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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마음속 "여래"를 찾기
2016년 03월 12일 03시 36분  조회:3902  추천:0  작성자: 죽림
사막의 여정-내 안의 ‘여래’를 찾아

-이시환의 시집『상선암 가는 길』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그리스도교 동방교회에서 사막의 교부라 불리우는 이들은 하느님을 찾아서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관계들을 끊고 스스로 고독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사막의 동굴이나 보잘 것 없는 바위틈 같은 곳에 거처할 곳을 정하고 거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신을 찾았다. 왜 이들이 스스로 황량한 사막과 고독을 선택한 것일까? 이들은 대부분 그 시대에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상가에서 태어나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이 줄 수 있는 부와 명예가 아니라 가난하고 고독하며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오로지 기도에 열중하여 신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신(神)에게 의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시무시한 사막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인간이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인 사막에서 그들은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을 만났던 것이다. 사막을 찾은 많은 이들 중 그곳을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간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 사막의 교부라 일컬어지는 성인들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사막에서 신을 만났기에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크게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고대 수도자들의 수행이 오늘날 서방의 모나키즘(Monasticism:수도원 제도)으로 정착하였고, 많은 이들이 불가(佛家)에서처럼 일종의 출가를 하여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을 피하고 침묵에의 사랑, 특히 겸손이라는 그들 소명의 근본적인 요구를 지니고 그들의 어떤 덕행 실천이 누군가에게 회자되면 그 실천을 더 이상 덕행으로 보지 않고 죄악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이 의미는 그들이 이렇게도 보이는 외적 행위를 숨기려고 애쓴 것과 같이 그들의 영적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하며 비밀을 지키고 봉인된 채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침묵과 겸손의 자세이다.

사막에서 일어나는 만남들 가운데 특별히 중요하고 은혜로운 만남은 수도생활을 원하는 자가 그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한 답변인 평생의 방향전환에 결정적일 수 있는 답변을 간청하면서 위대한 수도자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지원자들은 자기의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어느 위대한 수도자에게 본질적인 질문인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였다. 이 한 마디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갈망과 구원에 대한 것이다. ‘제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되겠습니까?’라는 의미는 모든 것, 즉 가정, 쾌락, 부를 떠나버린 이에게 영적 투쟁의 어려움과 고뇌에 빠진 채 홀로 사막에 있는 구령자(救靈者)의 다급한 구조요청인 셈이다. 하우스 헬 교부는 ‘우리는 구원과 완덕을 너무나 분리시켜 생각한다. 믿음을 가진 선조들은 구원(soteria)의 개념 안에 완성의 개념을 포함시켰으니, 그것은 총체성, 완전한 건강, 결점 혹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테리아(soteria)‘라는 말 자체의 의미에 의거한 것’이라 하여 구원은 곧 해방을 뜻하였다. 이 구원은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수행자이든 아니든 세상에 사는 모든 이에게 삶의 목표일 것이다. 구령자의 ‘내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나 신탁을 듣기 위해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또 조시마 장로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인 알료샤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은 영적 육적 문제에서 부자유스러웠고, 그러기에 자기 구원을 위해 그를 만났던 것이다. 교부들이나 원로들은 바로 하느님이 임재해 계시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찾아가서 ‘한 말씀’ 즉 성경에 의거한 복음적 구원의 방법을 구했던 것이다. 성 바실리오 교부는 ‘구원은 영원한 지복과 아울러, 현세에서는 영혼의 건강에서 오는 평화의 낙원이라’ 하여 구원이 영원한 지복과 더불어 영혼의 건강에서 오는 평화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내적 고요는 바깥세계와 끊음으로써 침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고독이 가져오는 고요 속에서 명상(瞑想)이나 관상(觀想)을 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온 이들에게 구령은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막과 같은 곳이다. 조종사와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동화 속의 사막은 두 주인공에게 고통의 시간이고, 어린 왕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조종사가 비행기 수리를 일시적으로 포기할 때 두 사람 간의 교감과 소통이 일어난다. 그 둘이 발견한 사막의 오아시스는 새로운 삶에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수 역할을 한다. 그들은 죽음과 같은 사막에서 생명을 피워 내거나 자신이 지닌 한계와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거듭나거나 해방된다. 이때의 사막도 역시 사막 교부들이 처한 사막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은 현실세상의 부조리함과 적대감에서 탈출하거나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쓰여졌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세상사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명상과 침잠을 거듭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밝히듯이 이 시집은 명상과 침잠의 시정(詩情)으로 쓰여졌다. 그가 ‘내 한 몸에 생태가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를 키워오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와 그를 초월하려는 듯한 관조(觀照)와 직관(直觀)에서 나오는 선시(禪詩)에 가까운 시들을 써왔던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시집이 부조리하고 욕망, 무지,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로부터 초월하여 관조와 직관을 통해 마음을 침잠 시키고 내적 고요를 이루어 선시에 가깝지만 서정성이 풍부한 시정을 일구어 낸 것이다. 현실세상은 분명 악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부조리와 모순, 욕망, 무지로 가득 차 인간을 병들게 한다.

