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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한번도 가본적 없는 유대계 독일 시인 - 파울 첼란
2016년 12월 07일 22시 37분  조회:6785  추천:0  작성자: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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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독일의 시인. 시집 《양귀비와 기억》(1952)에 수록된 〈죽음의 푸가〉는 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1960년에 퓨히너상을 수상하였다.

 

본명 파울 안첼(Paul Antschel).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당시 오스트리아령, 현재 러시아령)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 출생. 제2차 세계대전 후 빈을 거쳐 파리에 정주(定住)하였으며, 센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부모를 잃은 나치스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 온 마음의 상처를 핵(核)으로 하여 유대 신비 사상을 숨기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드물게 보는 순수한 시공간을 창조하였다.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1952)에 수록된 〈죽음의 푸가 Todesfuge〉는 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생전에 6권, 사후에 3권의 시집이 간행되었고, 1960년에 퓨히너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Sprachgitter》(1959) 《Die Niemandsrose》(1963) 《Lichtzwang》(1970) 《Schneepart》(1971) 등이 있다.

 

 

1.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녀의 삶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실비아의 문학에서 아버지는 가정에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거대하고 부조리한 가부장적인 세계의 상징이었다. 실비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만 8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성애의 결핍이 그녀가 페미니즘에 눈뜰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오토 에밀리 플라스 (Otto emily Plath) 는 독일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유럽의 전통적 문화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 후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는데, 전통적 문화가 희박한 미국에 와서도 아버지는 권위있는 가장이어야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병에 걸렸을 때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가장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죽어간 그의 태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어린 플라스에게 그는 강하고 거대한 세계의 하나로 기억되었다.

실비아 플라스가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이런 가부장적인 특성에 기초한다. 이는 자신을 개미로 비유한 시 「거상」(“The Clossus”)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죽음의 푸가>는 강제 수용소의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김영옥 옮김, 청하, 1986, 83~93쪽.

 

 

 

 

 

후광

 

 

파울 첼란

 

 

 

아몬드 속에-무엇이 있을까 아몬드 속에?

아무것도안이

아무것도안이 아몬드 속에 있다.

거기에 그것이 있다, 있다.

 

아무것도안 속에-누가 있을까 거기에? 왕이

거기에 왕이, 왕이 있다.

거기에 그가 있다, 있다.

 

유대 사람의 곱슬머리여, 너는 잿빛이 되지 않으리.

 

그리고 너의 눈은-어느 쪽으로 있을까 너의 눈은?

너의 눈은 아몬드에 맞서 있다.

너의 눈은 아몬드에 맞서

왕 쪽에 있다.

그렇게 있다, 있다.

 

사람의 곱슬머리여, 너는 잿빛이 되지 않으리.

왕다운 푸른 빛의 빈 아몬드.

 

아무도안에게

너 삶에게 다가와.

너, 손 잘려나간 팔과 함께

찾아내진 너에게 뺨을 대고.

 

너의, 손가락들은

저 멀리서 가는 도중,

교차로에서, 때로,

언젠가라는 이름의 먼지방석

위,

맥빠진 관절 옆에서의

휴식.

 

장작처럼 딱딱해진 가슴-저장소.

불에 그슬리고 있는

사랑과 빛의 노예.

 

너희들이 만지고 있는

밤을 지새운

이 숨구멍, 저 숨구멍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반(半)

거짓이 작은 불꽃 하나.

 

열쇠소리, 저 위

너의 위에 있는 숨-

나무에서.

우리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낱말은

지금 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

 

손 잘려나간 팔과 함께 찾아내진

삶,

너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돌이 산을 떠났다.

누가 깨어 있었던가? 너와 나.

언어. 언어. 함께있는-별. 버금가는-땅.

더 보잘 것 없는 것. 열려 있는 것. 고향과 같은 것.

 

그것은 어디로 갔던가? 소리 멎지 않은 곳을 향하여.

그것은 돌과 함께, 우리 둘과 함께 갔다.

가슴과 가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무거워진다. 더욱 가볍다.

 

공중에 떠있는 그 흉터의

그늘 아래 서다.

 

아무도안-과-아무것도안의-편에-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채,

네 편에

오롯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어

없이도.

 

흑회색 황량함을 비추는

실낱 햇살

나무-

높은 사상(思想)은

빛의 소리에 제 가락을 맞추는데, 이것은 아직

인간의

저편에서 불리우는 노래들.

 

말을 쌓아올리기, 화산이 되도록,

바다의 물살에 휩싸여 있는 말을.

 

위에는

밀려드는

반(反)인간의 무리 그들이

깃발을 나부껴-영상과 잔상(殘像)이

시간 따라 덧없이 교차한다.

 

네가 말-달을 밖으로

내던질 때까지, 그리하여

썰물의 기적이 일어나고,

가슴-

모양의 분화구가

새로운 시작들을 위하여,

왕의

탄생을 위하여

드러날 때까지.

 

네 언어의 빛-바람에

썩어 문드러진

체득(體得)되지 않은 것에

관한 갖가지 지껄임-백(百)의

혀를 가진 거짓-

시, 시 아닌 시.

 

휘-

몰아치며,

자유로이,

인간의

모습을 한 설[雪],

참회자-눈을 지나,

환대하는

빙하 방과 식탁으로 이끄는 길.

 

깊이

시간의 금간 틈새

벌집얼음

에서

기다린다, 숨의 결정(結晶)이,

너의 취소할 수 없는

증언이.

 

아직 노래부를 수 있는 것-

저만치, 눈 덮인 곳에

소리없이 낫문자(文字)를 헤치고 나간

이의 윤곽.

