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핵시의 정점을 향한 기나긴 여정
이 승 하
성찬경 시인이 아홉 번째로 펴내는 시집(시선집 제외)의 제목은 ‘해’이지만 시집의 제목 밑에 적혀 있는 타이틀에 그 무엇보다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찬경일자시집’―마침내 밀핵시론(密核詩論)의 완결판이 2009년도 다 저문 지금 이 시점에 나오게 된 것을 까마득한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경외심을 갖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일자일행시 「해」가 발표된 것은 1992년 여름호 『현대시사상』이므로 17년 만의 결실인 듯하지만 우리말에 대한 실험 공법이 『화형둔주곡』(1966)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근 45년 만에 시인은 한국시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작업을 이제 막 끝낸 것이다. 시인의 밀핵시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표제시 「해」에 대한 소감부터 밝히고 싶다. 시의 전문은 없고 제목 ‘해’가 전부다. 제목 아래 본문은 없지만 각주가 하나 오른쪽 하단에 붙어 있다. ‘해’라는 한 글자로 된 순우리말에 대한 시인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이 시의 본문을 대신하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단연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해다. 세상에 해보다 더 크고 밝고 고마운 것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키우는 물리적인 원동력이 바로 저 해임에랴.
이 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 ‘해’는 해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해’의 자음 ‘ㅎ’은 밝음과 높음과 신성함을 표상으로 울린다. ‘하늘’의 자음도 ‘ㅎ’이 아닌가. ‘해’의 모음 ‘ㅐ’는 이를테면 莊重함의 親密化다. ‘아비’ ‘아기’를 ‘애비’ ‘애기’라 할 때 느끼는 감정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말 ‘해’는 저 고마운 해가 동시에 우리와 친하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한 개 글자로 된 제목과 텅 비어 있는 본문 자리와 친절한 각주가 모여서 ‘해’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 문화권 내에서 반(半)식민지의 삶을 살아왔지만 우리 조상은 太陽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해’라고 썼다. 이 해로부터 파생된 낱말로는 해님, 햇살, 햇빛, 햇볕, 햇무리, 해넘이, 해돋이, 해거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이 생각하건대 자음 ‘ㅎ’과 모음 ‘ㅐ’가 아무 뜻 없이 모인 것이 아니다. 그 낱말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동안 시인은 사물과 언어를 연결할 줄 아는 우리 조상의 삶의 지혜와 탁월한 언어 감각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두 번째 시 「달」을 보자. ‘ㄹ’과 ‘外光派’에 대한 설명은 그야말로 설명문에 가깝지만 그 밑의 각주를 보라.
이 밤도 나는 달빛 받으며 너무 눈이 부셨던 낮의 狂亂을 엷고 결고운 恨의 무늬로 變容시키리라. 사랑의 상처에 어스름 香油를 바르리라. 달 둘레 멀리 퍼지는 보랏빛 憂愁로 나의 詩情을 포근히 덮으리라.
세 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 ‘달’이라는 우리말 낱말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서 시인은 짧은 산문시 한 편을 덧대어 일자일행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세 번째 시 「별」도 마찬가지다. 제목만 홀로 빛나는 듯하지만 별은 둘레에 여백도 있고 광휘도 거느린다. 별은 저 홀로 빛나는 듯하지만 수많은 인간이 수많은 별을 보면서 눈물짓고 한숨짓는다. “이 시 「별」은 동시에 시(문학)이자 그림(미술)이다. 문학과 미술 두 예술의 융합으로 볼 수도 있고 새 예술의 반투명적 장르로 보아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설명을 하다가 성찬경 시인은 시를 쓴다.
