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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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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인 중국 기행 시모음/중국 현대시 개요
2016년 07월 29일 21시 02분  조회:4193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 기행시 모음

 

 

1. 
金鞭溪谷에서 
이시환 


누가, 눈먼 내 소맷자락을 잡아끄는가? 
낯선 그대 손길에 이끌리어 한 걸음 두 걸음 
더딘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놓을수록 
어느새 이 몸에도 초록빛 물이 들어 
물가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마네. 

누가, 벙어리가 된 내 귀에 속삭여대는가? 
가도 가도 끊기지 않을 물길 따라 
이미 나도 흐르기로 했네, 흘러가기로 했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저 깊은 하늘에 이르는, 
숨 쉬는 물이 되기로 했네, 구름 되기로 했네. 

-2004. 12. 24. 22:37 



2. 
장가계를 빠져나오며 
이시환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바다가 솟아올라 
높고 깊은 산이 되었는가. 

실로 오랜 세월, 
안개에 가리우고 구름에 덮이어서 
알몸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던 네가, 

오늘 비로소 한 마리 거대한 地鬼가 되어 
꼬리는 깊은 산정호수에 두고, 
머리는 구름 밖으로 내민 채 꿈틀대는구나. 

나는 분명 그런 너를 보았으나 
보지 아니한 것으로 하리라. 
가슴 속에 다 묻어두고 내가 죽는 날까지 
침묵을, 침묵을 지키리라. 

내 입을 여는 순간, 
네가, 네가 굳어버린 돌산 숲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리라. 

-2004. 12. 28. 23: 14 



3. 
황룡동굴(黃龍洞) 
이시환 


있지도 않는 용(龍)을 각별하게 좋아하는 백성들이 
‘天下第一奇觀’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는 황룡동굴에 
나도 잠시 틈을 내어 가 보았네 그려. 

그렇게 높지도 않은 산허리로 뚫린 
지하문(地下門)으로 들어서면 놀랍게도 
그곳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깊은 강물이 흐르네. 
그 하늘 그 땅 사이로는 
온갖 꿈틀대는 생명체들의 동작이 일순간에 정지 된 듯 
모두 숨을 죽이고 있네. 
하지만 저들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내 어떻게 피할 수 있으랴. 

하늘을 떠받드는 것인지, 
저마다 기운을 뽐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고 놈들을 요리조리 눈이 빠지게 쳐다보노라면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마녀(魔女) 중의 마녀의 깊은 자궁 속임을 알아차리고는 
스스로 놀라고 마는 것을. 

그대여, 저들을 꿈틀거리게 하라. 
그대여, 저들을 제 멋대로 움직이게 하라. 
그리하여 음기(陰氣) 가득한 이 왕국, 이 골짜기에 
생명의 기운이 요동치게 하라. 
그리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라. 
일으켜 세우시라. 

**중국에는 시인다운 시인이 없는 듯하다. 이 황룡동굴 앞에 몇 자 끄적거린 것이 
고작 “中華最佳洞府 天下第一奇觀”과 같은 글들이고 보면,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비문에 그럴 듯하게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현대를 살고 있어도 그들은 옛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내 이 시를 짧은 시간에 지어 기쁜 나머지 잠시 오만을 부려본다. 
-2004.12.30.19:32 



4. 
구름바다 
이시환 


비행기 창밖으로 내다보는 
저 뭉실뭉실한 구름바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햇솜을 막 펼쳐 놓은 듯 

뛰어 내려 
마냥 뒹굴고 싶어라. 

오늘은 이곳 
천자산(天子山)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그가 

마치 비단 치맛자락을 깔아 놓은 듯 
나를 유혹하네.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 
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2005.01.02. 20:29 


5. 
너와 나 
-금편계곡에 부쳐 
이시환 

안개인가, 구름인가? 
이곳 계곡에서 보면 안개이고, 
저곳 산위에서 내려다보면 구름이리라. 

이쯤에서 한 사나흘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밤낮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듣노라면 
눈을 감아도 저들의 알몸이 보이고, 
그 알몸 속 투명한 영혼의 옷자락도 보이리라.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저들이 내게 건네는 말소리 들리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들리고, 
저들의 숨을 죽이는 숨소리마저 들리리라. 

안개인가, 구름인가? 
이곳 계곡에서 보면 안개이고, 
저곳 산위에서 보면 구름이리라. 

이젠 내가 뒹굴던 
호남평야 끝자락 허허벌판에 서 있어도, 
배회하던 서울 시내 칙칙한 뒷골목에 서 있어도, 
멀리 아프리카 초원이나 사막에 서 있어도, 
그 어디에서든 나는 듣는다, 너의 속삭임을. 
발뒤꿈치 들고 종종 따라다니는 너의 숨소리를. 

-2005.01.02. 11:45 



6. 
그리운 이에게 
-장가계에 부쳐 
이시환 


너와 함께 살고파라. 
너와 함께 살고파라. 
너와 함께 찬란한 아침해를 맞고 
너와 함께 영롱한 저녁별을 맞으며 
너와 함께 밤낮을 얼굴 마주 보리라. 

