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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블로크(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1921)는 러시아의 시인이다.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880년 11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 출신이다. 부친과 조부는 대학 교수였고, 외조부는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알렉세이 베케토프(А. Н. Бекетов)다. 블로크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실상 결별했다. 블로크는 외가에서 자라며, 인문적인 가풍 속에서 일찍이 시에 눈을 떴다.
블로크는 1903년 잡지 <새로운 길(Новый путь)>을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등단했다. 1904년 출간된 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블로크는 이미 초기 시의 이상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첫 시집 출간 이후 1905∼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시인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열기와 격동의 시적 체험을 연이어 상자된 네 권의 시집에 담았다. 블로크는 또한 1908년 ≪서정적 희곡집(Лирические драмы)≫을 출간했다. 블로크는 이후 두 편의 드라마(<운명의 노래(Песня Судьбы)>(1908)와 <장미와 십자가(Роза и Крест)>(1913)를 더 집필했다.
블로크의 창작에 있어 1910년대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의 모색과 시의 운명의 본질적인 전환과 더불어 찾아왔다. 블로크는 1911∼1912년 다섯 권의 시집을 세 권의 ≪시 모음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으로 편찬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이때부터 블로크의 시는 독자의 의식 속에서 단일한 ‘서정적 3부작’으로서, ‘길의 신화(миф о пути)’를 창조하는 독특한 ‘시 소설’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의 삶과 창작의 토대로 자리했고, 이후의 두 판본(1916년과 1918∼1921년)에서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21년 블로크는 새로운 판본의 준비에 착수했으나 1권을 마무리하는 데 그쳤다. 편집인으로서 블로크가 펴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시집(Стихотворения Аполлона Григорьева)≫(1916)은 19세기의 잊혀진 ‘마지막 낭만주의 시인’을 부활시켰다.
1915∼1916년에 이르러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현저하게 쇠퇴한다. 자신의 세대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체의 운명을 그리고자 블로크가 1914년 집필하기 시작한 서사시 <보복(Возмездие)>은 미완으로 남았다. 1차 대전의 암운과 징집은 시인에게 정신적 공동화를 안겼다.
2월 혁명과 더불어 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블로크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 관여했다. 1917년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던 블로크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이 지닌 정화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고양되어 정신적 소생을 맞이한다. 1918년 1월 마지막으로 찾아온 짧고 격렬한 창조적 열기 속에서 블로크는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서사시 <열둘>과 시 <스키타이>, 그리고 에세이 <인텔리겐치아와 혁명>을 썼다.
마지막 불꽃은 이내 시들었다. 1921년에 이르러 시를 쓸 수 없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블로크는 창작을 대신하여 혁명정부 산하의 문화 기구들에서 일하며 문화 보존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철학 강연에 몰두한다. 애초에 블로크의 문화 계몽 활동은 민중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책임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정화의 불길로서의 혁명’의 이상과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관료 정권의 실상 사이의 괴리에 대한 뼈아픈 인식은 블로크를 깊은 환멸과 새로운 정신적 지주의 추구로 이끌었다. 말년의 그의 에세이와 수기를 관류하는 ‘문화의 카타콤’의 모티프가 그렇게 대두된다. 시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말년의 우울은 심장병을 동반한 정신착란으로 심화되었다. 1921년 8월 7일 시인은 영면했다.
20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는 ‘시대의 비극적 테너’라는 말로 시대의 표상으로서 블로크가 지닌 의의를 갈파했다. 아흐마토바의 말을 빌리자면, “블로크는 비단 20세기 첫 사반세기의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 가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 블로크의 시적 체험이 지닌 진정성과 날카로움은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20세기 러시아 시와 러시아인의 삶에 폭넓은 문학적·정신적 반향을 낳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예술을 관류해 온 시민적 애국정신과 윤리적 절대주의의 생생한 증거다.
블로크는 자신의 생의 의미를 항상 ‘길’의 형상 속에서 모색했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상이한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 이와 같은 시인의 예술적 이상의 구현이 그가 자신의 시 전체에 부여한 큰 문맥이자 주제인 ‘강림의 3부작(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개별적인 시들은 저마다 장(사이클)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장들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시 소설’은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이 투영된 독특한 서정적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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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극작가.
러시아 상징주의는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한 부분으로 유럽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러시아 고유의 동방정교회의 종교적·신비주의적 요소가 짙게 배어 있다.