이 시집은 총 80여 편의 시가 실려 있고 제1부에서 제5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에서 제4부까지는 국내의 산사(山寺)와 산(山)을 여행하며 쓴 시들이고 제5부는 남아메리카 대륙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쓴 시들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을 등지고 여행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서는 여행이 중요한 테마이다. 명상과 침잠을 위하여 떠나는 시인에게 여행은 내적 고요를 찾기 위한 것이기에 여기에서 여행은 전술한 소테리아에 이르고자 하는 한 방법[불가(佛家)에서는 행각(行脚)이라 함]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집의 첫 자리에는 「상선암 가는 길」을 놓았는데 함께 읽어보자.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

이미 말(言)을 버린,

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2004. 7. 26. 01:46 「상선암 가는 길」 전문

 

언어를 절제한 이 시에는 1행에서 말하듯 산 밑의 인간세상은 시끄럽다고 하여 결코 인간에게 내적 고요의 평화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이 길에서는 말을 버렸다고 하여 침묵 속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스승은 말없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시어는 인간세상의 시끄러움, 단독자, 침묵, 바위, 스승 등이다. 상선암은 수행자의 거처이다. 이 거처는 인간세상을 버리고 온 이들의 작은 거처이다. 옛날의 은둔자나 은수자들처럼 세상을 등지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쾌락, 부와 명예를 버리고 구령을 택해 온 이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들이 수행하는 곳으로 가는 길에서 시인은 침묵 속에 홀로 크고 작은 바위들을 스승 삼아 가는 것이다. 작은 바위가 시인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길에서 침묵을 가르쳐준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물의 대상을 시인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스승으로 부른다. 시인은 인간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자연물인 크고 작은 바위가 지니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고 위대한 침묵의 비밀을 숨겨온 말없는 바위가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시환 시의 특징 중 하나인 자연물의 대상을 인격화하여 친밀한 교감과 소통을 하는 모습은 이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는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부기해 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특별한 의도라 여겨진다. 여기에는 여행을 하고 와서 시를 쓴 시간이거나 여행 중에 그 때 그때 시를 쓰거나 시를 쓰기 위해 창작 메모를 하거나 시의 모티프나 장소가 되는 여행지에 이른 시간 등을 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쪽이냐에 따라 시의 해석이 또한 달라질 수 있겠다. 만약, 이 시가 2004년 7월 26일 01시 46분에 상선암 가는 길에 쓰여진 시라면 현장성이 아주 강하고, 시인은 캄캄한 한여름밤에 홀로 야간산행을 하다 잠시 작은 바위 위에 자신의 몸을 부려놓고 명상에 잠겨 이 시를 쓰거나 구상하였다고 보아도 좋고, 아니면 상선암 간 때와 시간을 메모해 두고 여행을 마친 후 돌아와서 그 때를 기억하며 시를 썼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이 시를 이해하는 자가 그냥 지나쳐버려서는 안 되는 부기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여행을 하면서든 하고 난 후에 썼건 간에 장소성과 시간성을 시인이 중요시하고 있다는 데에는 독자도 함께 공감해야 할 부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상선암 가는 길에서 보여준 자연물인 바위와 소통하는 자세는 작품 「벚꽃 지는 날」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04. 22. 00:05 「벚꽃 지는 날」전문

 