하지만, 하지만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외로워지고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숨 막히고 
너를 가까이하메 내가 더 두려워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 사연이 무엇이더냐? 

사시사철 말없이 天衣無縫 드러내 보이는 
장엄한 너의 품에 안겨 내가 죽는다면 몰라도, 
아침저녁 말없이 안개 구름바다 피워내는 
신비로운 너의 품에 안겨 내가 다시 산다면 몰라도 

네 곁에 머물 수가 없구나. 
네 품에 안길 수가 없구나. 

나는 그저 멀리서 너를 바라보리라. 
나는 그저 멀리서 너를 그리워하리라. 
나는 그저 멀리서 노래하리라, 너를, 너를. 

-2005.01.01. 18:44 



7. 
만리장성(萬里長城).3 
이시환 


목이 타는 가뭄. 
끝내 해갈이 되어도 
가뭄이 그리워지는 가뭄이다. 

-2005.01.02:53 


8. 
만리장성(萬里長城).2 
이시환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얼마나 많은 인권을 유린하였을까?) 

인간의 욕망이 욕망을 짓이기면서 쌓아올린 
장엄한 무지렸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아니면 변방 요새에 
그런 성(城)을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지. 

2005.01.01. 02:44 


9. 
만리장성(萬里長城).1 
이시환 

맑고 푸른 하늘이었으면 좋겠다. 

아주 길게 한 모금 빨고서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리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제 손등으로 떨어지고 마는 
담뱃재 같은 것. 

흐린 구름떼가 몰려온다. 

-2004. 12 31.23:35 



시화 1 
-중국 장가계張家界* 
도지민 



천지창조 때가 이러했을까 
모진 산통 끝에 
낳은 아가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그 전율이 
이러했을까 

전신이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고 
눈 앞의 오색몽롱함이 걷히고 
이어 눈부시게 등장하는 
숨이 터억 막힐 듯한 장가계의 무릉원 
하늘 닿을듯 주욱죽 뻗은 
울창한 석림石林들 
높고 낮은 그 자태마다 
다투어 읊어내는 명시들의 합창 

몸소 구름을 생산해 내는 듯 
온세상의 폭포란 폭포가 다 모여 
함께 어울어진 무희들같기도 하고 
곧 본 막이 오를 듯 
숨 죽인 비경 사이로 
선녀들이 흰 옷자락을 폴폴 날리며 
몹시도 분주하게 
골짜기마다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듯 

겹겹이 걸쳤던 뭇 언어 대신 
와아 와아 탄성들만 빗발치는 곳 
온김에 나 이곳에 움막을 짓고 
영영토록 눌러 살면 아니되오리까 

문득 떠오르는 우리 부모님 
나 먼저 이 곳에 와 훔쳐 본 죄 
정말로 죄송합니다. 



시화 2 
-천자산, 토가족의 노래 
도지민 


용암을 녹여 마시면 
저리 고운 음색이 될까 
석림에 푹 젖은 오색안개를 
고농도로 압축하여 
가느다란 현을 빚어 목젖에 걸면 
저리 고운 소리가 날까 

천자산 꼭대기 
보석같이 맑은 호수를 유람하다 
먼데서 방문한 손님을 향해 
덤으로 들려주는 토가인의 노래 소리 
천만년을 익혀온 현악 연주에 
깊은 계곡 새벽이슬만 마신 목청이라 

그 청아한 음악에 
이미 혼은 빠져나가고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절벽에 달라붙은 달팽이 계단을 밟고 
끝도없이 뱅그르르 돌고돌아 
어찔한 채 몸만 겨우 빠져나오다 

무릉의 문턱을 넘어갈 때 
다른 것 다 잃어도 혼만은 잃지말라는 
가이드의 누누한 당부가 
괜한 말이었을까 

토가인이 뺏어간 나의 혼 
지금쯤 발등까지 밟혀 
천자산 기슭 어느 아담한 토가네에서 
그만 눌러 사는가 보다. 


시화 3 
-무릉원, 십리화랑길 
도지민(綾波) 


모노레일 열차를 타고 
십리 풍경 속으로 서서히 잠수를 하는데 
세모네모동그라미 그 어느모양으로 보아도 
하늘과 완벽한 구도를 이루는 신의 명화들 
누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가 
그럼 저 그림을 어느 유명 화가가 그렸단 말인가 
어찌 십리만 화랑이라 이르는가 
십리 밖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까지 
일단 눈의 화폭에 담기만 하면 
모두가 살아 숨 쉬는 그림 그림들 
그러고 보니 
이 세상 어느모로나 문명의 이기만 빼면 
하늘 아래 모두가 화랑이겠다 
이 그림들에 합류하는 이들은 
옥의 티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걸어서 가야 하리 
모자를 벗고 
신발을 벗어 놓고 
남녀 모두 자유롭게 알몸둥이 그대로...... 