그렇지. 그렇지. 별아. 별아. 서북쪽 어두운 밤하늘에 외롭게, 그러나 맑고 밝은 빛으로 반짝이는 별아. 그만이나 하니까 네가 내 별이자 詩 별이지. 뭇 사람의 理想 별이지. 허무 별이지. 기쁨 별이지. 슬픔 별이지. 별아. 별아. 서북쪽 어두운 밤하늘에 외롭게…… 이 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원처럼 영원한 순환과 반짝임이 있을 뿐이다. 별아, 별아……
별을 노래한 수많은 시인의 작품 가운데 그중 빛나는 시를 3편만 꼽으라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조지훈의 「승무」와 성찬경의 「별」을 꼽고 싶다. 각주의 마지막 부분을 시로 쓴 이 눈부신 전환 앞에서 나는 말문을 잃어버린다. 제일 앞에 놓인 3편의 시를 일단 감상해보았으니 일자시집을 펴낸 시인의 시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론의 골자는 앞서 말한 밀핵시론이다. 밀핵시란 무엇인가. 시가 담을 수 있는 의미의 밀도를 최대한도로 높여서 써보자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밀도란 단위 체적에 대한 질량의 크기를 말한다. 바위처럼 크고 무겁다고 밀도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피는 작은데 무거워야 밀도가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보기가 아주 어려워진 시가 짧은 시이다. 운문이라 일컬어졌던 시는 간결미와 압축미를 생명으로 했는데 이제는 시가 신문의 사설보다 길고 논문보다 딱딱하고 철학서보다 어렵다. 문예지나 시집에서 한 페이지 넘어가는 시가 자주 보이고, 수다의 시, 달변의 시, 횡설수설의 시가 대세를 이룬 느낌도 든다. 말의 홍수에 시가 떠밀려가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시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의 규모, 크기, 길이에 비해서 많은 의미를 담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미의 다이아몬드’ ‘의미의 라듐’ 같은 시가 ‘밀핵시’이며 나는 평생 이런 시를 추구해왔다.(2005.5)
다이아몬드는 한자로는 金剛石이라고 하는데, 보석 중의 보석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자연산 물질 중에서 경도가 가장 높다. 라듐은 자연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방사능을 띤 가장 무거운 원소라고 한다. 지극히 작지만 그 작은 물질 안에 엄청난 의미가 내장된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고안해낸 시의 형태가 바로 일자일행시다. 밀핵시의 종착지점 바로 앞에서 나온 일자일행시는 그냥 한 순간의 아이디어로 ‘발명한 시’가 아니다. 일자일행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2005년에 나온 시집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 버스』를 읽어보아야 한다. 제4부에는 1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일자시에 이르는 긴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하는, 다시 말해 일자시까지의 진화 내용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를 한 편씩 실어놓았다. 이 가운데 「一字一行詩」를 보자.
가.
와.
봐.
해.
둬.
(……)
짜.
껴.
퍼.
대.
떠.
시작노트
要素詩
내가 더러 시도해 보는 <요소시要素詩>의 일종으로서, 일자일행의 형태다. 행이 모두 순우리말의 동사이며, 단화된 명령형이다. ‘가’는 ‘가라’의 뜻이고 ‘와’는 ‘오라’의 뜻이다. 이리하여 각 행의 뜻을 한ₐ가’표시해 보면, 往, 來, 見, 行, 藏, 掘, 書, 寢, 展, 夢, 射, 縛, 擊, 立, 置, 消, 照, 剝, 與, 除, 始, 取, 測, 織, 揷, 汲, 接, 去, 이렇게 될 것이다. 군더더기를 뺀 순우리말이 갖는 간결한 아름다움과 힘을 음미해 주었으면 한다.
―「一字一行詩」 부분
이 시는 28행의 순우리말 동사와 요소시에 대한 시작노트가 합쳐져 이뤄진 것이다. 우리 조상은 ‘往’이라는 한자가 있었지만 ‘가’, ‘간다’, ‘가지’, ‘가세’, ‘가봐’, ‘가야지’ ‘갈 걸’ 등으로 써왔다. ‘縛’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쓰지 않고 ‘매’라고 썼다. 양반들이야 ‘擊’이라는 17획으로 된 글자를 썼지만 민중은 ‘ㅊ’과 ‘ㅕ’ 단 두 음절을 합쳐 ‘쳐’라고 말했다. 글자의 발음과 뜻도 비슷하다. ‘격’이라는 글자의 발음과 ‘쳐’라는 글자의 발음을 놓고 볼 때 우리네 정서상 ‘쳐’가 훨씬 원래의 뜻에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寢’보다는 ‘자’가, ‘立’보다는 ‘서’가 우리의 삶 속에, 말 속에,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글자였다. 시인은 「활짝」이란 시에서 31개의 부사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데, 부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순우리말 부사는 가차없고 정력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익살스럽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시인은 마침내 「똥」이라는 시를 얻는다. 1999년 『시안』 겨울호에 발표된 이 시는 가히 한국 시사에 일어난 혁명이었다. 제목이 있고 본문이 없는 시, 각주가 본문을 대신한 시.
