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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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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녀류시인 - 옥봉 / 詩가 내게...
2016년 05월 19일 08시 11분  조회:5241  추천:0  작성자: 죽림

 

낮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해가 떨어지자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거세지자 천둥번개까지 요란하다. 이따금씩 벼락 치는 소리도 들렸다. 옥봉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안을 오갔다. 결혼 후엔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애걸복걸하여 소실로 들어간 자리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소실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약속을 깼으니 집을 나가라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도 조원은 기척이 없다.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어가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옥봉은 자리에 들수가 없다. 평소 조원의 성격으로 봐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어서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그칠 기세가 아니다. 어둡고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여명이 동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도 차츰 기세가 꺾여갔다. 그때다. 조원이 들이닥쳤다. 어제 오후부터 밤새 기다린 남편이 들이닥치자 옥봉은 전신이 얼어붙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었어요?”라고 짜증을 부릴 상황이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소? 이리 와서 앉으시오...” 조원의 입에선 술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평소와 너무나 다르다. 옥봉은 남편의 행동에 겁이 났다. 이미 자신이 시를 써서 파주 친척이 누명을 벗고 방면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어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남편의 맨송맨송한 운우지정이다. 옥봉도 작심하고 온몸의 정기를 모았다. 부부는 여명이 동창으로 들어오고 있는데도 뜨겁게 운우지정을 즐겼다. 옥봉도 첫날밤 보다 더 따뜻하고 뜨겁게 사내물건을 받았다.

지금의 운우지정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요란한 몸짓으로 사내의 욕정을 북돋우는 여자로 인식되기는 싫었다. 온몸의 기를 옥문(玉門)으로 모았다. 뜨거운 정화수(井華水)같이 잔잔하지만 힘찬 파도가 일 듯 사내 심볼을 조였다. 조원의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이 갑자기 커졌다.

마침 배란기다. 사내도 새벽 욕정이 꿈틀댔다. 하주종일 수창(酬唱)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풍류를 즐기느라 육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그런데 뜻밖에도 옥봉이 뜨겁게 맞아줘 애액(愛液)이 폭포수처럼 나왔다. 옥봉이 기대했던 대로다. 애액은 옥봉의 옥문을 넘어 사타구니에 까지 넘쳐 나왔다.

아이를 가지려는 여자의 본능이다. 여자보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사랑의 파트너인 동시에 소실의 의무이기도 하다. 아들을 낳아 당당하게 소실의 두 가지 의무를 다 하려는 야무진 속내다. 풍류 반려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다.

날이 밝자 조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엇에 쫓기듯 방을 빠져 나갔다. 잠자리엔 쪽지 하나가 놓였다. 금시맹약(禁詩盟約)이다. 소실의 의무다. 약속을 어겼다는 통보다. 의무를 어겼으니 소실의 자격이 상실됐다는 얘기다. 옥봉은 파주에 있는 친척에게 써준 시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위인송원≫(爲人訟寃)이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머리를 빗는 물로 기름을 삼아도/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사연인 즉 이러하다.

소를 훔쳤다는 남편이 누명을 쓴 아내의 하소연을 듣고 써준 시다. 마침 칠석날 일어난 사건이다. 견우와 직녀를 활용한 시다. 견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갈 수 있겠느냔 것이다. 사또는 화들짝 놀라 누명을 쓴 주인공을 즉각 방면시켰다. 하지만 옥봉은 소실의 자격을 잃어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얻은 소실의 자리인가...

옥봉의 부친 이봉이 조원의 장인 이 준민을 찾아가 자신의 딸이 비록 한번 결혼에 실패했으나 춤과 노래, 시에도 재주가 있어 ‘풍류반려’가 될 만하니 며느리로 받아 줄 것을 애걸복걸하여 얻은 자리다. 그런데 지금 쫓겨나는 신세가 된 가여운 운명이 되었다. 옥봉이 조원의 소실에서 자격을 잃고 다시 청상과부가 되면 아버지 이봉은 가슴앓이를 또 다시 할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였다. 시를 쓰면 안 된다는 약속을 어겼으니 소실의 자격이 상실되었다. 옥봉은 뚝섬에 우거(寓居)를 마련했다. 일선에는 조원이 옥봉을 소실에서 내쫓은 것은 시 실력이 뒤져서란 얘기도 있다. 남편이 아내, 그것도 소실만 못해 자격지심이 발동하여 내쫓았다는 풍문이다.

