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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구나 좋은 詩를 쓰는것은 아니다...
2016년 01월 09일 04시 42분  조회:3908  추천:1  작성자: 죽림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최동호




시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나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할까.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쓰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런 과장된 주장에 반대한다. 좋은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말할 것이다. 그게 그 말이 아니냐,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바로 특별하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시를 쓰려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어떤 환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이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지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탐닉적 주관성이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천재의 시가 있다. 김소월이나 정지용과 같은 경우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김소월은 물론 

정지용의 경우에도 단어 하나 시 한 줄의 첨삭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 또한 누구보다 치밀하게 초고를 가다듬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교단에서 창작 지망생을 많이 접하는 나의 경우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장단점을 지적해 주었는데, 그들 중의 어떤 이는 몇 마디 언급을 발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지적해 주어도 절대로 자기 주장을 고치지 않아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남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만 듣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제 3자의 지적을 심각하게 음미하여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수정하는 사람이 좋은 시를 쓰게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두루뭉수리한 지적이나 모호한 칭찬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접적이고 신랄한 지적일수록 도움되는 바 크다. 

2. 모호함과 명료성 

시적 감성이나 표현은 명료해야 한다. 모호함은 금물이다. 물론 감정의 엉킴이 복잡하여 때로는 뿌옇게 복합된 심정 상황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명료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들에게 그런 심정을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적 감정을 모호하게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된 [눈 오는 날은]은 모호한 표현들로 인해 시적 감정이 적절히 정제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눈오는 날은 
내리는 눈발 사이 북녘 
소식 같은 것 섞여서 온다 

새벽녘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휩쓸던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 

희뿌옇게 동녘이 처음 열릴 때 
하늘에서 내리는 글발, 희끗희끗 단군 한배님의 
긴 수염 눈발 사이 휘날리고 

환상의 새 한 마리 천년을 거슬러 올라 
송화강 언덕을 치닫고 
고구려의 위업 삭지 않는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 

눈오는 날은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들 
내리는 눈발 사이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를 본다 
- [눈오는 날은] 

전체적으로 보아 시의 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자의 감각은 살아 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 나름으로 갖추어 시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개가 판에 박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상의 균형과 안정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 이러한 구성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 시의 전환은 제 4연에 있는데, 여기서 지나치게 무겁고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앞의 시행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1연의 '소식 같은 것', 제 2연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말발굽소리 무수히' 등에서 '같은 것', '호반쯤', '무수히' 등이 모호하게 돌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3연의 '글발'과 '눈발'도 작자로서는 고심한 결과였을 터이나 제 4연의 시상을 설득력 있게 끌어오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이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작자는 '환상의 새'를 날려 올리지만, 그 새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시적 필연성이 독자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천 년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니 '고구려의 위업'은 더욱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제 4연 마지막 행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은 이미지를 실감나게 살려 보고자 했다고 판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아도 구체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 제 5연의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에서 화자가 너무 표면에 나서서 설움에 떨고 있다고 판단된다. 설명적이고 불필요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라면 더욱 감추거나 다른 이미지를 빌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뒤틀림은 이미 제 5연 제 2행의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과 제 3행의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들'의 엇갈림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제 3행의 진술은 그 나름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제 2행의 경우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곳송곳'이란 어휘가 이 문맥에서 생경하게 드러남으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이 시를 다 읽고 난 독자가 왜 눈 오는 날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어야 하는지 선뜻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의 약점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시적 감정은 강렬한 것이지만, 그 강렬함이 선명한 이미지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쉬운 시행 하나를 더 지적하자면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에서 작자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시를 읽은 사람 쪽에서 보자면 구체적으로 각인된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라는 시어가 막연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수히'는 '고구려의 위업'과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의 동기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역사성을 갖게 하는 시적 긴장 없이 평범하고 느슨하게 사용된 까닭에 시가 전체적으로 생명감과 탄력이 느껴지기보다는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3. 명료함과 추상성 

명료한 시는 우리에게 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군더더기나 잡박함이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그 명료함은 일단 호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명료하게 쓰여진 시에서 삶의 깊이가 발견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시적 사고의 단순성에 실망하기도 한다. 명료성은 복잡한 시적 감정이 여과되고 정련된 결과물일 때 독자들로부터 시적 공감력을 갖는다. 다음에 인용된 [유리창에 비, 그리고]는 간단하고 명료한 진술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작자가 하고 싶은 시적 전언은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주의 섭리는 물론 태초의 생명의 탄생까지 시적 상상을 확대하고자 한다. 