((……) 굵고 긴 똥자루 하나가 (사윗감으로 최고다) 뚝 떨어진다. 똥은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본문은 어디로 가고 없고 각주만 붙어 있는 이 희한한 시를 읽고 처음에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정신이 멍한 상태가 되었다. 조금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니 “굵고 긴 똥자루”처럼 생긴 똥은 잘생긴 사윗감 같다는 뜻, 하하, 포복절도할 내용이 아닌가. 2000년 1월호 『현대문학』 시 격월평 난에 나는 아래와 같이 평을 썼다. 처음 읽었을 때의 나처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독자들에게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 똥을 눈다. 그 똥은 염소 똥처럼 동글동글하지도 않고 돼지 똥처럼 질퍽하지도 않다. 굵고 길어 흡사 자루처럼 생긴 똥이 땅에 뚝 떨어져서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딴딴하지도 묽지도 않은 똥 한 덩어리가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시인은 이렇게 맥이 통한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는 괄호 속에 나오는 또 하나의 괄호 속 글자, 바로 사윗감으로 최고라는 일종의 경탄이다. 똥의 모양이 아주 그럴듯해 사윗감으로 쳐도 최고라는 뜻으로 쓴 것이겠지만 뭐든지 잘 먹고 잘 소화하여 잘 배설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바람이 이 괄호 속 괄호에는 또한 들어 있다. 똥을 제목으로 쓰고서 본문 제시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똥을 공(空)으로 보거나 우주로 보거나 생명체 최후(혹은 사후)의 모습으로 보거나 그것은 독자의 자유일 것이다.
된똥도 물똥도 아닌, 굵고 길게 잘생긴 똥에 대한 은근한 ‘기림’이 유쾌하였다. 변비와 설사의 시대, 똥만 잘 싸도 살맛나는 세상이 아닐 것인가. 시집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 버스』의 제일 마지막 앞의 시가 「똥」이고 마지막 시는 「흙」인데 「흙」은 각주마저 사라지고 없다. 시인이 추구하는 마지막 단계의 밀핵시 혹은 절대시가 바로 한 글자가 시의 제목이자 본문인 시, 각주조차도 없앤 시의 형태이다. 지금까지 시인이 써온 갖가지 시 가운데서도 가장 밀도가 높은, ‘초강력 밀도’의 시가 바로 일자시다. 이번에 내는 시집에는 이런 일자시가 25편이다. 한 글자 제목에 본문도 각주도 없는 완전무결한 일자시는 그럼 아무것도 없는 ‘空’의 시인가.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꿀」은 정말 꿀이고 「칸」은 정말 칸이다. 「신」은 신어야 제가 태어난 바의 소임을 다할 수 있고, 「징」은 지잉― 하고 울리지 않는가. 「얼」은 얼이며 「알」은 알인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할까. 바로 이런 생각이 낳은 시집 후반부의 25편 시 앞에서 나는 넋을 놓는다.
생각의 절대치를 지향하는 이런 시가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님을 앞에서 말하였다. 최초의 일자일행시 「해」의 발표를 시작 시점으로 잡더라도 장장 17년이다. 그저 신기한 것을 노려서 한 것이라면,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한 것이라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지난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일자일행시 쓰기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징과 끌만으로 바위산을 뚫어 굴을 만드는 석공의 자세로 일자일행시 쓰기 작업에 몰두해왔다. 참으로 외롭고 괴로운 작업이었으리라.
