비큐 작전에도 댕댕이 넝쿨을 타고

살아 남은 토종 씨도야지

코가 연밤송이처럼 벌쭉인다

꼬리가 고사리 새순처럼 도르르 말린다

 

비 맞고  슈퍼까지 뛰어가서

바나나 한쿨 사다가 나누어 먹는다.

 

 

* 지신물 : 중산간 지방은 물이 귀하므로 처마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저장해서 쓴다.

* 굅시 : 제사.

 

 

산 노을

 

아직도 한라의 눈은 녹을 기척도 없는데

저무는 산간 놀이 떠서 꿈만 같다.

빌레밭 양파 움으로만 모이는 저녁 햇살들

꽈, 다, 꽝 말 끝마다 사투리를 한밭 널어놓고

지심을 매어나가는 돌 할망들 곁에

잠시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적막한 슬픔에 젖는다.

 

밭머리에 놓인 두 개의 아기 구덕이

말매미처럼 쌍을 지어 운다.

무슨 구덕 혼사*라도 있었더냐?

할망들 속에서 두 새댁이 엉금엉금 빠져나와

돌담 밑에서 젖을 빨린다.

 

제주 여성사女姓史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봅서 어디 감수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

싱그러운 양파 밭의 저녁 햇살과

호미 끝에 잘려 나가는 서러운 서러운 풀내음들과

해안 마을들에 벌써 켜지는 저녁 불빛들

나는 갈매기처럼 양 손을 저어 흙 위에서

나는 시늉을 했다.

 

* 구덕혼사 : 구덕 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양가에서 혼사를 맺음.

 

 

바람이 현무암에 새기고 간 말

 

역사는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라고

그 기억되는 것이 어물쩡 종이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는 것이라고

제주에 와서 4·3은 묻지마라

모두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그것은 침묵의 또 다른 굴레

바람이 현무암에 새기고 간 말

살암시면 살아진다라고 말한다

 

동족이 동족에게 저지른 만행

3만 명이 사라졌다는 붉은 섬

아홉 명 중 한 명이 수장되었다는 기억

결코 그 기억은 기억만으로 상처가 될 수 없다

 

제주에 와서 4·3을 묻지마라

4·3은 비밀스러운 암호로

모두가 동굴 속의 통로에만 숨어 있는

마음과 마음 속으로만 건너가는 통로

어둠 속에서만 살아서 빛나는 눈

 

 

빙떡

 

메밀가루 부침에 팥무채 또는 콩나물

소를 박고

둘둘 말아서 만든 떡

개떡도 아니고 참떡도 아닌

올레 담 구멍을 집집마다 타고 도는 빙떡

어쩌다 소고기를 만나면 숭당숭당 썰어 넣어서

칼국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숨겨 놓고 먹는 떡이 아니라

동네방네 입소문을 내고 먹는 잔치떡

곤떡보다는 친근하고

이웃 사돈을 불러서 배 불리 먹는 떡

 

4·3사건 때는 산으로 간 사람들

동굴 속에 숨어 솥뚜껑 뒤집어 놓고

비사리와 망개나무 연기 나지 않도록 꺾어다

한 국자씩 빙빙 돌려가며 참취, 고사리나물 소를 박아

조금씩 나누어 먹었던 떡

 

세경할미 자청비가 산중을 떠돌며

서천꽃밭 속에 숨어 입덧하며 먹었던 떡

세경본풀이에 메밀꽃 피면

눈물 나는 빙떡

 

* 3떡5편 : 3떡은 백사리(백설기), 둥근 흰떡, 빙떡이며, 5편은 참떡, 곤떡, 절편, 새미떡, 인절미를 말한다(명절 때 중류이상의 가정).

 

 

불타는 섬

 

계엄령이 내리고 길은 끊겼다

바닷새들은 줄을 이어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LST 군함 꿈에도 본 적 없는

저 함포 사격의 불빛

더는 탈출할 수 없는 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빌레못 동굴 밖에 서서 보는 빗개*

그 눈시울 밑으로 하염없는 별똥별만 쌓인다

고독한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절벽에 조각달이 서서 칼을 가는 밤

동굴 안에서 더는 갈 수 없어 불 피우고

쇠갈고리 몽둥이를 쌓아놓고 마을 사람들과

무장대들이 모여 죽창을 깎는 밤

통곡소리 울음소리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 이 두려움과 낯설음

삼다 6백리 8할이 빨갱이다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굶겨 죽여라!

물 건너 온 저 잡귀신들의 외침

9연대와 11연대가 저지른 3광3진 작전

온 마을들이 불탄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굴 밖에 나와 울부짖는 물할망들

16년 전 여름 잠녀들 1천 명이

관덕정 총독부 앞에서 시위할 때도

마을은 불타지 않았다

머리에 흰 수건 쓰고 물안경 쓰고

호미와 빗창 궐기할 때도

마을은 불타지 않았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외양간이 불타고 마방이 불타고

봄에 뿌릴 씨감자 오쟁이까지

불탄다

불탄다

 

물 건너온 저 잡귀신들을 그냥

어쩐다냐

아가야, 네가 입어야 할 봇뒤창옷*까지 다 불탄다

우리는 어쩐다냐

 

* 빗개 : 보초.

* 봇뒤창옷 : 배냇저고리.

 

 

마당개들

 

제주 바다는 소리쳐 올 때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맘때가 오면 폭낭*을 잘 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퐁*을 한 주먹씩 따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어느 날 스리쿼터와 군용트럭이 들이닥쳐

마을 전체가 불쏘시개로 가라앉았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들

아이는 뒤곁의 폭낭으로 올라가 이 모습 지켜보았다

십 년 후에야 어른이 되었을 때

마당개*라고 불렀던 서애청단원의 고백에 따라

사람들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모슬포의 공동묘지가

그곳이다

왜놈들 탄약고로 쓰던 콘크리트 땅굴 속에서

고리고리한 자리젓처럼 삭은 육탈된 해골들만

오글오글 쌓여 있었다

우리가 언제 온코시 반코시* 찾고 살았더냐?

그냥 대충 살가운 뼈만 추려서 뗏장을 얹었다

그때 자란 아이는 식개食皆* 들면 곤밥지어 고사리 비빔밥을 만들고

일가친척 생령들을 불러내어 삼십여 개의 숟가락만 놋양푼에 꽂는단다

이집저집 한밤중 소지 다발을 태우는 귀신불이 

지금도 이 마을에선 떠돈다고 한다

 

* 폭낭 : 팽나무(마을공동체의 상징인 나무).