 

소용돌이치는,

혜성-

눈썹 아래

섬광체(閃光體), 그리로

어두워진 조그마한

가슴-위성이

밖에서 붙잡은 불꽃

보듬고

바람에 불려간다.

 

금치산 선고 받은 입술이여, 알려라,

너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무엇이 일어나고 잇다는 것을.

 

너의 흔들리는-매인

세 갈래 손들

뒤에 재(灰)의 후광.

 

흑해의 옛적, 여기,

비석으로 선 서약

깊이,

물에 빠진 노 끝에

맺힌

물방울 하나

그 옛적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때, 수직의

밧줄을 타고

고통의 두 매듭 사이,

보다 더 높이

내 너에게로 너에게로 파고 들어갈 때,

그 밝은

타타르의 달은 우리를 따라 떠올랐지.)

 

너희, 세 갈래

손들

뒤에 재의

후광.

 

너의 앞에 동쪽으로부터 이리로

내던져진 어마어마한 것.

 

아무도

증인을 위하여

증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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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머물고 있는 해가 이제 지겹다.

나는 세상이 문장구조가 해체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탈로 칼비노, 『엇갈린 운명의 城』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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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김서연 만듦,『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 상상, 2012, 99쪽.

 

아내 김현경은 남편 김수영을 본의 아니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사유에 이르도록 강제한 셈이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하이데거는 본래성(authenticity)과 비본래성(inauthenticity)에 대해 이야기했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나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그렇지만 만약 오늘 밤에 그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를 측은하게 보고 오히려 안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죽는 존재라고 엄연한 사실에 입각해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괴롭히려는 현재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의 마음은 본래성을 회복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 우리는 비본래적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란 개념을 가지고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바다.

결국 타인을 본래성으로 본다는 것은 그를 ‘존재’와 ‘무’의 층위에서 보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존재하는 무엇이든지 언젠가 ‘무’의 차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숙명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즉, 어떤 타인이든 하나의 생명체라는 시선에서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어느 것이 측은하지 않겠으며 누구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얼마 지나면 다 죽어 갈 목숨이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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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바오긴 락그와수렌

 

 

 

 

하얀 첫눈을 밟은

말을 늑대가 뜯어 먹고 있다

생명과 생명이

꼬리를 물고 쓰러지는 세상

살아 있는 잠깐 사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삶을 영위한다

 

영혼이 떠도는

광활한 희디흰 초원

주위에 흩어진 발자국

함께 달려들어 뜯어 먹은 야수의 발자국

배가 찬 늑대들이

행복을 찾아 저 멀리 사라지고

얼룩 끈 같은 발자국이

뼈다귀에서 멀어져 간다

 

잡아먹힌 말의

뼈에 닿아 멈춘

발자국에서

뜯어 먹은 늑대의

뼈다귀가 있는 점까지

이 발자국은 계속될 것이다

죽고 산 모든 것을

발자국은 염주같이 연결한다

 

이 염주로

자비의 보살이 다라니경을 외신다

 

 

 

바오긴 락그와수렌, 『한 줄도 나는 베끼지 않았다』, 이안나 옮김, 문학의숲, 2013,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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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진실 시선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지음 | 제여매  옮김  | 시와진실  | 2010년 11월 10일 출간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07월 29일 출간


죽음의 푸가(세계문제시인선집 2) 
파울 첼란    지음 | 김영옥  옮김  | 청하  | 1995년 02월 15일 출간 (1쇄 1986년 01월 01일)

 

죽음의 푸가(열음세계시인선 3) 
파울 체란    지음 | 고위공  옮김  | 열음사  | 1985년 05월 01일 출간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0728

 

제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유대인으로서, 그 고통을 아름답고 밀도 높은 시어로 표현해 낸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은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첼란의 시에 관한 이론서를 펴낸 전영애 교수가 30여 년 전 독일에서 번역해 놓은 시들을 2001년부터 10년 동안 틈틈이 다듬어 내놓는 것이다.전후 독일 문단에서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서정시 자체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에게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시적으로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손 님



저녁 오래 전

어둠과 인사를 나눈 자가

너의 집에 유숙한다.

낮 오래 전

그는 잠에서 깨어나

떠나기 전 잠을 불러일으킨다,

발걸음 소리 울려퍼진 잠을,

네게는 그가 먼 곳을 횡단하는 소리 들려 오고

그곳으로 네 영혼을 던진다.




- Paul C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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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나브리에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주여,
가까이 붙잡을 수 있도록

벌써 붙잡혀 있나이다, 주여
서로 움켜잡고 있나이다, 주여, 마치
우리들 각자의 몸이 
주 당신의 몸이기라도 하듯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소서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우리는 바람에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함지와 화산이 터져 생긴 연못으로
우리는 가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물가로 갔습니다, 주여

그런데 그것은 피였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피가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여,
눈과 입은 헤벌어져 텅 비어 있습니다, 주여,
우리는 들이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비친 주 당신의 모습을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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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나브리에"라는 단어는, 예수 수난을 기리는 아침기도와 찬미가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만, 라틴어이기도 합니다.
아주 어두운 어둠. 한국 말로 하자면, '흑암' 정도의 뉘앙스를 가진 단어라고 하더군요.



 

시는 붉은 자색 울음의 기록이다. 인간이 필요로 할 때  시는 신처럼 등 돌린다.

시인은 언어의 祭壇 제물로 바쳐진  양이다. 그  제물로 바쳐진 시인이 파울 첼란 이다.

 

흑암(黑暗)

                           파울 첼란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주여,

잡힐 듯 가까이.