시화 4 
-황룡동굴에서 
도지민(綾波) 


선악과 사건 이전의 이브, 혹은 
태초를 잉태했던 동정녀의 자궁같은 
굴의 입구에 서면 
꼭히 머리를 숙여야 들어 설 수 있는 
행복문과 장수문이 
양쪽 나팔관처럼 열려 있고 
어느 문턱을 넘든지 비집고 들어서면 
어찌 행복과 장수 뿐이겠는가 

보라 
천만년 걸쳐 세공을 하던 
일천 칠백의 오묘한 석순과 석주들이 
여느 왕 대하듯 
일시에 하던 일 뚝 멈추고 
길 양 옆으로 엄숙히 비켜 서 있고 
끝보이지 않는 양수같은 호수에는 
어여쁜 처녀 뱃사공들이 열지어 기다리고 
하늘보다 더 아득한 천정까지 이어진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오르면 
모태를 통한 맥박처럼 
여기저기서 들리는 물방울의 하모니 

감미로운 그 음악에 
스르르 두 눈을 감으면 
태반의 자리에 건설된 자궁 속의 궁전 
어느 누구라도 앉으면 주인이 될 
텅 빈 권좌權坐가 
태초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시화 5 
-북경, 의화원* 장랑길을 걸으며 
도지민 


참으로 좋았겠구나 
하루 밤 정사 
단 한 번 뼈와 살을 불살라 치러 주고 
감쪽같이 사라져 주었던 
의화의 눈에 들었던 수 많은 장골들이여 

이래저래 개죽임 당한 천인들에 비한다면 
단 하룻밤 
별을 따기보다 더 힘들 그 아리따운 왕비 품에서 
마지막 성찬에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리 죽은 목숨이야 호강 받은 죽임이지 

보아하니 그 여자 
세상 호령하던 서태후도 지레 겁 먹은 
으시시한 색골을 아마 타고났었나 
왕도 어쩌지 못해 저 성깔대로 내버려 둔 듯 
의화원의 천인공노, 아연실색할 현장 

오늘에 
의화원의 장랑길 발 아프게 걷다보니 
지금쯤 그 여자 
단 하루밤 즐겁게 해준 이름조차 모를 
헤아릴수도 없는 장골 귀신들 틈에서 
죽고 싶어도 이젠 죽어지지도 못하고 

아랫도리 썩어 문드러지도록 
이내 또 이내 번갈아 끌려다니며 
네네네네 그럽죠 그럭허죠 
영원토록 그짓거리에 
천벌 받는 꼴을 보네. 


돌숲 
박종해 


세상에 돌의 숲이 있다는 것을 
머나먼 중국 운남성 곤명시 
석림石林에 와서 보았네. 
기기묘묘한 뾰족한 돌들이 
삼라만상의 모양으로 숲을 이룬 
돌의 나라. 

저 아름다운 침묵. 
자연의 황홀한 연출 앞에 
잠시 숨이 멎어 푸른 하늘을 보니, 
거기 우둑 솟은 돌의 산. 
세상의 신비란 신비는 다 불러모아 
나의 걸음을 붙잡고 있는 너희들은 
억만년 전에 누구였던가. 
아리따운 남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돌문을 열고 걸어나와 춤을 춘다. 
아! 너희들 앞에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화원에서 
이하영 


아름다운 침실이며 태산 같은 금은보화 
천하를 호령하던 어제의 비단금침 
오십 년 세도 정치에 죽은 백성 얼마인가. 

서태후 걷던 길을 호사하게 걸어본다 
곤명호에 배를 타고 금수산을 바라보니 
하룻밤 놀이개로 죽어간 원혼들이 보인다. 



자금성에서 
이하영 


어린 황제 뛰어놀던 구만 평 넓은 뜨락 
허수아비 황제들 갇혀 살던 구석까지 
단단한 붉은 벽돌을 여섯 겹을 깔아다나.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는 넓은 마당 
호통은 서릿발인데 역모만 무성하다 
대궐 안 호사스런 삶도 알고 보면 바늘 방석. 

금색으로 도금한 궁궐 보기야 좋다만는 
공짜로 준다 해도 나는야 그건 싫어 
산속에 작은 내 집이 궁궐보다 좋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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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_ 문화혁명 이전의 여러 유파를 중심으로 -

               

김 금용 시인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외세침입에 의한 봉건주의 붕괴와 함께 서구 세계의 문예사조가 일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신시와 근대시, 그리고 현대시의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단에서는 1917년에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탈바꿈한 白話운동을 포함한 신 문학운동을 기점으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를 현대시의 발생기로 본다. 즉, 백화운동으로 중국문자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개인과 문학이 말살된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통틀어 현대시라고 부르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문단의 통설에 따라 1907년 루쉰魯迅이 서구의 셀리, 바이런, 키이츠, 푸슈킨 등의 시들을 白話로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중국의 신시와 문화혁명 이전까지를 현대시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7,80년대 이후의 시를 중국문단에서는 ‘당대시當代詩’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필자는 중국 당대시를 크게는 현대시의 범주에 넣어서, 각 시대별 유파들의 특성과 그 시정신을 짚어보려 한다