* 퐁 : 폭(팽)의 귀여운 말.

* 마당개 : 백정이란 뜻, 어른 백정은 ‘마당개’, 자식은 ‘소근개’라고 불렸다.

*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 여러 조상 아래 한 자손의 땅이란 뜻(공동묘지).

* 온코시 반코시 : 벼슬아치(급제)가 있는 집은 곤떡(횐쌀떡)을 빚을 때 조상의 체형體形을 그대로 빚고 없는 집안은 반코시로 빚는다.

* 식개食皆 : 제삿날 또는 그 음식.

* 4·3 때 해안선이 녹색지도로 이루어진 반면 4km 전방의 중산간 마을은 군사작전 지도에서 붉은색red island으로 표시되어 120여 마을이 불탔다.

 

 

죽음의 트라우마

 

죽음의 트라우마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산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란 말

수용의 원리가 아니라 배제의 원리

우리는 그렇게 살아 남았다

 

 

항몽 삼별초 100여 년

우리는 조랑말 소리에도 기가 죽었다

일제 강점기 해안 곳곳 절벽 파놓은 동굴 속

흙바람 부는 날 모슬포비행장에 나와 보아라

움막같은 저 격납고 허허벌판

그 언저리 감자꽃 피어 눈부시구나

 

태평양 전쟁 막바지

20만 도민을 끌어내어 병참기지화로

우리는 총알받이 우리 소년병들은 토코타이

신풍돌격대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제주를 상륙하려는

미 함대에 나무 비행기에 프로펠라를 달고

폭탄을 싣고 함상에 내리는 그 육탄전의 음모

그 침략자의 말발굽 아래서도 살아남았다

 

반탁이 찬탁으로 돌아서고 건준위(건국준비위원회)가 들어서고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민보단 활동을 하고

5·10 단선 투쟁을 벌였다

빨갱이가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들은 불타고

우리는 산으로 들어와 살아남았다

 

500년간 출륙이 금지된 섬

유배지의 섬

우리만의 독특한 말씨로 소통이 막힌다면

바다 건너 침탈해 온 너희들의 죄.

천만 관광 시대에도 우리는 연기 나는

굴뚝 하나 세우지 않았고 

외래 자본으로 물들어 잘려나가는 땅

남해안 시대의 J프로젝트에도 우리는

손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주 자치도민보다는

독자성이 강한 탐라 시민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심방길

 

매인 심방*으로 이곳저곳 떠돌다 보면 괴이쩍은 일이 어디 한두가지 아니깝주 1만8천 신의 신궁神宮을 차린 섬 나라에서 몸주*를 한 분씩 찾아 떠돌다가 화북리의 광넙궤팽나무 그늘을 찾아들어깝주 그곳에서 몸주 한 분을 뵈어깝주 꼭 그것같이 털고삐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에 한참을 낄낄거렸구먼요, 수산벌 초등학교 성담 밖 일곱 살바기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진안 애기할망당, 열 살 때 업저지*로 버려진 마라도의 할망당도 한 바꾸 뺑 둘러왔는데 하기사 뱀 신앙까지 토속신으로 받들어 있는 판에 아무리 여자들의 천국이라지만 슬쩍 홀아방 하나 끼워 넣은들 그것을 어찌 금도禁度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타박하리요

 

그날도 윤 노인은 배를 타고 은갈치 낚질을 나갔구먼요 왠일인지 갈치는 올라오지 않고 돌미륵 하나가 낚시바늘을 물고 올라왔구먼요 꼭 머시기가 거시기만 같아 낄낄 슬쩍 바다 밑으로 쳐넣어 버린거야

그런데 두 번째도 올라오는 것이 돌미륵인지라 참 괴변이로고! 자리를 몇 마장쯤 비껴 낚질을 하는데 또 그놈인 거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이리도 질긴가 마씀 배의 뒷고물에다 쳐박아 놓고 낚질인데 갈치가 쌍쌍구리로 줄줄 물고 올라와 한 배 가득 실었구먼요, 이놈을 어쩐다 싶어 생각 끝에 마침 부엌 아궁이의 이맛돌* 벗겨진 것이 생각나 집에 돌아와 그놈을 이맛돌로 박고 불을 지폈어요

 

그날부터였구먼요, 노인이 등창을 되게 앓은 것은,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육환장으로 방바닥을 찍으며 이놈아, 은혜를 원수로 갚은 놈도 있다더냐, 나는 본시 경상도에서 제주도의 관음사가 좋다하여 나를 따라 구경삼아 관탈도와 소관탈도를 지나오다 풍랑에 휩쓸려 바닷속을 헤메던 터로 너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갑주

노인은 깜짝 놀라 이맛돌을 빼어 유한 락스 세제로 박박 문질러 때깔 좋은 물색으로 여기 좌정하시는 게 좋겠구먼요 하고, 마을 앞 광넙궤팽나무 그늘 밑에 울타리를 치고 금줄을 둘러 당구덕에 제물을 드리고 치성을 드렸더니 둥창이 씻은 듯이 나았겝주

 

윤 노인은 그날부터 떼돈을 벌어서 먹물든 하우장 각시*로 동지同知 벼슬까지 얻고 죽어서도 미륵 할망과 함께 한 살림을 차렸구먼요, 초이렛날과 여드렛날 어스름 상현달이 뜨면 가는대구덕*을 멘 아낙들이 모여들어 정성껏 제물을 드리고 어이, 윤첨지 영감, 나도 먹물 든 아들 하나 점지하여 주깝, 하멍 어멍 지금도 비손질이 그치지 않는다는군요.

 

 

* 매인심방 : 신들의 이야기를 본풀이로 풀어내는 심방.

* 몸주 : 신당神堂의 주인.

* 업저지 : 아이보개(아이 보는 어린 계집, 담살이).

* 이맛돌 : 아궁지의 받침돌.

* 하우장 각시 : 글공부하는 선비.

* 가는대구덕 : 당구덕.

* 지금 화북포구의 해신사海神祠가 그곳이다.