옥봉이 조원의 소실이 되기 전에 이미 그녀의 시 실력은 널리 알려져 사내가 알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장인이 ‘풍류반려’로는 안성맞춤의 여자라고 강력히 권하여 마지못해 맞아들였는데 ’위인송원‘을 써 파주사또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편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다. 아녀자는 관가의 일에 참견을 하면 안 된다는 금기시 된 조선시대의 사회 흐름이다.

하지만 옥봉은 샘솟듯 하는 시심의 발로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집을 나설 때 역시 시 한편을 남겼다. ‘임 그리는 깊은 마음 어이 쉽게 변할 손가/ 다시 또 말하려니 부끄러워요/ 행여나 임께서 내 소식 물으시면/ 옛 화장 그대로 난간에 기대어 있다 전해주오...’ ≪이원≫(離怨) 이별의 슬픔이다.

그랬다. 옥봉은 아버지가 조원의 장인에게 간곡한 부탁으로 소실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그녀는 운강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조원의 소실로 들어가 풍류반려로 살아갈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옥봉은 거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조원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처지였었다.

친정에서 아버지가 시회를 열었을 때 첫눈에 사랑의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쫓겨 나갈 신세가 되었다. 등 떠밀려 내쫓겨 떠나가도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애절한 시다.

비록 몸은 내쫓기는 신세로 떠나가도 마음은 가져가지 않고 두고 간다는 이별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읊었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남존여비사회의 여자의 숙명이다. 아니 소실의 천형(天刑)같은 굴레다. 그러나 옥봉은 자신의 문재(文才)를 썩히지 않았다. 소실의 자리는 잃었어도 샘솟듯 발로하는 시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 2016년 05월 18일 09시 02분 ]

 

 

湖南 平江 石牛寨 음악유리잔도(音乐玻璃栈道)에서
 

 

 

기 획 특 집 -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

 

신경림 스스로 충만한 한 그루 나무

천양희 내 삶의 단독정부

김혜순 리듬의 신에 붙들리다

장석남 “시가 나를 이만큼 지켜 주었다”라는 말씀

이원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편집자주 -  80년대는 시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소설의 시대였다. 그럼 2000년대는? 물론 소설의 시대는 아니지만 시의 시대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시에 있어 시대의 아이콘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호사스런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고 이제는 그 온전한 생존조차도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시인으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 틀림없는 5명의 시인으로부터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라는 자기고백을 들어본다.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과 성향을 가진 이들의 고백으로부터 독자들이 우리 시의 앞날을 내다볼 조그만 단초를 발견하게 되길 기대한다.

 

스스로  충만한 한  그루  나무

 

글 신경림_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1936년생. 시집 『농무』 『남한강』 『가난한 사랑 노래』『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

내가 시를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로서, 내 등단 작품은 「낮달」 「갈대」 「석탑」 등 이른바 순수시였다.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격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었지만, 실제로 내 시는 이러한 내 감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또는 내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회의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차츰 시에 게을러졌다. 내 시뿐 아니라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화두는 신이니 존재니 하는 외국서 들어온 관념이 아니면, 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통적 서정 일색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읽은 바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며 막연히 내 시가 계속 이럴 수는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은들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럴 때 고서점에서 만나 사귄 한 선배가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이 계기가 되어 시골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하고 본 것인데, 일단 시골로 오고 보니 영 서울 갈 기회가 오지 않아,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가 사업이다 자식들 학비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는 데다, 아버지는 아직 일할 나이에 일찌감치 실업자가 되고 집안 살림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오죽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 한구석에 무리를 이루었던 작약 뿌리를 캐어 보리쌀과 바꾸었겠는가.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며칠 따라다닌 일도 있다. 그러면서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농사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이때 비로소 제대로 알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곳곳에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흉측하게 남아 있는 것도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보면 같은 날 아버지나 형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씩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천지였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또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보지도 않고 사는 경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내게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다시 글 쓸 기회가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이며 한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래도 그 10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우연히 김관식 시인을 길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를 다시 쓸 기회를 영 놓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믿을 바가 못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고,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시가 이래도 되는가 의아하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시골서 다시 내게 시를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시대의 요구란 유신, 긴급조치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나 저항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한테 감동을 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이것이 드러나면 친구나 후배들은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시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 쓰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적 정서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을 가지고는 생동감 있는 현실을 포착한다는 일이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시 쓰기가 더 싫어졌고 더 지루해졌다.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벗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나의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또 생각했다, 내가 시를 쓰는 한 내게는 시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은 없다고.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문학주의자로 자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최근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것이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있을 것이요 그것을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터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나의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일 때 그것이 주는 기쁨도 진정한 기쁨이 되리라.

