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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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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한매의 아름다운 수묵화
2016년 10월 01일 17시 56분  조회:4493  추천:0  작성자: 죽림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까지 


시에 대하여 얘기하다보면 흔히 받는 질문이 있다. 그건 "영감(靈感․인스피레이션)이 뭐예요"라든가 "시를 쓰기 전에 시인은 영감을 받아야 하나요"라든가 아니면 "선생님은 영감을 받으셨나요"라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며 특히 세 번째 질문은 매우 신랄하기까지 하다. 영감을 받았다 하면 시인이 무슨 무당 같은 생각이 들고 안 받았다 하면 재능 없는 시인으로 몰릴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난 그런 질문에 대개 농담으로 대신한다. "왜 처녀를 받지 영감을 받습니까?"라고. 

얼마 전 TV사극『명성황후』중 황후시해 장면에서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아 현장을 총지휘한 하수인이 황후를 시해, 소각한 후에 왕궁 뒷길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나온 인텔리겐차이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이었던가.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을 넘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그가 왜장쳐대는 말은 놀랍게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영감이!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단박에 표현할 그 시 한 줄이 떠오르지 않아. 아이구 이 돌대가리야."라는 게 아닌가.

영감을 무슨 신적 계시 같은 걸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악마에게 무슨 영감이 주어지겠는가. 영감이 풍부한 천부적 시인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둘 것은 시인이 자기 펜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쓰기까지 시를 만드는 작업의 대부분은 이미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그 시의 대부분을 시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다는 말도 아니다. 역시 시인에 따라서 지적조작의 방법으로 시를 만드는 시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 편의 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순서를 거쳐 만들어진다. 



< 한 편의 시의 씨, 또는 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인의 상상력을 강하게 때린다. 그것은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감정이나 어떤 특정의 경험, 또는 하나의 관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맨 처음에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 한층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미 말이라는 옷을 입은 시구의 형태로, 아니면 또 완전히 한 줄의 운문 형태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느 새벽 흉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홀로 느끼는 고독이나 불안감, 나아가서 얼마 후엔 이 삶도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소멸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감, 그러다 보니 지금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그리움의 감정을 겪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형태로 느껴진 감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때 존재의 본질에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햇빛 좋은 날 옥상 위에서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경이로운 순간, 사랑하면서도 피치 못해 떠나보내야 하는 애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뒷모습을 하고 빗속을 터덜터덜 돌아서 가는 걸 볼 때처럼 명치끝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슬픈 순간, 요즘 탄핵정국에서 보듯 국민을 안하무인으로 여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민의 이름을 빌리는 우리나라 모든 정치인의 몹쓸 행태를 볼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격렬한 분노의 순간, 그리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경쾌한 발걸음 혹은 그런 손자를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할머니의 그윽하고 흐뭇해하는 눈길을 보는 때 느끼는 즐거움의 순간들을 늘 경험하게 된다. 그런 경험은 우리의 희로애락의 사생활에서부터 사회적 삶에서까지 곧잘 겪게 된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다가 이런 말들을 발견한다. 빈자의 등불 하나, 자유의 종, 신비의 꽃, 야생, 슬픈 열대, 욕망의 불꽃, 주체상실, 매우 가벼운 담론, 슬픔의 온도, 나무의 신화, 풍류, 빵과 수선화,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슬픔만한 생의 거름이 어디 있으랴,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등 관념․이미지․말․시구․한 줄의 운문들이 가슴을 흔들고 영혼을 흔들고 삶을 흔든다. 본질에 대립하는 실존만이 아니라 본질과 실존의식이 동시에 인생 속으로 삼투해버리는 이런 흔들리는 순간은 책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남과 대화할 때도 오고 강의를 들을 때도 오고 나날의 삶 속에서도 곧잘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여러 감정이나 관념이나 이미지 등을 그의 습작노트에 적어 놓거나 머릿속에다 잠깐 저장해둔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것을 아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다음 정호승「들녘」은 어린 날 겪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분출한 시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지금 시인은 삼십여 년을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농촌 경험이 느닷없이 분출한 것이다. 왜 어린 시절인가. 볏잎에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약 때문에 메뚜기나 미꾸라지도 없는 실정인데 거미가 거미줄을 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에서 이 시가 튀어나오는가. 

