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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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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시인과 명시 꽃
2016년 01월 02일 20시 10분  조회:3463  추천:0  작성자: 죽림

꽃 / 조병화


꽃이 스스로 혼자 피어서 
한동안 이승을 구경하다간 
스스로 사라지듯이 
나도 그렇게 구경하다 가리

꽃이 꺾이면 꺾이는대로 그렇게 
꺾여가듯이 
나도 그렇게 
이승을 살다 가리

꽃이 어느 불행한 시인에게 
눈에 들어 
사랑을 받듯이 
나도 그렇게 
어느 불행한 여인에게 눈에 들어 
아, 그렇게 사랑을 받았으면

 


꽃을 버릴 때처럼 / 조병화


꽃을 버릴 때처럼 
잔인한 마음이 있으리

아직도 반은 살아 있는 꽃을 
버릴 때처럼 
쓰린 마음이 있으리

더우기 시들은 꽃을 버릴 때처럼 
애처로운 마음이 또 있으리

한동안 같이 살던 것들 
같이 지낸 것들 
같이 있었던 것들을 
버릴 때처럼 
몰인정한 마음이 있으리

아, 그와도 같이 
버림을 받을 때처럼 
처참한 마음이 또 있으리 

 


꽃 / 유 치 환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 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발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들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꽃 /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꽃 / 박양균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망(亡)한 
이 황무(荒蕪)한 전장(戰場)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委囑)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砲聲)과 폭음(爆音)과 
고함(高喊)과 마지막 살육(殺戮)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地軸)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靜謐)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天心)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 김춘수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의 무늬 위에 나는 나를 가만히 띄워 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마리의 황나비는 아니다. 
물살을 흔들며 바닥으로 바닥으로 나는 가라앉는다. 
한나절, 나는 그의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도연(陶然)히 눈을 감고 그는 다만 웃고 있다.
                

[출처] 꽃에 관한 명시들|작성자 헌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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