※ 이 글은 2002년 한국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내  삶의 단독정부

글 천양희_시인. 1942년생.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都市』『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등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나에게 시는 무엇이며 시를 통해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시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시가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왜 나를 이 고통스럽고도 피 말리는 일에 등을 떠미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생각만 바꾸면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직업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왜 시인으로만 살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때 나는 주저없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잘 산다는 것은 시로써 내 삶을 살리고,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해도 시만큼 나를 살려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시인된 지 올해로 40년이 되었지만 시를 못쓰고 산 얼마 동안은 살고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생활 때문에 시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어떤 시인은 ‘시가 곧 생활’이고 ‘시 쓰는 일이 숨을 쉬는 일’이라고 했는데 나는 생활 때문에 시를 버렸던 것이다. 내 자책인지 그땐 그 말들이 어떤 말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고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시가 더 이상 내 삶 속에 무엇이 되지 못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 나는 나를 바꿔야만 했다. 그때부터 시가 내게로 올 수 있는 어떤 것이든 발견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여러 곳을 떠돌았다. 직소폭포에서 수수밭으로, 동해에서 몽산포로, 원근리에서 고하리로, 무심천에서 소리봉으로, 버스 종점에서 새벽시장으로 발품을 팔 듯 돌아다녔다. 수없이 돌아다닌 끝에 비로소 시의 본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만난 모든 것들이 새로운 시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 시들은 죽음에서 다시 쓴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내가 하던 일과는 다른 어떤 것, 내 몸과도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그때처럼 삶이 수난인 적은 없었고 불행했던 적이 없었다. 내 시는 어쩌면 신산스런 내 삶의 절망이 부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망이 키운 내 시를 내 팔자로 생각하고 생업(生業) 또는 시업(詩業)이라 생각한다.

시업과 사업을 혼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즈음, 시집이 너무 많고 시인도 너무 많아 가끔 시멀미가 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삶에서 시가 주는 의미는 아직도 크다. 시는 내가 사는 이유이며 살아 낼 가치이며 일생의 표지이다.

쌀이 농부들의 손을 여든여덟 번이나 거친 뒤에 밥이 되듯이 내 시도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면 수십 번의 파지를 버려야 한다. 그 과정과 완성이 나에게는 괴로운 기쁨이다. 시를 쓸 때는 괴롭지만 좋은 시가 되었을 때는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시는 나를 찢고 나온 내 분신이다. 그 분신은 나를 아프게도 믿게도 한다. 내가 시에 헌신하면 몇 배로 기쁨을 주고 조금만 소홀히 하면 영락없이 앙갚음을 한다.

시는 그렇듯 내 삶에서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시는 내 삶에서 끊임 없이 나를 격려해 주고 내 슬픔까지도 등에 지고 가는 친구 같은 존재다. 시는 나를 부추겨 주고 깊은 우정으로 나를 채찍질해 주며 끊임 없이 나를 충전시켜 주고 갖가지 매혹으로 나를 사로잡기도 하고 때론 환멸을 주기도 한다. 시는 내가 본 만큼 쓰게 하고 내가 발견한 만큼 또 쓰게 하는 내 삶의 저자(著者)다. 그래서 나는 시와 소통할 때 가장 덜 외롭다.

지금은 시 외에 어떤 삶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시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시는 이제 내 삶에서 떼어내 버릴 수도 어쩌지도 못하는 운명처럼 되어 버렸다. 마치 한 집에서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끈질기게 살아온 조강지처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는 변함없이 나를 격려해 주는 친구로 끊임 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애인으로 평생을 질긴 끈처럼 묶여 있는 운명 같은 존재다. 만약에 시가 아니었으면…… 그러나 운명에 만약이란 없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운명을 거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토록 고통스런 일에 혼신을 바칠 수 있었으며 돈도 밥도 안되는 시가 무슨 재미가 있었을까.