 

붙잡혔습니다, 주여,

우리 각자의 몸이

당신의 몸인 듯,

서로 움켜 안았습니다,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바람에 뒤틀리며 갔습니다,

물이 괴어있는 은박지를 향해,

몸을 굽히려고 갔습니다

 

물을 찾아갔습니다, 주여.

 

그것은 피였습니다,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리는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담긴 모습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흑암은 성서적 의미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6시부터 9시 사이의의 칠흑 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이 짧은 시에서 주를 부르는 호칭어 ‘주여’가 시 속에서 11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유념하자.

* 이 시는 첫 연부터 고난 받는 절박한 마음의 공포에  차 있다.  위험에 잡힐 듯 그러한 가까운 거리에 인간이 처해 있는 것이다.

다가올 운명에 대한 무기력함,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우리 몸뚱어리들은 서로 껴안고 주의 몸인 듯, 살려 달라 움켜 안으며 주를 애절하게 부른다.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해야 한다는 역설의 표현이다.  이렇게 주와 가까이 있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요청하는 것이다.

 

바람에 뒤틀리며 갔습니다,

물이 괴어있는 은박지를 향해,

몸을 굽히려고 갔습니다.

 

물을 찾아갔습니다, 주여.

 

그것은 피였습니다,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죽음을 향해 뒤틀리며 찾아 가는 곳은 도살장에서 도살한 고기를 담아두는데 사용한 은박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성경 구절처럼  ‘주님은 푸른 초원과 물가로 나를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우리는 은박지 속의 물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물은 물이 아니라 주님의 피를 발견한다. 그 피는 우리의 눈에 반짝거린다. 마치 새 희망처럼.

 

우리는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담긴 모습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것은 핏속에 담긴 주님의 형상, 고난의 모습이다. 그 순간 기도가 요청된다. 우리를 ‘버리지 마옵시라’는 기도. 우리는  고난 받았던 주님과 똑같이 이처럼 ‘가까이’ 에서 고난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시의 ‘가까이’라는 말은 부정적 반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신 같으나 신은 ‘붙잡기 어려운 존재’로 나타난다. ‘가까이 있으나 붙잡기 어려워라 神은’ 이 구절은 횔덜린의 시 ‘파트모스’에 나오는 구절로서 첼란은 이 구절을 자신의 시 속에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흙의 기억

                                  파울 첼란

그들 안에 흙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파냈다.

 

그들은 파내고 또 파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낮과 밤이 갔다. 그들은

듣건대, 이 모든 것을 원했고,

듣건대, 이모든 것을 알았던

신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지혜롭게 되지 않았으며, 아무런 노래도 짓지 않았고,

아무언어도 생각해내지 않았다.

그들은 파냈다.

 

나는 파낸다, 당신은 파낸다, 그리고 그것, 그 버러지도 파내고,

그리고 저기 노래부르는 이가 읊조린다, 그들은 파낸다고.

 

오 누구, 오 아무, 오 아무도 아닌, 오 당신이여.

오 당신이 파내고 또 내가 파내고,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로

나를 파내 던지고,

그리하여 우리 손가락에서 그 반지가 잠을 깬다.

                            

* 첼란의 시 속에서 神은 위대한 창조주가 아니라 그저 ‘당신’으로 호칭된다. 존경심이 없다.  ‘아무도 아닌 자’ ‘누구도 아닌 자‘로도  불리어지기 시작한다. 신이라는 이 거룩한 이름은 그에게는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는 자로 불리어 지는 것이다.  시에서도 계속 흙을 파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밤과 낮으로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역사에 대한 끈질긴 회상이 지속된다. 강제수용소에서의 무덤을 파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주의 손에 의해 흙으로 빚어졌다.  그러나 숨과 생명을 불어넣은 그 흙을 파낸다는 행위는 신의 뜻을 거역하고 파괴하는 행위이리라. 우리는 강요에 의해 그 뜻을 거역한 자들인 것이라는 자책과 함께 우리로부터 등을 돌린 신에 대한 원망이 이 시속에 깔려 있다.

 

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無이며,

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無의

 그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

(...)

우리가 노래불렀던 그 자색어의 붉음이어라.

                                           -파울 체란 ‘나는 무’에서

 

이 찬미가는 슬픔과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신은 ‘누구도 아닌 자로’로 불리우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無’이다. 시인은 인간을 영원한 無로서 보고 있다. 또한 시인은 신 조차도 이제 ‘無’로 표현하고 ‘아무도 아닌 자와 같은 ’ 동격으로 취급 한다.

신의 장미, 그 영광은 이제 지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노래 불렀던

 ‘붉은 울음’(紫色語의 붉음)라는 것이다.

 

神을 ‘아무도 아닌 자’로 규정하는 파울 첼란의 세계관은 많은 반기독교적인 시인에게 공감을 주었다. 우리는 프랑스의 거장 쟈크 프레베르(1900~1966)의 시 ‘하나님 아버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다.

                                -쟈크 프레베르 ‘하느님 아버지’에서

 

주기도문을 빌어 풍자한 이 시는 시인의 반종교적 성향을 담고 있지만 이제 신은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라 땅과 격리된 하늘에 있는 관념적 존재일 뿐이다.

훼밍웨이도 단편 ‘해진 날’에서  주기도문을 패러디하여 지문 속에 남겨놓은 바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허무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허무가 임하옵시며

허무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

오늘날 우리가 일용할 허무를 주옵소서

권세와 영광이

허무님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리안네

                           파울 첼란

 

라일락도 꽂지 않은 네 머리, 유리거울 같은 네 얼굴

눈에서 눈으로 구름이 흐른다. 소돔에서 바벨로 일듯이.