아버지는 법학교수였으며 어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총장의 딸로 교양이 높은 여자였다.
지성적이고 아늑한 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이혼하자 3세 때부터 귀족가문인 외조부모의 영지에서 예술적으로 세련된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1903년 저명한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딸 류보프 멘델레예바와 결혼했다. 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로서는 시적 표현이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의 초기 시들은 결혼이 가져다준 정신적 충족감과 고양된 기분을 전달해주고 있다.
19세기초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낭만주의적 시와 신비주의자이며 시인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1853~1900)의 계시철학에 감화를 받고 창조적·혁신적인 리듬을 사용해 그들의 관념을 독창적인 시적 표현으로 발전시켰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였으며 따라서 음악성이야말로 그의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첫번째 시모음인 연작시 〈아름다운 부인에 관한 시 Stikhi o prekrasnoy dame〉(1904)는 그의 청년기를 사로잡은 플라톤적 관념론을 대변해주는 작품으로, 신적 지혜(그리스어로는 소피아)를 여성적인 세계영혼(영원한 여성성)으로 의인화시킨다.
그러나 1904년 내세의 실현에 대한 낭만적 기대는 그를 둘러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관심으로 변형되었으며 관능적인 체험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자 광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후속 시집인 〈도시 Gorod〉(1904~08)·〈백설의 가면 Snezhnaya Maska〉(1907) 등에서 종교적 주제들을 지저분한 도시 문화의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첫번째 작품의 신비한 여인을 '미지의 창녀'로 변모시킴으로써 전에 그를 숭배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른바 부르주아 상징주의자들의 메마른 지성주의를 거부하고 러시아 국민을 구원하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로서 볼셰비키 운동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비극적 딜레마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이중의 배신감을 느꼈다. 우선 그의 문학 동료들이 그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가 그의 작품과 미학적 포부를 비웃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소외는 그를 우울한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이때문에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그의 후기 시들은 희망과 좌절이 엇갈리는 분위기를 표현한다.
미완성 이야기체 시 〈천벌 Vozmezdiye〉(1910~21)은 새 정권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주는 반면 〈조국 Rodina〉(1907~16)·〈북방인 Skify〉(1918) 등은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러시아가 맡은 메시아적 역할을 찬양한다. 수사적 송시인 〈북방인〉은 그의 대표적인 극시로 꼽히며 집시 민요에 바탕을 둔 경쾌한 리듬과 불규칙적인 박자, 정열과 우수의 급전 등이 특징이다. 찬미와 위협의 어조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서유럽에 대한 그의 슬라브주의적 사랑과 증오를 표현하며 유럽이 러시아, 즉 미래의 물결에 간섭할 경우 러시아와 아시아의 거대세력에 의해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쓴 불가해한 발라드 〈열둘 Dvenadtsat〉(1918)이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시의 백미로서 분위기를 창조하는 소리, 다음향적 리듬, 거칠고 속어 같은 언어로 유명하다. 1917~18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봉기 때 혹독한 눈보라 속을 뚫고 행진하는 12명의 잔인한 적군(赤軍)병사들을 묘사하는 이 시에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는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비평가들은 〈열둘〉을 모호한 작품이라 평가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꾸준히 읽혔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서 혁명 이후의 시대를 연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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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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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러시아 |
분야 | 시 |
해설자 | 최종술(상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
현대 러시아인의 삶의 운명을 결정했던 변혁의 폭풍우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몰아쳤다. 이 시대의 혼란스러운 삶의 정신적ㆍ정서적 체험이 지닌 폭넓은 스펙트럼을 극도의 진정성과 깊이로 표현한 시인이 있었다. 동시대인의 격앙된 의식의 대변자로 시대정신을 구현했던 그는 생전에 이미 위대한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 시인은 바로 러시아 상징주의 시의 대변자인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А. Блок, 1880∼1921)다.
블로크는 서정시가 지닌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힘에 있어 가장 위대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이다. 20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는 ‘시대의 비극적 테너’라는 말로 시대의 표상으로서 블로크가 지닌 의의를 갈파했다. 아흐마토바의 말을 빌리자면, “블로크는 비단 20세기 첫 사반세기의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 가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 블로크의 시적 체험이 지닌 진정성과 날카로움은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20세기 러시아 시와 러시아인의 삶에 폭넓은 문학적ㆍ정신적 반향을 낳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예술을 관류해 온 시민적 애국정신과 윤리적 절대주의의 생생한 증거다.
