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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인 찾아서 - 김종한 시인
2016년 05월 14일 07시 47분  조회:5365  추천:0  작성자: 죽림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들.
왼쪽부터 박두진 시인, 김학철 소설가, 김종한 시인





김종한 - 시인·평론가.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명천(明川) 출생.

호는 을파소(乙巴素)·월전무(月田茂).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졸업.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 당선되고, 39년 《문장》에 《귀로》 《고원(故園)의 시》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해협의 달(1938)》 《연봉재실(1940)》 《살구꽃처럼(1940)》 등이 있다. 그의 시는 솔직·명쾌하며, 속도감이나 시각적 공간성을 추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주지적 경향을 비난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순간》을 표하는 단시(短詩)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등장한 최초의 선시이론(禪詩理論)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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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김종한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

-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도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는구려.
(‘조선일보’ 1937)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능수버들이 지키고 서있는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살아온 한 집안의 깊은 연륜과 내력이 고아하고 그윽한 분위를 자아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위엄 있게 박혀 있는,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던 오래된 종가 집 같다고 할까요. 우물 속엔 푸른 하늘조각이 떠있고, 긴 한 낯을 뻐꾸기가 웁니다.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그놈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울음소리는 늘 한결같은 걸요. 요즘처럼 재빨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때로는 매우 느리게 적응해 가는 것도 중요할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잘 변하지 않는 것들의 지고한 속내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주는 깊은 울림을,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십니다. 아, 어떻게 웃으면 박꽃처럼 웃을까요. 오래오래 마음속에 고여 가슴을 환하게 하는 웃음, 언덕 너머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게 하는 웃음, 물동이에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게 하는 웃음, 뻐꾸기가 작년마냥 어김없이 찾아와 똑같은 소리로 울게 하는 웃음. 도저히 필설로 그려낼 수 없는 신비한 한국 여인만이 지닌 웃음입니다. 아마도 종가의 넉넉한 맏며느리일 것으로 추측되는 아주머니는 하염없이 물을 길어 올리지요.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을 연신 길어 올립니다.

지금 아주머니가 길어 올리는 저것들은 선조들이 남기고 가신 낡은 풍경의 진정한 아름다움들 아닐까요. 시간과 장소는 삶을 떠받치는 힘이지요.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들은 시간의 손때로 반짝입니다. 그 반짝임 속에 다가오는 본래부터 우리 것이었다는 긍지와 자부심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우리는 오래된 미덕이며 전통이라 하지 않던가요. 우리가 이룩할 미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의미 있는 과거는 마땅히 존중 되어야 합니다. 신자본주의의 길목에서 그런 동아시아적 가치야말로 세상을 지탱해나갈 견고한 힘입니다.

김종한 시인은 1916년 함경북도의 변방인 경성에서 태어나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타계했습니다. 그의 호를 을파소(乙巴素)라 한 것을 보면 꽤나 민족에 대한 긍지를 지녔던 것 같고요. 이 시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그 후 주로 정지용 선생이 주관하던 ‘문장’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요.

짧은 한 생애를 통하여 그가 길어 올리려했던 푸른 하늘은 아마 한국의 전통 쪽빛 하늘이었을 테지요. 지금도 우리의 하늘에는 시인이 길어 오리던 그 빛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지나친 서구화의 물결 속에 우리 본래의 빛이 바래지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하늘을 우러러볼 일입니다.

 
 

 

 

작가 소개

김종한(金鍾漢 1916-1944) 시인. 1916년 함경북도 경성군 명천 출생. 니혼(日本) 대학 예술과 졸업. 1936년 <동아일보>에 시 “망향곡” 발표.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당선. 1939년 문장에 “귀로”, “고원의 시”, “그늘”, “할아버지”, “계도” 등이 추천되었음. 시집에 <수유근지가(垂乳根之歌)>(1943), < 설백집(雪白集)>(1943)이 있음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어조 : 전원의 평화롭고 그윽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서정적 어조

표현 : 오래된 우물이 있는 고가(古家)의 그윽한 정취와 아늑한 분위기가 우리의 고유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각 연이 2행으로 구성되어 단아하고 절제된 느낌을 자아낸다. 제3연의 통사 구조의 반복을 통해 물긷는 동작이 느릿하면서도 규칙적인 리듬감을 자아낸다.