나를 끌고 가는 시가 없었다면 따라가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좋은 시는 내 정신의 르네상스를 맞게 해 주고, 나쁜 시는 나를 정신의 이방인으로 왕따시킨다.

시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살아 있는 자로서 나를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시가 잘 쓰여지지 않을 때, 발표한 시도 버리고 싶을 때, 발표한 시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괴로워할 때 ‘이 끝없는 덧없는 짓을 왜 하지’라며 잠깐 정신을 놓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시처럼 지독한 형벌이 없고 시처럼 지독한 천형도 없다. 첫 시집을 내고 몇 년이 걸려 낸 새 시집이 별다른 변모가 없고 전 시집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을 때는 시가 구원이다가도 지옥처럼 느껴진다.

수없이 파지를 내고도 시 한 편을 제대로 얻지 못할 때는 시가 두려워지고 이러다간 시를 영영 못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지고 조바심이 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새벽시장에 가거나 버스 종점에 간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다. 밤 12시에서 그 이튿날 1시까지 꼬박 12시간 넘게 자지도 않고 깨어 있는 그들을 보면 그 상인들이 마치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 같고, 차들의 떠남과 돌아옴이 되풀이되는 시 쓰기와 같아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떤 고통도 고뇌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정신의 끝을 조여 맨다.

정신이 느슨해진다 싶으면 나는 또 베란다에 매달아 놓은 풍경을 힘껏 친다. 그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용맹정진하는 수행자가 생각나고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가 떠오른다. 풍경 끝에 물고기를 매달아 놓은 것은 물고기처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때마다 나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에 매달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고통 없는 성장이 없듯이, 고통을 통하지 않고 좋은 시를 얻겠다는 생각부터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고통을 통하지 않고 좋은 시를 얻겠다는 것은 인생을 절망해 보지 않고 진실한 삶을 알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 시도 내 삶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그때의 시는 절실하고 진정한 내 삶의 다른 모습이다. 새 중에서 가장 작은 벌새도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바다는 하루에 70만 번씩이나 파도를 쳐서 새로워진다고 한다. 나는 내 몸을 얼마나 쳐서 시를 쓰며, 쓰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시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시는 내 자작(自作)나무이며 내 전집(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리듬의  신에 붙들리다

글 김혜순_시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1955년생. 시집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등

 

시를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한 번만 대답하면 될 것을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전에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해도 신문하듯 자꾸 묻는다. 질문을 받으면 생각한다. 저장된 답변 항목 몇 번에서 답을 꺼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말로 다양하게 할 수 있다. 대답을 듣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아니면 질문을 한 사람의 진정성의 정도에 따라서. 아니면 그 때 나의 기분에 따라서. 또 아니면 질문이 던져진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이번에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나에게 ‘시가 죽었다, 아니다, 아직도 살아 있다 라는 말이 팽배한 시대다. 너는 이런 시대에 왜 시를 쓰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번에 나는 아무래도 죽거나 상한 말의 성찬을 앞에 두고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배부르다고 말하는 사람의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부산국제영화제엘 다녀왔다. 나는 3일간 도합 9편의 영화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개봉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적 변방의 나라 작품들만 골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가 죽었다, 혹은 아니다,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시가 꼭 종이 위에서만 살아 있어야 하는가, 저렇게 영화 속에서 몸을 바꿔 살아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라고 시 나라의 방관자처럼 생각했다.

토니 갓리프가 만든 <추방된 사람들 Exile>이라는 영화는 리듬에 관한 영화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커플 자노와 나이마는 알제리로 떠난다. 말하자면 알제리 사람들이 잘 사는 나라를 찾아 떠나온 길을 그들은 거꾸로 간다. 그것도 걸어서 간다. 그들의 귀엔 2004년의 젊은이답게 테크노 리듬이 현란한 이어폰이 꽂혀 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안달루시아를 지나 모로코를 거쳐 알제리로 간다. 가는 길에 프랑스에서 불법 체류자가 되려고 하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만나 함께 농장에서 노잣돈을 벌기도 하고, 노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로드 무비를 지배하는 것은 음악이다. 그들이 가는 길은 음악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에 다름없다. 그들은 파리의 테크노에서 안달루시아의 12박자 플라멩고를 거쳐 모로코의 민속 음악, 최후로는 고향 알제리의 굿판에 이른다. 굿판에서 두 젊은이가 리듬의 엑스터시 속으로 빠져들어 온몸을 흔드는 장면은 무려 12분 이상 계속되는 데도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우리나라의 굿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술적 리듬의 엑스터시에 저절로 동참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지나가자 두 청춘 남녀의 얼굴엔 몸속에서 자신의 근원을 마주해 본 자의 해탈한 표정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는 고향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되리라.