 

 

“白話”를 매개로 한 신문학운동

 

본격적인 신시운동은후스胡適(1891~1962)가 1917년《신청년》 2월호에서 “한정된 형식에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없다”며, 시의 형식 타파를 주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 정형시 형식으로부터 이론적 탈바꿈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 되는 낭만성, 상징성, 산문성 및 사회성을 도입함으로써 일약 시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후스胡適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할 때 접하게 된 서구 문예사조는 후스 뿐만 아니라 중국 신지식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들은 앞다퉈 전문 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시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시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국,공 내란의 정치적 압박과 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20,30년대는 중국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롭고도 치열한 심도의 시 전성기를 이뤘다고 할 것이다.

 

까마귀

               후스*

 

나는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사람들 지붕 모서리에 서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네

사람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미워하네

나는 그네들 사랑 받자고 재잘거릴 줄 모르네

몹시 춥고 바람센 날에도 돌아가 쉴 곳이 없네

후략

『상시집嘗試集』에 수록

 

老鴉 

                                胡適

我大清站在人家屋角上啞啞的啼/人家討嫌我,說我不吉利;--/我不能呢呢喃喃

寒風緊,無枝可棲。/我整日裏飛去飛回,整日裏又寒又飢。---/ 

                                                         <收錄於嘗試集>

 

윗 시는 후스가 1924년(32세)에 발표한 시이다. 까마귀는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한편,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건왕조가 붕괴된 새 체제의 불안 속에서 자신이 품고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을 잘 투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군중 " 群" 과 나 자신 "己" 속에서 갈등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첫 행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홀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이며, 또한 깨어나 먼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이의 고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4.5행의 "無枝可棲""又寒又飢" 역시 춥고 배고파도 돌아가 쉴, 혹은 머물 나뭇가지 하나 없는 자신의 선구자적 존재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백화문으로 쓰여지고, 격률시의 정형성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20년대 초기 작품이지만, 상징과 은유, 역설적 표현이 잘 드러난 최근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등과 함께 <新月派>의 대표적인 시인인 원이둬聞一多는 시“여신의 地方色彩”에서 음악미와 건축미를 내세우며 현대시 리듬을 주창했으며, 리진파李金髮 는 프랑스의 상징시에 영향을 받아 <早期象徵詩派>를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오늘날도 애송하는 국민시인 궈뭐루어郭沫若 역시 이 <조기낭만파>시인으로 <創造社>를 통해 유미서정 경향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호반시파湖畔詩派>, <문학연구회>가 루쉰魯迅과 빙신氷心, 주즈칭朱自淸, 조우줘런周作人 등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수용, 비약을 시작했다.

 

 

상징파 시의 출현

 

상징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중국 고대 시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창작법이나, 5.4운동 당시 『소년중국』『소년월보』『신청년』『창조주보創造週報』『어사語絲』등을 통해 소개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시가 소개된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어사語絲』에 상징주의 수법의 시를 처음 소개, 가장 왕성한 상징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5년부터 27년까지 3년간 《이슬비微雨》,《행복을 위한 노래爲幸福而歌》, 《식객과 흉년食客與凶年》등 세 권의 시집에 총 450 여편을 발표했다.

 

   버림받은 여인

                           李金髮리진파

 

긴 머리칼이 내 눈앞을 가리자

일체의 부끄러운 질시와

붉은 피의 급류, 앙상한 뼈다귀의 깊은 잠과 단절되었다.

칠흑의 밤이 모기떼를 몰고 천천히 다가와

낮은 담 모서리를 넘어와

결백한 내 귀에 대고 울부짖는다

황야를 휘돌며 노호하는 광풍이

무수한 목자들을 전율케 하듯

 

棄婦

長髮披遍我眼之前/ 遂隔斷了一切羞惡之疾視/ 與鮮血之急流, 枯骨之沉/黑夜與蚊蟲聯步徐來

/越此短墻之角/ 狂呼在我淸白之耳後,/如荒野狂風怒號./戰慓了無數遊牧

 

윗 시는 《이슬비微雨》에 수록된 대표시 중 하나로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한 스무 살의 리진파의 문화적 충격과 이방인으로서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棄婦’는 삶의 고달픈 숙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실 리진파 자신이 유학 중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외로움, 조국에 대한 고뇌, 방황, 절망에 이르는 비극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에서 팽배하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와 퇴폐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전반에는 현실에 대한 허무, 비애, 무능, 권태 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기떼를 몰고 오는 칠흑 같은 밤은 무고한 그의 귀에 와서 울부짖으며 그를 괴롭힌다. 외우내환으로 들끓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자화상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詩怪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그가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부유한 생활을 했음에도 시에선 상당한 퇴폐성과 삶의 절망 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新詩운동을 전개시키며 서구의 문예사조를 재빨리 흡수, 바로 현대시로 발전시킨 당대 시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이 구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상징파 대표시인인 리진파는 홍콩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후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가 뉴욕에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대 상징파시인의 하나라고 불리던 왕두칭王獨淸 일본과 프랑스에서, 무무티엔穆木天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펑나이차오馮乃超 역시 동경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외국문물을 접했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순수시를 표방하고 신비주의, 유미주의 경향을 나타냈는데, 리진파는 베를렌을, 무무티엔穆木天은 라파르그(Lafargue)를, 다이왕수戴望舒는 야메스(Jammes)를, 스민石民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모두 인정하였다.