구성 :

    1연  윤사월의 낡은 우물가의 풍경

    2연  한가로운 뻐구기 소리와 박꽃처럼 웃는 아주머니의 모습

    3연  푸른 하늘과 전설을 길어올리시는 아주머님

    4연  물동이에 넘쳐흐르는 아주머님의 푸른 하늘

제재 : 낡은 우물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

주제 : 평화와 그윽함이 넘치는 시골 고가(古家)의 풍경.  이상화된 농촌의 모습

출전 : <조선일보>(1937)

 

이해와 감상

같은 사물을 대하면 서도 사람들이 읽어 내는 의미나 분위기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가령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에서 어떤 사람은 억센 노동 뒤의 휴식을 찾아내고, 어떤 사람은 한없는 단조로움과 권태를 읽을지 모른다. 이 작품은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능수버들과 낡은 우물이라는 사물들은 매우 온화하고도 안정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때는 봄도 거의 지나가는 윤사월,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이 한 조각 비쳐 있다.

여기서 물을 긷는 아주머니에게 작중 화자는 묻는다. 지금 우는 뻐꾸기가 작년에 울던 그 새일까라고. 여기서 뻐꾸기는 작품 세계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어떤 상황의 고요함은 아무 소리가 없을 때보다 그 속에 어떤 평화로운 소리가 간간이 끼여들어 올 때 더 잘 나타나는 법이다. 아주머니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박꽃처럼’ 웃기만 한다.  그 웃음 속에는 이 한가로운 세계에서 있는 대로의 삶을 누릴 뿐,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는 소박하고도 담담한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 그 말없는 웃음이 이 시가 그리는 세계의 평화로움을 더욱 부드러운 것이 되게 한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물을 길어 올린다. 이 부분은 문장의 구조가 똑같은데, 그것은 물긷는 동작의 느릿하고도 규칙적인 움직임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두 행에 같이 들어 있는 ‘넘쳐 흐르는’이라는 구절에서는 어떤 풍성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아주머니가 길어 올리는 물은 그저 물만이 아니라, 푸른 하늘이기도 하고 푸른 전설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푸른 하늘을 길어 올린다는 구절은 두레박의 물에 푸른 하늘이 비쳐 있다는 사실의 시적 표현이겠지만, 푸른 전설을 길어 올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을 푸는 열쇠는 앞에서 본 ‘낡은 우물’이라는 데에 있다. 아마도 그 아주머니는 오래 전부터 이 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러 대에 걸쳐서 그 집안이 이 마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우물은 그들이 대대로 물을 길어 올렸던, 그리하여 이 평화로운 세계의 삶을 영위했던 생활의 근원이다. 그 물은 그래서 푸른 전설처럼 그윽하고 예스러우며 아름답다.

  이러한 시상의 흐름에 평화로운 분위기를 더하는 요소가 마지막 연에 나오는 ‘황소의 울음 소리’이다. 나지막하고 게으른 듯한 황소의 울음 소리, 그 속에서 물동이를 이고 일어서는 아주머니, 물동이에 출렁거리는 맑은 물과 거기에 비친 하늘……. 이러한 모습으로 그윽한 평화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계의 모습이 완성된다. 다시 한번 천천히 읽으며 상상의 그림을 그려 보면 이 점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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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살구꽃처럼

         /김종한
 
 
살구꽃처럼
살구꽃처럼
전광(電光) 뉴스대(臺)에 하늘거리는
전쟁은 살구꽃처럼 만발했소.
 
음악이 혈액(血液)처럼 흐르는 이 밤.
 
살구꽃처럼
살구꽃처럼 흩날리는 낙하산부대,
낙화ㄴ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이 밤.
 
청제비처럼 날아오는 총알에
맞받이로 정중선(正中線)을 얻어맞고
살구꽃처럼, 불을 토하며
살구꽃처럼 떨어져가는 융커기(機).
 