나뭇잎인 양 구름은 탑을 쥐어뜯고 유황불 타는 숲을 미쳐 맴돈다.

그리곤 번개도 번쩍인다. 너의 입가에서- 바이올린의 잔해를 지닌 저 계곡.

눈처럼 흰 이빨로 바이올린의 활을 그으니 오 더욱 아름답게 갈대는 울렸었는데!

사랑하는 이여, 너 또한 갈대이고 우리 모두는 빗발이어라.

작은 단지의 푸르름으로 너 그렇게 우리를 훌쩍 뛰어넘어 가는데

우리는 잠들어 있다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있고 우리는 마시며 마시며 마시며 너를 무덤으로 나르고 있다

 

* 이 시는 마리안네라는 한 바이올린을 켜던 아름다운 처녀의 유골을 묻고 오던 날을 회상하고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라일락꽃을 머리칼에 꽂지 않았어도 늘 해맑았던 마리안네. 눈처럼 희고 눈부신 그녀의 바이올린 솜씨는 갈대밭의 바람결처럼 황홀했었다. 너는 마치 갈대밭의 애처로운 갈대같았다. 네가 갈대라면 우리의 사랑은 그 위에 내리는 비(雨)였다. 이제 너는 유골단지의 한 줌 재가 되어 있다. 우리는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너를 무덤으로 나른 슬픈 기억이 있다.’

 

* 파울 첼란의 문학은 죽음보다도 어두운 죄의식을 바탕에 깔고 시대와 신에 대한 질문을 가한다. 그는 평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은 정신질환인 추적망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가 몸을 던져 자살한 세느강은 시인의 오열을 삼키고 오늘도 흐른다.  첼란이 하이데거에게 남긴 그 유명한 말을 음미해보자.

 

길 왼쪽에는 야생의 백합이 꽃 피고

다른 쪽에는 도라지가 자라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엔 패랭이가 눈부시게 커가고 있다.

당신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닌 언어,

<나>도 <당신>도 없는 언어,

<그>뿐이고, <그것>뿐인 언어,

알겠는가, 그것만이 있는 것이다

 

파울 첼란은 1920년 11월 23일 루마니아 부코비나 지방의 가장 큰 도시 체르노바츠에서 유태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한때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독어와 루마니아어를 배웠고, 부유하고 교양있는 지식인 부모 덕택에 첼란은 18세때 프랑스 뚜르대학에 합격해  의학수업을 하러 1년간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을 공부하게 된다.

1939년은 나찌가 반유태주의를 선언한 시기이다. 세계2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고향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루마니아 부코비아 북부는 1940년 소련영토가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다시 독일과 루마니아 점령군에 의해 유태인만 모여살아야 하는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로 획정된다. 첼란의 나이 21때 일이었다.

1941년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유태인들의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첼란은 재빨리 숨을 수 있었으나 집에 있던 부모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첼란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체포되어 집에 없었다. 첼란도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게 되지만 부모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1942년 늦가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고 그 해 겨울에는 어머니가 일 할 능력이 없는 이유로 총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모가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에게도 어느날 죽음과 삶의 주사위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의 사건이 예고되어 있었다.

 

< 파울 첼란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야 할 아침이 찾아왔다. 유태인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점호를 부르는 곳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많은 쪽은 가스실로 갈 유태인이고 사람이 적은 다른 쪽은 바깥으로 내보내질 것이었다. 당시 유태인은 트럭과 교환될 수 있엇다. 첼란은,  보초가 서 있는 사람들을 세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순간 가스실로 결정된 무리들 속에서 나와 밖에 팔려갈 무리들 속으로 도망쳤다. 이제 죽음에 바쳐질 사람들 중 하나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 이송 책임자가 와서 명단과 서 있는 사람수를 대조하더니 다시 세도록 지시했다. 다시 숫자가 맞지 않자,  그는 밖으로 나가기로 되어있던 쪽에서 가장 맨 앞줄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 손짓하였다. 이 운 없는 남자가 첼란을 대신하여 가스실로 가게된 것이다. >

 

흔히 첼란을 기억속에 끔찍한 어둠을 지닌 시인이라고 말한다. 일생동안 과거의 상흔과 죄의식을 품고 살아온 그가 시달린 죄책감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오기 위해 그가 택해야 했던 이런 생존방식에서 연유한다.

첼란은 다시 루마니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소되었다가 1944년 고향인 체르노비츠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3월부터 체르노비츠는 소련령이 되었고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첼란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가서 번역과 출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1947년에 루마니아 문예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1947년 첼란은 독일어권인 비엔나로 가서 횔덜린과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를 접하게 된다. 나찌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지닌 그는 이 두 명의 독일시인의 삶에서 불행했던 시인들이라는 어떤 동질성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비엔나에 머물 때 첼란은 초현실주의 화가 레드가 에네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당대 초현실주의 시인의 거장 앙드레 브르똥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후 빠리에 정착하면서 첼란은 죽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고 독일어로 시를  쓴다. 1950년 부터 빠리의 한 대학강사로 있으면서 시작활동을 해왔지만 나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끊임없이 시달리는 <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 1970년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루마니아계 유태인으로서 독일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시인으로서 창작기의 대부분을 빠리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쳤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났던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부모를 죽인 독일인의 언어로 시를 썼다...

