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창수(薛昌洙:1916~1998)선생 흉상(胸像)
위 사진은 진주시민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문인으로서 진주(晋州市)를 빛낸 설창수(薛昌洙) 선생의 남강변 고수부지에 세워진 흉상(胸像)이다.그의 아호는 파성(巴城)이였으며 1916년(음력 10월8일)경남 창원군 창원면 북동리에서 태어나 진주로 이주하여 진주를 위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진주시 칠암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대전(大田)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그는 창원 공립보통학교,진주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 예술과에서 창작을 전공했으며,1942년 항일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뤘고, 1946년 경남일보사 주필 16년.사장10년을 역임하고,1947년 영남문학회 창설 14년간 운영,영문(嶺文)18집 발간하였으며,1949년 제1회 영남 예술제(개천예술제) 청시,11회(1959년)까지 대회장을 맡았으며,1960년 초대참의원 의원,196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1963-1987년 전국 순력(巡力),시(詩),서(書),화(畵)전 224회 개최,1977년 독립유공자 표창수상.이후~광복회 경상남도 지부장.중앙회 부회장.1981년 한국문학협회 창립이사장,1985-1996년 개천예술제 제사장,1988년 사단법인 개천예술제탑 건립위원회 창립.1991년 개천예술탑 건립(진주성내),시집(詩集)-개폐고(開閉槁),설창수 전집(시,수필,희곡),미주기행문,성좌있는 대륙 등을 발간하였고,눌원문화상,진주시 문화상,경상남도 문화상,사회교육 문화상 문학부 대상,향토문화대상,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며 진주를 빛낸 위대한 선구자 이시다.
흉상의 좌측면에 새겨진 그의 시
남강(南江)가에서
진양성외(晋陽城外) 수동류(水東流)를
왜 남강(南江)으로 이름했음일까?
아무도 모른다.
언제 어드메서 처음되었는지
너 강줄기의 족보를 아무도 모른다.
멍던 선지피로 흘렀던 짓밟힌 청강(靑江)의 젖가슴에
말없이 남아 있는 돌 하나-
그 묵어(默語)를 아무도 모른다.
둥근 달과 뭇 별을 눈망울에 담고도
차라리 여울마다 목메이는 서러움을
아무도 모른다.
천지(天地) 보군(報君) 삼장사(三壯士)로 읊조렸던 왕이란 것 따로 없는 만백성의 나라-
역사(歷史)란 얼굴을 비쳐주는 푸른 거울임을 아무도 모른다.
흉상 후면에 새글
서기 2001년 10월 3일
문화예술인들의 뜻을 담아
재단법인 진주문화예술재단에서 세우다.
글씨 정도준
조각 박찬걸
동상 후면의 세움 글
설창수(薛昌洙)선생 흉상(胸像)#1
좌측에서 바라본 흉상(胸像)#2
흉상 옆의 정자 전경[2011.7.14(목)Sony撮影]
☞.진주라하면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한곳인 진주성을 먼저 떠올리게 되며,그 때 전공을 세운 춤무공 김시민 장군은 충남 병천 사람이였고,적장을 껴안고 남강물에 투신한 의기 논개는 전남 장수 사람이였으며,진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전남 사람이고,의병장 곽재우 홍의장군은 경남 의령 출신이며,진주출신으로 진주를 빛낸 사람으로는, 청담,경봉 큰스님,가수 남인수가 있으나 설창수 선생과 같이 타지에서 이주해와 위대한 업적을 쌓고 진주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특별히 찾을 수가 없다. 흉상을 세울 당시만 해도 고인의 위대한 업적에 뜻있는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고 고인을 기렸지만 이제는 남감변 고수부지 숲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이시대에 진정 진주(晋州)에 혼을 불어 넣어줄 위대한 인물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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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호는 파성(巴城). 