 

 

당할미들

 

무슨 할망당이 지붕도 기둥도 천정도 없이

오글오글 모여 누대를 이렇게 살고 있나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 둥치에

너슬너슬 붙어 이렇게도 수명이 기나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와흘리 본향당

나뭇가지 하나 건드려서도 안 된다는

이 금기

어떤 할망당은 나무와 바위가 한몸되어

살고 있다

무명실이나 물색 옷감 지전紙錢이

나뭇가지에 붙어 펄럭이며 아스스하다

 

열 살 난 아이로 바닷가를 떠돌다 죽었다는

마라도 업저지* 애기할망당

일곱 살에 희생물로 바쳐졌다는

수산水山벌 울타리 밖 애기할망당

제주 할망당은 모두가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지 않은 호젓하고 외진 곳을 좋아한다

해안 마을 바닷가나 마을 밖에 산다

 

앉아 기다리고 서서 기다리고 천년을 기다린다

이렛당 여드렛당 할멍은

한 달에 삼세 번 누워서도 기다린다

 

* 업저지 : 아이보개(아이 보는 담살이).

 

 

도둑맞은 인장

 

다시 지삿개의 주상절리대에 섰다

바닷물이 나가는 것을 보고 주상절리대가

통째로 드러난 인장印章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바닷물이 나가자 인장통의 인장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설문대 할망 당신의 인장통에 인장 하나가 왜 없어졌어요?

하고 물었다

파도 소리인 듯 바람소리인 듯 계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어느 간 큰 시러비 아들놈이 도둑질 해다가

구럼비 마을로 가져 갔다는구나! 

내 손을 벗어난 인장이니 크게 탓할 건 없지만

때가 좋지 않구나

 

평화의 섬 자연의 섬 신화를 삼킨 섬

바람타는 섬, 불타는 섬

파도가 와서 다시 인장통을 흔든다

 

 

구럼비 마을

 

한밤중 폭약 심지를 물고 구럼비 낭 절벽들이 소리친다

이지스함 20척 크루즈호 2척이 정박할 수 있는

해군기지를 건설 중이란다

‘안보 없는 평화는 없다’고 위정자들의 프래카드가

돌먼지 속에서 펄럭거린다

 

탐라왕국에 가뭄이 들자

하늘 나라 옥황상제님께 올라가 메밀 씨앗을

가지고 온 자청비*도

구럼비 절벽을 타고 왔을 거라는 전설 깊은

강정江汀 마을

강정천 소낭밭 맑은 냇물 가에 앉아

이 마을에서 봇뒤창옷(배냇저고리)을 입고 자랐다는

현 시인과 함께 은어회를 먹은 적이 있었다

 

4·3때 많은 양민이 학살당하고 불타버린

‘잃어버린 마을’ 영남리가 이웃에 있고

구럼비 마을은 바야흐로 지금 때늦게

물 속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구럼비야 보고 싶구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깃발이

큰 길가 어디서나 펄럭거린다

 

이름도 고약한 ‘썩은 섬’이 있어 피서와 낚시를 즐겼던 곳

엉또폭포가 흘러내리는 해안 절벽 밑에선

벌써부터 기름 띠를 두른 석유 냄새가 진동한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

한밤중 까마귀쪽나무들이 뿌리째 넘어지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설문대 할망* 신음 소리보다 크다.

 

* 구럼비 마을 :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 숲을 말하며 강정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 자청비 : 세경본풀이에 나오는 제주 농경신화의 할머니, 세경 할미라고도 한다.

* 설문대 할망 : 제주(탐라)도를 창조한 여신. 한반도에는 강림신화(단군신화)만 있는데 창조신화는 오직 제주도밖에 없다.

 

 

신화를 삼킨 섬

 

천왕 닭이 세 홰를 치고

지왕 닭이 울어 날이 새자

바람 찬 날 어디서 온 것일까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거대한 모습으로

설문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빛 바다와 어울리는 섬들을

만들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

치마폭에다 가득 흙을 퍼날라다

산을 쌓았다

치마는 낡고 헤어져 여기저기 구멍이 났지만

설문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구멍들 사이로 흙부스러기가 떨어져

오름오름을 이루어나갔다

 

흙을 너무 많이 집어 놓았다 싶은 곳은

주먹으로 봉우리를 탁 쳐서

균형을 잡아나갔다

봉우리가 꺾인 곳은 백록담

솥뚜껑 같은 봉우리가 날아가 앉은 곳은

산방산

솔밭 두 개가 떨어져 나앉은 곳은

가파도와 마라도가 되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곳은 영실이었다

영실은 수려하고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냈다

깎아지른 절벽

병풍처럼 둘러싸인 암벽들 사이로

설문대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그날부터 5백 장군들을 놓아 멱여 길렀다

솥덕을 걸고 죽을 쑤었다.

 

그제서야 한라산을 베개로 허리가 쑤시면

잠자리 펴고 잠이 오지 않으면

저 멀리 관탈섬에 한 발을 걸고

고근산에 앉아 가장 따뜻한 곳

서귀포 바다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녀는 산으로 바다로 바장이며

박지에 있는 커다란 박을 솥덕 삼아

밥을 짓고

우도와 가파도를 빨랫돌로

성산 일출봉 분화구를 빨래바구니로

등잔바위를 등불 삼아

밤늦도록 새끼들의 헤진 옷을 기웠다

빨래와 바느질

그녀의 손끝 발끝 하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람과 돌과 척박한 땅

먹거리가 항상 부족해

봄비가 부슬거리는 날은 한라산에 올라

고사리 한 줄 꺾어 죽을 쑤었고

바닷가 몰을 뜯어다 몸국을 끓여냈다

그녀는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태어나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국자로 죽을 푸다가 헛발 딛어

그만 죽솥에 빠져죽고 말았다

막내 아들이 솥바닥에서 죽은 어멍

흰 뼈들의 흔적을 보고 통곡하며

차귀섬까지 달려나가

선바위로 굳어졌다

 

늦봄이 오면 그때서야

오백 장군 흘린 피눈물은 한라산을 온통

철쭉꽃밭으로 물들여 놓았다

그녀는 왜 오백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 길러야 했을까

바람 부는 날은 영실봉에 

올라 보아라

아직도 좁쌀 죽粥 냄새가 끈하다

 

 

탐라 개국을 엿보다

 

영평 8년* 을축 3월 열사흗날 자시에는 고을나, 축시에는 양을나 인시에는 부을나, 고,량,부 삼성친이 모흥굴(삼성혈)로 솟아나서 도읍한국이외다.