리듬이 두 젊은이를 근원, 떠나온 땅의 원초적 이미지 속으로 끌어들인다. 리듬의 신에 붙들림으로써 연인은 개별적 동일성을 상실해 버리고, ‘우리’라는 드넓은 내적 동일성의 세계에 익사해 버린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진정한 엑스터시가 솟아오른다. 비로소 개별자를 해탈하고 그들은 경계없는 세계에서 해탈한다. 이 굿판에 참여하고 나서 두 젊은이는 할아버지의 묘비에 테크노 음악이 쏟아지는 이어폰을 꽂아두고 참 평화를 맛본 자의 미소를 지으며 고향을 떠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다. 내 시 속에서 내쉬어지고 들여 마셔지는 리듬, 그 리듬을 생각한다. 시의 리듬에 ‘나’가 실리면 ‘나’는 사라진다. 나는 ‘나’로부터 익명으로 이행한다. 나는 내 언어 속에, 내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리듬의 매혹에 빠져 시를 쓴다. 리듬 속에서 내가 지워지고 경계 없는, 명명할 수는 없지만 드넓은 ‘우리’라는 대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내 시의 주제이며, 의도이며, 인식 내용의 파도다. 나는 완전하게 ‘익명적 있음’이 되려고 시를 쓴다. 그것도 한국말로 쓴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말 속에서 완전하게 익명적으로 드넓게 퍼져 있으려고, 드넓게 퍼져서 내가 이 개별자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며 우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시를 쓴다.

내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맨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골치 아픈 영화, 그가 올해에 74세의 나이로 제작한 <아워 뮤직>이었다. 고다르는 아마도 자신이 현대의 단테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신 스스로를 21세기의 단테라고 믿는 모양이다. 영화는 지옥, 연옥, 천국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언술(이 영화의 시추에이션들을 장면들이라고 말하면 안될 것 같다. 그는 영화에서 ‘보여 주기’보다는 ‘말하기’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되고 있다. 지옥 편에서 그는 디졸브로 연결된 짬뽕을 보여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전쟁 자료가 뒤섞여 있다. 쓰러져 피 흘리는 사람들이 화면 가득 넘쳐난다. 이 때 감독은 웅변가다. 연옥 편에서 고다르는 질문자가 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사라예보의 재건 현장에 있다. 바벨탑이 막 무너지기라도 했는지 각 나라 언어와 각 시대 언어들이 번역 없이 쏟아진다. 마지막으로 천국 편에서 감독은 시인이 된다. 주인공인 올가가 미군이 보초서고 있는 어느 해안가에서 죽음 후의 평안을 얻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때 어디선가 섬광이 비추는 것도 같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한 편의 시론을 완성했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있지 않고, 각자가 인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시의 세계 속에서 시적으로 살다 간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 같다.

고다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스토리가 있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영화 속에서 소리친다. ‘시가 없는 나라는 망한다’라고도 한다. ‘눈을 감고 보라’고 하기도 하고 ‘눈을 뜨고 상상하라’고 하기도 한다. ‘천국은 멀리서 온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천국은 멀리서 온 것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늙은 고다르가 영화 속에서 줄곧 우리 각자에게 이미지의 세계를 가져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다르는 이 영화 속에서 우리가 개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함께 있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가 개념과 함께 하면 우리에게서 능동성이 나온다. 그 능동성이 우리를 전쟁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지와 함께 하면 우리는 멀리서 온 것에 지배를 받는다. 이미지와 함께 있는 우리에게선 우리의 근본적인 수동성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그 수동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야만 멀리서 평화의 섬광이 온다.