이 시에서는 벚꽃이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지는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대개의 일본의 고전시가에서 벚꽃을 노래할 때는 삶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법열의 기쁨과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무리 지어 하얗게 지는 흰 벚꽃은 마치 간밤에 그들끼리 깊은 정을 나눈 것처럼 함께 사뿐히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고 군무를 춘다. 이 군무는 희다 못해 반짝이는 큰 물결이 된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그것을 눈이 부셔 볼 수 없고 현기증을 느끼며 지는 벚꽃이 이루는 군무에 넋이 나간다. 그 유혹의 불길에 만지고픈 충동이 인다. 그러다가 벚꽃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어지럽게 비상한다. 시인의 마음은 그 가운데에서 소용돌이치는 법열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벚꽃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에 ‘간밤에 마음과 마음에 통했는가?’ 하고 자신과 군무를 추다 비상하는 벚꽃을 두고 자문을 해보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도 이 벚꽃들처럼 한없이 마음이 가벼워져서 날아오르고픈 것이다. 법열의 불길이 일게 된 것은 벚꽃의 군무를 목도하여 일으킨 것으로 시인은 이 자연물에 마음을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물을 인격화하여 대화를 나누고 끝없이 바라보다 문득 법열의 환희를 느낌으로써 시인 자신의 마음도 묶여 있는 것으로부터 가벼워지고 해방된다. 「고강 댁」 1, 2, 3 연작시는 처자를 버리고 암자 아닌 암자에서 홀로 고독과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은둔자의 거처에 찾아온 봄과 철따라 자연물의 변화를 통해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통해 시인은 생명과 말씀을 읽는다.

 

잠시 잠깐 피었다지는 들꽃 같은,

바람이야 불거나 말거나

사람이야 있거나 없거나

염주알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아서

되려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흘러내리며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가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간간이 바람을 일으키며 꽃을 피우며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이 되어 흘러내리네.

큰 산 깊은 계곡의 생명 되어 흘러내리네.

 

-「화양계곡에서」전문

 

이 시는 화양계곡의 물소리가 시적 모티프가 되고 있다. 끊임없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그저 흐르기만 한다. 그래서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 나간다. 흐르는 물은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바람이 불거나 불지 않거나 상관없이 도도하게 흐른다. 때로는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하여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바람도 일으키고 꽃도 피운다. 큰 산 깊은 계곡의 물이 마침내 살아있는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흐른다. ‘염주알 구르듯 흘러내리는’의 비유는 참으로 종교심을 일으키는 비유(比喩)이고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보리심, 거룩한 영의 임재를 느끼게 한다. 아직까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로 이렇게 발심을 일으키게 하는 시를 나는 읽은 적이 없다.

물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든 흘러갈 수 있는 이유이다. 물은 좁은 곳이든 큰 돌이나 바위가 버티고 있는 곳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비켜 흘러간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것이 없다. 즉 차별이 없고 그저 평등의 경지만이 있다. 완전히 비우고 있기에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다. 그런 물은 큰 뜻을 이루는 말씀과 생명이 된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물[水]을 인격화하고 있다. 물살의 손과 손의 숨, 한 몸, 큰 뜻을 이룬다는 표현에서 더 두드러지고 있다. 물의 이 친화성과 자유로움, 개방적이며 해방됨은 물소리를 듣는 이로 하여금 종교심을 일으키거나 묶여있는 이들은 소테리아를 느낀다. 시인이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라고 권고하는 까닭은 거기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고 독자와 같이 나누고 싶은 것이다. 좋은 것을 혼자 독차지 하지 않고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고 같이 나눈다는 것은 소통과 교감이다. 그냥 듣고 말거나 지나치고 말 깊은 산 속의 계곡 물소리가 시인의 촉수나 인식에 이르면 이렇게 변화된다. 그래서 시인은 우주만물에 깃든 거룩한 영을 감득하여 그것을 나누는 자이다. 시인에게 감득된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시「有無同體」의 “집착이요, 욕심이요, 욕망의 덩어리”인 나의 역사를 뒤바꾸는 거룩한 힘인 것이다. 이러한 힘의 작용은 시인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어난다. 이 관계 맺기는 주체의 자기 지우기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거나 대상과의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대상이 건네 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통과 교감은 자기를 비워둘 때 가능한 일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리고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치마를 뒤집어쓰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며 춤을 추는