이들의 시에선 공통적으로 상징수법의 하나인 강렬한 암시와 음감과 색감을 동시에 결합시킨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특히 왕두칭王獨淸(정+힘) + (음 + 색)=<시>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라마틴(Lamartin)으로부터 情을, 베를렌에게선 音을, 랭보(Arthur Rlmbaud)에게선 色을, 라파르그(Lafargue)에게선 을 전승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新月派>의 대두

 

중국인민들이 지금까지 애송하는 국민시인,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모두 신월파 동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색은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시즘에 대항하며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와 부정부패에는 저항하였다. 때문에 한때 국민당의 사찰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전국이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바뀌자 5,60년대 중국학자들로부터는 매판자본주의 문학단체 혹은 반동적집단이라고 비판을 받다가, 8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신월파>는 사실 인도의 타고르의 시집『초승달』(중국어로 新月)이란 이름에 매료되어 滿月이 되자고 1923년 북경에서 쉬즈뭐徐志摩가 발기한 사교 모임이었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는 해외유학파였으므로 여러 계층의 신사들을 모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하고 문학을 품평하다가 사회개혁을 시도하자는 뜻으로 동인들의 자본을 모아 1924년 12월에 『현대평론』을 창간하였다. 1927년, 북벌군에 쫓겨 상해로 온 시인들과 남경이나 해외에서 들어온 전국시인들이 모여    후스胡適를 세워 <신월서점>도 열고 19세기 말 영국의 문예지 『Yellow Book』을 닮은 정사각형 종합지도 발간했다.

<신월파>의 공동신념은 자유주의, 인도주의, 개성해방이었으며 격율시를 제창했다.

격율시란 시행의 장단이나 시의 韻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통시가 무너지면서 실험시가 넘쳐 만 여 편 이상이 발표되었으며, 방만한 낭만주의나 산문시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고 전통시의 절구시나 율시의 형식을 일부 이식, 조화롭게 정리, 발전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시어의 음악화, 방언의 시어화를 시도했다. 원이둬聞一多는 특히 음악미, 회화미, 형식상 균형을 지키자는 건축미를 주창했다. 일부는 <신월파>를 말린두부시(豆腐乾詩)’‘모꼴시(方塊詩) 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권, 자유, 민주, 법치 등을 강조하는 서구 영향 아래 中體西用을 실험적으로 응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혁명문학의 팽배와 항일운동의 봉기, 후에 좌익작가연맹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이들이 이끌던 『현대평론』은 1928년 정간이 되었다. 다시 쉬즈뭐徐志摩가 『詩刊』을 매주 한 번씩 발간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함으로써, 동년 6월, 11호로 정간되고 말아 <신월파>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요한 밤

                            원이둬

 

 이 등불, 등불은 사방의 벽을 하얗게 씻어내고

점잖게 놓인 탁자와 의자는 친구처럼 친밀하다

고서의 종이 향내가 간간이 밀려오는데

소중한 찻잔들은 정숙한 여인처럼 청결하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홀짝홀짝 젖을 빨고

큰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리는 듯 코를 곤다

 

這燈光, 這燈光漂白了的四壁 / 這賢良的卓椅, 朋友似的親密, / 這古書的紙香, 一陣陣的襲來/   要好的茶杯, 貞女一般的潔白,/ 受哺的小兒, 接呷在母親懷裏/鼾聲報導我大兒健康的消息...//

                                            聞一多 <靜夜> 中 一部

 

윗 시에선 그의 주장대로 각 행 머리를 로 시작하였으며 행의 중간마다 을 넣어줌으로써 節의 균형과 句의 규제가 반복적으로 쓰여 리듬과 일정한 건축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격율이란 단순한 음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회화적, 건축적인 복합 차원의 형식의 규제이다. 따라서 자연대로의 수용이 아닌, 예술의 구성을 통한 唯美性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신월파>와 <상징파>를 수용한 <현대파>

 