─ 제주 심방굿 사설중에서

 

활쏜디왓(三射石)에서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가늠해 본다

고을나의 땅 일도동, 양을나의 땅 이도동 부을나의 땅 삼도동을 지나 

그들이 결혼했다는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 혼인지婚姻池의

연못을 보았다.

‘흰죽’굴에서 벽랑국의 세 공주를 하나씩 맞이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며 살았다

일설에는 벽랑국 세 처녀는 강진군 남쪽 벽랑도(현 소랑도)에서 왔을거라는 주장이 강하다. 옛 탐진耽津은 탐라국의 탐耽과 그 음이 같고 고대 항로로서 물물교환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다. 

벽랑도와 가까운 마량馬良은 말배가 닿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 사냥꾼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농경문화가 이식된 것을 뜻한다.

 

설문대 할망의 창조신화와 세 신인의 개국신화는 신화시대와 역사시대의 분기점이 아닐까

파도에 쏠리고 바람에 날리고 돌로 다져진 한라의 신화는 여신들과 평화로운 탐라인들의 삶속에서 용출된 이야기들, 

한반도의 강림 개벽신화는 제주에 와서 분출된 창조신화와 역사로 뒤바뀌는 것을 본다

자청비의 풀어흘린 치맛자락 같은 사라봉의 능선이 또 노을속에 여울지는 것을 본다. 

어둠이 와서 별도원을 덮고 내일 아침은 저 성산 일출봉에서 

불수레바퀴 같은 해가 바다위로 굴러 오리라.

 

* 영평 8년 : 영평은 중국 연호로 후한 시대, 서기 58~75년에 해당. 8년은 서기 65년이 된다. 한무제가 처음 사용한 이래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꽃놀이 패

 

줄줄이 유배 길을 나서는 선비들을 꽃놀이 간다고 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을 돌아와서는 꽃놀이 한번

잘했다고 말한다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길을 가면서도

거드름을 피며 위풍당당했다

시쳇말로 화전花煎놀이

속말로 사당패 놀이라고도 했다

 

조천항 포구에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었다.

배가 들어오지는 못할 것 같다

 

조선조엔 2백여 유배객들이 드나들던 나들목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큰절 한번 올리고

운이 좋은 사람은 보수주인保授主人*도 잘 만났다

고. 을. 나의 땅에서 봇뒤창옷*은 입지 않았어도

말뚝을 박고 슬쩍 끼어들어

뻔뻔한 입도조入道祖가 되기도 한다

 

광해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린

간옹艮翁 이익李瀷은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의 딸을 맞아

경주 李씨 국당공파 파조派祖가 되었고

이성계 정권을 거부한 고려 유신

김만희金萬希는 김해 金씨 좌정승공파

입도조가 되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는 4만 평의 땅을 가진

강도순姜道淳의 집에 부처했다

딸은 없어도 안거리 밧거리 쇠막 말방앗간까지 딸린 집

제자를 기르고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쳤다

이만큼이면 화북 포구로 들어오든 조천 포구로 들어오든

쓰라린 세월 꽃놀이 패 한번

잘 놀아 볼만하지 않은가

 

* 보수주인保授主人 : 유배인의 보증인이 되어 관리하며 시식을 제공했던 사람.

* 봇뒤창옷 : 배냇저고리

* 화북포구와 조천포구는 제주에 파견된 관리와 유배객들이 드나들던 2대 관문이었다.

 

 

사란결寫蘭訣*

― 대정골 추사관에서

 

비껴 서지 마라

빈 겨울 하늘만 남은 절벽이다

알 오름을 뒤덮는 까마귀 울음만이 남은 절벽이다

이곳에 와서 더 비껴 설 곳은 없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불꽃 같은 정신을 보고 서 있으면

붓대신 입에 칼을 물고 싶어진다

얼음을 딛고 서서 언 겨울 하늘에다

청죽靑竹을 치는 사내

등뼈 같은 두 그루의 잣나무와 벼락맞아

한 가지가 비틀어진 두 그루의 소나무 앞에서

얼 빠진 사내처럼 나는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진다

더는 비껴 서지말자

 

변명도 하지말라

변명만으로는 시詩가 되지 않는다

하얀 백지에 흐르는 8년 3개월의 위리안치된 시간들

열 개의 벼루 밑구멍이 뚫리며

천 개의 붓이 닳아

이렇게 제주 수선화는 피었구나

이렇게 난초잎은 둥글게 휘어졌구나

이 밤은 선화지에 듣는 검은 먹물만이 진실이다

물러서지 마라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밤이다

너에게도 절복切腹의 시대는 오리라 

99푼을 완성하고도 1푼이 모자라

폐기처분 하는 날이 곧 오리라

용서하지 말자

더는 갈 곳이 없다

서릿발 치는 겨울 하늘

울타리 밖은 파도 소리만 높다

 

* 사란결寫蘭訣 : 추사 김정희(金正喜,1788-1856)는 사란결寫蘭訣 즉 난초를 그리는 비결에서 99를 얻고도 1푼이 부족해 버리는 그림이 된다고 말한다. 1푼은 시인의 정신(정체성)을 말한 것인데 이는 죽란도나 묵란도보다 세한도(59세 때 그린 그림, 64세 해배)에서 유감 없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적적성성한 기운은 올곧은 선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아호를 33개 이상 지었고, 그의 제자(제주) 박계첨이 정리한 완당인보에 의하면 180개의 인장을 사용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추사체요 세한도였다. 세한도는 고도의 압축과 감정의 억제, 자기 성찰을 추구한 작품이다.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 『꿈꾸는 섬』,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허공에 거적을 펴다』 등 ―‘소월시문학상’,  서라벌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풍장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는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선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이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연비燃臂

                                              송수권

 

 

목어가 울 때마다 물고기들의 싱싱한 비늘이 떨어지고

운판이 자지러질 때마다 날짐승들마저 숨죽이며 날았다

어떤 침묵 하나가 이 세상을 여행 와서 더 큰 침묵 하나를

데리고 그림자처럼 지난다

문득 희나리*의 불꽃 더미 속에서 조실祖室 스님의 흰 팔뚝

하나가 불쑥 떠올라왔다 그 흰 팔뚝에서 아롱진

연비** 몇 방울이 생살로 타면서

얼음에 갇힌 꽃잎처럼 나의 감각을 흔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가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칠칠한 숲을 기르는 물이 되고 햇빛 되는 걸까