유리창에 빗줄기가 부딪친다 
잿빛 하늘의 방사다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물과 흙의 슬픈 정사 

저 어두운 땅속 깊숙이 
끝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어둠은 이제 
더 이상 어둠만이 아니다 

태초에 생명은 그렇게 얻어졌느니 
- [유리창에 비, 그리고]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성적 이미지를 떠올림은 물론 그 아득한 시원으로까지 상상의 진폭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 것이 이 시에서 작자가 시도한 시적 의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일상에서 우주의 섭리와 생명의 창조까지 연상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발상은 결코 범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락이 연결되는 제 2연과 제 4연을 한 행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간결 명료하게 시행을 마무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아 어딘가 이 시가 추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수정의 알들이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는 시적 전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 1연 4-5행의 진술들이 시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얻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투명한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작자의 시적 상상력의 변증법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빗줄기가 유리창에 떨어져 투명한 정자가 되고 이것이 흙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 물과 흙이 뒤섞이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나 사물의 생명력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리 설정한 자신의 선입관을 그대로 반영하여 쓴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작자 자신은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제 3연과 4연의 시적 논리가 어둠은 이제 어둠만이 아니라 생명이다라고 요약되는 것 또한 그러한 진술의 연장선에 있음을 뜻한다. 물과 흙의 뒤섞임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어둠이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이지 시적 통찰에 의한 구체적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시는 크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에서도 산문적, 개념적 진술은 있어도 시적 공감을 유발하는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꼬집어 말하자면, 제 1연에서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이란 표현이, 마구 쏟아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정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일차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무차별 난사' 이상의 표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이 시의 작자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면 '무차별 난사'가 아닌 그 나름의 다른 표현을 찾았을 것이며, '우주의 섭리'가 어둠 속에서 빗방울을 머금어 어떻게 생명으로 탄생되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명료한 진술들은 유리창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방안에서 바라보며 떠올린 이런 저런 상념들의 스케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우는 소쩍새의 울음과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소리가 있고,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 새벽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둠에서 탄생하는 생명 현상에 동참하는 시적 상상력 없이 사물과 거리를 두면서 현상을 외곽에서 묘사하는 시적 진술은 시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손은 노동에 짓이겨지지 않았을지라도 시인의 펜촉은 노동으로 뭉그러져 있어야 참된 땀냄새가 밴 시가 쓰여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우주의 섭리'와 같이 크나큰 뜻을 머금고 있는 어휘들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시적 문맥이 아니라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커다란 것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관념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에서 우리는 시적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짧은 시에 태초에 이루어졌던 생명의 탄생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범박한 언어로 다루어서는 좋은 시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해 두고 싶다. 

4. 새로움과 옛스러움 

세상살이 변화가 격해질수록 옛 것은 빨리 사라져 간다. 옛 것을 돌이켜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격언은 이제 그 효용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움에만 집착하는 것이 최근 사람들의 심적 동향이다.'새 것 콤플렉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20세기 한국은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그 결과 20세기 말에는 경제적 도약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재빨리 버리고자 했던 것들 속에 사실은 오늘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게 하는 문화적 코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해 볼 시점에도 이른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자든가 과거의 것이 좋다는 폐쇄적 보수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 새로워지려면 과거로부터 우리의 문화적·정신적 뿌리로부터 새로움이 터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 과거 그 자체로 되풀이될 때 그것은 새로움을 추동하기보다는 과거의 속박이 될 것이요, 새로움이 새로움 그 자체일 뿐일 때 그것은 알맹이 없는 새 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음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 소재가 옛스러운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옛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시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옛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옛스러움의 고착성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향]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사람들은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면 
시골집의 난로와 따뜻한 아랫목을 이야기한다. 
토끼몰이나 눈썰매 타던 일을 자랑하며 마음속에 고향의 난로를 
다시 피우는 것이다. 
쌓인 눈을 털어 내고 
낡은 문을 열면 어머니가 반가이 맞아 주신다고, 

옛날 나의 집 사립문은 늘 열려 있었다. 
눈 내리는 날은 
저 쌓인 눈을 밟고 반가이 가족이름을 부르며 
누군가 와 주기를 얼마나 목메었던가? 