블로크는 자신의 생의 의미를 항상 ‘길’의 형상 속에서 모색했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상이한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ㆍ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 이와 같은 시인의 예술적 이상의 구현이 그가 자신의 시 전체에 부여한 큰 문맥이자 주제인 ‘강림의 3부작(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이 본격적인 창작이 시작된 1898년 이래 약 10년에 걸친 전업 시인으로서의 삶을 결산하며 처음으로 ≪시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 출판을 기획하던 1910∼1911년에 태동했다. 이때 블로크는 처음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쓴 시들을 3부작(세 권의 책) 구조 속에 배열한다. 그리고 3부작의 구조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 예술적 이념을 작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직접 밝힌다.
개별적인 시들은 저마다 장(사이클)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장들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시 소설’은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이 투영된 독특한 서정적 일기다.
블로크는 나아가 그와 긴밀한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있던 상징주의 시파의 문우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 소설’이 반영하고 있는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 곧 의식의 삶의 각 단계가 지닌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을 피력한다.
…나의 길은 그러하다. …나는 확신한다. 이 길이 의무임을, 모든 시가 모여 ‘강림의 3부작’을 이룸을. 너무나도 선명한 빛의 순간으로부터 불가피한 늪지대의 삼림을 지나, 절망을 향한, 저주를 향한, ‘보복’을 향한… 그리고 ‘사회적’ 인간의 탄생을 향한, 세상의 얼굴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영혼의 부분적인 상실을 대가로 치르고 형식을 연구하고 ‘선’과 ‘악’의 윤곽을 들여다볼 권리를 획득한 예술가의 탄생을 향한 길.
블로크는 이 구절이 지닌 명확한 의미를 어디에서도 해명한 적이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가 다의적인 형상들 속에 구현한 정신적 삶의 단계들의 윤곽은 그의 시 사이클들을 읽고 각 권(책)의 개념, 그 형상체계와 상징체계, 그리고 (번역을 통해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 음악을 이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포착될 수 있다.
‘강림의 3부작’은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향해 가는 길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학문적 이해가 아니라, 고행과 환멸, 의심과 고통을 거쳐 가는 길이다. ‘강림’이라는 말 속에는 성서적인 의미가 자리한다. ‘강림’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여 인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지상의 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행과 고통을 통해 시인은 ‘세상의 얼굴을 담대히 바라보는 정직한 예술가’가 되고, 세대의 얼굴이 되어 말할 권리를 획득한다. 블로크의 창작의 길은 ‘나’로부터 ‘우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강림의 3부작’ 1부(권)의 시들에서 그는 온전히 자기 내면에 침잠해 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형상들이 시인의 영혼을 물결치게 한다. 그러나 2부(권)의 정열의 어두운 회오리와 3부(권)의 ‘무서운 세상’을 거치며, 시인은 담대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더 이상 내가 아닌 우리의 세상과의 결속이 확립되었음을.” 시인은 구시대의 인텔리겐치아로서의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대가로 세대의 이름으로 말할 권리를 획득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무서운 시절의 자식들….”
블로크의 3부작의 제1권에는 시인이 1898∼1904년 사이에 쓴 시들이 창작 연대에 따른 순서로 배열된 세 사이클 <빛이 있기 전 (Ante Lucem)>,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 <기로(Распутья)>에 선별되어 실려 있다.
1권에 실린 첫 시들은 첫 사이클의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빛이 있기 전’의 정신적 상태를 구현한다. 뭔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한다. 시인은 다가올 파국과 변화에 대한 예감 속에서 살며 정신적 토대를 갈구한다. 묵시록적인 정신적 경향 속의 미증유의 세계에 대한 예감은 세계의 비밀과의 신비로운 접촉의 느낌과 함께한다.
