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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시인 - 葉維廉
2016년 12월 13일 22시 33분  조회:3563  추천:0  작성자: 죽림

예웨이롄 시선

 ]
 
저자 예웨이리엔(, 1937- )
국가 대만
분야
해설자 고찬경(부산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동아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강사)

시인의 창작이 그의 삶의 유ㆍ무형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라면 예웨이롄()의 시 세계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넘나드는 여러 이질적 요소들의 착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산과 추방, 국가와 민족, 중국과 서양, 과거와 미래, 현대와 전통…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삶의 조건과 의식적인 시적 추구는 이 같은 주제 안에서 자아와 세계에 대한 독특한 감수를 담은 일련의 시를 배태했다.

시인 예웨이롄은 시적 탐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간다. 중국 대륙, 홍콩, 타이완 그리고 미국을 오가는 생활공간의 변화는 그의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그에 대한 시적 탐구로 이어졌다. 이 같은 예웨이롄의 자의식은 현실에 대한 관망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존재의 귀속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의 또는 타의로 시골에서 도시로, 일본의 식민지에서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타이완으로부터 미국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을 전전하며 그는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혼란으로 인해 ‘모든 감각기관과 혈관, 심지어 땀구멍과 손가락 끝까지 파고드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기인한 불안과 혼란, 언어의 착종과 시인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이질적 문화의 공존은 그의 시작()을 통해 고스란히 확인된다.

1950년 당시 중국 대륙을 떠나 타이완으로의 이주를 강요받은 시인들은 익숙한 중국 대륙이라는 문화와 창작 환경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불안정한 ‘현재’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들은 파편화된 문화 공간 속에서 새로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한편, 그 과정 가운데의 복합적인 내면의 심리 상태를 시를 통해 드러낸다. 추방과 이산에 따른 우울과 방황, 향수와 고독뿐 아니라 단절 후 재건이라는 자각적 심미 의식의 회복이 그들의 시, 특히 예웨이롄의 시적 여정에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다. 외재적 타격을 내재화해 가는 이 모든 과정은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경험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예웨이롄 시의 특징은 이 같은 개인 정체성의 탐구가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으로 외연을 가짐에 따라 그의 시 또한 문학사적 의의를 함께 획득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아울러 그의 시의 현대성의 추구가 대륙의 1930∼1940년대 모더니즘의 계도로부터 1950∼1960년대 타이완 시단의 모더니즘에 경도된 후, 중국 전통 시에 대한 의식적 추구로 화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대륙과 홍콩, 타이완 등지의 각각의 상이한 특성을 품은 모더니즘의 양상이 그에게서 계승되고 융화되어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타이완의 현대 시인들은 대륙의 역사적 경험을 내재화해 타이완의 사회ㆍ정치적 현실에 조응해야 하는 시적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생활공간과 창작 환경의 변화 속에 그들은 상술한 바와 같은 복합적 정서를 고도로 응축된 시어와 다의적 이미지 속에 이식해 가기 시작한다. 예웨이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 무렵 그는 1930∼1940년대 대륙의 언어미학으로부터의 경험을 타이완이라는 창작 환경 속에 이입해 간다. 역사의 재건과 민족의 자각이라는 제재는 이산자인 시인에게 일종의 사명과 책임으로 의식화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타의 또는 자의에 따른 추방과 이산의 경험이 오히려 시인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그는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이 아닌 무형의 민족의 품을 귀속처로 삼은 듯하다. 그것은 ‘조국과의 영원한 결별’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린 후, 모호하기만 했던 ‘신분 정체성’을 인식해 가는 과정 가운데 획득한 ‘문화 정체성’으로의 귀결이었다. 즉, 당시 대륙과 홍콩, 타이완은 각각 이질적인 정치ㆍ사회ㆍ문화 환경 속에 놓여 있으면서 심지어 대결 양상을 띠고 반목했지만, 세 영토는 결국 시인에게 동질의 문화를 공유한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에게 ‘민족’은 영토를 뛰어넘고 국경을 초월하는 ‘우리’로 호칭해도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친숙하고도 자연스러운 개념이 된다.