요사이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들이 많이 나온다.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이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만물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동동한 목숨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가진 시인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한 시들이다. 이 시에서도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촌풍경을 선연하고 깨끗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의 핵심은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라는 구절이다. 비 온 뒤 모를 내는 아버지나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 라고 말함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중심, 이성중심, 욕망중심의 현대인의 심성에 맑고 깨끗한 구원의 힘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요새 근대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이 시의 씨앗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기억의 창고 속에서 영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그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 이른바 ‘무자각적 의식’ 부분 안에 숨어든다. 거기서 그 씨앗이 점점 자라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때 물론 그 씨앗과는 다른 많은 시적 씨앗이 함께 자라는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 몸 안에서 몇 편의 시가 동시에 자라나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어느 새벽에 느낀 죽음에 대한 시의 씨앗은 자꾸 자란다. 일어나 기지개 켜다가 고혈압으로 죽은 사람, 봄 내내 일한 남편의 몸보신을 시킨답시고 아내가 사온 산낙지의 다리가 목구멍에 붙어 기도를 막는 바람에 되레 죽어버린 남편, 군사통치 시절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람,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골재가 머리 정수리에 떨어져 죽은 사람, 방금까지도 희희낙락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른 심장병 때문에 숨이 억 막혀서 죽는 사람, 그뿐인가, 온갖 고생고생 끝에 이제 아이들 대학도 다 졸업시키고 나서 살만하니 덜컥 암이 걸려 죽는 사람, 아흔 일곱을 사는 할머니 앞에 일흔 두 살 먹은 딸이 먼저 죽자 예순 살 먹은 며느리가 “아이고 똥오줌 받아내는 우리 어머니나 돌아가시지 고모가 돌아갔다”고 탄식하자 “아 제 년 제 명대로 살고 나는 내 명대로 사는데 너는 내가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느냐”며 역정을 냈다는 결코 안 죽겠다는 사람, 또 요사이 나온『자살』이라는 책에서 보듯 각종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자살을 택해 죽은 사람, 불로장생을 위해 수많은 신하와 많은 국가예산을 들여 불로초를 캐러 보냈으나 끝내 죽은 진시황 같은 사람 등등에 대한 생각들이 자꾸 되고, 그 죽음 의식은 마침내 동물, 식물과 온갖 생물에까지 이어져 결국 죽음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해석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죽음들을 타인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나의 실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될 때부터 그 인식의 성장속도는 급격히 빨라진다. 

또 우리가 어떤 이별을 보았다 하자. 마침 이시영 시인의「어떤 이별」이란 시가 있어 그것을 먼저 여기에 적는다. 


여름 한낮의 햇빛 속을 
맨 손의 한 여자가 울면서 길을 가고 있다 
저 적요의 뒷모습에 쏟아져 내리는 
한낮 여름의 강렬한 함성! 

여름 한낮의 햇빛의 그늘 속에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그 여자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아, 사라지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흰 길 위의 두 점의 가없는 펄럭임 


보다시피 이 시는 어떤 이별의 광경을 그 이유나 사정에 대한 시시콜콜한 천착이 없이 거시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기본적 이별의 경험 뒤에 나의 생각은 더더욱 자란다. 그녀를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떠나보내면 더 서럽겠지, 소슬한 바람에 낙엽이 지는 날 보내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니까 차라리 벚꽃 만발한 그 화려한 날 보내는 게 더 서럽겠지, 불치병에 걸린 걸 알리지 않고 떠나는 여인의 속내를 모르는 남자의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천착해보는 게 났겠지, 산모퉁이를 기적소리와 함께 돌아서 떠나버린 여인 뒤의 철로에 주저앉아 그 많은 눈물로 주변에 무더기무더기 망초꽃을 피우거나 언약의 징표였던 구리반지를 구겨버리는 남자의 속마음에 대해 탐구해보는 게 났겠지…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는데 그 관념의 실제를 겪는 자의 서러움과 고통에 대한 생각은 날로 자라서 시인은 실제로 삶에서 이별을 겪고 마는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바로 탄생하려는 순간이 온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씨앗의 자람이 며칠이 될 때도 있고 몇 년이 걸릴 때도 있다. 더구나 시의 씨앗은 우리의 의식 속에도 자라고 꿈같은 무의식 속에서도 자란다. 그 씨앗의 배경과 전경, 그 씨앗의 본질과 실존, 그 씨앗의 꿈과 현실, 그리고 씨앗의 형태의 구체성과 본질의 철학성에까지 미치도록 자란다. 