음악은 혈액처럼 흐르는데,
 
달무리같은
달무리같은 나의 청춘과
마지노선과의 관련, 말씀이죠?
제발 그것만은 묻지 말아주세요.
 
음악은 혈액처럼 흘러 흘러,
 
고향집에서 편지가 왔소.
전주 백지(白紙) 속에 하늘거리는
살구꽃은
살구꽃은 전쟁처럼 만발했소.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이 밤,
 
살구꽃처럼 차라리 웃으려오.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이 밤.
전쟁처럼
전쟁처럼 살구꽃이 만발했소.
 
 
 
 
김종한(金鐘漢,1914 함북 경성~ 1944)- 시인.
 
호는 을파소(乙巴素), 창씨명은 월전무(月田茂). 1940년부터 폐병으로 요절한 1944년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다. 친일 매체에서 활동하였고 집중적으로 창작활동에 참여한 기간이 태평양전쟁 시기와 겹치면서 총 22편의 친일 저작물을 발표했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졸업했다. 니혼대학에 재학중이던 1936년 〈동아일보〉에 시 〈망향곡〉을 발표하였고, 1937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 1939년 〈문장〉지에 〈귀로 歸路〉·〈고원의 시〉·〈할아버지〉·〈그늘〉·〈계도 系圖〉 등이 추천되면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솔직하고 명쾌하고 단순하며 비애를 기지로 포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김종한의 시는 속도감과 공간성을 활용한 기교적인 면모와 함께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1939년 〈문장〉지에 〈나의 작시설계도(作詩設計圖)〉에서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는 단시(短詩)를 주장했는데, 이는 한국현대시사에 등장한 최초의 선시(禪詩)이론으로 꼽힌다. 〈인문평론〉과 〈매일신보〉의 기자를 지냈고, 1942년 부일(附日)문학지인 〈국민문학〉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친일문학자로 전향하였다. 〈시문학의 정도(正道)〉에서 시적인 상황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여 시화해야 한다는 현대의 시정신을 다룬 순수시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 도쿄에서 〈이인 二人〉이라는 시동인지를 발간하여 민요풍의 서정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시단의 진로〉(1942)라는 평론에서 '국민시운동이 대동아공영권 운동'이라는 개념을 수립하고 동양에의 복귀, 흙에 투철한 정신, 민족융화의 사상 등을 주장했다. 시 〈원정 園丁〉(1942)에서 일본과 조선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시 〈거종 巨鐘〉(1943)에서는 대동아공영권 문화에 대한 향수를, 〈용비어천가〉(1944)에서는 대동아건설에 참여하는 반도인의 풍모와 감격을 노래하는 내용 등을 썼다. 또한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을 찾아가 만난 뒤 쓴 수필〈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1943)를 쓰기도 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 〈해협의 달〉(1938)·〈하기휴가〉·〈길〉(1939)·〈연봉제설 連峰霽雪〉·〈살구꽃처럼〉(1940)·〈항공애가 航空哀歌〉(1941)·〈유년징병(幼年徵兵)의 시〉(1942) 등과, 일본어판 시집 〈수유근지가 垂乳根之歌〉(1943), 한시일역집〈설백집 雪白集〉(1943), 수필 〈남방에의 초대〉·〈바다, 효석, 하숙〉등이 있다. 이효석의 작품 〈황제〉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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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의 시((故園-詩)>

           - 김종한

밤은 마을을 삼켜버렸는데

개고리 울음소리는 밤을 삼켜버렸는데

하나 둘…… 등불은 개고리 울음소리 속에 달린다.

 

이윽고 주정뱅이 보름달이 빠져나와

은(銀)으로 칠한 풍경을 토하다.

                   - [문장] 3호(1939년 4월호) -

 해설】

   시 <귀로(歸路)>와 함께 묶어 발표된 작품의 하나이다. 당시 추천자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명암(明暗)이 적확(的確)한 회화(繪畫)’라 하였는데, 이 시는 농촌의 여름밤 풍경을 그린 시로서는 매우 특이하다. 아주 새롭고 인상적인 회화시인 것이다.