저 붉디붉은, 작은 복사 꽃잎들처럼

날더러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無心, 無心川으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芙蓉抄」부분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덕진공원에 핀 연꽃을 바라보다가 연꽃의 이끌림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린 듯하다. 연꽃이 시인에게 말한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뛰어내리라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복숭아꽃처럼 그렇게 뛰어내리라고 한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무심, 무심천으로”라고 하여 무심의 경지로 자기를 던지라고 연꽃이 주문한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의 번뇌와 업장이 소멸된 적멸보궁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번뇌와 업장을 소멸시키는 길은 나를 지우고 비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욕망과 욕심 덩어리인 주체를 지우기 위해서는 주체의 산화(散華) 즉 복사꽃이 천 길 벼랑으로 낙화하듯이 자기를 던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의 꽃들은 때가 되면 피었다가 때가 되면 말없이 낙화한다. 인간만이 이 떨어짐, 자기 지우기를 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의 역사는 쉽게 자기포기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려고 한다면 번뇌와 업장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길은 무심의 경지 자기 비우기에 이르는 길이 된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영롱한 꽃을 피워내듯 번뇌와 업장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바꾸어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이치는 마음을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하여 적멸보궁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청정의 상태이고, 위없는 보리심이며, 여여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은 곧 구령의 길에 이른 마음이고, 해방된 마음의 경지이다. 그 무엇에도 계박(繫縛)되어 있지 않는 마음이다.

사물과 소통과 교감을 이루면서 얻어지는 것은 말씀과 생명수이다. 작품 「물」에서는 마실 한 모금의 물에서 말씀과 생명수를 건져 올린다.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야 하네.

넘치는 물이라 해서 모두가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지 않으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네.

흐르던 물조차 마르고 마르면

옥토가 사막이 되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하네.

한 방울의 물이 곧 너와 나의

생명이란 꽃을 피우는 불길이니 말일세.

 

깨끗한 한 방울의 물속에

해맑은 물 한 방울 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으로 정녕 단단한 말씀이네.

 

-「물」전문

 

이 시에서는 ‘넘치는 물’과 ‘마실 한 모금의 물’이 대조를 이룬다. 넘치는 물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지만 마실 단 한 모금의 물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고 너와 나의 생명의 꽃을 피우는 불길이 된다. 그러니 넘치는 물은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한 모금의 마실 물이란 뜻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고 중요시하여 이것도 쫓고 저것도 쫓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 한 방울 속에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곧 생명수인 말씀이라 한다. 말씀은 곧 참다운 진리이다. 동화 「어린 왕자」에는 정원에 피어있는 수천 송이 어여쁜 장미꽃과 왕자가 두고 온 자기 별의 다소 까다로운 한 송이 장미꽃이 나온다. 어린 왕자에게 수천 송이 장미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별에 두고 온, 자기를 떠나게 만든 바로 그 한 송이 장미꽃이 의미가 있을 뿐이고 거기에는 어린 왕자와 장미꽃이 관계가 맺어져 있기 때문이고, 수천 송이 장미꽃은 어린 왕자와 아무런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은 점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후기산업사회의 물신주의가 새로운 디자인과 새로운 트렌드의 상품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지만 그것이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고 새로운 것만을 욕망하게 하는 상품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한 상품에는 소중한 관계 맺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효기간이 있을 뿐이다. 한 모금의 마실 물 앞에서는 감사하고 기도의 마음이 될 수밖에 없음은 그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용정(龍井)차를 마시며」에서 소통과 교감이 부드러움으로 용해된다.

 

너와 가까이 마주 앉노라면

창밖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도

세상 시끄러운 줄 모르고,

 

너와 단둘이 마주 앉노라면

높은 파도가 내 안에서 일어도

물에 젖은 내가 있는지조차 모르네.

 

부드러움의 그 깊이를 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녹여주는 네가 있을 뿐….

 

-2004. 01. 18. 14:55 「용정(龍井)차를 마시며」전문

 

이 시는 날짜가 부기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추운 겨울날 오후에 시인은 용정에서 생산된 차를 마신다. 차와 만나는 시간 동안은 창밖에 함박눈이 내려도 세상 시끄러운 줄 모른다. 그만큼 고요하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높은 파도로 물에 젖어 가여워진 자신의 모습마저도 잊는다. 차를 마시는 시간 동안 이렇게 안과 밖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잊는다. 그것을 계속 기억하면 마음이 비워진 상태가 아니다. 그것을 잊을 때 마음이 비워진다. 그렇게 잊을 수 있는 이유는 차의 부드러운 깊이를 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말없이 녹여주는 차가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차를 ‘너’로 부르고 있다. 차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여기에서 차는 나를 따뜻이 녹여주는 깊고 친밀한 연인이 되어 있고 이렇게 둘이서 마주하는 시간에는 안과 밖의 모든 번뇌를 잊게 되고 둘만의 비밀스럽고 고요한 경지를 나누는 것이다. 겨울 오후 3시경의 나른함 속에서 차와 시적 화자 나는 아주 감미롭게 만나는 순간이다. 입 속의 혀끝에서 감지되는 차의 깊고 풍부하고 부드러운 미각의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시여서 촉각과 미각, 차를 바라보는 시각의 감각이 융해되고 있다. 작품 「바람 속에 누워」에는 바람과 소통과 교감을 하는데 여기에는 이시환의 제4시집 『추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눕는다’는 행위와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바람 속으로 알몸을 눕혀 보게나.