이제 드디어 시인은 하나의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 욕망은 단순히 욕망이라기보다는 마치 육체에까지 스며드는 實感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지금까지 시의 씨앗이 뿌려짐과 그것의 자람은 밖으로는 먼 곳을 나는 시조새의 실루엣처럼 막연하게 보이거나 안으로는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의 숨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그것이 내 몸에 확연히 들이닥치려 하거나 내 몸에서 뜨겁게 분출하려는 찰나에 시인은 흥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펜을 잡기를 계속 주저하기도 하고 온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이때가 바로 시가 탄생하려는 순간이다. 

시인은 숨을 죽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아니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니 미친 듯이 시골길을 헤매고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아니면 기차로 여행하고 있어도 괜찮다. 무엇이든 좋다. 시를 자기의 태내에서 끄집어내는 데 주의를 집중시키게 해주는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좋다. 시인은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시의 속을 들여다보고 몇 주일이나 몇 달 전에 처음으로 머리에 떠오르거나 겪은 그 씨앗, 그러니까 그 뒤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있던 그 씨앗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느새 그 씨앗은 훌륭하게 성장하고 발전해 있는 것이다. 

< 한마디로 이번 단계는 방안에 갇혀 있던 시가 문에 몸을 부딪치면서 빨리 내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이 열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맨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완성된 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시의 대체적인 모습과 관념이다. 때로는 그 시의 1절이 얼렁뚱땅하게 맞추어졌을 뿐인 경우도 있다. 실은 시를 쓰는 괴로운 작업이 시작되는 것은 이때부터인 것이다.> 

사실 과장할 것 없이 그것은 괴로운 작업이다. 시인은 그 시의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끌어 내와야 한다. 여기다 형태를 맞추어주어야 한다. 그 시 속의 하나하나를 개개 시인이 각종 자재들을 골라 집을 짓는 건축가나 데생 위에 각종 색을 칠해 입체적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처럼 말이다. 이는 참으로 괴로운 작업이다. 시에 따라서는 비교적 쉽게 순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괴로운 작업이어서 자기 스스로 납득할만한 단 한 줄을 쓰는데 몇 시간 또는 며칠이나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기서 나의 독특한 경험을 한 가지 말하고자 한다. 시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것이 무척 자라있는데도 그것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헤맨다. 그렇게 헤매다 보면 내게는 출산을 돕는 어떤 계기가 대개 찾아온다. 그것은 특히 그 마음속에서 분출을 기다리는 시, 곧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감정, 새로운 해석의 심리적 상태가 찾아왔을 때이다. 

가령「직관」라는 다음의 제 시를 보자.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 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 오르며 눈 털어 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대나무 고장인 담양, 그것도 대밭 밑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폭설이 내린 대숲의 장관을 해마다 몇 번씩 보고 살았다. 그 폭설에 밤이면 뒷문으로 대 부러지는 소리가 밤새 들리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어른 팔뚝만한 대들이 팽팽히 휘어져 고샅길을 아치인양 덮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팽팽히 휘었으면 거기에서 톡, 날아오른 참새 한 마리의 발짓에도 일순 패앵, 소리가 날 정도로 튕겨져 오르며 그 우듬지를 창공 깊숙이 바르르바르르 떨겠는가. 그런 장관이 진즉 마음속에 시의 씨앗으로 심기고 그것이 대나무처럼이나 자라있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출산시킬까 몇 년을 망설였는데 어느 아침 그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 전날 낮에 아내와 경제 문제로 심하게 다툰 뒤, 밤에 어찌어찌 화해하고 그 긴장된 몸과 마음으로 섹스를 나누었는데, 부부 싸움 칼로 물베기요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 일이라고 하더니 그것이 딱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기분이 상쾌해져 아침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오니 예의 그 장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순간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며 앞에 펼쳐진 대숲의 장관이 금방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휘어진 참대는 절정을 향한 그 팽팽한 긴장의 순간, 그런 대가 새 한 마리 톡 건들자 패앵 튕겨져 오르는 순간은 절정이 터지는 순간, 그 대 우듬지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순간은 절정의 환희와 여진의 순간,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은 오르가슴 뒤의 죽음과 같은 적막과 혹은 평안의 순간, 큰눈 곧 폭설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상징화하는 순간이었다. 

혹자는 이 시를 단순한 풍경시로 보아 2연은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했지만 그러나 그 부분이 없었으면 아예 이 시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잘 눈치 챈 어느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사랑은 절대순결의 충만이며 그 탄력이다. 마침내 저 무한 穹窿의 아득함으로 치솟아 올라 가물가물 점 하나로 잦아들게 하는 몰입이 있다”고 했으니 나의 의도와 잘 들어맞는 평문이었다. 