경상남도 창원(昌原) 출생. 1942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창작과를 2년 수료하고 46년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사장을 역임하였으며, 47년 동인지 《등불》에 시 <창명(滄溟)>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57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지내고, 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된 데 이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에 선출되었으며, 81년 문학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영남문학회》와 《시와 시론(詩論)》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초기의 동인지 《등불》을 《영문(嶺文)》으로 고쳐 1961년까지 18집을 발간했으며 63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200여 회의 시화전을 개최했다. 저서로는 개인시집 《개폐교(開閉橋)》과 《설창수문학전집(6권)》이 있으며, 주요작품에 《개폐교》 《파초(芭草) 제 2 장》 《적막》 《의랑논개(義娘論介)의 비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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汎生의 章<告靈文⑦>
(범생) (장)<고령문>
薛昌洙(설창수)
꼭 작년 오늘 그의 俗魂(속혼)은 이승을 떠났다.- 智異山
줄기 1500 해발의 細石高原(세석고원)에 아물아물 가 없이
철쭉들의 한창 무렵, 열두번째로 主峰(주봉)「天王」을 넘은
그로선 분명 익혀 아는 毒草(독초) 누루치의 뿌릴 汁(즙)으로 먹고
서로 인연 따라 한동안 다녀간 前生 菩薩(보살)의 化身(화신)이란
傳說도 있으나 하필이면 武陵桃源(무릉도원) 같더란 山上의 꽃 그
늘에서 남몰래 숨진 召命(소명)과 같이 自意의 까닭을 모른다。
맹아, 이승에서 스므햇 동안을 나의 어질디 어진 아들
이었던 네 이놈 맹아, 저승이냐 너 먼저 갔다 한들
이승의 천륜을 잊고 말 너가 아니리라。
아비는 오늘도 창천을 감감히 우러러 근심하고, 이 北
邙(북망)의 골짝을 살피며 근심하노니 冥道(명도)엔 시장도 추위
도 눈바람이야 따로 없으련만 혹시 네가 의지할 곳
없는 客魂(객혼)의 혼이 되어 표표한 가랑닢처럼 헤매이
고 있지나 않느냐。 구태여 벗을 찾아 무리지어 놀기
를 즐겨하던 너가 아니었건만 冥天(명천) 冥府(명부)의 가없는
薄命(박명)의 천지에서 無主 孤魂(고혼)이 되어 서럽진 않느냐。
恒河(항하)의 모래알 하나 같은 이승의 나도 살고 죽음이
란 萬有의 實存(실제)에 비길진댄 이미 有無 起滅(기멸)의 소식
조차 못될지 모르지만 恢恢(회회)하고도 아예 새지 않는
天網(천망)이더든 어찌 어진 나의 아들 영혼을 無依
孤魂(무의고혼)으로 헤매이게야 하실소냐。
마땅히 선한 뜻과 영혼은 大宇宙의 時空 生滅 (생멸)위에 자
리한 드높고 푸른 하늘의 영원 및 大榮光과 綠由(연유)되
고 또 調和(조화)됨이려니 목숨 나게 하신 恩惠(은혜) 또한 목숨
거두어 드리는 恩惠와 더불어 둘이 아닌 한 줄일 것
임을 아비는 믿어 의심치 않노라。
나의 이승에서 어진 아들, 저승에서 또한 오래도록 나
의 아들됨을 싫다 하지 않으리니 욕되고 병든 나라,
가난한 아비의 아들로 태어났었다가 웃으며 작별하
고 너발로 걸어서 黃泉(황천)의 門으로 들어 간 나의 착하
고도 믿음직하던 아들 맹아, 이놈아。
우리 이제 死生을 아득히 넘어 三生을 함께 살아 不滅 (불멸)
코자 하노니 오늘은 江 하나 가로놓여 있을 뿐인 이
삼생의 浩浩(호호) 無涯(무애)한 벌판 위에 汎生(범생) 共存을 믿고 누
려서 또 헤어짐이 영영 없게 하리로다。
南無十方諸佛, 南無大悲阿彌陀佛, 南無一切經,南無大方廣佛華嚴經, 합장。
(나무십방제불, 나무대비아미타불 나무 일체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芭草(파초) ⑦
揚揚衝天舞 孤高向天掌
(양양충천무 고고상천장)
薛昌洙(설창수)
계절이 나에게 無綠(무록)한 지 오래언만
너는 내 窓 앞에서 나의 여름을 대표한다。
이젠 흘러 가 버린 내 젊음의 江언덕에서
나에게도 있었던 그 한때를 立證(입증)하여 주고。
너를 客觀으로 比喩(비유)하기를 삼갈진대
넌 곧 나의 召喚者(소환자), 내 主觀의 同化者。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새삼 말하는가
내가 本是(본시) 가진 것 없었음을 너는 理解(이해)하고 있다。
너를 옷 입고 나의 靈魂(영혼)은 다시 푸르다。
계절을 뚫고 선 너의 對話者는 오직 하늘 뿐。
춤춰라 춤춰라 춤춰라 律動(율동) 없는 너의 춤을
그것만이 너가 갖는 唯一한 言語임을。
나에겐 차라리 너를 통한 夜禱(야도)만이 있나니
너는 나의 寺院(사원), 나의 敎會(교회)일까。
너의 後光인 별 아래 때로는 苦行僧인 듯
壯嚴(장엄)한 立像은 나의 祭壇(제단)일 수 있다。
十一月, 너를 지키려는 내 斷刀(단도) 아래 샘솟는 맑은 물은
또 겨울이 외로울 내 영혼에의 눈물일까。
설창수(薛昌洙.1916.1.16∼1998.6.29)
