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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詩]- 목소리들
2016년 03월 20일 07시 47분  조회:3960  추천:0  작성자: 죽림

목소리들

                                / 이원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이원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12


한 어절로 된 단어사전이다. 한 묶음의 단어들이 던져져 있는데, 일종의 ‘시어사전’이다. 이 시어사전에는 돌, 빛, 벽, 길, 창, 겉, 안, 피, 귀, 등, 색, 나, 너, 눈, 별, 꿈, 씨, 알, 뼈, 손, 입, 문, 몸, 신, 꽃, 물, 칼, 흰 등 모두 28개의 단어가 실려 있다. “흰”이라는 색채 형용사를 제외하고 모두 한 어절로 된 명사들이다. 시인이 편애하는 단어들일 텐데, 그 펼침은 무작위적이다. 시인은 이 시어들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내부를 헤집으며, 이것들이 내는 목소리를, 불명확한 웅얼거림들을 경청한다. 시어마다 한 줄의 상상력을 덧붙이는데, 이것들을 분리하면 그 자체로 일행의 시들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무의식에서 불거진 것들이다. 시어들의 나열에는 엄격한 원칙이나 질서가 없다. 그저 무의식의 임계점에서 파열하듯이 명사들이 쏟아진다. 무의식의 자유연상으로 주르륵 나온 시어들은 서로 연계되지 않고 개별화되는 것이다. 마치 태양을 도는 행성처럼, 지구 위에서 개별자로 사는 사람들처럼. 그래서 시어와 시어 사이의 유기적 느슨함은 불가피하다.

자, 시의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돌은 세상의 모든 단단한 것들을 대표하는 경성(硬性)의 사물이다. 그것은 단단한 광물성 형질로 이루어졌고, 잘 변형이 되지 않는다. 이것의 불변성 때문에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이라는 목소리는 자연스럽다. 빛은 누리에 넘치지만 누리와 차단된 안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누리는 빛으로 환하고, 누리 안쪽은 어둠이 그득하다. 빛이 누리 안쪽으로 들어오려면 틈이 있어야만 한다. 빛은 누리 안쪽 틈을 통해서 새어 나온다. 그래서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라는 연상이 가능하다. 벽은 공간을 단절한다. 벽은 막힌 것이어서 오고 감을 차단한다. 애초 벽은 밀어볼 수 없는 것이지만, 시인의 연상 속에서는 바로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본디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은 뒤 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은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이다. 창은 바닥보다 높은 곳에 있다. 아직 키가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에는 창에 닿을 수 없다. 그런 유년기 경험에서 유추되었기 때문에 창은 “닿지 않을 때까지”라는 목소리를 낸다.

겉은 사물의 거죽이다. 겉은 안에서 부풀어 오른 것들을 감싼다. 겉은 “치밀어 오를 때까지”가 되었을 테다. 안은 사물의 안쪽이다. 안은 사물의 내부이면서 추락의 현장이다. 안은 아득하게 떨어져서 더는 “떨어질 곳이 없을 때” 그 내부를 형성한다. 피는 몸 안에 있는 체액의 한 종류다. 피는 액체고, 혈관을 돈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면 굳는다. 피는 혼란스럽다. 피는 공기 속에서 “뒤엉킨” 채 굳는다. 귀는 머리 일부로 귀속하지 않고 바깥으로 솟아 나온다. 애초에는 내부에 편입되어 있던 것인데, 어느 사이에 바깥으로 “기어 나온 것”이다. 등은 외롭다. 등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부랑하는 부분이다. 등은 “세계가 놓친 것”들 중의 하나다. 색은 만물이 제 안의 형질을 바깥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색을 갖는다. 세상은 온갖 색채들의 향연이다. 색은 보이지 않는 사물의 형질들을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씨”와 “알”이다. 이것은 생명의 시작이고, 만물의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다.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는 이것에서 시작하니, 이것들은 근원이고 본질이다. “씨”는 식물의 것, “알”은 동물의 것이다. “씨”의 바탕은 “가장 어두운 것”이고, “알”은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이다. 이것들은 고갈과 탕진의 반대, 즉 풍부한 자양분의 덩어리다. “씨”와 “알”로 있는 동안 이것은 자양분의 형태로 부동하는 욕망이고 잠재적인 팽창이다. 어쨌든 우주는 암흑물질에서 나오고, 생명을 빚는 것도 어둠이다. “씨”와 “알”이 보여주듯 생명은 가장 어두운 것에서 비롯하고, 격렬함에서 솟아 나온다.

“씨”와 “알”은 어느 순간 폭발하고 비상한다. “씨”와 “알”은 파열하고 변환하며, 몸으로 도약한다. 사람은 몸으로 살아간다. 몸은 피, 귀, 등, 뼈, 손, 입을 거느린다. 몸은 움직이는 전체다. 우리는 몸으로 먹고 싸고 자고 걷고 떨고 말하고 사랑하고 일한다. 몸은 실존의 무거움을 다 받아낸다. 몸이 없다면 삶도 없다. 몸은 보이지 않는 자아에 형태와 윤곽을 부여하고 삶의 물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담긴 이 몰골이라니! 우리는 몸으로 태어나 몸으로 살다가 돌아간다. 모든 존재의 끝은 부재다. 부재를 지시하는 “흰”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흰” 것의 안에는 얼마나 많은 부재들이 “퍼드덕거리는”가! 우리는 살아서 퍼드덕거리고, 죽어서는 부재로서 퍼드덕거린다.

어느 시대에나 가장 좋은 시인들은 눈으로 궁극의 것을 보고, 귀로 궁극의 소리를 들으며, 머리로는 궁극의 형상들에 대해 상상한다. “시각에서 다른 시각이 나오고 듣는 것에서 다른 듣기가 이루어지고, 목소리에서 사람과 사물들의 이상한 조화에 대해 영원히 호기심을 갖는 목소리가 나온다.”(월트 휘트먼, 《풀잎》, 19쪽) 시인은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듣기”를 하며, 같은 목소리에서 “영원히 호기심을 갖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 시의 심층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들은 시인의 고막에 울려 퍼진 궁극의 목소리들이다. 이것은 “돌”과 “별”과 “꽃”의 목소리이고, “씨”와 “알”의 목소리며, “피”와 “뼈”와 “귀”와 “등”의 목소리다. 28개의 시어들은 저마다 다른 28개의 목소리를 낸다. 이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과 관념들의 형이상학, 물리학, 역학(力學), 유체 공학, 광물학의 목소리들이다. 목소리는 “노래인 동시에 메아리이며, 삶인 동시에 기억”(J. P. 리샤르, 《시와 깊이》, 74쪽)이다. 좋은 시인은 항상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중계한다.


이원(1968~ )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세 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인에 따르면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사람이 고독한 것은 이 지구에서 저마다 고립된 개별자로 살기 때문이다. 지구 위의 고독한 삶의 행태를 보라. “손바닥만한 개에 목줄을 매고/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천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지구에서 고독하다”(〈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고독이 불가피한 실존의 형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은 초감각으로 세계를 맛보고 냄새 맡으며 소리를 경청한다.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되엉킬 때까지/사과는 둥글어졌다”(〈애플 스토어〉)라고 쓸 수 있었을 테다. 이원 시인은 등단 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등을 펴내고, 현대시학 작품상, 현대시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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