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청조(李淸照, 1081-1141 추정) |
국가 |
중국 |
분야 |
사(詞) |
해설자 |
이지운(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전임연구원) |
사(詞)라는 체재가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운문의 일종으로서, 대략 성당(盛唐, 713∼765년) 전후에 발생하여 송대(宋代)에 가장 번성하였던 문학양식이다. 수당(隋唐) 시대에 유행했던 자극적이고 신선한 음악이었던 연악(燕樂)에 가사를 붙여 발전된 것으로, 시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시여(詩餘), 곡자(曲子), 악부(樂府), 장단구(長短句) 등의 다양한 명칭이 있다. 이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가락에 맞추어 가사를 지어 불렀기 때문에 장단이 가지런하지 않고 매 구마다 쉬는 곳이 같지 않은 특색이 있다. 사를 창작할 때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악보인 사조(詞調), 즉 곡조에 따라 지어져야 했고, 사조는 각각 특정한 명칭이 있었는데, 이를 사패(詞牌)라 하였으며 먼저 곡조가 있는 상태에서 가사를 지었기 때문에 사를 짓는 것을 전사(塡詞), 즉 ‘가사로 메운다’라 하였다. 사패는 일종의 가락의 명칭이기 때문에 사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어 시의 제목이 내용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아쉽게도 현재는 그 가락이 실전되어 그저 사를 읽고 그 내용에 비추어 가락의 분위기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어서 사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운문이긴 하지만 사는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담고 있는 내용도 시와는 구별되었다. 주로 술, 여색, 유희적인 것을 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앉아서는 경전이나 역사서를 읽고 누워서는 소설을 읽으며 뒷간에서는 사를 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작가들이 아름다운 사를 지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왔으므로 그 지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시라는 것은 자신의 뜻을 펴내는 것으로 여겼던 반면 사는 자신의 정감을 쏟아내는 것이라 여겼다. 제재를 선택할 때에도 시는 장엄하고 정치적, 윤리도덕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사는 서정적 성분이 강해 남녀 간의 애정을 주요 소재로 삼아 깊고 섬세한 내면을 완곡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사가 발전함에 따라 염정적이고 개인적 신세타령에서 벗어나 시국에 대한 한탄이나 국가의 흥망성쇠 등까지도 읊게 되어 점차 시의 언지(言志) 기능까지도 겸하게 되었다.
사는 송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송대는 역대 제왕들과 문인들이 모두 사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았으며 남녀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인(詞人)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이청조는 중국문학사상 거의 유일하게 주목받고 있는 여성으로, 뛰어난 재능과 부모와 남편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ㆍ사ㆍ산문ㆍ문학비평ㆍ금석고증 등의 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여성으로서는 매우 독특하며 높은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청조는 산동(山東) 제남(濟南)출신으로 학식이 높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고 교육받았으며, 조명성(趙明誠)과 혼인 후에도 계속 시사를 창작하는 한편 금석문과 서화의 정리에 힘을 기울였다. 그녀의 <금석록후서(金石錄後序)>에는 남편과 보냈던 시절에 대한 몇 가지 추억이 담겨 있는데, 신혼 초 남편이 태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집에 돌아올 때면 의복을 전당잡히더라도 절에 가서 비문(碑文)과 과일을 사가지고 와서 부부가 서로 마주 앉아 비문을 감상하였었고, 때로는 고대의 서화나 기물 같은 금석예술품을 수집하는데 심취하였으며, 고전의 구절이 어느 책의 어느 쪽, 심지어 몇째 줄에 기재되어있는 지를 맞히는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맞힌 사람은 통쾌하게 웃다가 찻잔을 쏟았던 경험까지 있었을 정도로 이 둘은 뜻이 잘 맞았던 부부였다.
그녀는 북송과 남송의 교체기에 활동하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인생 전반기에 겪었던 평화와 안정뿐 아니라 후반기에 겪었던 혹독함과 비참함이 작품에 모두 표현되어 있어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에는 자연경물과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을 읊어 청신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편과 이별하고 나서는 주로 이별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규원사(閨怨詞)를 쓰고 있다. 송의 남도 이후 남편과 사별하고는 망국의 한과 흥망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작품을 창작하여 여성 사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후대 애국 사인들에게 전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는 사의 음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새로운 단어와 구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자신의 복잡한 정감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안체(易安體)’로 불리는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이와 더불어 사의 예술성에 대한 정확한 견해가 담긴 ≪사론(詞論)≫이라는 비평문은 그녀로 하여금 사사(詞史)에 있어서 부동의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이청조를 ‘완약사(婉約詞)의 종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그녀가 북송의 대표적인 완약파(婉約派) 사인들, 즉 유영(柳永), 진관(秦觀), 하주(賀鑄), 주방언(周邦彦) 등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 남송 시기의 새로운 사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대(淸代) 사비평가였던 진정작(陳廷焯)은 “이청조는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하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원류는 진관, 주방언으로부터 나왔으나 어휘를 구사하는 데는 대단히 창조적인 면을 보였다. 따라서 이청조는 이런 면에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백우재사화(白雨齋詞話)≫)라 하여 그녀의 독창성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는 이청조의 작품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는 정본으로 삼을 만한 송본(宋本)의 이청조 작품집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인데, 조공무(晁公武)는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서 ≪이이안집(李易安集)≫ 12권을 남겼다고 하였고, 황승(黃昇)은 ≪수옥집(漱玉集)≫3권이 있다 하였으며, ≪송사(宋史)≫에서는 ≪이안거사문집(易安居士文集)≫ 7권과 ≪이안사(易安詞)≫ 6권이 있다 한 것을 볼 때, 이청조의 작품이 당시에는 양적으로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수많은 일서(佚書)를 집록하면서도 이청조의 작품에 대해서는 집록한 바가 없었으니 송대부터 이청조의 작품집은 이미 실전되었던 듯하다.
그 후 몇몇 학자들이 이청조의 작품을 수집하여 작품집을 엮었으나 작품 수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수옥사(漱玉詞) 간본(刊本)으로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명대(明代) 모진(毛晉)의 ≪시사잡조본(詩詞雜俎本)ㆍ수옥사(漱玉詞)≫가 있고, 근대의 것으로는 왕붕운(王鵬運)의 ≪사인재소각사본(四印齋所刻詞本)ㆍ수옥사(漱玉詞)≫, 조만리(趙萬里)의 ≪교집송금원인사본(校輯宋金元人詞本)≫, 호운익(胡雲翼)의 ≪수옥사집본(漱玉詞輯本)≫, 이문의(李文漪)의 ≪수옥집집본(漱玉集輯本)≫ 및 ≪전송사(全宋詞)≫본 이청조 사 49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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