[출처] 파울 첼란|작성자 다리오75


 

 

● 죽음의 푸가를 읽기 전에

 

20세기가 되면 유럽의 문학사조는 표현주의 시대입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대두되고, 산업혁명 등으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며 대도시로 몰려든 인간에게는 이제 생명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인간 자체로서의 실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언제나 기계의 노예로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은 가치없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이 팽배해졌습니다. 게다가 기성세대는 강압적인 전통교육을 젊은세대에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를 갈구합니다. 이때 마침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이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전통을 때려부수는 가치전도를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문학에도 전달됩니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시같은 모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작가들은 생철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의식을 잃은 인간은 기존 전통을 따르는 인간들이라고 작가들은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에서, 소설에서, 희곡에서는 대도시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 길가의 창녀들을 주로 작품에 옮깁니다. 이웃사랑이나 동포애를 잊은지 오랜 군상들의 모습은 곧 세기말의 현상이자 불안한 20세기 초의 모습입니다.

이제 인간은 인류종말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세계 제1차대전이 터집니다. 인간의 생명이 더더욱 위급해졌습니다. 실존이 문제입니다. 이어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고 지식인들은 해외망명길에 오릅니다. 나치의 히틀러 정권은 유태인 대학살에 나섭니다.

현대작가들은 유태인 학살 이후 이제 인간에 대해 글로 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나 허무해서 작가의 글로 무엇을 쓸 것이며 쓴다한들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끝까지 유태인 학살의 문제를 고발한 작가가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아픈 과거를 경험한 파울 첼란이란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유리병 편지’입니다. 다급하여 해안가에서 급히 글을 써서 망망대해에 띄웁니다. 누군가 이 ‘유리병 편지’를 건져 읽고는 첼란이 경험한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이렇게 띄웁니다. 그 편지는 우리나라의 기형도 시인이 읽었는지 그는 ‘80년대’의 광주사태를 다룬 시를 썼지요.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전하는 시인의 시를 독자는 참담한 마음으로 한 시대를 읽게되는 서정의 울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시인 기형도의 「대학시절」이란 시를 한번 소개하며 첼란으로 넘어갑시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99, 43면)

 

 

위의 시를 읽으면 분명 기형도라는 시인이 저 서구의 첼란 작품을 분명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첼란의 ‘유리병 편지’가 극동의 대한민국에서 자행되었던 광주사태를 아파하는 작가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독자가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학살을 목격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첼란이 던지는 물음에 당혹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생존자 한 개인의 생애의 고통스러운 기억만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 인간의 조건이 그의 시속에 함께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첼란의 그 아픈 시를 읽기 전에 작가를 둘러보자.

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1)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파울 첼란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야 할 그 아침이 왔다. 유태인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점호를 부르는 곳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많은 쪽은 가스실로 갈 유대인이고, 사람이 적은 다른 쪽은 바깥쪽으로 내보내질 것이었다. 당시 유태인은 트럭과 교환될 수 있었다. 첼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보초가 서있는 사람들을 세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첼  란은 순간 가스실로 결정된 무리들 속에서 나와 밖에 팔려나갈 무리들 속으로 도망쳤다. 이제 죽음에 바쳐질 사람들 중의 하나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 이송 책임자가 와서 명단과 서있는 사람들 수를 대조하더니 세는 의식을 다시 시켰다. 다시 숫자가 맞지 않자, 그는 간단히 밖에 나가기로 되어있는 쪽에서 가장 앞줄에 선 한 남자에게 손짓하였다. 이 운 없는 사람이 이제 첼란을 대신하여 가스실로 가야했다. 첼란은 밖으로 나왔다.

 

첼란은 그후 루마니아의 노동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다가 1944년에 체르노비츠로 돌아왔다. 그해 3월부터 그곳은 소련령이 되었고 이듬해 첼란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갔다. 1947년 5월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아고라』에 처음으로 그의 시가 발표되었다. 1947년 12월 첼란은 스스로 독일의 친 문학의 중심지라 생각한 비엔나로 갔다. 이듬해 봄 첫 시집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를 출간하나 잘못 박힌 철자가 너무 많아 판매를 중지했다.

 

비엔나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가 예네(Edgar Jene)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가 첼란을 앙드레 부르똥 (Andre Breton)에게 추천하였으며 파리에서 이 초현실주의 대부는 첼란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후 파리에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독어독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1950년부터 파리의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1970년 세느강에 투신하여 죽을 때까지 번역과 창작 활동을 했다. 부모가 처참한 죽음을 당할 때에 자신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첼란의 삶 동안 그를 괴롭힌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유대교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첼란은 부모의 죽음과 유대민족의 고난을 통해 박해받고 고난에 처한 민족에 가까이 다가가며 그 아픔을 함께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또 이들의 고난을 통해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동질성을 찾게되고, 고난받는 민족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죽음의 운명적인 체험은 첼란의 문학을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듯 난해하고 어둡게 하는데, 이런 그를 "어두움의 대가 Meister der Dunkelheit"2)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든 후유증세를 다 지니고 있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그는 말년에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추적망상에 시달리다가 1970년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

 

파울 첼란의 가장 잘 알려진 시 『죽음의 푸가』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독일을 가 본적도 없었는데도 파리에서 살면서 독일어로 시를 쓰고 독일 출판사에서 시집이 간행한 이유는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 잔행된 독일의 만행을 경고하기 위한 엄중한 경고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에 대한 단 일회적인 대학살에 대해 첼란은 자기 대신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속죄하며 죽음의 푸가 같은 류의 시를 썼다. 첼란의 시는 고통을 표현하고 고통을 언어로 감당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이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하여 시적인 또는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첼란은 추상의 언어와 함께 조각난 낱말들이나 중간에 끓어져 다음 행에 계속되는 말, 침묵, 생략, 비약 등의 심한 말더듬과 말막힘 경향을 보인다. 첼란은 언어를 현실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온갖 시도를 다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에 상처를 입은 채 현실을 찾고 얻으려는 시도이다.