그 후, 나는 고개를 꺾으며 몹쓸 습에 걸려

무심히 핀 들꽃, 날아가는 새에서도

조실의 흰 팔뚝을 떠올리며 어린애처럼 자주 길을 잃고

헛기침 끝에 온 몸을 떨었다

 

아니다, 아니다, 조실은 가지 않았다

어떤 믿음의 확신 하나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나는 참으로 몹쓸 병을 꿈에서도 앓았다

눈보라치는 섣달 겨울 어느 날, 그의 방문을 열다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윗목에 놓인 매화분의 둥그럭***에서

빨간 꽃망울 몇 개가 벌고 있음을 보았다

뜨거운 연비 몇 방울이 바야흐로 겨울 하늘에서 녹아 흘러

꽃들은 피고 있었다.

 

 

* 희나리 : 덜 마른 장작.

** 연비燃臂 :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계를 받고 나서 팔뚝에 불을 놓아 문신처럼 떠내는 의식 또는 그 자국.

*** 둥그럭 : 끌텅이

 

우리 나라의 숲과 새들 -송수권나는 사랑합니다 우리 나라의 숲을, 늪 속에 가라앉은 숲이 아니라맑은 신운(神韻)이 도는 계곡의 숲을, 사계(四系)가 분명한 그 숲을철새 가면 철새 오고 그보다 숲을 뭉개고 사는 그 텃새를 더 사랑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든가뱁새가작아도 알만 잘 낳는다든가 하는 그 숲에서 생겨난 숲의요정의 말까지를 사랑합니다나는 사랑합니다, 소쩍새가 소탱소탱 울면 흉년이 온다든가솔짝솔짝 울면 솥 작다든가 하는 그 흉년과 풍년 사이온도계의 눈금 같은 말까지를,다 우리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는 말로다 사랑합니다, 술이 깬 아침은 맑은 국물에 동동 떠오르는동치미에서 싹독싹독 도마질하는 아내의 흰 손이 보입니다, 그 흰 손이우리 나라 무덤을 이루고, 동치미 국물 속에선 바야흐로 쑥독쑥독쑥독새*가 우는 아침입니다나는 사랑합니다, 햇솜 같은 구름도 이 봄날 아침 숲길에서생겨나고, 가을이면 갈꽃처럼 쓸립니다, 그 보다는 광릉 같은데,먼 숲길쯤 나가 보면 하얗게 죽은 나무들을 목관악기처럼 두둘기는딱따구리는 저 혼자 즐겁습니다나는 사랑합니다, 텃새, 잡새, 들새, 산새 살아넘치는우리 나라의 숲을, 스 숲을 베개 삼아 찌르륵 울다 만 찌르레기새도우리 설움 밥투정하는 막내딸년 선잠 속 딸꾹질로 떠오르고밤새도록 물레를 감는 삐거덕,삐거덕, 물레새 울음 구슬픈우리 나라 숲길을 더욱 사랑합니다.

 

전설(傳說)& 송수권

 

바닷가 오두막집에 늙은 양주 내외 살았다.

옛날에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풀고

옛날에 영감은 망치집이 쉬지 않고 불꽃을 쳤다

낮과 밤을 이어 끝없는 노동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

타는 불 보고 불 같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먼 데 있는 도시의 집들을 꿈꾸고

망치야 날아라 망치야 날아라

새들처럼 가볍게 떠가는 꿈을 꾸었다

폭풍이 치고 온 산과 들 바다에 쿠렁쿠렁

망치소리 울릴 때

 

길 잃은 배들이 망가진 닻을 풀고

고개 너머 마을 사람들이 연장과 도구를 찾아 갔다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불고

영감은 모루 위에서 쇠집게로 물통 속에 불을 던졌다

물과 불이 만나 싸늘하게 식은 쇳덩이를 토해 내고

이제 우리는 알았다

그것들이 맹수처럼 덤벼 들어서

어떻게 우리를 사냥하고 물어뜯는가를

 

적막한 바닷가/송수권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 밭이 갯물을 비우듯이더러는 그리워 하며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 밭이 미물을 쳐 보내듯이갈밭 머리 해 어스름녘마른 물꼬를 치려는 지 돌아갈 줄 모르는한 마리 해오라기처럼먼 산 바래 서서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갈바람 소리에우리 으스러 지도록 온 몸을 태우며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징검다리  송수권

 

햇빛은 산과 들에 부드럽게 빛나고

물결은 풀어져 물방아는 쿵쿵

바둑이가 든 그림책 한 권을 잘도 넘기도 갔다

바둑이 대신 어머니는 자꾸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물방앗간 앞을 가로 지른 서른 몇 채의

어느 징검돌 위에 서서

나의 다릿심을 풀어 내느라

어머니는 손을 내밀고 서서 나를 부른다

아마 그때가 입학하던 첫날이었을 게다

물방아도 봄이 되자 더 힘을 내어 돌고

내 이웃의 소녀들처럼 뒷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징검돌들은 흐젓이도 물 속에 처박혔었다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도령아 이도령아

내 뒷머리채 못 밟아준 것도 죄지……

이 날은 해가 꼴딱 지도록 어머니와 그 짓을 되풀이하여

내 다릿심이 반남아 풀리는 것을 보았다

팔짝, 팔짝, 쿵, 쿵, 물방아는 돌고 세월은 가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아주아주 슬픔에 발을 적시어

내가 영 일어서지 못하는 날은

조약돌 몇 개로 물낯바닥을 마구 흐려 놓고

어머니는 그 돌들 위에 서서 나를 부른다.

