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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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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작법 똥그랑...
2016년 01월 10일 06시 00분  조회:4679  추천:0  작성자: 죽림

3) 현실인식과 역사를 껴안은 시 

<踏靑>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書經』에 ‘詩言志 歌咏言’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그 책이 나오기 전부터 시는 그러했다는 전제하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서경이 말하는 시의 정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이 정의에 따라 시를 쓰고 시를 해석, 음미하는 사람들이 동서에 그득하다. 어쩌면 7-80년대 민중시들은 대개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詩言志, 말로 뜻을 세우는 게 시라고 정의했을 때 시에서 내용 혹은 주제와 논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이게 문제가 된다. 
대작『황무지』를 쓴 엘리엇은 시를 ‘잘 빚은 항아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시의 형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정희성의 이 시는 리듬이나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라든가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라든가 하는 행에서 보여주는 비유는 핍진한 내용과 논리를 넘어서며 오히려 이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위의 엘리엇은 스물여섯이 넘어서도 시를 쓰려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또한 말했다. 그런데 그가 밝힌 그의 역사의식은 자기의 시대가 불안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신념이 무너진 시대라는 것이다. 20년대의 유럽 정신계를 그는 그렇게 보았다. 말하자면 역사를 내면적, 심리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우리도 80년대 민중시의 시대를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역사를 일상화,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80년대적 화두를 청산하기에 급급해서 욕망, 섹스, 죽음, 상품 등으로 우루루 달려갔지 그것을 시 속에 내면화시킨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이정록의 시는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붉은 풍금새> - 이정록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붉은 풍금새 한 마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풍금 뚜껑을 열자 
건반이 하나도 없다 
칠흑의 나무 궤짝에 
나물 뜯던 부엌칼과 
생솔 아궁이와 동화전자 주식회사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 
그 붉은 눈알이 떠있다 
언 걸레를 비틀던 
굽은 손가락이 
무너진 건반으로 쌓여 있다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에서 
붉은 새 한 마리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누나!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풍금소리를 낼 것 같은 누나에 대한 시다. 아마 누나는 풍금을 잘 쳤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그 풍금이 붉은 풍금새가 되어 내려온다. 아니 마지막 행대로라면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한데 누나를 생각하면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마음을 저며 온다. 그 풍금 뚜껑을 열자 아뿔사! 건반은 하나도 없고 그 칠흑의 나무 궤짝에 어리던 날 나물을 뜯던 부엌칼과 연기 꾸역꾸역 내며 생솔가지를 태우던 아궁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누나는 커서 ‘공순이’가 되어 동화전자 주식회사를 다닌 모양인데 그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이 졸음을 이기느라 충혈된 붉은 눈알처럼 되어 떠 있고, 더 아득한 것은 그때 흔히 난방도 제대로 못한 자취방 생활을 하느라 언 걸레를 곧잘 비틀곤 했던 그 굽은 손가락들이 무너진 건반으로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은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처럼 단정하고 엄정해져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오는 것이다. 
버드나무껍질에 세들고 싶고 제비꽃 여인숙을 차려 특실 한 칸을 영구 분양해주고 싶다던 이 시인의 상상력은 참으로 기발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떻게 누나의 힘든 생의 기억을 지상에 있지도 않은 풍금새를 상상하고 빌려와 이렇게 눈물겹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상상력 까닭에 이 시는 자칫하면 내용의 무게에 짓눌릴 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지향한 시 

<요리사와 단식가> - 장정일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 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굶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 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새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 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 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 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준다.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 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 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야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 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 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 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이 시는 현대 도시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의 단절된 공간성을 301호와 302호로 압축시켜 구도화하고, 이 속에 기생하는 인간의 원초적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하에, 소통의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된 아파트와 같은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단절과 외로움이 인육을 먹는 여자와 철저히 굶는 여자라는 충격적인 일화를 통해 담담히 서술되고 있다. 차분한 서술과 그 속에 담긴 충격적 내용의 대비는 이 시인의 능숙한 시적 기교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실은 이 시적 기교와 장치 속에 시인의 전언이 폭풍 전의 고요처럼 잠재되어 있다. 시적 내용에 있어, 시적 언어의 마술에 가려지거나 신비화된 부분은 없다. 담담한 산문체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이건 장정일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문명의 부정성에 집중하고, 또 거기에서 발생하고 극단화하기 마련인 인간의 이기와 소외와 외로움을 이처럼 아무 감정적 수사도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이 이 지상에는 존재치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 무렵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1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라고 쓰고 있다. 정말 희망의 길을 찾고자 해서 그렇게 다짐했던가. 하지만 시는 중반 너머 종반이 다 되도록 어떤 희망의 조짐도 표현하지 않는다. 되레 그 사이 사람들은 참으로 느린 속도로 죽어갔고, 많은 나뭇잎들은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그 길을 묻던 혀는 흉기처럼 단단해진 상태다. 끝내는 지금까지 나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쓰는 것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한마디로 모든 길들은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불안 따위에 시달릴 것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그게 희망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가 그간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고향상실감만을 안은 채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하여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서술한 시다. 그러기에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떨어지는 물방울은 목숨을 다한 나무에서 이탈한 수액으로 시신에서 흘러내리는 죽은 피를 닮았고, 종반부 화자가 “나그네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이라고 타이르는 물방울도 기력이 다해 움직이기를 그친 비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노트는 시의 처음부터 천천히 덮이는데 사실 이 노트는 인간의 불안과 권태와 죽음을 캐고자 했고,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려 했으며, 나아가선 삶의 참된 길을 찾고자 늘 의심을 품던 노트였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닫힌다. 그러니 희망, 물방울, 노트, 추억, 개, 길 등은 이제 죽음의 희망을 노래하려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추적케 하는 화려한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정일과 기형도 80년대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의 광장 속에서도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적 도시문명 속의 인간소외를 묘파해내거나 광장이라는 외면적 실존보다 거기에서 불안이나 허무라는 내부적 실존의식을 묘파해서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확보해낸다. 하지만 이 시들에 그러면서도 도저한 문명비판이나 시 밑바탕에 깔린 현실정치비판이 건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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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코스모스 / 조정권

 

     

 

 

 

 

 

 

 

 

코스모스

 

                                조정권

 

십삼 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 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 꽃이옵니다

 

 

조정권 시집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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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목숨 / 조정권

 

                   

 

 

 

 

 

 

목숨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체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수록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정권 시집 < 얼음들의 거주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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