나는 고다르의 영화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시 속에 구축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모든 대상을,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헛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 옆에 있는 대상을 멀리서 온 것으로 덮어 씌워 그것들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 시에 들어오면 누구나, 어느 것이나 헛것이 된다. 그것은 이미지라는 부재하나 존재하는 것, 익명적으로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경계 있는 것을 시 속에서 허문다. 경계란 무엇인가. 경계는 몸으로 다가가보면 가장 넓은 곳이 아니던가. 하늘과 땅을 나누는 지평선을 밟겠다고 걸어가 보라. 영원히 지평선은 밟히지 않고, 결국엔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된다. 지평선이 지구만큼 넓어진다. 나는 멀리서 온 것,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 부재하나 익명적으로 있는 것을 지금 여기 내 앞에서 보려고 시를 쓴다. 나는 있는 것 속에서 일평생 살다가는 것이겠지만 시인으로 사는 동안 없는 것 속에서, 멀리서 온 것 속에서 일평생 살다 가는 것이다.

 

 

“시가  나를  이만큼 지켜  주었다”라는  말씀

글 장석남_시인,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1965년생.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등

내가 시라는 이름으로 처음 글을 쓴 것이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다. 몇 편 써 두었다가 그중 하나를 고른 것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데 다니던 학교 신문(1년에 한 번 나오는 소식지)에 투고를 했었다. 내 앞 자리에 앉았던 아이가 나를 다시 보면서 ‘너 같은 애가 이런 글을 다 쓰냐?’ 하는 내용을 가진 표정으로 “정말 좋은 것 같다. 한 번 내봐” 했다. 그는 공부를 꽤 잘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막상 학기말에 나온 그 소식지에 내 글은 없었다. 일언반구 가타부타 아무런 통보도 소식도 뭣도 없이 나의 글은 어디론가 침몰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침몰? 어린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알기로 자발적인 투고는 거의 나 혼자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일언반구도 없이 실리지도 않았고 되돌아오지도 않았고 읽어보았다는 풍문도 없었으니 그러한 심정이 될 만하지 않은가? 그저 형식적으로만 아이들에게 글을 내라고 한 것이지 사실 제출된 글을 어느 누가 눈여겨 읽어보았을 성싶지도 않았다. 읽어보았다면 내 시가 실리지 않을 이유란 없다고 굳게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그저 공부 잘 하는 아이들 내지는 호국단 간부생들의 시덥잖은 독후감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보나마나 그것도 죄다 자발적으로 낸 것이라기보다는 써오라고 해서 그렇게 실었을 것이 뻔했다. 하여튼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고 약간의 분노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다행히 앞 자리에 앉았던 그 아이는 내가 투고했던 사실에 대해서 일부러 그랬는지 상기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를 투고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내 마음은 여간 설레는 것이 아니었음을 역시 잊지 못한다. 과장하여 말하자면 한 구절을 쓰면 그 구절을 둘러싸고 그때까지 알고 느끼고 있던 여러 가지 빛과 바람들이 몰려들었고 또 한 구절을 써놓으면 또 다른 빛과 그늘과 물기들, 별들이 나란히 놓인 두 문장 위에 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참을 그 마술 같이 몰려든 풍경과 느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안타까움의 심정 같은 게 없을 수 없었다. 근원적인 향수가 그런 것일까? 그마저도 행복의 조바심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소년 시절을 회상해보는 것은 시에 관한 최초의 기억의 설렘과 씁쓸함이 선연한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차원은 좀 달라졌겠지만 비슷한 두 감정이 대립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당시 투고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상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남 몰래 시를 쓰면서 그 미묘한 설렘의 행복감 같은 걸 지속시켰을 지는 의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마저도 든다. 그때 이미 내가 하고 있는 시의 흉내를 누군가와 함께 보고 있다는 착각이 당시의 설렘 속엔 섞여 있지 않았을까?

소년이 청년이 되고 또 세상의 종이에다 시를 발표한 지 17년이 되었다. 이른바 등단이란 것은 내가 사는 명분을 찾아야 할 세속적 절실함이 없지 않았으니 그렇다 치고 나는 시가 내게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놓아본 적이 없다. 시를 발표할 기회마다, 청탁을 받아들일 기회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이건대 이러나’ 하는 적이 가벼운 상념에서부터 그것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서, 잡지 같은 데서 만나게 되는 형편 없는 시들과 시를 둘러싼 난삽한 속물적 거래들을 접할 때도 그렇다. 드물지만 내 삶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시를 만날 때 환기되는 시의 가치는 새삼 즐겁고 귀한 것인데도 여전히 내 시업의 지지부진은 내게 시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곰곰 따져보게 한다.