1901년, 블로크는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정신적 선구자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В. С. Соловьёв)의 시와 철학을 본격적으로 접한다. 솔로비요프의 영향 속에서 지상의 현실 속에 이상의 구현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상적인 ‘저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접촉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강화된다. 시인은 신플라톤주의와 주콥스키(В. А. Жуковский)와 페트(А. А. Фет)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서정시에 구현된 낭만주의의 ‘이원론적 세계 지각’으로부터 발원하는 진정한 존재의 세계로서의 ‘저 세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 이와 같은 세계 지각의 이중성이 블로크 상징주의 시의 토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 변혁에 대한 기대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영원한 여성성(Вечная Женственность)’의 지상으로의 하강과 긴밀히 연관된다. 이 비밀스러운 여인의 출현에는 그 징표들-상징들이 선행한다. 그것은 오직 선택된 자들의 영적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 가능하다. 시인은 독특한 엑스터시의 상태 속에서 ‘영원한 여성성’의 현현을 예고하는 상징과 환유들을 포착하고자 갈구한다.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의 시기에 블로크는 이미 지상에 영원한 여성성이 구현된 형상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와 같은 정신 구조 속에서 시인은 자신과 자신의 연인이자 미래의 아내인 류보피 멘델레예바(Л. Д. Менделеева) 사이의 사랑을 고상한 신비주의적 사랑의 코드 속에서 이해한다. 시인은 지고지순한 여인에게 순결한 기사도적 사랑을 바친다. 시인에게 그녀와의 개인적인 사랑은 세계사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는 내밀한 사랑을 세계 변혁의 우주적 신비극으로 받아들인다. ‘영원한 여성성’의 이상 속에서 전기적 사실과 세계사적ㆍ우주적 규모의 사실 사이의 상응이 확립된다.
이 시기 자신의 의식의 상태를 두고 블로크가 ‘너무도 선명한 빛에 의해 눈멀었음’을 고백한 것은 구체적인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젊은 시절의 추상적인 정신 상태에 대한 반성적 술회다. 블로크는 영원한 조화의 이상을 변함없이 소중히 간직하며 정신적 추구의 방향을 변화시킨다. 그는 곧 영원의 꿈에서 깨어나 서서히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다. 사이클 <기로>는 이와 같은 변화의 표현이다.
2권에는 1904∼1908년 사이에 창작된 시들이 여섯 사이클 <대지의 기포(Пузыри земли)>, <여러 시(Разные стихотворения)>, <도시(Город)>, <눈 가면(Снежная маска)>, <파이나(Фаина)>, <자유로운 생각(Вольные мысли)>에 분산되어 수록되어 있다. 블로크는 <서시>로 2권을 열고 있으며, 여섯 사이클 외에 서정적 서사시 <밤 제비꽃(Ночная Фиалка)>을 2권에 수록했다.
2권에 실린 시들은 1권의 문맥 속에서 받아들일 때 복잡하고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1권의 서정적 주인공이 ‘순결한 어린아이’, ‘현명한 사제’, 성스러운 존재인 연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와 절연한 ‘기사도적 인간’이라면, 2권의 서정적 주인공은 ‘집 없는 곤궁한 부랑아’, ‘생의 무게에 신음하는 소시민’, ‘한밤 선술집의 취객’이다. 새로운 모티프와 형상들이 출현하며, 세계와 연인의 형상의 변모에 상응해서 사랑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한다. 2권은 파국과 비극에 대한 예감과 파괴적이고 파멸적인 정열로 점철되어 있다.
1905년 1차 혁명기의 사회상은 시인의 세계 지각의 변모와 시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 직접적인 계기다. 시인은 젊은 시절의 추상적인 염원을 대신하는 다른 지상의 가치를 추구한다. 모순적인 현실의 체험에 시인의 의식이 열리고, 단일한 조화의 원칙의 구현인 ‘영원한 여성성’ 대신 모순적인 삶의 체험이 시에 침투한다. 시인은 혼란스러운 삶의 체험 속에서 순간적인 조화의 체험에 몰입한다. 순간적인 절대의 체험의 엑스터시는 죄의식과 절망의 느낌과 함께한다. 이 시기 시인의 삶, 대표적으로 여배우 나탈리야 볼로호바(Н. Н. Волохова)와의 사랑은 다시 상징주의적인 상응의 코드 속에서 시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개인의 삶의 모순과 우주적 삶의 모순의 구현이다.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을 구체화하던 1910년을 전후한 무렵은 블로크에게 정신적 혼란으로부터의 출구를 찾기 위한 자기 정돈의 시간이었다. 시인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은 삶의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으로서의(영원한 조화에 대한 갈망과 창조의 원칙의 구현으로서의) 예술과 조국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삶의 지주를 재발견한다. 그에게 개인사적 삶이 부딪힌 절망과 러시아의 삶의 절망은 동등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희망의 좌절은 파국이 아니라 그와 조국에 부여된 오랜 가시밭길의 시작이다. 조국의 형상은 시인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개인의 운명과 조국의 운명의 융화 속에 상징주의자 블로크의 일관된 면모가 자리한다. 햄릿적인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 블로크는 러시아와 예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삶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 이로부터 3부작의 마지막 책에서 블로크가 견지한 ‘예술가 인간(Человек-артист)’의 이상이 대두된다. 모순과 절망의 체험 없는 진정한 삶은 없다. 모순과 어둠 속에 잠재된 조화와 빛의 계기를 포착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자인 예술가 인간은 이와 같은 건강한 비극적 세계 지각을 체현한 인간이다. ‘강림의 3부작’ 3권은 현실에 맞서는 강한 거부의 몸짓 속에서 현실과 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웅혼한 영혼의 삶의 기록이다.