 

아그라 마을에 가서

송수권

 

우리의 신(神)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 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神)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한국의 강 / 송수권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소리가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음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저 깊은 골짝으로 막 밀어낼 때는, 가지는 휘늘어져검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그러나 잘 들어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늑대들처럼 몰려서서 짖는다. 어떤 차이 와도 이 옆구리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창창한 어린 잎을 달고서는 계룡산 연봉을 보며우쭐거리던 처녀시절 - 扶餘, 참 좋은 숲 하나를 이루었다.백마를 타고 강폭을 미끄러지던 범선의 돛대를 향하여화살을 날리는 꿈 같던 백제의 청년은 죽었다.시들해지고 그후 밑뿌리까지 다 보일 듯하더니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멸치젓 새우젓 어리굴젓 독에서도왁자지껄 진딧물 같은 물벼룩들이 툭 툭 떨어진다.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그것들은 모이고 모여 밑둥까지 꺼머진 채 숲을 이루며어깨와 팔다리의 근육을 우그려뜨려서는 금산사의 미륵보살흰 눈썹에도 어진 손 얹고 지나는 것을, 그러고도논산 제2훈련소 앞을 서서남으로 빗밋이 에두르고휘두르다가는 이제는 그 숲속에서 깨어진 꿈이고무엇이고 탁류에 얼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이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진다.아, 저 보아라 저무는 강둑 착한, 젖먹이 소를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 서해 짠물 속에머리를 처박고 들어가 이제는 멸치떼고새우떼고 마구 퍼올리는 한국의 강을, 저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고도이 벌판 가득 떠오르는 저 찬란한 별들을.

 

해빙기(解氷期)

& 송수권

 

며칠째 쌓이던 눈이


다시 녹으면서


대성동(大成洞) 마을 움집들의 추녀 끝을 둘러


고드름발을 쳤다.

 

우리 고숙(姑叔)은


삼동(三冬)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


물소리도 싫어지고


마른 산약(山藥) 뿌리를 다듬으며


달장깐이나 막힌 화개(花開)장길이 못내 서운타.


 

지리산(智異山)을 겉돌면서 살아온


고숙의 한평생


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


삼동(三冬) 허연 꿈 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


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


한 뿌리라도 만나질까.


 

유마경(維摩經)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


고드름발에 엉기면서


지리산(智異山)일대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왔다.

 

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


엇둘 엇둘 소리…….

 

 

 

송수권에게 고향 학림리는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 깊숙이 관여한 채 몸을 조여오는 학림리는 그에게 기피의 대상이었다. 학림리가 그에게 던져준 것은 상처였다. 군대를 다녀온 직후 생목숨을 던져버린 동생이 그렇고, 7년 동안이나 방구들에서 병을 앓다 간 생모의 죽음 또한 딛고 일어서기 힘든 상처였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적으로 근원으로 회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외면하고자 하는 생각에 비례하여 다시 고향으로 쏠리는 마음을 송수권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이 이룩한 문학은 근원에 바탕을 두기 마련이다. 송수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초기 시편들은 대부분 고향 학림리에 대한 기록이며 그는 학림리 안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진 아득한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곧 젊은 나이에 이미 생의 의미를 소진해버린 송수권 자신과 동생의 죽음을 환생의 길로 인도하는 치열한 굿판이었다. 

그의 시는 아주 까마득히 잊혀진 정서를 지금의 시간 앞에 다시 끌어다 앉히는 힘을 지녔다. 지금껏 송수권의 이름 앞에 지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수식은 ‘토속’이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시 속에 풀어놓으며 대상에 파닥이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 토속어들로 인해 그의 시는 농촌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하게 살아오게 만든다. 그에게 전라도 사투리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표준어가 서울말이라면 판소리의 표준어는 전라도 사투리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결국 표준은 쓰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 마련이며 송수권식 시어의 표준은 전라도 사투리다. 

<공동 묘지의 벌겋게 까진 잔등이 비에 얼룩지고/비명처럼 황토흙의 빛깔들이 새어 나왔다/ 외짝 신발 하나를 묻고 봉분을 짓고/“오매 오매 날 무얼라고 맹글었는고 짚방석이나 맹글 일이제…”/흐렁흐렁 울음 속에서도 황토흙처럼 불거져 나온/저 전라도의 간투사들> (「묵호항」 부분) 

평생을 같이 했던 사람의 죽음을 단지 슬픔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은 자신을 ‘짚방석’보다 못한 존재로 비유하는 고모의 입말을 통해 가능해진다. 현실에서 건진 전라도 말은 슬픔을 넘는 해학이며 아픔의 승화다. 한을 풀어내는 송수권의 방식은 적절한 토속어의 사용 안에 있으며 그가 부리는 언어들은 토속과 어우러질 때 긴 파장을 만든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시인 
송수권에게 돌아보기 힘든 시절은 학림리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때이다. 교직을 그만두고 방황하던 서울에서 어린 아이를 들쳐업고 자신을 찾아 나선 아내를 만났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학림리에서 흙 파먹고 살았던 시절, 그는 동생의 죽음이 던진 충격에서 쉬 벗어나지 못했다. 

동생의 자살이후 송수권에게 삶은 아무 의미없음으로 정리됐다. 몇몇 절을 기웃거리며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고, 여차 하면 생을 버릴 요량으로 수면제를 한 움큼 가지고 다녔다. 그 무렵 「문학사상」에서 당선 통고가 왔다. 서울에서 방황하던 때 그는 백지에 휘갈겨 작품을 응모했다. 그의 작품은 원고지에 쓸 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마침 편집주간이던 이어령씨가 쓰레기통에 쌓인 원고들을 보고 꺼내 읽었고, 송수권의 작품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런데 막상 주소지 서대문 ‘화성여관’으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있어야 할 작가 송수권은 종적도 없었다. 주간은 그를 1년 동안 찾아 헤맸고 학림리에서 수박 농사짓던 송수권을 찾아냈다. 주간이 그를 만나 대뜸 던진 말은 “자네는 쓰레기통에서 나온 시인이야!”였다.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그렇게 만나는 것을> (「산문에 기대어」 부분) 
그의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산문에 기대어'는 죽은 남동생에 대한 제의로 씌어진 작품이다. ‘산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의 문이다. 

학림리 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생의 무덤은 고향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고향 산허리에 누워있으니 동생은 죽어서 더 편안할 것이다”고 했다. 
송수권이 담배에 불을 붙여 동생의 묘 위에 놓았다. 죽은 자에게 건네는 산 자의 예의, 그 행위는 「산문에 기대어」를 관통하고 흐른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에서처럼 한 잔은 산 자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죽은 자의 몫이다. 살아 돌아와 술잔을 채워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 궁극적으로 「산문에 기대어」는 살이 썩어도 영원히 남는 터럭(눈썹)을 매개로 한 재생의 길이다.