네 알몸의 능선을 핥고 지나가는

그 놈의 혀끝이 감지되면서

무거운 몸뚱이조차 티끌처럼 가벼워지나니.

 

영영 바람 속으로 누워 버려

그 놈의 정령과 입 맞추어 보게나.

누추한 몸뚱이조차 바람이 되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흘러가나니.

 

붙잡아 두려하면 사라져 버리고

풀어 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다

네품에서 비롯되고

네품에서 끝이 나는 것을.

 

-「바람 속에 누워」전문

 

시적 화자는 바람 속에 알몸으로 누워서 바람을 감지하라고 권한다. 알몸으로 눕는다는 것은 가장 정직하면서도 가장 낮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추신』에서 죽은 자는 관 속에 누워 있었고, 그것처럼 누워보라고 시적 화자는 자주 말한다. 눕는 행위는 바닥에다 몸을 붙이는 것으로 땅 속과 가까우며 직립보행의 반대 행위이다. 누워서 바라보면 우주만물들이 다 커 보이고 가장 낮은 자가 되는 것이다. 또 눕는다는 행위는 남녀가 교접을 할 때의 행동이거나 아프거나 죽었을 때 인간이 취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시적화자가 알몸으로 바람에 쏘이길 원하고 바람의 혀끝이 몸을 핥고 지나면 무거운 몸뚱이도 바람처럼 가벼워진다고 한다. 바람은 원래 가볍고 지나가는 것이기에 무거운 인간의 육신도 바람처럼 가볍고 지나가길 바란다. 인간은 뭔가 부정적인 일들로 인해 정신이 힘들면 육신이 무거워지고 아파서 드러눕는다. 바람의 애무를 받으면 가벼워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과 입을 맞추고 누추한 몸뚱이가 바람이 되어 백년이고 천년이고 흘러간다고 한다. 붙잡으면 사라지고 풀어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은 흡사 연인들 간의 밀고 당기기를 연상케 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다 바람의 품에서 비롯되고 바람의 품에서 끝이 난다고 한다. 이 시구는 바람은 곧 생멸의 동인(動因)이라는 의미이며, 모든 힘의 근원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양 어깨 위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몸뚱이조차 벗어 놓아라.

 

그리하여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가벼워진

그런 너마저 놓아 버려라.

 

그리하여 모든 것과의 緣이 끊어져

공간도 없고 시간도 끊긴

 

세계의 소용돌이가 되어라.

아니,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라.

 

-2003. 9. 20. 00:49 「나의 進化」전문

 

이시환의 시세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시이다. 그의 시가 태어나는 토대는 불교적 영성에서이다. 이 시에서는 자신마저도 놓아버려서 모든 것과 연이 끊어지고 시간도 공간도 끊겨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 해탈의 경지를 구가하는 시이다. 이시환에게 있어 구령(救靈)이란 바로 해탈(解脫)이다. 삶에서 생기는 짐도, 육신도, 자아도 모든 것과의 인연도 다 끊어져 존재와 비존재에서 영원히 벗어나 ‘무상도’에 이르는 것이다. 하루의 시작인 새벽 한 시의 시간대에서 시인은 있고 없음을 영원히 벗어나길 바란다. 육신은 ‘한 덩어리 진흙’이거나 ‘한 줌의 먼지’(「화엄사 계곡에 머물며 2」)에 지나지 않음은 사람이 흙에서 피조 되었기 때문이고, 그 숨을 거두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나의 進化」는 바로 이런 인식 아래에서 자신의 영적 단계가 거쳐야 할 과정을 잘 보여주는 시이며, 이런 시가 창작될 수 있는 바탕에는 시인의 마음이 구도(求道)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구도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마음이 비워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바닥에 깔린 바위 모래 나뭇잎 조각들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닥에 고인 하늘 햇살 바람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

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

 

빈 그릇 같은 이 마음도 저와 같아

머물러 있는 듯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울퉁불퉁 돌들을 넘고 바위틈을 빠져나가며

 

마침내 눈이 부시게

두런두런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生)에 이 몸을 다 풀어 놓을 수 있을까.