몇 마리 까치가 울고 
매서운 바람이 늙은 소나무 위로 넘어가면 
눈 내리는 나의 하루는 그리움으로 저물어 
땟국물 절은 이불 속으로 야윈 몸을 숨긴다. 
- [귀향] 

위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이 시가 초고속통신망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오늘날에 쓰여진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먼 옛날 전설의 고향 시대의 추억 한 토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위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과거는 모두 아름답다는 회고적 성향 때문일까. 또는 현실에 패배하고 과거로 복귀하려는 퇴행적 사고 때문일까. 
어떻든 이런 소재를 가지고도 위의 시가 가진 정태적 복고 취향이 아닌 시골 풍경을 어떻게 살려내는가가 우리들의 관심사이다. 우선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위의 시의 작자가 독자에게 심정적 호소를 매우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1 연의 '이토록 슬픈 눈', 제 2연의 '얼마나 목메었던가', 제 3연의 '그리움으로 저물어' 등등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나 이유보다는 당연히 모두 그럴 것이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서술된 것들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오늘의 독자들은 왜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는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혼자만의 슬픔이라면 모르지만, 시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슬픔을 공감하도록 할 때 하나의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인식될 때 슬픔은 그 슬픔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작자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의 서두에서 '고향의 난로'를 피워 놓았다. 시골집의 사립문은 늘 열려 있다고, 누군가로부터 이름 불리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저물어 가는 하루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을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움은 그러므로 작자는 '목메이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을 위한 서술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움을 말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상투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좀더 개성적이기 위해서는 '쌓인 눈', '낡은 문', '매서운 바람', '늙은 소나무' 등의 관형어구들 또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따져 읽어보면, 누구나 감지할 것이다. 이러한 관형적 표현들에서 우리는 새로움보다는 고착된 과거의 정서를 느끼는 동시에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 또한 진부한 기다림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땟국물 절은 이불'에서 작자는 조금 고심했을 것이다. 

삶의 땀냄새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나에게 말하라면 이런 표현들이 좀더 적극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아나야 된다고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를 소리내어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부름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그리움으로 자신을 야위게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좀더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소재나 그 속에 담긴 그리움 그 자체는 그것대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작자의 고심과 처리 능력에 따라 새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두들기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골집을 떠올리고 고향 난로와 더불어 그리움을 말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낡은 것도 아니다. 선배 시인들이 많이 다루었을 법한 소재를 자기 발전이 없이 그들의 상당수가 사용한 어법 그대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인해 옛스러움의 품격을 살려내지 못하고, 퇴행적 상투성으로 마무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향]에서 읽을 수 있는 기다림을 간직한 작자에게 우리는 인간적 신뢰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신뢰가 농촌 공동체 시대에 통용되었던 인간적 유대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시의 작자에게 어머니와 가족이 없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 우리들의 시적 화두가 될 것이다. 

5. 시 쓰기의 괴로움과 즐거움 

위에서 우리는 가급적 비판적 시각에서 몇 가지 예를 검토해 보았다. 위의 시를 썼던 분들에게는 아마도 지나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만큼 시적 감정을 정돈하고 마무리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시를 써 본 사람들의 시 쓰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 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아마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변명을 후자 쪽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하다.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연습량이 문제이다. 불면의 밤들을 보내지 않고, 남을 흉내내어 한 두 번 시도하다 안되면 잘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시 쓰기가 출세의 수단이 되거나 돈벌이의 방법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전념한다 하더라도 쉽게 좋은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방황과 좌절에 빠지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스스로 흥분하여 환호작약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는 그것이 어떤 세속적 보상과 관련이 없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방 보상이 주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나 쉽게 매달릴 것이지만, 동시에 또한 싫증나기도 쉬울 것이다. 세속적 보상도 없고, 뜻대로 잘 되지도 않지만, 끝내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 시 쓰기에 자기 생존을 건다면, 그는 분명히 좋은 시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찬보다는 웬만한 비판과 질책에도 끄덕도 하지 않는 강한 의지가 발동할 때 그 사람의 시 쓰기는 제대로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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