이처럼 정체성의 탐구와 현대성에 대한 추구가 그 깊이를 더해 갈수록 시인은 중국적인 어떤 익숙한 공간과 민족의 보편 정서로 회귀하게 된다. 이 같은 정향은 시의 예술적 탐색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웨이롄은 중국 고전시의 성과를 현대성을 갖춘 시적 기교에 의식적으로 융화시켜 감으로써 새로운 현대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예웨이롄의 초기 시는 타이완 모더니즘 시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유의 방식을 초월해 의식적으로 작품 가운데 설명적인 서술적 요소를 배제하고,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 시인 사유의 결과만을 독자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대략적 묘사마저 배제함으로써 독자는 시인의 사고의 과정을 파악하기도 힘들 뿐더러 작품 속 대강의 뜻도 확정하기 어렵다. 시인은 다만 ‘이러함’만을 드러낼 뿐, 왜 이러한지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독자는 그저 작품에서 사물의 평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시에서의 현대성의 추구는 그가 고백한 대로 중국의 1930∼1940년대 시인들의 창작, 특히 볜즈린()과 신디()의 창작에 힘입은 바 크다. 이에 대해 예웨이롄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1930∼1940년대의 시인과 비평가를 발견하고 그들의 사색을 계승하게 되었으며 전략적 토대가 되는 언어의 간결함을 찾아내게 되었다. <나와 1930∼1940년대의 혈연관계()>라는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정서의 내재적 호응’, ‘장면의 변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 보여 주기’, ‘극적 장면’, ‘사건의 율동과 전개의 긴박감’ 등은 이후의 시 속에서 음악적 경향과 분위기의 융합으로부터 분위기의 풍부함과 효과를 얻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5ㆍ4운동 이래 중국의 현대 시인들은 세계문학과의 조우를 통해 시의 형식과 내용을 부단히 확장해 갔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조류는 중국 현대시라는 드넓은 미개척지에 일시에 들이쳤고, 시인들 역시 이를 계기로 다양한 문학적 시도를 통해 시의 영역을 부단히 넓혀 갔다. 그러나 중국과 서구의 역사적 경험의 상이함과 문화적 바탕의 이질성으로 말미암아 서구 문예의 성과는 중국의 전통 정감이라는 필터를 거쳐 이식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시와 서구 시의 이 같은 상호 교류로 인해 중국의 현대시는 부단히 확장되고 성숙해 갔다.

예웨이롄은 상이한 이 두 세계의 내면화를 통해 존재와 세계에 대한 사유의 총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나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고심하며, ‘탐구’하고 ‘모색’해 갔다. 이를 위해 전통과 현대의 상이한 문화적 시공을 넘나들며 문화와 역사의 다층적 반향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울러 고전적 어휘와 이미지, 구법을 이용해 새로움을 빚거나 중국 시가 중시하는 현현[]의 방식을 사용해 시각적 이미지와 사건을 한데 어울렀다. 이 밖에 서양 현대시가 제공하는 함축과 다의가 농축된 언어로써 어지러이 산산조각 난 현대 중국의 경험을 길들여 갔다.”

1950∼1960년대 타이완의 많은 시인들은 고전적 어휘와 이미지를 자신의 시에 되살림으로써 중국문학의 본류를 재현하려 했다. 예웨이롄이 밝힌 ‘산산조각 난 현대 중국의 경험을 길들이기’ 위한 그 모든 ‘탐구’와 ‘모색’은 결국 ‘파편화된 문화 공간’을 ‘파괴’하고 ‘재건’하기 위한 시인의 주체적 자각이자 역사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예웨이롄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그의 초기 시작()을 서양 현대시의 학습과 적용에 실패한 사례로 꼽는가 하면, 순수시 창작을 시인의 역사적 사명의 방기로 단정 짓는 서술도 보인다. 이 같은 평가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이후, 문예의 해빙기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 문단의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때까지도 사회ㆍ정치적 효용성의 여부와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시인과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부동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훙쯔청(), 류덩한()이 함께 쓴 ≪중국 당대 신시사()≫(1993)에 이르면 더 이상 난해하다는 이유로 예웨이롄의 시를 폄훼하는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수년 사이 시인 예웨이롄을 새롭게 주목하는 한편, 중국 당대 문학의 숨겨진 성과로 그의 시를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된다. 주요 정기간행물에 그에 대한 특집 기사가 게재되는가 하면, 2008년에는 총 열한 권으로 구성된 예웨이롄 문집이 인민문학출판사와 안후이()교육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 3월 말에는 북경대학 중국현대시연구소()와 수도사범대학 중국시연구센터() 공동 주최로 ‘예웨이롄 시 창작 심포지엄()’이 개최되기도 했다.

예웨이롄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의 증폭은 근래 중국문학의 세계적 확장을 위한 ‘해외 화문 문학’의 정립에 그가 좋은 모델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웨이롄의 시는 탐구와 탐색의 기록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되는 자아 정체성의 끊임없는 탐구는 그가 살아온 현대사의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민족 정체성의 탐구로 변화했다. 상술했다시피 예웨이롄 시의 특징은 이 같은 개인 정체성의 탐구가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그의 시 또한 문학사적 의의를 함께 획득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는 끊임없는 시적 탐구와 현대성의 추구를 통해 이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해소해 간다. 즉, 1930∼1940년대 중국 모더니즘의 계승자이자 1950∼1960년대 타이완 모더니즘의 선도자인 예웨이롄은 이 같은 현대성의 계승과 확장의 과정을 거친 뒤 중국 전통 시와 서양 현대시의 융합을 통한 현대성의 재창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청명한 푸른 하늘에 언뜻 스쳐 가는 검은 새 한 마리’와도 같은 순간의 포착과 그 기록으로 구성된다. 그의 시의 문학사적 의의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전통과 현대를 두루 아우르는 이 같은 시적 조화라는 창조적 성과에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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