 

-2003. 4. 1. 20:32 「화엄사계곡에 머물며 3」전문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 더구나 마음의 선정을 담은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비워둔다. 자기의 마음을 비워놓지 않으면 자연물은 의미 부여되지 않는다. 「화엄사계곡에 머물며 3」은 모두 네 편의 연작시 가운데 한 편으로 시인의 마음 밭[心田]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이다. 이시환의 선정을 담은 시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중핵(中核)으로 하여 이끌어 가고 있다.

시인은 계곡의 물가에 머물며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이 맑아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인다. 바닥에 깔린 바위나 모래, 나뭇잎사귀까지. 그리고 거기에 겹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에 햇살도 바람도 잔잔하게 불고 있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감수성은 마치 어린 아기와 같다. 거기에는 어떤 경계나 의심이 없다. 다만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하고 감탄한다. 시인 자신도 이 맑은 물처럼 되고 싶어 한다. 머물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돌들과 바위틈을 빠져 나가서 길을 여는 물굽이 되어 이 생(生)에서 자신의 몸을 다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 빈 그릇의 마음이 된 시인은 ‘이 생에서 자신을 다 던지고 가고픈데 그게 가능할까?’고 고요히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 이유는 자연물을 대할 때는 느끼는 감정과 일이나 그 외의 관계에서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그것과는 달라진다. 시인이 세상의 부조리와 욕망, 무지 이런 것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도 이 이유이다. 세상 것들에 대해 이렇게 맑은 물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아기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거기에는 물론 세상의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세상을 탓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본 자신의 탓도 있음을 시인은 성찰해 낸다. 「여래에게 10」에서,

 

그동안 내가 부린,

불필요한 욕심은 얼마나 되며,

다스리지 못한 화는 얼마나 되는가?

그동안 떨쳐내지 못한

내 어리석음은 또 얼마나 되더냐?

항하(恒河)의 모래밭을 홀로 거니는 내게

 

그가 묻네.

 

-「여래에게 10」전문

 

하고, 여래가 자신에게 묻는다고 한다. 항하의 모래밭을 홀로 걷는 여정은 시인에게 하나의 영적 도전이요, 투쟁의 공간이며, 시간이다. 그런 영적 단련의 시기에 여래는 나에게 묻는다. 아니 내 속의 ‘참 나’가 여래가 되어 가아(假我)인 현실의 나에게 묻는다. 「여래에게」14편의 시들은 자기 성찰의 시이면서도 비워진 마음으로 여래에게 의탁하여 구령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의 여정을 담을 것이다.

일체유심조라 하였던가?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다는 뜻이다. 만해(萬海)는 그의 시「心」에서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라고 했다. 가아가 비심(非心)이라면 이것도 역시 심이다. “심만이 심이 아니라 비심도 심이니 심외(心外)에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고 하였다. 「여래 2」에는 “그 마음으로부터/하늘과 지옥이 나오고,/한없이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는,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고 가벼울 수도 있는,/그 마음 안에 모든 것이 있나니/마음의 임자가 되라 하셨나요? 이 몸의 주인은 이 마음이라 하지만/이 마음의 임자는 마음 가운데 마음인가요?”라고 하여 심이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라는 만해 시의 의미와 접맥시켜 볼 수 있는 시편이다. 의미적으로 이 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여래에게 11-마음」을 읽어보자.

 

일만 가지 선의 주인이요,

일만 가지 악의 주인이라 하셨나요?

 

온갖 ‘생각’이란 파도를 일으키는,

일파만파의 주인인 바다의 욕망인 것을,

 

이 울긋불긋한 세상의

기쁨이야 슬픔이야,

 

한없이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는,

한없이 품을 수도 있고 뱉어낼 수도 있는

너의 꽃이로다 향기로다.