< 어쨌든 그런 형편이니 비록 <영감>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침 황금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의 홍수가 시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와 그것이 솜씨 좋게 자연적으로 시의 한 행 한 행에, 한 절 한 절에 늘어놓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감은 결코 전가의 보도나 요술지팡이가 아닌 것이다. 영감이란 한 편의 시에 있어 첫 씨앗이 시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때를 말한다.> 여기서 ‘뿌리를 내리다’라는 말에 주의하자. 시인은 온갖 경험을 가질 수가 있다. 온갖 관념이나 이미지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을 몇 개의 시의 씨앗으로 삼으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그것들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즉 반드시 시인의 상상력 안에 깊이 뿌리박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배양한다고만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시인은 과연 자기의 온갖 경험 가운데 어느 것이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서 한 편의 시가 되어, 마치 그 시가 제발 나를 낳아달라고 조르는 그러한 시가 되는가: 그 줄거리는 바로 당자인 시인으로서도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영감이란 단어를, 시가 만들어지는 단계의 이러한 순간, 즉 시인이 금방이라도 한 편의 시를 낳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마음을 두근거리면서 자각하는 순간으로 적용해도 틀림없다. 

이 순간을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우리가 어딘가 먼 방송국에서 오는 방송을 캐치하려고 우리의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는 것과 같다.「다이얼을 돌린다, 1밀리미터만 틀려도 안 된다, 오랜 침묵이 있다, 기계가 열을 띠어온다, 한참 있으면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온다, 말이 점점 알아듣기 쉽고 알기 쉬운 말이 된다.」 도대체 이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 정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치 어느 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전파를 잡기 위해 우리가 라디오 세트를 필요로 하듯, 시인은 영감의 메시지를 잡기 위하여 자기 몸 안에 장치된 일종의 예민한 기계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 기계장치가 곧 시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의 상상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또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얼마 전 시적 상상력을 잘 구사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다. 앞으로 시의 일곱 가지 재료와 그것의 사용법을 강의하여서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인이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즉 시를 쓰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일이다. 이 습관은 직업적인 진짜 시인과 가끔 심심풀이로 시를 써보는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의 하나다. 또한 시인은 마치 마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늘 동전을 만지작거려서 오른손을 가만두지 않듯이 늘 언어를 만지작거림으로서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만일 여러분이 언어라는 것-그 음운과 모양과 의미(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에 몹시 매력을 느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머릿속에서 회전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시인이 되기 힘들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인은 凝視라는 것을 통해서 그의 시적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같이 가만히 바라보는 일, 자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인생의 불가사의와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일과 또 끊임없이 인생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신비적인 바탕무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의 직무에 아무리 충실하다 해도, 아무리 응시와 연습을 쌓아도, 아무리 교묘한 말의 장인이 된다 해도 시인은 영감을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는 절대 없다. 영감은 몇 달간이나 시인 곁에 머물러 줄지 모른다. 또 몇 년 동안이나 시인을 팽개쳐버릴지도 모른다. 언제 그것이 찾아올지, 언제 그것이 사라져 버릴지 시인 자신도 모른다. 셸리가 말했듯이「창조하는 정신은 꺼져 가는 석탄의 불꽃과 같다. 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꽃을 불어 순간적인 밝음을 준다.」 


그러면 이제부터 몇몇 시인의 구체적인 시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며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외국시부터 한 편 본다. 


Children look down upon the morning gray 
Tissue of mist that veils a valley"s lap: 
Their fingers itch tear it and unwrap 
The flags, the roundabouts, the gala day. 
They watch the spring rise inexhaustibly― 
A breathing thread out of the eddied sand, 
Sufficient to their day : but half their mind 
Is on the sailed and glittering estuary. 
Fondly we wish their mist might never break, 
Knowing it hides so much that best were hidden: 
We"d chain them by th spring, lest it should broaden 
For them into a quicksand and a wreck. 
But they slip through our fingers like the source. 
Like mist, like time that has flagged out their course. 