 

 

 

 

 

죽음의 푸가(Todesfuge)에 대해

 

이 시를 읽으면 어느덧 우리는 시속의 ‘우리’가 되고 만다. 이 시에는 느낌표나 쉼표도 없다. 작가가 안겨주는 시를 읽으면서 숨가쁘게 처절한 유태인 문제, 아니 세계동포인 인간에 대한 아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이 시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우선 주제가 제시되면, 그에 대한 반주제가 성립되고, 곡에서 주를 이루는 이 두 개의 가락은 각기 그에 상응하는 응답을 가진다. 우선 이 시의 푸가 형식을 살펴보면 1연에서 1-3행이 주제이고, 4행이 그에 대한 답(答句)이며, 5-6행이 대주제, 7-9행이 그에 대한 답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시는 두 개의 주된 가락을 갖게 되는데, 파울 첼란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통해 유태인과 그들을 억압하는 독일인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위의 주제들은 매연마다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고 이러한 반복어구는 주술적인 효과를 자아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돈과 역설이 지배하는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시에서 서술자인 첼란은 유태인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부문장 없이 주문장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속되는 반복 어구는 주술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시에 등장하는 유태인 여성 줄라미트(Sulamith)와 독일의 가장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인 마르가레테(Margarete)라는 여성을 서로 대비시키는 모티브, 무덤파기와 죽음의 춤이라는 유희 모티브, 색깔 상징들이 푸가 형식의 대위법 구조로 서로 얽히면서 유태인과 독일인의 운명을 대비시킨다.

 

첼란은 중얼거리는 듯한 독백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유태인들이 자기 무덤을 파고 독일인의 총에 맞아 무덤에 묻힌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그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전혀 서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아픔이 물씬 퍼져있다:

 

 

 

 

 

 

 

 

 

 

작품 분석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¹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시고

 

우리는 그것을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시고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게 눕지 않는다

 

한 남자가 집에서 산다 그는 뱀들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을 향하여 마르가레테²너의 금빛 머리라고 쓴다

 

그가 그것을 쓰고 집 앞으로 나오면 별이 빛난다 그는 제 사냥개를

 

휘파람으로 부른다

 

그는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내 땅에 무덤을 파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용곡을 연주하라고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아침에 마시고 한낮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그는 뱀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을 향하여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라고 쓴다

 

줄라미트³너의 잿빛 머리라고 쓴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게 눕지 않는다

 

그는 소리친다  너희들 한 무리는 더 깊이 땅을 파고 너희들

 

다른 무리는 노래하고 연주하라고

 

그는 허리띠의 권총을 움켜잡고 그것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푸르다

 

너희들 한 무리는 삽을 더 깊이 파고 너희들 다른 무리는

 

계속해서 춤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머리

 

줄라미트 너의 잿빛머리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소리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고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名人)이다

 

그는 소리친다 바이올린을 더 어둡게 켜라 그리고 너희들은

 

연기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너희들 무덤은 구름 속에 있고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의 눈은 푸르다

 

그는 총알로 너를 맞춘다  그는 너를 정확히 맞춘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

 

그는 제 사냥개를 풀어 우리를 몰이한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한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고 꿈꾼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마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

 

술라미트 너의 잿빛 머리

 

 

1) 나찌수용소 가스실의 독가스

2) 괴테의 파우스트 Ⅰ부에 나오는 그레트헨을 생각나게 한다.

3) 성서 아가(雅歌)의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 시는 한 호흡에 주욱 읽어 나가는 시입니다. 왜냐하면 시에 ‘,’이나 ‘.’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시는 처음에 ‘검은 우유’라는 모순어법으로 시작됩나다. 흔히 고난, 슬픔, 위협 등을 뜻하는 검은 색과 결합된 이 은유는 시에서 죽음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런 위협이 새벽뿐 아니라 밤낮 없이 이어져요.

유태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첫 3행의 주제에 이어서 답구가 그에 대응합니다. '공중의 무덤'이라는 은유법에는 죽어서라도 하늘 나라에 들고 싶다는 유태인의 희망과 내세사상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나서 대주제가 이어집니다.

시에는 집안에 살고 있는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밖이 아니라 안에서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아요. 뱀은 성경 창세기에 언급된 것같이 저주받은 권력의 상징이며 사탄입니다. 또한 이 남자는 어두워지면 편지를 쓸 만큼 여유를 보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는 느긋하게 그 흔해 빠진 독일의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을 지닌 처녀(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토록 무수히 많은 인간을 죽인 전쟁, 학살, 거기서 현대 작가들은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시속의 그 남자는 밤이면 글을 씁니다.

그에 대응하는 7-9행의 답구에서 남자는 휘파람을 불고 사냥개를 몰아 유태인에게 땅속에 무덤을 파고 춤을 추라고 강요합니다. '땅 속의 무덤'은 '공중의 무덤'에 비해 현실의 냉혹함을 대변합니다. 이 무덤은 유태인을 파묻기 위한 무덤입니다.

 

2연에서 “검은 우유”는 직접 “너”로 호칭되면서 화자와 훨씬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와 함께 “우리” 라고 말하는 화자의 생활 공간은 더욱 큰 위협을 받으며 상황도 고조됩니다.