1930년대 대표적인 유파는 현대파이다. <현대파>는 본질적으로 <상징파>를 계승, 발전했다. 두 파간의 상호 인적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생명을 표현에 두고 시의 궁극목표를 순수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현대파>는 1932년 5월, <現代書局>의 출자와 시저춘施蟄存. 두헝杜衡의 편집으로 간행된 종합문예지 《현대》에서 시작되어 다이왕수戴望舒가 본격적으로 현대주의의 기치를 들고 『新詩』를 창간하면서부터 전 중국시단을 휩쓸게 된다. <상징파>와 <신월파>의 쇠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종전의 <상징파> 인물이었던 다이왕수戴望舒가 <현대파>를 접수하고 여기저기에서 현대파 경향의 신 잡지들이 탄생하게 된다. 36년부터 37년까지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시단이 항전체제로 전환되기까지 <현대파>는 최고의 성숙기를 맞아 다이왕수戴望舒는 비엔즈린卞之琳, 펑즈馮至, 쑨다이위孫大雨, 등과 공동편집으로 현대시의 조류를 강렬하게 펼침으로써 5.4운동 이래 중국 시 최고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현대파>가 궁극에 둔 것은 순수시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중국전역이 <상징파>의 낭만과 신비로움, 난해한 시가 넘쳐 난데 대한 반발로 자각적인 상징파*3로 불리던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파>의 암시법과 상징법, <신월파>의 낭만성과 격율시 등을 조화시켜 몽롱미와 복합적 이미지의 조합을 이뤘다. 또한 순수시정, 시의 산문미의 특성을 갖춤으로써 <상징파>를 수정, 계승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파는 상징파보다 훨씬 화해적이고 통일적이며 주지적이고 <상징파>의 지나친 암시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을 벗어나 좀더 직관적이고도 단순적 이미지로 시의 영역을 훨씬 명랑하고 격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비관적 서정풍과 이미지 조합에 실험성을 가미한 심상풍, 직설이나 격정을 유보하면서도 현실비판에 맘을 둔 사실풍,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첨예화된 현대의식을 표현하려던 회화풍 등 여러 가지 경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현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정적 낭만과 격율적 형식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고전적 이성으로 현대적 상징과 심상의 융합을 꾀하는 시인들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선 <현대파>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영미계 현대주의와는 그 특징을 조금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 내리는 골목

                                다이왕수戴望舒

 

종이우산을 받들고, 혼자

길고 긴, 텅 빈

비 내리는 골목을 방황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라일락처럼 근심과 원한을 맺은

소녀와 만나게 되기를

 

撑着油紙傘, 獨自 / 彷徨在悠長, 悠長 / 叉寂寥的雨巷,我喜望逢着 / 一個丁香一樣地 / 結着愁怨的姑娘//                                               <雨巷> 中 一章

 

윗 시는 다이왕수가1927년 4.12사태에 연루되어 스저춘施蟄存 시인의 집에 숨어 지낼 때, 프랑스 시인 베를렌에 도취되어 쓴 시로 이 시는 1928년 《소설월보》에 발표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르렌의 <가을의 노래>와 견주어지곤 하는데, 슬픈 리듬이 노래처럼 강물처럼 흐느끼는 걸 느끼게 한다. 종이우산이나 긴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골목, 빗속에 남보라 빛 그늘을 드리우는 라일락, 그 라일락처럼 향과 슬픔을 함께 지닌 소녀와의 마주침 등이 이슬비 속에 연결되어 창으로 번지는 빗물같이 물안개같이 읽는 독자들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인식이나 설명이 없이도 응축된 서정이 흐르며 시어가 절제되어 해이하지 않고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파의 특성 중, 애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울을 서정풍이면서 삽화풍으로 그려낸 초창기 다이왕수의 대표시이다.  

 

단장 

                                 비엔즈린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断章                              卞之琳

你在桥上看风景/看风景的人在樓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1935년 10월에 발표된 이 시는 장시의 한 부분으로 후에 독립시켜 《断章》 제목을 달았는데, 중국 현대문학사상  짧으면서도 내포한 함의가 풍부한 명시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철학은,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도 "나의 의도는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중시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응축과 절제가 잘 이뤄진 현대파의 대표적인 시이다.

 

 <항전시>의 출현

 

시의 열풍이 강해질수록 독자들과는 소원해지는 당시 중국 상황은 일부 시인들이 복잡다단한 외세와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성과 우울한 정서에만 치중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괴리가 한창 심각해질 때,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항일전쟁 수행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상징파, 신월파, 현대파 시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유파와 관계없이 항일을 위한 민족적 위기감으로 그들은 뭉쳐서 시 낭송회와 좌담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정권의 "외세를 축출하기 전에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반공 주장 때문에, 그들은 반공 열기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국.공 대립에 밀려 좌.우익으로 갈리고, 갈등과 분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를 위한 문예가 아니라 붓을 무기로 삼아 거리로, 시골로 뻗치는 가두시나 선동적 낭송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8년간(1937, 7월- 1945.8월)이나 계속된 항전은 급기야 시의 변화를 가져왔다.

낭송시의 단소화, 민족형식의 장편서사화, 정치시의 대중화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 때부터 낭송시, 가두시, 전단시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1938년엔 가두시가운동선언까지 나왔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항전문학도 1942년 공산화가 자리 잡히고,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은 모든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여야 하고 정치노선을 찬양하며 정치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연설하면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은 파괴되었다.