시인은 언젠가 강연장에서 시는 음악성과 회화성과 의미를 다 살리는 ‘멀티 플레잉’ 전술로 쓰되 무엇보다 의미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작지만 ‘모끈한’(‘무거운’의 충청도 사투리) 시를 써야 한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의 작업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다른 시를 한 편 보자. 「활」의 각주가 또 한 편의 시다.
활. 만삭이 된 여인의 배처럼 긴장한 시위. 퓽 소리와 함께 운명을 겨눈 화살을 떠난다. 팽팽한 현을 비비는 것도 활이다. 천상의 소리가 붙들려 영혼의 심부에 꽂히면 영혼은 흐느낀다. 공알․음핵․클리토리스. 이 작은 뇌관도 활의 원리다. 기쁨이 너무 고여 더는 견딜 수 없어 터지면 절정의 오뇌가 오로라처럼 너훌거리며 하늘을 간다. 활.
한자는 표의문자라서 弓이라고 쓰지만 우리는 ‘활’이라고 발음하면서 그 발음 속에 갖가지 의미를 담는다. 그런데 시인은 글자 풀이에 멈추지 않고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다. “천상의 소리가 붙들려 영혼의 심부에 꽂히면 영혼은 흐느낀다”는 것인데, 시인은 여성 성기의 음핵(영어로는 ‘클리트리스’이고 순우리말로는 ‘공알’이다)조차도 활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기쁨이 너무 고여 더는 견딜 수 없어 터지면 절정의 오뇌가 오로라처럼 너훌거리며 하늘을 간다”고 하면서, 바로 그것을 나타낸 낱말이 ‘활’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의 각주가 각주의 역할을 넘어서 시 바로 그 자체가 된다. 일자일행시 가운데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낱말이 있어 눈길을 끈다. 「몬」인데 각주를 보자.
‘몬’ 한 글자가 시의 제목이자 내용이다. 글자 하나가 시의 전부다. 따라서 ‘몬’ 한 글자에서 시를 전부 읽어야 한다. 이러한 一字詩를 나는 ‘절대시’라 부르고 있다. ‘몬’은 ‘物’의 뜻을 갖는 古語다. ‘物’은 현대 일본어에서 ‘모노’인데. ‘몬’과 ‘모노’의 語源이 같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몬’이 우리말에서 사라진 것도 애석한 일 중의 하나다. 불쌍한 몬. 몬! 역시 詩다.
몬! 마르셀 뒤샹!
고어 ‘몬’은 ‘物’이란 뜻을 가지므로 일본어 ‘모노’와 어원이 같을 것이라고 짐작해본 뒤에 시인은 ‘몬’이 우리말에서 사라진 것을 애석해한다. “몬! 역시 詩다.”라고 한 뒤에 “몬! 마르셀 뒤샹!”이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일까? 뒤샹(Marcel Duchamp)은 1917년에 남성용 소변기를 ‘샘 Foundation’이란 제목으로 뉴욕 독립미술가전에 출품한 괴짜였다. 그의 작품은 논란에 휩싸였고 평단의 집중포화를 받았지만 한참 뒤에 이 소변기는, 아니 「샘」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작자 자신도 현대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로 인정을 받았다. 뒤샹이 수십 년 동안 인정을 못 받았던 것처럼 성찬경 시인이 공력을 기울여 쓰고 있는 각주가 붙은 일자일행시 및 각주조차 사라져버린 일자시가 시인의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쌍한 몬! 불쌍한 뒤샹! 불쌍한 일자시!’ 하고 시인은 외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낱말에 쓰인 받침이 지닌 생명력을 다룬 시도 있다.
우리말 중에서 빛을 나타내는 말에는 영락없이 ‘ㄹ’이 들어 있다. ‘불’이 그렇고 ‘별’이 그렇다. ‘밝다’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뿐만 아니라 서양말의 경우도 그렇다. ‘light’가 그렇고 ‘illumination’도 그렇다. 필경 깊은 원리가 숨어 있어서 그렇데 되는 것이며 결코 우연이 아니니라.