언젠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모신 소박한 강연 시간에 ‘시가 나를 이만하게 지켜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처음 그 말뜻은 내게는 좀 과장되거나 낭만적으로 들렸다. 시라는 것이 어떤 행위나 일상생활의 판단의 지침이 되는 것이 아닐 바에야 그것이 한 인생을 지켜주었다는 말씀은 시를 너무 숭고한 자리로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내 그 말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시가 삶을 지켜준단 말인가? 그 실마리는 가장 오랜 시의 정의 중 하나인 사무사(思無邪)라는 말로 이어진다. ‘거짓 없는 생각’이라 풀이할 만한 이 말은 시의 정의로서는 아주 알맞지는 않은 도덕성이 너무 많이 차지한 말이지만 나이가 들은 탓인지 그 뜻의 고리타분을 털어내며 자꾸만 내 생각에서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어갔던 것이다. 이 말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시는 남을 속이려는 그 어떤 것에게도 저항하는 것이며 특히 스스로에게는 더더욱 거추장스럽게 따라다니며 경계하는 언어인 것이다. 시는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것과 시의 정의 내지 의미는 가장 오랜 도덕적 정의와 단절되지 않는다는 시의 태생적 이중성과 그 간격의 긴장된 끈, 형식과 내용의 길항 관계는 늘 흥미롭고도 괴로움을 안겼다.

어쩌면 그러한 도발적인 발언은 그분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했고 또 그분의 신조였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만한 절제된 삶과 너그러움과 속되지 않은 자리가 아마도 시를 공부하고 쓰고 하는 과정의 영향 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의 노경은 시가 삶으로까지 이어진 예증이기도 하다. 흔히 시와 삶이 유리된 인생을 지적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친일시를 거론할 때도 그렇고 민중시를 거론할 때도 그렇고 순수시를 거론할 때도 해당된다. 원칙에서야 틀리지 않겠지만 그러나 시와 삶이 직선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곡선으로서, 먼 우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는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고 또 삶은 다시 시 속으로 스며들어가면서 서로의 삶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또는 질타하면서 가꾸어주는 것이리라. 그 맥락에서 ‘시는 이만한 나의 삶을 지켜 주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과장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다. 나와 같은 흔들림이 많은 천학(淺學)에게 그 말씀은 앞으로도 내내 되새겨질 것이다. 시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투명한 창이고 눈이어야 한다. 그 눈은 세상의 어떤 색과 틀과 때도 거부한 가장 투명한 본성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엔 적잖이 써서 내보낸 내 수준 낮은 시들을 들여다볼 일이 있었다. 혼자 하는 일이었음에도 계면쩍은 일이었다. 그곳엔 일말의 움직임이 없지도 않았다. ‘망명’이라고 이름 붙인 첫 시집과 ‘번짐’이라고 이름 붙인 맨 마지막 시집 속의 시 사이에 달팽이 기어간 자국 같은 것이 있어서 내 생각의 일말을 짚어보기도 했다. 시로써, 세상은 망명으로 견뎌내야 할 엄살의 장소가 아니라 어떻든 ‘번져가’ 봐야 할 장소로 인식하고 발표한 장이었다는 사실의 발견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내게 시는 그래서 저 거창한 말, 청춘 시절엔 별 뜻 없이, 그러나 비장하게 사용하던 말, 여전히 얼마쯤은 유효한 ‘구원’의 일말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시가 이만하게라도 내 삶을 지켜주었다’는 완료형의 말씀이 앞으로도 진행형인 내 시와 삶 앞에서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글 이원_시인. 1968년생.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등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오빠가 죽고 중학교 1학년 겨울 아버지가 죽었다. 오빠가 죽었을 때는 바랜 가을 햇빛이 가득했고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희디흰 폭설이 가득했다. 그때 반짝이는 것은 햇빛이거나 눈이었고 나도 그들의 죽음 밖에 있었으므로 반짝였다. 오빠가 죽고 나서 아버지는 심하게 우울해 했고 술을 많이 마셨다. 크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이 늘 불편했다(슬펐다기보다는 불편했다).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죽은 아버지가 정말로 살아 돌아올 것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처럼, 다시 아버지가 돌아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집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집 밖으로 난 길로 들어서지도,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 밖과 집 안의 가파른 경계에서 왔다 갔다만 했다. 꿈에 날이 새도록 한 이불을 덮고 밤새 글짓기를 가르치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아버지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꿈속에서 나는 졸면서도 아버지의 얘기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발과 아버지의 발이 닿자 차가웠다. 누구의 발이 차가웠는지는 알 수 없었고 꿈에 찾아온 아버지는 생시보다 덜 낯설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말했지만 오빠가 죽은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게 그런 피붙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그렇게 믿어지기도 했다. 재수할 때 친구 엄마를 따라 점쟁이에게 갔는데 형제 중에 먼저 죽은 사람 있지, 라는 점쟁이의 도식적인 한 마디에 지레 놀라 내가 먼저 훼손되어버린 가족사를 다 얘기해버렸다. 즉각적으로 심장판막증을 앓던 오빠가 내 몸 속에서 다시 부활했다. 오빠의 입술은 여전히 새파랬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조심스럽지만 낭패감이 뒤덮인 얼굴로 정말이니 하고 묻던 친구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예대 2학년 때 기형도의 「위험한 가계 1969」를 읽고 숨겨둔 가족사를 「소곡」이라는 제목의 시로 썼고 수업 시간에 합평도 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쓰지 않으면 계속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번도 정면으로 쳐다본 적이 없는 그 죽음들을 통과하지 않으면 시는 내게 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용기가 생겨났고 그 시를 쓰고 나서 그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다. 두 개의 무덤이 들어와 있는 내 몸도 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처는 어두운 것만이 아니라 반짝이기도 한다는 것을, 어둠과 햇빛은 한 몸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여전히 안과 밖의 어느 곳으로도 들어서지 못하는 경계에 있었지만, 불안을 겹겹으로 껴입고서도 자꾸 시가 쓰고 싶어졌다.