 

시인들은 외국의 침략과 좌파와의 충돌이란 두 가지 짐을 져야 했다. 한창 누렸던 민주화 물결 속의 개인의 사상이나 사고, 자유의지 등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며 대중화되고 통속적, 산문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항전시기의 시는 20여 년의 신문학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좌익 정치노선의 구호에 내밀리며 대중화 시가 되었으며 민족화의 요구로 인한 개념화, 공식화의 현상을 가져와 예술성의 조잡함과 과도한 사상의 노출 등 결함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전초기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과 함께 불붙어 모든 시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즉,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국민과 위기의 조국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합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모두 대외투쟁에 나서자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뒤, 시인들 중에는 항일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시를 쓴 아이칭艾靑 같은, 후세까지 존경받는 시인이 있었으며, 다이왕수戴望舒와 비엔즈린卞之琳, 허치방何其芳, 무무티엔,穆木天, 좡커자臧克家, 루이스路易士, 루위엔綠原, 무단穆旦, 신디辛笛, 자오링이趙令儀 시인들도 시의 형상화, 심오한 경지화, 내성적인 시를 씀으로써 끝까지 순수시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국가의 위기는 시인들을 더 많이 고무시키고 단합하게 만들어 한편에선 항전과 무관한 순수예술이 계속 발표되었다.

 

나는 이 대지를 사랑한다

 아이 칭

내가 만일 한 마리 새라면

나는 응당 목이 쉬도록 노래할 것이다

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

저 우리들의 비분이 영원히 용솟음치는 강줄기,

저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격노한 바람,

그리고 숲 사이로 다가오는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여명,.....

_____ 그 후에야 난 죽을 것이다

깃털조차 토지 속으로 썩어 들 것이다

 

왜 나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내가 이 대지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我爱这土地

                              艾 青

仮如我是一只鸟, / 我也应该用嘶哑的喉咙歌唱:/ 这被暴风雨所打击着的土地 / 这永远汹涌着我们的悲愤的河流 / 这无止息地吹刮着的激怒的风, /和那来自林间的无比温柔的黎明..... /___然後我死了,/ 连羽毛也腐烂在土地里面 // 为什麽我的眼里常含泪水? /因为我对这土地爱得深沈........

 

아이칭의 이 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전국이 항일전쟁의 기치 하에 뭉쳤던 1938년 작으로서 절절히 표현된 조국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이 사랑하는 애송시이기도 하다. 이 시 외에 <중국의 대지 위에 눈이 내리네 雪落在中国的土地上>라는 시에서도 절절하게 애국애민의 순애보를 느낄 수 있다. 아이칭은 원래는 프랑스 미술유학생이었으나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연루,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이 때부터 시를 전념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중국인민들을 위한 열렬한 시를 발표했다. 아이칭은 국민당이 몰려난 즉 후에 다시 우익으로 몰려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 절필선언을 했다. 장장 10여 년의 문혁이 끝난 뒤에야 신분회복이 이뤄져 북경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생활을 한 민족시인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정치 대립 사이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민족을 위해 한 줄의 시로 목쉬도록 아침을 깨우는 새 한 마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음을 이 시는 절규하고 있다.

 

 시의 암흑기: " 정치는 모든 예술에 앞선다"

 

일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부정부패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중국 공산주의는 한창 서구 문예사조를 일시에 섭렵한 시인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즉, 시인들에게 정치 노선에 봉사하는 찬양 선동적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즉,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1942년 5월) 발표와 함께 시는 “정치적 표준이 예술적 표준에 앞선다”는 강령 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의지, 남.녀간의 사랑표현 등, 시인의 개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시 정신이나 시인의 지위는 왜곡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1949년 공산주의 신중국이 성립되고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정치와 군사가 압도하면서 중국 시단은 함께 선동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특히 이상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정권 탈취와 연장을 위해 1966년부터 10여 년간 실시된 문화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든 예술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정치선전을 위한 목적시가 우선되면서 진정한 시 정신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대시의 경계를 다시 문혁 그 이후로 잡아야 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화남호랑이(华南虎)

                          뉴 한 汉*⁴

너의 건장한 다리는

꼿꼿이 서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네

내가 보는 너의 발가락은 하나하나가

모두 깨지고 망가져 짙고 짙은 선혈이 응고되어 있네

너의 발가락은 사람들에게 묶여서생으로 잘려나갔는가

아니면 비통한 분노 때문에

그 부숴진 이빨로 뜨거운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것인가

 

나는 철창우리를 바라보네

회색 시멘트 담장 위

한 길 한 길 피 묻힌 도랑이 있어

섬광처럼 현란하게 눈 찌르는 것을

 

마침내 알았네,.....