―「달」 부분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빛보다 더 오묘하고 신비한 것은 없다. 詩의 時空이 빛을 받아 온통 흴 뿐. 밝은 시다. ‘빛’의 받침이 ‘ㅊ’이니 과연 찰떡처럼 차진 생명력이다. 빛과 생명이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빛」 부분
받침에 어떤 것이 붙느냐에 따라 그 글자의 힘과 뜻, 역할과 품격이 달라진다고 시인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는 순우리말 낱말의 특징에 대한 연구이면서 그 낱말의 유래와 의미에 대한 연구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가 낱말이기에 시인은 그림으로 치면 물감 그 자체의 색깔부터 연구하고자 이런 시를 써나간 것이 아닐까.
성찬경의 일자시는 어찌 보면 시에 대한 시이면서 시 자체를 반성하는 시, 다시 말해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의 몇몇 시인은 문법을 무시하고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을 우리말의 영토를 넓히는 행위라면서 사랑삼아 말하고 있다. 20~30대 일부 시인의 시를 보면 기발한 표현도 보이지만 개인적인 엄살에 지나지 않는 넋두리 같은 시인데 지금 우리 시단에서는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서 유행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것들이 너무 안타까워 일자시를 썼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많은 시인이 아닌 게 아니라 운문이 아닌 산문을 무미건조하게, 혹은 비논리적으로 써놓고서 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낱말의 뜻을 모르고 쓴 시어가 넘쳐나고 있고 문장이 안 되는 글이 시의 문맥 안에서 난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1920~30년대의 한용운과 정지용과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언어의 연금술사인 동시에 사상과 철학을 넘어선 밀핵시의 선구자들이었다. 문학적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이 안 되는 문장을 만들어 시를 죽이고 있는 시인들을 향해 성찬경 시인은 일자시를 통해 준열히 꾸짖는다. 아니, 낱말을 오용하고 말의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낱말도 죽이고 시도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는 시인들을 향해 시의 수류탄을 던진다. 쾅! 정신들 차려라.
시인의 제9시집이 되는 『해』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신호탄이 될 것임을 알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금을 하나 긋는다. 그 금을 경계로 해서 구별과 관계가 동시에 생긴다. 금에 목숨을 싣는 작업을 하는 이가 예술가다.”(「금」)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런 예술가로 시인이 예로 든 이가 추사와 피카소다. 나도 성찬경 시인처럼 금을 하나 긋고, 금에 목숨을 실어야 하거늘!
성찬경 시인의 연세가 나는 궁금하지 않다. 한창 나이이면서도 늙수그레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은 이 ‘겉늙음’의 시대에 성찬경 시인은 언어의 실험실을 밝혀놓고 밤새워 시를 쓰고 있다. 노익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듯이 도사연한 시를 쓰면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으려는 대가의 자세를 일찌감치 버리고 日新又日新, 우리말의 값어치를 헤아리면서 언어의 광석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인의 작업이 이 시집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왜? 그는 등단 이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새로운 영토로 나아간 현재진행형의 시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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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가을 바다 ]
달빛 내린
해변에서
당신 업고
한 십리 쯤
걸어 보고
푸른 바다
가고 싶다.
(문장으로 치면 불과 한 문장에 지나지 않고, 각 행이 4 글자로만 되어 있습니다.)
2. [ 영혼 ]
우주에 있다.
3. [ 세월 ]
겨울 산
오르면
여름 바다
그립다.
4. [ 소라 ]
너는
사랑을
담은
그릇이었구나.
5. [ 성(性) ]
성(性) 은 성(城)이다.
(※ 타고난 인간의 성<성격, 성정, 성질, 품성, 성정, 성깔>은 흙으로 성을 쌓는 것과 같지요.)
6. [
이별 ]
너는
눈물이었구나.
(눈물이라는 낱말 대신에 슬픔이라고 바꾸는 것을 어떨른지.....)
7. [ 서시 ]
사랑은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8. [ 인생 ]
내 삶
여름 장마 같구나.
(이번 여름 장마가 우리 모두의 삶 같지 않은가요 ~?!)
9. [ 고향 ]
어머니 얼굴.
(어머니 얼굴이 급작스레 떠오르고, 그 품이 더욱 더 그리워져서 더 깊이 파고 들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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