시를 쓰면, 내가 세상의 어딘가와 닿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내게는 늘 세상이 낯설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창 밖이 낯선 것이 아니라 내 두 다리로 딛고 서 있는 창 안이 낯설었다. 잘 모르는 사람보다는 바로 옆 사람이 더 낯설었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죽음을 겪기 전부터 시작된, 태생적 불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북적대는 세상 속으로 몸을 쑥 집어넣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직감했던 것 같다. 뒤뜰의 햇빛 속에 쪼그리고 앉아 깨진 유리병 조각을 한 없이 들여다보던, 방에 웅크리고 앉아 퍼담아 온 색색의 흙을 한 없이 들여다보던 그 시간들부터. 그리고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 사실을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내가, 시를 쓸 때만은 세상에 닿고 있다고 느껴졌다. 아니, 분명 내 몸은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 시 쓰는 순간의 나는, 살고 있었다!

자라면서 내가 꾸며댔던 거짓말처럼 어느 날 나는 시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 쓰는 사람이 되어 여러번 아버지의 죽음을 말했고 오빠의 죽음을 밝힌 연보도 썼다. 「소곡」을 썼던 그 순간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내 몸 밖으로 꺼낸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은 박제되었고 패턴이 되었고 그것을 말하는 나는 점점 아프지도 않아졌다. 나는 오빠와 아버지의 죽음의 무덤인 내 몸을 싫어했지만 죽음이 사라진 텅 빈 몸은 더 싫어졌다. 나는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을 살리기 위해 내 몸 속에 다시 넣었다. 내 몸에서 사라지지마, 말 안 할게.  

유목민은 자신들 스스로를 유목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몸에는 유목의 대척점인 정주의 흔적이 없는 까닭이다. 한 곳의 집과 뿌리를 가졌던 자만이, 그러나 어느 날 그것에 온몸이 통째로 타본 자만이, 그리고 흉터가 뒤덮인 그 몸으로 세상을 떠돌게 된 자만이, 유목민이라는 말을 새로운 유전자로 갖는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나서도 낮에는 햇빛이 낯설고 밤에는 불빛이 낯설다. 아니 점점 더 낯설어진다.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는 나는 이제 부재만이 나의 유일한 존재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느닷없이 죽음과 함께 살게 된 어렸을 때보다 지금의 몸이 더 많은 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뿌리를 갈망한 적이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삶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없이 달래고 쓰다듬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비명 지르고 싶은 시간들이 내게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비명을 몸 안으로 넣고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비명이 삶을 일으켜 세워준다는 것도, 비명이 내 날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이제 삶이 그리 비장하지 않은 것임을 안다. 시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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