‘강림의 3부작’의 3권에 수록된 시들은 1907∼1916년에 걸쳐 창작되었다. 3권에는 <무서운 세상(Страшный мир)>, <보복(Возмездие)>, <얌비(Ямбы)>, <이탈리아 시(Итальянские стихи)>, <여러 시(Разные стихотворения)>, <하프와 바이올린(Арфы и скрипки)>, <카르멘(Кармен)>, <조국(Родина)>, <바람은 무엇을 노래하는가(О чем поет ветер)> 등의 9개의 사이클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서정적 서사시 <종달새의 정원(Соловьиный сад)>이 사이클 <카르멘>과 <조국>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
블로크는 ‘사랑의 시인’이다. 채 성숙되지 못한 열정[크세니야 사돕스카야(К. М. Садовская)와의 사랑−사이클 <빛이 있기 전>과 3권의 <하프와 바이올린>에 삽입된 소 사이클 <12년이 흐른 후(Через двенадцать лет)>에 반영]의 소산인 시편들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멘델레예바와 ‘눈 처녀’와 ‘파이나’의 볼로호바를 거쳐, 1914년 블로크에게 다시 닥친 류보피 델마스(Л. А. Дельмас)와의 정열적인 사랑(사이클 <카르멘>)에 이르기까지, 시인에게 사랑의 이해는 삶의 이해와 동질적이다. <카르멘>의 사랑의 형상은 빛과 어둠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시인의 이해의 극명한 발현이다. 시인은 악의 창조적 힘, 조화를 낳는 어둠, 역사적 악의 필요불가피성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1917년의 혁명을 받아들였고, 그 찬연한 종착점이 혁명 서사시 <열둘(Двенадцать)>이다.
블로크의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블로크 자신이다. 그의 시는 모순적이지만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블로크의 형상을 창조한다. 시가 창조하는 시인의 형상이 실제 시인을 대체한다. 독자들은 이 창조된 시인의 형상을 실제 시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숭배했다. 블로크는 시를 통해 ‘자기 신화’를 창조했다. 이것은 러시아 상징주의 시학의 가장 중요하며 고유한 면모의 실현이다.
블로크의 ‘3부작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 한편이 더 있다. 그것은 시인이 생애의 마지막 해에 쓴 시 <푸시킨스키 돔에게(Пушкинскому дому)>다. 서정시인 블로크의 창작의 길은 ‘3부작’을 닫는 해인 1916년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후 블로크는 혁명의 열기로 고양되어 창작한 서사시 <열둘>과 시 <스키타이(Скифы)> 외에 서정시는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그중 예외적인 의미를 지닌 시가 바로 <푸시킨스키 돔에게>다. 근대 러시아 고전 문화의 정신을 체현했던 블로크는 그의 시의 몸을 러시아 문화의 분수령이 관통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을 마감하며 푸시킨(А. С. Пушкин)의 이름이 대변하고 자신이 그 유기적 계승자인 러시아 고전 문화의 시대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예감했다. 이 시는 블로크의 시적 유언이자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화 독재에 의해 고전 문화의 정신적 지향과 가치를 상실하고 문화적 공황을 맞이하게 될 20세기 러시아인의 암울한 삶에 대한 예언이다. 생애의 마지막 해에 블로크가 심혈을 기울였으나 실현되지 못한 ‘3부작’의 개작 판본에서 아마 이 시는 3부작 전체에 대한 에필로그를 이루었을 것이다.
블로크의 시는 파국에 대한 느낌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하게 한다. ‘파멸’은 그가 사랑했던 말이다. 세계의 파국성을, 사랑의 파국성을, 창작의 파국성을 그는 노래했다. 그의 많은 시가 운명의 모든 바람에 개방된, ‘눈보라 치는 광장’의 느낌에 침윤되어 있다.