 

-2004. 5. 23. 15:38 「여래에게 11-마음」전문

 

마음은 온갖 욕망을 일으키는 일파만파의 파도이다가 일만 가지 선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없이 얕을 수도 있고 깊을 수도 있다. 품어야 될 것일 수도 있고 뱉어내야 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마음은 하나의 미크로코스모스(Mikrokosmos)이면서 동시에 마이크로 코스모스(Microcosmos)이다. 온갖 것이 하루에도 수없이 떠오를 수 있다. 수없이 욕망한다. 거기에서 하늘도 즉 천국도 지옥도 나오고 선도 악도 나온다. 일체유심조란 말은 그런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만, 마음의 임자가 되기 위해 마음을 어디에다 매어두어야 하는가? (「여래에게 12-시스템」)에서 시인은 “나는 자유로우나/알고 보면 완벽하게 구속되어 있네.//나는 구속되어 있으나/그 안에서 한없이 자유롭네.//네 생명의 빛깔도, 네 죽음의 향기도/나를 구속하고 있는 당신의 꽃이네.”라고 하여 여래에게 의탁하고 있는 나는 자유로우면서도 구속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으나 자유롭다. 그 이유는 ‘나’의 생명도 죽음도 여래인 ‘당신’의 꽃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래란 미래의 부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에게 계시될 구원을 상징한다. 나는 그 여래와 동화되어 자유와 구속의 알뜰한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나가 되어 있다.

 

몸이라는

욕망의 집 안방에 머물며

그곳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려는

마음을 이 세상에 내놓으셨네.

 

무거운 이 몸을 가지고는

거추장스런 이 마음을 가지고는

다다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나고 없어짐(生滅)조차 없는 그곳에 이르기 위해

나룻배 노를 저어 물길을 건너고

언덕을 넘고 산과 산을 넘어

끝도 없이 걸어 들어가셨네.

 

마침내,

당신이 타고온 나룻배도

당신이 걸어온 길과 길도 다 놓아 버리고

당신이 머물고 있는 사실조차 놓아 버려

당신은 비로소 몸을 벗고 마음조차 벗은

초월자 되셨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런 길〔道〕이 되셨네.

그런 법(法)이 되셨네.

 

-2004. 5. 25. 12:43 「여래에게 14-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고」전문

 

여래는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 생멸조차 없는 무상도에 든 여래는 나에게 길이 되고 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득도의 과정에서 무상도에 이르기 위해 나룻배 노를 저어 물길을 건너고 언덕과 산을 넘어 끝없이 걷는 고행의 연속 끝에 타고 온 나룻배도 걸어온 길도 다 놓아버리고 머물고 있는 사실조차 놓고 몸과 마음을 벗을 때 초월자가 된다. 그러기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닌 스스로 여여한 법이 된다. 이 초월자는 여래이며,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에서 시인은 누더기를 걸친 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어디쯤일까. 첨벙첨벙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가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는, 누더기를 걸쳤고, 맨발이었으며,

내 잠시 한눈파는 사이 흰 구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한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그의 몸은 없는 듯 가벼워 보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돌연 빛

으로 휩싸여 버린

그를 더 이상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가 모습

을 감춰 버린 뒤

텅 빈 하늘만 더없이 깊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하루 종일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어디쯤에서인지 하늘을 걸어오는 이가 보였다. 그는 첨벙첨벙 물 위를 걸어오고 있다. 하늘이 마치 바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이시환은 물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인 걸인의 모습이다. 흰 구름 위에 앉은 그는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 눈이 한없이 맑고 푸르며 그의 몸은 없는 듯 가볍게 느껴진다. 시적 화자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자 갑자기 그는 빛에 휩싸이고 나는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다. 다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텅 빈 채 더욱 깊었다. 그런 하늘을 하루 종일 바라보았다는 의미이다. 환시(幻視) 속에서 나타나는 이 누더기를 걸친 이는 여래의 현현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여래와 동화 내지는 일치 되고자 하는 바람이 이 시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하늘을 걸어오는 이로 구현되어 있다. 이는 곧 시인의 마음이 선경(仙境)에 이르렀고 그런 마음의 표현으로 읽어진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쓴다고 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여래의 법신은 어여쁜 한 여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가난한 이의 모습이었다. 시인의 구도 여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세상과, 자기 속의 자기와의 사이에서 파열음을 내는 한 그의 영적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가 그 싸움에서 무너지지 않고 사막의 언덕을 넘어 우리 눈앞에 승리의 백기를 꽂을 것이다. 그 백기는 그가 차려주는 천상의 양식이라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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