【주제】 신선한 이미지로 포착한 저녁 무렵의 전원 풍경

【내용 풀이】

▶제1연 : 밤의 어둠은 완전히 마을을 칠흑으로 덮어 버렸는데, 요란하게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 어둠을 또 삼켜 버렸는데, 하나, 둘……보이는 마을의 등불은 개구리 울음 속에 마치 달리는 것처럼 빛나고 있다.

  ― 원색의 여름밤 농촌 풍경이다. ① 마을을 삼켜 버린 밤의 어둠 ② 밤이 되어 신나게 우는 개구리 울음이 삼켜 버린 밤(개구리 울음이 밤을 지배하고 있다) ③ 하나, 둘, 셋…몇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등불만이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등불은 개구리 울음 속에 달린다’는 표현은 매우 현대적이고 또한 역동적(力動的)이다. 이것은 시각과 청각의 결합이니, 등불(시각)이 와글와글 우는 개구리 울음(청각)과 조화를 이루면서 반짝이는 모습을 ‘달린다’는 동사로 묶었다. 따라서 마을은 어둠 속에 완전히 감추어지고, 개구리 울음과 불빛만 남은 농촌 여름밤의 짙은 풍경이 선명하다.

▶제2연 : 이윽고 먹장구름이 덮인 하늘에서 마치 주정뱅이 같은 모습의 보름달이 구름에서 빠져나와 은가루를 뿌린 듯한 하얀 풍경을 비추어 낸다.

  ― 2연의 주부(主部)가 되는 ‘주정뱅이 보름달’의 표현도 특이하다. 구름에 가리우고  이그러진 모습을 ‘주정뱅이’라 한 것이지만, 이것은 농촌의 이미지와 가까운 시어이며, 거기다 그것이 지상을 비추는 모습을 ‘은으로 칠한 풍경을 토한다’고 하였다.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 거기에 나타나는 하얀 풍경……그것을 달이 ‘토한다’고 한 것은 의인법의 표현인 동시에, 시각 이미지에 호소한 회화성(繪畫性)이다.

【감상】

   제목의 ‘고원(故園)’은 ‘전에 살던 곳’의 뜻으로 고향을 뜻한다. 향수에 젖어 그리운 고향 풍경을 이와 같이 독특하게 회상,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그가 주장하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이른바 ‘최고의 순간’을 잡은 표현주의의 시라 할 것이다. (조남익: <현대시 해설>)

 

   이 시는 이미지 표현을 위주로 한 시다. 그런데 이미지의 표현 방법이 기발하고 우수하다. 이 시는 부분적으로 비유적 이미지가 사용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묘사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밤의 한 정경을 산뜻한 이미지로 제시해 보려는 것이 시인의 의도인데, 대단히 유니크한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밤이 마을을, 밤을 또 개구리 울음 소리가 삼켰다는 시적 진술은 퍽 기발하다. 개구리 울음 소리만이 가득한 고향의 밤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한다. 밤이 깊어지면서 하나 둘 등불이 밝혀지는 것을 개구리 울음 소리에 등불이 달린다고 표현했다.

   여기까지가 장면 1이었다면 제2연은 장면 2에 해당한다. 장면 1과 장면 2 사이의 전환과 휴지는 연 구분을 통해 구별되는데, 적절한 연 배치는 독자의 호흡을 쉬게 하면서 새롭게 전개될 장면 2의 경이로운 광경을 시적 긴장 속에서 기다리게 하는 효과를 준다. 이 휴지의 긴장 뒤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은 달빛이 자아내는 풍경이다. 보름달이 비치면서 드러나는 은은한 마을 광경을 마치 보름달이 토해낸 것으로 본 착상은 새롭고 뛰어나다.

   주정뱅이로 보름달을 비유한 것은, 달의 시인 이백에 대한 정서가 투영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달이 좋아 달을 노래하고 달과 함께 죽어간 시인. 그리하여 '이태백이 놀던 달'로 민요 속에 고스란히 간직된 우리의 정서를 기묘하게 표상한 데서 이 시인의 천재성을 감지할 수 있다.

   한편, 화자 자신이 술에 취해 논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주취(酒趣)가 시취(詩趣)에 이를 때의 정취야말로 서정성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의 매력은 이미지의 신선함에 있다. (송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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