죽창으로 살아오는 대숲 바람소리
학림리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이다. 송수권은 그 땅에서 자라며 농촌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송수권의 전매특허와 다름없는 토속적 색채는 곧 고향 학림리의 것에 다름 아니다. 송수권과 함께 찾아간 학림리, 새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고 텅 빈 송수권의 고향집은 폐허를 연상시켰다. 넓지 않은 마당은 웃자란 억새로 가득했고 사람의 온기는 이미 없었다. 송수권의 집처럼 고향 학림리도 시름에 잠겨있었다. 

<밝은 햇빛 떨어진 황토길/통나무 같은 지렁이 한 마리가 고딕체로 넘어져 있다/농사는 갈수록 힘들고/경제 대국은 어려워요/소와 마부가 깍깍 한낮의 정적을 씹어놓고 갔을/두 줄의 선명한 수레 발자국> (「環村5」 부분) 
환촌은 인가가 둥글게 고리모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의미한다. 송수권의 시에서 환촌은 곧 학림리이고, 벌어먹을 땅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형성돼 있어 나라 땅 대부분의 마을은 환촌이다. 여건 자체부터 이미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의 논리는 더욱 더 농촌을 외면한다. 송수권의 인식 속에서 학림리는 막막한 땅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한이다. 그러나 송수권은 한을 그 자체로 묶어두지 않는다. 한과 맞서 싸워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의 대숲소리는 그래서 옹골차다. 

학림리에는 대숲이 많다. 송수권의 시에 대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단순하지 않다.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타는 내음…> (「대숲 바람소리」 부분)

학림리의 대숲소리는 송수권의 시를 통해 죽창으로 되살아온다. 대는 난세에는 죽창으로, 평온한 시절에는 피리로 태어났다. 대나무가 담고 있는 이 양극단의 이미지는 헐벗은 땅을 안으로 보듬어내려는 송수권의 의지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는 “황토, 뻘과 더불어 대나무는 우리 국토의 3대 정신이다”고 했다. 그의 시는 곧 국토의 정신과 그 속에 살아내는 사람들을 오롯이 담아내고자 하는 당위성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송수권은 고향 학림리를 돌아나오며 “고향의 흙냄새는 잃었지만 저 대숲마을의 풍경은 무덤 속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무덤에까지 가져가려 하는 것은 단순한 고향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 딛고 살아낸 사람의 시간과 정신일 것이다. 
정상철 기자 

 

송수권은 주변 사람들에게 ‘5분 후에 웃는 사람’으로 통한다. 모든 게 느린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느림의 미학’을 인생의 길로 삼는다. 아무리 원고를 쓰는 일이 버거워도 그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동차 운전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곡선 속에 있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아픔도 모두 곡선으로 모아진다. 직선 안에는 시간조차 없다. 단지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열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는 동안 그는 대나무, 황토, 뻘로 이어지는 국토의 정신을 가다듬는 데 천착했다. 그 안에서 그는 “현세의 질서가 아닌 우주의 정신”을 만났다.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 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로 신인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첫시집 『산문에 기대어』를 시작으로 최근에 나온 『파천무』까지 열 권의 시집을 묶어냈으며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송수권 시비

위치 : 전남 장흥군 장평면 봉림리 계명성문학공원

 

   

 

 

시골길 또는 술통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아도』,『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금호문화재단 예술상 수상.

 

 

 

 

 

 

 

 
 
 

 


좋은 시와 나쁜 시

박태일(시인, 교수)


1
시는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공간적 단위의 구성원이 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온 담론 구성물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둘레 주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은 부분 개념이거나 역사적 정의에 머문다. 처음부터 시의 본질이니 순수한 시정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일은 수사적 부풀림이거나, 특정 시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굳히기 위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특정 시관을 금과옥조로 일반화시키는 잘못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시와 비시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경계의 나눔이 불필요해 보일 정도다. 어떤 작품이 시냐 시가 아니냐는 물음이 어리석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특정한 시적 취향과 그 관점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토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이 생산적이다. 

(ㄱ)콩나물죽 
후룩후룩 먹으며
아버지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 돌아오시면
죽 안 먹으려니 하고

(ㄴ)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ㄱ)과 (ㄴ)은 둘 다 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 둘은 줄글 꼴로 쓰여진 예사로운 산문과는 다르다. 겉꼴에서부터 들쭉날쭉 글줄이 들고 난 가락글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낯익은 시꼴이다. 그리고 둘 다 시집이라는 형태공간에 실려 있다. 그러하니 이 둘을 두고 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남은 문제는 있다.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나쁜가라는, 작품에 대한 호오․취향에 대한 물음이다. 이 둘이 시인가 시가 아닌가라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먼저 (ㄱ)을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 속에 담겨 있는 현실감각을 눈여겨본 사람일 성싶다. 짐짓 배고픈 아이의 생각과 몸짓을 이음매로 내세운 가난이라는 현실이 짧은 시줄 속에 잘 옹글었다. 거기다 이 시는 나라잃은시기 1930년대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간지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조선의 빈궁 현실을 다루어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위험이 큰 작품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면 (ㄱ)에 대한 독자의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명시인의 습작기 투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ㄴ)을 나쁜 시로 꼽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ㄴ)은 구체적인 삶과 겉돌아 추상적이다. 작품 내용도 어름하다. 반복법에 이끌린 영탄조마저 없었다면 이 시를 객쩍은 벌소리로 볼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작품은 그렇게 낮추어 보기 힘든 시다. 명망가 시인인 정현종의 것인 데다, 그에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시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런 무거운 사실을 일깨워준 뒤 다시 독자에게 (ㄴ)에 대한 호오를 물어보라. 이 작품을 벌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던 이도 마냥 생각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눈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면 유명 문학상과 그 심사위원회의 식견, 그리고 시상 주체의 사회적․제도적 명성과 권위체계를 딛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떠맡기 힘든 일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결정 짓는 취향의 요건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것 못지 않게 시 바깥에도 있다. 어쩌면 시 바깥 요인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 작품은 문학사회의 거시 제도 안에서 마련한 미시전략의 결과다. 각급학교 문학교육, 등단방법, 문학상과 같은 다양한 인정기제나 제도적 틀, 대중매체나 저널 문화면의 명성 생산과 재생산, 또는 인맥․학맥․지맥과 같은 문화자본, 서점 유통 단위에서 나타나는 판매지수나 기호도 순위와 같은 중계회로의 소비전략이 그 내면화의 세부를 이룬다. 이른바 시의 역장이다. 
흔히 문학사회 안에서 시의 자리는 세 가지 역장을 보여준다. 고급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시적 취향과 목표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서로 긴장, 대립, 보족 관계를 거듭한다. 오늘날 우리시는 이러한 세 역장을 껴안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다.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잣대와 조건은 이 역장 안에서 다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여러 길항관계를 받아들일 때라야만 비로소 시에 대한 열린 개념 정의와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좋은 시의 요건을 몇 가지로 들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시의 모습 또한 자명해질 것이다. 