부끄러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떠날 때

갑자기 외치는 한 소리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외침,

속박할 수 없는 영혼이

내 정수리를 내리치고

허공으로 사라지네

나는 보았네, 불타오를 듯한 무늬와

불 타오르는 눈동자를

1976년 6월, <诗刊>1982년2월호에 실림

 

 你的健壮的腿/ 直挺挺地向四方伸开 / 我看见 的每 趾瓜 / 全都是破碎的,/ 凝结着浓浓的鲜血! / 你的趾瓜 / 是被人綑綁着 / 活活地鉸掉的 ? /还是由于悲愤/ 用同样破碎的牙齿/ 把他们和着热血咬碎的.....//   

 我看见铁籠里 / 灰灰的水泥墙壁上/ 有一道一道的血淋淋的溝壑 / 像闪电电那般耀眼刺目! //     

 我终于明白....../ 我羞愧地離开了动物园, / 恍惚之中听见一声 / 石破天驚的咆哮 /有一不羁的灵魂//      掠过我的斗顶/ 腾空而去, / 我看见了火焰似的斑纹 / 火焰似的眼睛!//            

 

윗 시를 쓴 뉴한牛汉이 <谈谈我这个人,以及我的诗(나란 사람과 내 시에 대하여)>를 통해서 밝힌 시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 우리 고향의 고량 나무 만큼이나 키가 크다. 그만큼 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노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처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아픈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외관과 영혼 속의 상흔이다."

윗 시는 물론 汗血马(피땀 흘리는 말), 悼念一棵樹(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半棵树(반쪽나무) 같은 시들은 오랜 전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혁명까지 닥치면서 휘돌아 치는 격랑에 지치고 다친 중국인민들의 상흔을 그리고 있다. 이 시도 뉴한이 감옥에서 나와 노동개조소에 오래 노동을 하다가1976년, 문혁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쓰여진 것으로 6년 뒤에야 발표를 했다는 데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가 빠지고 발톱이 생으로 빠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구경꾼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외마디 포효를 함으로써 불 타오르는 그의 눈빛과 분노를 통한 그 절절한 삶에의 의지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의 말살을 실험하였던 문혁기간 중에도 견뎌낸 그의 시정신도 바로 이 화남호랑이 같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70년대 文革 기간 중 감옥이나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도 문학은 지하에서도 지속되어, 중국 현대시사는 결코 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면, 70년대까지 이어진 정치서정시는 가송시, 생산시를 낳았지만, 예술성의 실험은 버리지 않고 지켜내어 80년 이후 다양한 새 영역으로 중국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인의 정신은 더욱 단단히 단련되는 것일까, 노동개조소나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인들에 의해, 문혁 이후에는 새로 탄생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고매한 시 정신과 시의 예술성, 순수성이 지켜져 오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홍보용 꼭두각시가 아닌 현대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 실험성도 가미되면서 현재 중국시는 보다 자유로운 풍토에서 2,30년대를 방불케하는 시적 열기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존엄한 인성을 찾는 발걸음도 늦추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참조, 1) : 후스: 1891년 상해 따칭大清태어나 시인으로 학자로 철학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5.4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제일 먼저 백화문으로 신시를 썼으며 모택동에게 제안하여 湖南自修대학을 설립하게 했다. 후엔 《자유중국》잡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민주사상을 흠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만에서 살다가 1962년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2) 李金髮(1900年11月21日-1976年12月25日)

현대상징주의 시인으로 조각가이며 교수,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그 역시 1919년에 프랑스에서  조각과 유화를 배웠다. 1920년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받아들여 시를 쓰기 시작, 중국상징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항주국립미술원, 중산대학미대교수로 있다가 1932년《현대》잡지를 통해 현대파 시인이 되었다. 1941년 항일문예운동에 뛰어들어 《문단文坛》창간을 도왔으나 그 해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관으로 나가면서 후엔 아예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76세에 생을 마감했다.

3) 盧斯飛, 劉會文 《馮至戴望舒的詩歌創作》 廣西敎育出版, 南寧,1989, 6月

  이 책에서 인용함. 서구문화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징수법을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창안했다는 뜻.

4) 뉴 한 (1923- ) : 원명은 史 成 山西省 定襄에서 태어남. 몽고족으로 1980년대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아이 칭(艾 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복귀하자 "귀래(归来"파에 흡수되어 8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시 주류가 되었다. 그도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발표나 시집 출판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 참고문헌 :

 

1, 『中國現代文學史』 上,下 冊 : 朱棟 丁 帆 朱曉進 主編  高等敎育出版 2000년 6월

2, 『20世紀 漢語 詩選 』: 康 耕玉 選編  上海敎育出版社 1999. 12월 

3.『중국현대시 연구』,허세욱, 1992년 6월 《명문당》

4.『중국 현대문학사_ 혁명과 문학운동_ 』 菊地三郞 저, 정유중, 이유여 옮김,

1986년, 《동녘》출판사 

3. 『문혁이 낳은 중국 현대시』 김금용, 2006.4월, 《찾기》츨판사

4. 『中国现代诗歌史』 维基百科 自由的百科全중에서

 

 

                                                          <시와 표현> 2011. 겨울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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