 

6행에서는 처음으로 유태 여자 이름인 줄라미트가 등장하며 1연에서 이미 나온 독일 여자 이름인 마르가레테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남자는 허리에 찬 탄띠에 손을 대고 위협을 가하며, '무덤파기와 죽음의 춤' 이라는 유희 모티브도 한층 고조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색채 모티브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남자 눈의 푸른색이 그것입니다. 금발의 마르가레테와 푸른 눈의 남자, 이 두 가지 색깔의 결합은 유태인 학살 때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선별하는 기준이 되었던 표지로서 북구인들에게는 '파멸을 초래하는 것에 대한 표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3연 6행에서 죽음이 직접화법으로 두 번 연속된다. 죽어서 신적인 것과 합일을 이룬다는 신비주의적 용어 "달콤한 죽음"이 여기서는 남자의 조롱으로 희화화됩니다.

 

8행에서는 이제까지 '공중의 무덤', '땅 속의 무덤'이던 것이 '구름 속의 무덤'으로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구름이란 무상함의 표상으로 사용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유태인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확신이 여기서는 남자의 조롱거리가 되고 무(無)의 세계로 몰가치화 되고 있습니다.

 

4연 첫 주제의 반복 속에는 명인-죽음-모티브가 삽입되어 있어요. 이제까지 어느 정도 질서 있게 진행되던 주제와 반주제의 형식이 혼합되고, 줄곧 이어져온 분위기 상승의 종결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죽음이 마침내 분리된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우뚝 섭니다.

 

4연 4행의 "그의 눈은 푸르다"에서 "그의"는 문맥상 "죽음"을 받아주고, 여기서 죽음과 남자는 동일 인물이 됩니다. 4, 5행은 시 전체를 통해서 유일하게 압운이 되는 곳입니다. 이 압운이 우연이든 아니든 시의 절정을 이루고 있어요.

남자는 정확하게 총을 쏘아 명중시키고, 죽은 이들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뱀을 희롱하고, 죽음이 독일이 낳은 명인임을 꿈꿉니다 (8행).

 

끝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두 행에서 여인 모티브의 단순화된 나열은 그것이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의 영원한 대립인지, 아니면 두 세계를 하나로 묶어 주는 화합의 장인지를 애매하게 만들면서 최종적인 판단을 독자에게 유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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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로 써보낸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그는 그것을 쓰고 집 앞으로 걸어나온다 별들이 빛나고 그는 사냥개를 휘파람으로 부른다
그는 유태인을 불러내 땅에 무덤을 파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제 춤곡을 연주해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아침에 마시고 한낮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로 써보낸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그는 소리친다 땅 속 더 깊이 꽂아라 너희 이쪽 너희 저쪽은 노래하고 연주해라
그는 허리띠의 쇠붙이를 쥐고 흔든다 그의 눈은 푸르다
삽을 더 깊이 꽂아라 너희 이쪽 너희 저쪽은 계속해서 춤곡을 연주해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소리친다 죽음을 달콤하게 연주해라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는 소리친다 바이올린을 더 어둡게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갖게 된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의 눈은 푸르다
그는 납 총알로 너를 쏘아 맞춘다 그는 너를 정확히 쏘아 맞춘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에게 사냥개를 풀어놓는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한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며 꿈을 꾼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주) 마르가레테 - 괴테 <파우스트>의 여주인공 그레트헨을 일컬음

줄라미트 - 구약성서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사랑한 미녀

 

 

 

첼란은 유태인이고 루마니아 출생입니다.

프랑스에서 의학을 전공했는데 프랑스에 있던 도중 루마니아에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루마니아로 돌아온 이후 루마니아와 소련이 합병되고, 그 후 독일이 루마니아를 침공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죠.

그의 양친은 모두 수용소 안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 역시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죽음의 푸가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탄생한 시입니다.

평생 독일인이기를 거부했고 독일인을 증오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하더군요.

그는 50세의 젊은 나이로 세느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합니다.

 

참고로 이 시는 47그룹에서 상을 받았을 때 독일과 독일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단상 위에서 낭독한 시라고 합니다.

후에 독일의 현대시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는 걸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네요.

===============================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마르가레테는 전형적인 독일 여인 이름이고, 줄라미트는 전형적인 유대 여인 이름이다.

출전 : <죽음의 푸가>,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읽고 그린 헝가리 화가 라슬로 라크너(László Lakner, 1936-1974)의 <검은 우유>.

시를 말하다

 

문태준 l 시인

파울 첼란의 시를 읽는 일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의 시에는 비의(悲意)가 꽉 차 있다. 한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제(우리)가 어디 있으며 저(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저(우리) 자신을 위한 현실을 기획하기 위해”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적 사건을 출발의 지점으로 삼고 있다. 그의 유대인 부모는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죽었고, 그 또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이런 우울한 개인사로 인해 그의 시는 많은 경우 시간을 뚫고, 무언가를 마주해,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 자기 자신의 “현존하는 경사각(傾斜角)” 아래서, 타자에게로 나아갔다. 인간 이성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맞서서.

