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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시인 - 김현승
2016년 01월 05일 05시 23분  조회:4767  추천:0  작성자: 죽림


고독의 시인 김현승

 

이재훈(시인)

 


가을이다. 가을을 가리켜 흔히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고독의 계절이라고 한다. 산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쓸쓸해지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철학자는 아닐지라도 산책자쯤은 되는 것이다. 조락의 계절. 지는 낙엽은 소멸과 죽음이지만, 우리는 그 소멸의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미학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추억하며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고, 낙엽을 줍고 싶고, 그리워하고 싶고,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고독해진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바로 김현승이다. 가을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렸던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 김현승은 유독 가을과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또한 그 시들이 유독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충 짚어 봐도 <가을의 기도>, <가을의 시>, <가을저녁>, <플라타너스>, <절대고독>, <고독>, <고독의 풍속>, <고독의 순금>, <고독의 끝> 등등. 김현승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사역지를 따라 제주에서 잠시 성장하다가 7세 때부터 다시 광주로 이주해 성장했다. 부친 김창국(金昶國)은 개신교 목사인데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혈연적 전통은 김현승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에도 김현승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승화한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 소재 미션계 학교인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대학(숭실대학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이었던 1934년에 모교의 교수였던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51년 고향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신문학>을 창간 자칫 단절될 뻔했던 광주 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대 재직 시절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병란,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등 40여 명을 <현대문학>에 추천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960년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치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최근에는 탄생 100주년 앞두고 그의 문학적 고향인 광주에서 그의 문학사적 족적과 시 정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형 김현승 시인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다양한 문학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김현승의 대표시는 아무래도 <가을의 기도>나 <플라타너스>일 것이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로 이어지는 시 <가을의 기도>는 전국민의 애송시이다. 매년 가을이면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현승은 ‘고독의 시인’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견고한 고독>을 읽으며 ‘고독’의 찬란한 순간을 느껴보자.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씁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견고한 고독> 전문

김현승의 고독 시리즈는 관념적인 부분이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이 시를 읽을 때는 가슴 한복판으로 시어들이 밀려들어올 때가 있다. 시의 모든 사물들은 고독을 향해 수렴되어 있다.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 등의 시어가 내 모습과 함께 중첩되고 이것은 다시 고독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모습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과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가녀린 창끝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굶주린 삶의 고난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고독한 시간들 속에서도, 영어(囹圄)와 같은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고독한 영혼을 보듬어 안으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상한 삶의 내력들이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을 자학하고 훼손해 왔는가.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을 느끼기 위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노력했는가. 고독을 느끼는 가을의 시간. 고독을 통해 우리 영혼의 소중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한 시간들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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