시인.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 출생. 호 파성(巴城). 1937년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9년 리쓰메이칸대학 예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1942년 니혼대학 법문학부 예술과를 중퇴하였다. 1940년 일본 유학 중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일제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1년 12월 일문(日文) 시집 <야백편(夜百篇)>을 출간하려다 산변의 유고(有故)로 유산(流産)되었다. 8ㆍ15광복 후 1946년 [경남일보]를 창간하여 주필 겸 사장을 맡았으며, 좌익 문학단체에 대응하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였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창명(滄溟)> 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49년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예술제로 변경)를 창시하였으며, 문교부 예술과 과장을 지냈다. 1960년 4ㆍ19혁명 직후 총선에서 6년 임기의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ㆍ16군사정변으로 정계를 떠났다. 이후 군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독재타도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51년 이후 전국을 돌며 223회의 시화전을 열었으며, 1972년 일본에서도 2차례 열었다.
1957년과 1965년, 1975년, 1988년 네 차례 국제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81년 한국문학협회 이사장, 1986-1994년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94년 인간 상록수로 추대되었다.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탈(脫) 주지주의적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시집, 수필집, 산문집 외에 100여 편의 희곡도 남겼다. 1984년 시ㆍ수필ㆍ희곡 등을 모아 <설창수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1990년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파성문학상이 제정되어 허유가 첫 수상자가 되었다.
1959년 제1회 눌원문화상을 비롯하여 진주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독립유공상(1977), 건국훈장 애족상(1990), 은관 문화훈장(1990), 예총 예술대상, 향토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장지 :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경향】그의 시는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이를 정시(正視)하려는 경향으로 탈주지적 정신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를 드러내고 있으며, 초기의 서정성은 점차 풍자시로 변모하였다.
【시】<창명(滄溟)>(1947) <무명묘(無名錨)>(1954) <파초 제3장>(1955) <깨뜨려진 이조화병>(1956) <분황사탑>(1956) <동백을 심어놓고>(1957) <향편유정(香片有情)>(1989) <적막(寂寞)> <의랑(義娘) 논개의 비문(碑文)> <석란(石蘭)>
【시집】<개폐교(開閉橋)>(3인시집.1950) <설창수 시선>(1976)
【수필집】<상좌 있는 대륙>(1960)
【산문집】<청수헌산고(聽水軒散稿)>
【전집】<설창수전집>(6권.1984)
설창수외 / 삼인집
1952년 / 영남문학회 / 9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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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폐교(開閉橋)
설창수(파성, 1916~1998 경남 창원)
짓밟음, 바람비, 수레바퀴, 침뱉음을
오랜 동안 말없이 참아 온 내다.
내 등덜미의 살결은 메마르고
뼈, 힘줄, 주름살, 흉터만이 남아 있다.
디디어 보라, 내 껍질은 따글거린다.
이제 난 일어선다.
성낸 쟈이안트처럼 감연히 일어선다.