전 생애에 걸쳐 시인의 내면에는 생의 저주스러움과 파멸성에 관한 무서운 느낌이 살았다. 근대 문명은 의미를 다했고, 그 파멸은 피할 수 없고 무시무시하다. 블로크는 이 파멸의 재앙을 인류의 죄악과 실수에 대한 보복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블로크는 안락을, 축복을 거부한 시인, 파멸의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세계를 파괴할 재앙을 예감했다. 그러나 이 예감 속에서 그는 세계를 아름답게 갱신시킬 정화의 뇌우를 보았다. 오직 이 소망으로 시인은 러시아 혁명의 재앙을 받아들였다. 블로크는 고통을 통한 정화와 세계의 변모를 꿈꾸었다. 혁명 속에서 블로크는 러시아의 영적 변모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믿었다. 실현된 예감은 그의 가슴에 희열이 들끓게 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블로크는 삶에 있어서도 창작에 있어서도 절대주의자였다. 진정한 낭만주의자였기에 그는 혁명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함을”, “거짓되고 추악하고 무료한 우리의 생이 정의롭고 순결하고 즐거우며 아름다운 생이 되도록 해야 함을” 믿었다. 그리고 위대한 뇌우가 그치고 삶이 변모된 것이 아니라 더 잔혹하고 쓰라린 것이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애수가 그를 덮쳤다. “소리들이 죽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었고, 시를 쓸 수 없었다.
블로크의 시집은 다수의 판본이 존재한다. 1997년 20권으로 출간된 아카데미 판본(А. А. Блок.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двадцати томах. М., Наука, 1997)이 나오기까지 가장 충실했던 블로크의 ≪저작집≫은 소비에트 시대에 출간된 각각 12권과 8권으로 된 판본이다(C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в двенадцати томах, Л., 1932∼1936;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восьми томах, М.:Л., 1960∼1965). 이와 같이 블로크의 문학 유산 전부를 망라하고 그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집약한 명실상부한 블로크 전집은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블로크의 ‘3부작’을 이루는 시들에 대한 접근은 어느 판본을 이용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암시와 인유로 포화된 블로크의 상징주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문화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그것이 그의 시의 의미 구축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면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 점에서 아카데미 판본이 제시하는 방대한 주석은 블로크의 시에 대한 심화된 이해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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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부에서 은밀하게
알렉산드르 블로크
내 내부에서 은밀하게 물보라치는
혼란된 삶의 외침에 귀기울이면서
꿈속에서도 나는
그릇되고 순간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으리라.
나는 파도를 기다린다- 찬연한 깊은 곳을 향해
동반하는 파도를.
두 무릎을 굽히면서, 가까스로 뒤따른다
두더지의 시선으로, 조용한 가슴으로
환상과 꿈들의 한가운데서
다른 세계들의 목소리 한가운데서
분잡한 세속적인 일들의
떠돌며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알렉산드르 블로크(1880~1921)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으로 “동시대인의 격앙된 의식의 대변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릇되고 순간적인 생각”을 떠나보내고, 은밀한 내면의 심해(深海)를 찾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내면 응시를 “조용한 가슴”을 향해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을 향해가는 일이 비록 높은 파도를 동반하는 시련의 길이 되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분잡한 세속”이 만들어내는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시인은 시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에서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모든 존재를-영원한 것으로,/ 무성격(無性格)을-인간적인 것으로,/ 실현불가능을-가능한 것으로!”라고 써서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원력들에 대해 말합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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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세대 상징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알렉산드르 블로크(1880-1921)의 대표작인 희곡 "광장의 왕".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쉬킨'만큼이나 사랑받는 작가다. 블로크는 20세기 이후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에 뿌리라고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 랭보에게 영향을 받은 1세대 러시아 상징주의 작가들을 공허하다고 비판하면서 민중에 뿌리를 둔 상징주의 작품을 써냈다.
원작 희곡 '광장의 왕' 역시 블로크의 세계관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추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곰씹어야 맛이 살아나는 연극이다. 대사 사이에 여운을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와 상징적 대사를 모호하지 않도록 돕는 분장, 의상 등 다른 무대도구들이 꼭 필요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희곡을 낭독하면 40여분이 채 되지 않을 만큼의 짧은 희곡이고 또한 이미지화 된 대사가 많기에 연출 기법과 대사전달에 큰 신경을 써야 극이 살아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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