2
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 안쪽에 시인이 됨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곧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 밖에 없다. 시작에 대한 즉흥성과 시인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조급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언어와 다투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 봄직하다. 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숱한 언어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언어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형식주의자의 생각에 따라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언어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그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무엇보다 언어는 자민족 중심적이다. 언어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100년 남짓한 근대 시기 동안 우리시는 노래로 불려졌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그 쓰임새를 세련시킨 공이 크다. 이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근대시의 전통이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언어였던 일본식 한자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어론이 솔솔 피어나고 있는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 문화물이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 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동질성이다. 그러나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서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셋째, 표현?【?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하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 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적인 자리는 어딘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기지의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 보면 될 일이다. 이 경우 고쳐진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쳐진 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이미 낯설게하기라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일탈에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시와 같은 것들이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겨 있 따름이다. 좋은 시란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락,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독자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은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가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렇듯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작품 안에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저널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 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 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 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을 좋은 시로 거듭난다. 

3
좋은 시란 시인된 됨됨이에서부터 언어를 거쳐 표현 방법과 인식 내용, 그리고 독자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위에서 나는 좋은 시를 좋은 시인이, 민족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리 위에서, 어쩌면 될성부르지 않은 반복불가능한 표현을 겨냥하며, 세계를 개방해주는 쪽으로, 멀리 독자를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으로 규정했다. 여러 편차와 다채로운 맥락이 그 안에서 새로 마련되겠다. 그럼에도 좋은 시는 이러한 요건의 그물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뜻하는 궁극은 마침내 하나다. 뜻있는 말놀이, 문화관습으로서 이르기 힘듦이 그것이다. 그 방위가 어디든 더욱 이르기 힘든 상태를 보여준 작품, 그것이 좋은 시다. 오늘날 문학사회의 환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매체가 시의 취향을 이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향유 방식도 바뀌고 있다. 시를 향한 취향의 높낮이나 경계, 기대지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시의 자리가 시단을 이끌고 있다. 문학의 인정기제 또한 그에 맞물려 움직인다. 세련된 독서로서 시 비평과 연구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속에서도 시의 가능성, 곧 언어를 통한 창조적 가능성의 확대라는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좋은 시, 또는 시적인 것을 향한 헌신은 문학사회 안팎으로 지난날과는 견줄 수 없을 강도와 방향에서 요구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당대시의 전통과 관습의 담장을 흔드는 좋은 시가 나올 개연성은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사회가 시인들에게 시를 향한 다함없을 헌신을 한결같이 기대하는 시대 분위기,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처음이자 끝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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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 기대어 / 송수권

     

 

 

 

 

 

 

 

 

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 산다화 : 동백나무의 일종

 

송수권 시집 <산문에 기대어> 중에서

 

 

 

송수권 연보


1940년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1297번지 출생.

 

1959년 순천사범학교 졸업.

 

196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山門)에 기대어≫ 등이 당선 등단.

 

1976년 지리산 노고단 ‘산상(山上) 시화전’ 개최.

 

1980년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간행.

 

1982년 제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간행.

 

1984년 제3시집 ≪아도(啞陶)≫(창작과비평사) 간행. 해방 후 최초로 ≪분단시선집≫ 편저.

 

1985년 중등학교 교감 자격증 취득.

 

1986년 산문집 ≪속(續) 산문에 기대어≫(오상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나남) 간행.

          금호문화예술상 수상.

 

1987년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198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제5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간행.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간행.

 

1989년 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문학사상사) 간행.

 

1990년 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1991년 역사기행집 ≪남도기행≫(시민) 간행. 한국현대시 100인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간행.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간행.

 

1992년 제7시집 ≪별밤지기≫(시와시학사) 간행.

 

1993년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4년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간행.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감사).

 

1995년 30년간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연구관으로 명예퇴직.

 

1996년 남도 음식문화 기행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간행. 제7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광주문학상 수상.

 

1998년 산문집 ≪빛세상≫(토우) 간행.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와 광주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남도음식문화축제 심사위원. ≪무등일보≫ 편집위원.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시와시학사) 간행.

 

1999년 제1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객원교수 임용.

          우리 토속꽃 시집 ≪들꽃세상≫(혜화당) 간행. 육필시선집 ≪초록의 감옥≫(찾을모) 간행.

 

2000년 ≪태산풍류와 섬진강≫(토우) 간행.

 

2001년 제10시집 ≪파천무≫(문학과경계사) 간행.

          3인(고 이성선, 송수권, 나태주)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사) 간행.

 

2002년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모아드림),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간행(제 1~8 시집 정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정교수 발령.

 

2003년 제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간행.

 

2005년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 매화 한그루 심고≫(시학), 비평집 ≪사랑의 몸시학≫  간행.

          논총 ≪송수권 시 깊이 읽기≫(나남),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고요아침) 간행.

          시 감상선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고요아침), 시창작실기론 ≪송수권의 체험적 시론≫  간행.

          김동리문학상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퇴임.

 

2006년 비평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 ≪상상력의 깊이와 시 읽기의 즐거움≫ 간행.

 

2007년 시선집 ≪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산문집 ≪소리, 가락을 품다≫(열음사) 간행.

 

2008년 장편 동화집 ≪옹달샘 꽃누름≫(문학사상사) 간행.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수상.

 

2010년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 비평집 ≪체험적 시론≫ <시창작 실기론> 간행.

          지리산인산문학상, 만해님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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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꽃 꺾어 / 송수권 

         

 

 

 

 

 

 

 

 

 

석남꽃 꺾어

 

  

                                     송수권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송수권 시집 <별밤지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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