파울 첼란의 시에서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비극의 화인(火印)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무덤')에서 “남녘 만”은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지역인 드네프르 강 연안을 연상하게 하고,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낮이 가버렸고, 밤 또한 갔다. 그들은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뜻했다는 이/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이.”(‘그들 속에 흙이 있었다’)라는 시구나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우리는 마시며 너를 무덤으로 나른다./ 이제 세상의 석판 위에서 꿈의 단단한 은화가 쨍그렁 울린다.”(‘마리아네')라고 쓴 대목에서 우리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유대인들의 참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가 주로 동원하는 시어들을 살펴보아도 그의 내상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창살, 꺾인 무릎, 어둠, 뒤엉킴, 박해, 파괴, 울부짖음, 광란, 유골 항아리, 포획, 교살, 꺼진 눈, 수의, 가묘(假墓), 휘몰아치는 바람 등의 시어들은 그에게 상흔의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파울 첼란 시에서 ‘돌'과 ‘돌들'은 이러한 위협에 노출되고야 마는 개별적 존재 혹은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각별하게 읽힌다. 그의 시에서 ‘돌’은 ‘돌들’이라는 무더기를 이루면서 서로를 연대하여 보호하지만, 어느 순간 외부적 요인인 강압적 물리력에 의해 와해되고 사멸할 위기에 빠지고 만다.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 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돌 언덕’)라고 썼던 시인은 “어느 돌을 네가 들든―/ 너는 드러내 버린다,/ 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벌거벗긴/ 그들은 이제 짜임을 새롭게 한다,”라고 동시에 쓰고 있는 것이다.

시 ‘죽음의 푸가’는 원래 제목이 ‘죽음의 탱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한 잡지에 발표되었다가 1952년 펴낸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되었다. 이 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어졌을 법한 비참상을 그려 볼 수 있다. 이 시에는 지극히 수세에 몰려 있는 ‘우리’와 점점 지시와 요구가 난폭해지는 ‘한 남자’가 대치 관계 아래 등장한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검은 우유를 마시는 것, 무덤을 파는 것뿐이다. 순종을 버리고 맞서서 반항할 위치에 있지 않다.

 

 

‘검은 우유’는 죽음의 은유로 읽힌다. ‘무덤’은 학살당한, 무력하기만 했던 이들의 시체가 묻힐 매장지로 읽힌다. 이에 반해 ‘한 남자’는 몹시 거칠고 사나운 권력자의 함의로 읽힌다. 적의에 차 명령하는 그는 뱀을 갖고 있고, 사냥개를 불러내고, 마침내 살해하고, 주검을 묻게 한다. ‘마르가르테’는 독일 여인을, ‘줄라미트’는 유대 여인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한 남자’와 ‘우리’의 관계 그것과 대위적으로 진행되고 이해된다.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그 어떤 ‘호곡(號哭)’이다. ‘마신다’, ‘판다’ 등 동작어의 규칙적인 반복은 잔인함과 처참함의 절정으로 몰아가면서 독자들을 더 강도 높게 전율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슬로 라크너, <첼란>

 

 

이반 골(Iwan Goll)과의 표절 시비에 휩싸여 생의 의욕과 활력을 소모한 파울 첼란은 유대 신학과 신비주의를 접하고 또 이스라엘 방문을 계기로 힘을 얻는 듯했으나 입원 생활은 반복되었고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는 죽음의 대성황을 보여 주었고 한 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사적 고통의 최대치를 보여 주었지만, 한 평자의 지적처럼 타자의 고통을 향해 열린 ‘대화의 문학’이기도 했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갈망한, 그러나 꺾인 한 줄의 희망과 유토피아를 읽을 수 있다. “그대 나를 안심하고/ 눈(雪)으로 대접해도 좋다./ 내가 어깨에 어깨 걸고/ 뽕나무와 여름을 지날 때마다/ 그 갓 돋은/ 잎이 소리 질렀거든.”(‘그대 나를')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체르노비츠가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됐으며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때 첼란의 가족도 포함됐다. 강제노역을 하던 중 부모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첼란 역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갔다. 종전 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과 출판 일을 하다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를 발표했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첼란의 시 몇 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마르가레테(Margarete)>, 캔버스에 유채와 짚, 1981. 키퍼는 과거사와 논쟁하며 현대사에서 터부시되는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뤄 왔다. 나치 통치와 연관된 주제들이 특히 그의 작품세계에 잘 나타난다. 작품 <마르가레테>()는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영감을 받았다.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나의)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돌,

내가 쫓아간 공중의 돌,

돌처럼 눈먼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우리는 어둠을 공허하게 창조하였다, 우리는

여름을 건너 찾아온 말을 발견하였다.

꽃.

꽃― 눈먼 자의 말.

너의 눈과 나의 눈,

이들은

물을 걱정한다.

성장.

마음의 벽마다

낙엽진다.

이처럼 또 한 마디 말, 그리고 망치는

야외에서 흔들거린다.

 

이슬

 

 

이슬,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누워 있었다.

쓰레기 더미 속의 너.

축축한 달이

우리에게 응답을 던져주었다.

우리는 서로 부서져 나갔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로 부셔졌다.

주님은 빵을 자르고,

빵은 주님을 잘랐다.

 

찬미가

 

 

누구도 다시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으리라.

누구도 우리의 먼지에 관해 말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누구도 아닌 자여, 당신은 찬양받을지어다.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려 하나이다.

당신을

향해.

우리는 무(無)였고,

무(無)이며, 무(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무(無)의 장미,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

영혼의 해맑은 줄기,

하늘의 황량한 꽃실,

빨간 화관(花冠)을 지닌.

우리가 노래 부른 자색(紫色) 단어

위에서, 오

가시 위에서

 

나뭇잎 하나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해.

그렇게도 많은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대화가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린 곳에서,

이 무슨 시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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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문학예술가, 녀인, 그리고 "뮤즈의 삶" 2016-12-05 0 6281
1927 프랑스 시인 - 폴 엘뤼아르 2016-12-05 0 7774
1926 미국 시인 - 로버트 로웰 2016-12-04 0 5283
1925 영국 계관시인 - 로버트 브리지스 2016-12-04 0 5998
1924 미국 최초의 계관시인 - 로버트 워런 2016-12-04 0 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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