예각(銳角)화된 내 등덜미 위에
아무도 기어오르지 못한다.
내 두 줄기 동정맥(動靜脈)은 불꾼 번쩍이고,
내 머리카락은 끊어진 양 곧게 뻗어
난 이 때 발목으로 자유(自由)를 보장한다.
난 푸른 항만(港灣)의 숨통을 해방한다.
난 양양(兩洋)의 등경을 연결한다.
내 성낸 궐기(蹶起)는 모든 세속적 타협을 모른다.
내 아슬아슬히 목 없는 견평선(肩平線)―
접속철판(接續鐵板)의 냉엄한 감각 위에
한 마리의 비둘기도 날아 앉지 못한다.
―미모(美貌)도 공갈(恐喝)도 특권(特權)도 아유(阿諛)도.
난 무자비한 괴한(怪漢)이 아니다.
외로운 어머니의 복약(服藥) 시간을,
첫 청춘의 밀회(密會) 시간을 막으려곤 않는다.
난 규율과 섭리(攝理) 앞에 순종할 뿐,
난 배신(背信)을 모른다.
난 위대한 원시인(原始人)이다.
난 위대한 문명인(文明人)이다.
서건 눕건
난 위대한 노예(奴隸)다.
芭草(파초)
揚揚衝天舞 孤高向天掌(양양충천무 고고상천장)
薛昌洙(설창수)
계절이 나에게 無綠(무록)한 지 오래언만
너는 내 窓 앞에서 나의 여름을 대표한다。
이젠 흘러 가 버린 내 젊음의 江언덕에서
나에게도 있었던 그 한때를 立證(입증)하여 주고。
너를 客觀으로 比喩(비유)하기를 삼갈진대
넌 곧 나의 召喚者(소환자), 내 主觀의 同化者。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새삼 말하는가
내가 本是(본시) 가진 것 없었음을 너는 理解(이해)하고 있다。
너를 옷 입고 나의 靈魂(영혼)은 다시 푸르다。
계절을 뚫고 선 너의 對話者는 오직 하늘 뿐。
춤춰라 춤춰라 춤춰라 律動(율동) 없는 너의 춤을
그것만이 너가 갖는 唯一한 言語임을。
나에겐 차라리 너를 통한 夜禱(야도)만이 있나니
너는 나의 寺院(사원), 나의 敎會(교회)일까。
너의 後光인 별 아래 때로는 苦行僧인 듯
壯嚴(장엄)한 立像은 나의 祭壇(제단)일 수 있다。
十一月, 너를 지키려는 내 斷刀(단도) 아래 샘솟는 맑은 물은
또 겨울이 외로울 내 영혼에의 눈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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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바다
/ 巴城 설창수
일체는 아름다워라
찢어 봤자 형제, 씹은들 자매
천만 천만 사천만
은실 금실 계류는 흘러 간다
암벽에 부디쳐 가루나도
다시 모여 청담이 되다
천년 천년 사천년
흘러 감만 늠엄(凜嚴)하여라
포효도 분격도 선회도
비약도 말산(沫散)도
주사(呪駟) 까지도
오로지 한개 절대의 교향
천리 천리 삼천리
금수 찬란, 산하 삼라하고나
녹슬어도 이끼묻어도
헐어 있어도 조각져 있어도
거룩할손 나의 것
이 장대한 동방의
만다나(曼茶羅)
광망은 뻐쳐 간다,
일시(一矢) 또 일시…
깨어지라 혼돈의
야장(夜帳)이여
아아 살아 있도다
보아라 썩지 아니하였었도다
소리소리 줄기줄기
모두 바다를 향하도다
파성 설창수(巴城 薛昌洙, 1916~1998) 선생은 한 마디로 요약해 경남 진주의 문화 대들보였다.
창원에서 출생해 진주농고 입학을 계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줄곧 진주에서 정신적 거목으로 버텨왔다. 애국지사, 언론인, 정치가이기도 했던 시인 파성은 특히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파성만의 독창적 필흔을 남겼다. 여기 소개된 옥고 ‘민족의 바다’도 선생의 지대한 애국심의 발로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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