아이들은 아침 안개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 보얗게 서린 아침 안개를: 
아이들의 손끝은 이 베일을 찢어버리고 싶어 설렌다. 
깃발과 회전목마와 명절날을 싸고 있는 걸 벗겨버리고 싶다.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모르는 샘물을 지켜보고 있다― 
잔모래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 
어린 날엔 그것으로 충분하리 : 그러나 어린 마음의 절반은 
돛이 달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河口쪽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아이들의 아침안개가 내내 끊이지 않길 바란다, 
안개는 숨겨져도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감추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저 샘물로 묶어두고 싶다, 샘물이 흘러 개울폭이 넓어지면 
거기에는 모래더미와 難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샘물처럼 우리의 손끝에서 빠져나간다. 
안개처럼, 또한 경주로의 길가에 있는 깃발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과도 같이. 


이 시는 아일랜드 출신의 세실 데이 루이스라는 시인의 <아이들의 시간>이란 시인데 시인의 시작과정을 직접 들어보자. 

“이 시의 씨앗은 나의 두 아이에 대해 내가 느낀 어떤 격렬한 감정이다. 이건 세상의 대개의 부모들이 조만간에 갖는 감정, 즉 자기의 아이들도 얼마 안 가서 어른이 되어 부모 곁을 떠나 위태롭고 살기 힘든 세상 한가운데로 진출해야 한다는 슬픔의 감정이다. 누구나 젊을 때에는 자기 부모가 이런 기분을 갖는 데 대해 가끔 불만을 느끼는 법이다. 아이들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혼자 독립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런데 한번 더 앞의 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두 개의 테마 또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뒤의 6행에 나타나 있는 내 자신의 감정으로 그것이 본디 테마다. 또 하나는 처음 8행에 나타나 있는 안타까운 듯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아이들의 감정으로서, 이들 두 개의 테마가 서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서로 대비되는 듯한 기분으로 이 시는 씌어지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펜을 잡기 전에 나는 시의 1행이 실제로는 이미 내 머릿속에 떠올라있음을 흔히 발견한다. 그 1행은 그 시가 전개하는 그 시의 주제와 바탕모양에의 계기를 내게 주는 것, 즉 음악으로 말하자면 主調音에 해당하는 일종의 主調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14행 시를 쓰려고 내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런 의미의 한 행이 곧 내 머리에 떠올라왔다. 그 한 행은(이 한 행만이 나중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는데) <깃발과 회전목마와 명절날>이었다. 나는 이 한 행에 대해 생각하고 이 한 행이 명절날, 즉 아이들이 몹시 기다리는 것의 이미지임을 알았다. 분명히 이 이미지는 어린이가 들어가 보고 싶어하는 어른의 세계를 상징(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안타까움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다시 또 다른 행― 처음의 3행을 덧붙이기로 했다. 여기에서 강 유역을 덮고 있는 새벽안개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린이들이 생일날에 받는 선물의 얇은 종이를 찢어보고 싶은 하는 하나의 막―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에서 가로막고 있는 막을 말한다. 이 이미지는 몇 년 전의 어느 날 나의 기억이다. 내가 나의 아이를 데번셔 주의 초등학교에 데리고 가서는 어느 언덕 위에서 쉬면서 안개로 덮인 아래 골짜기를 바라보았을 때의 기억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때 그 안개가 마치 얇은 종이처럼 보이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 사건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처음의 4행에 표현된 테마의 변주곡으로서 그 테마를 보조하는 다음 이미지를 바라게 되었다. 여러분은 5행에서 8행까지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땅위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샘과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을 바라보려고 앞으로 쭈그리고 있는 어린이의 묘사다. <숨쉰다>라는 단어가 이전의 이미지에 대한 손잡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샘은 생명의 원천이요, 젊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생명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어린이의 절반>은 마치 시냇물이 확대되어 하구가 되듯, 그들의 생명이 확대되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지극히 많은 생활을 영위할 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샘의 이미지도 안개의 이미지와 같이 나의 기억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저택 근처에 있던 실제의 샘으로, 나는 어릴 때 그 샘에 몹시 매력을 느꼈었다. 나는 몇 시간이나 그 샘을 지켜보며 어째서 이렇게 자그마한 한 가닥의 물줄기가 이 대지에서 힘차게 솟아나는지 이상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테마를 덧붙일 필요를 느꼈다.―즉 아이들이 세상에 진출해 가는 데 대해 부모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 주기 바라는 것은 이 테마는 이 시의 근본씨앗이 되고 있으나 이 시에서는 비교적 작은 부분(9행에서 12행까지)을 차지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시를 쓸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완성된 시는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 편의 시가 어떤 형태의 것이 되는지 그 시를 다 쓰기 전까지는 짐작을 못하는 수가 많다. 사실 한 편의 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작자와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9행에서 12행까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우리 어른은 어린 시절의 안개가 어린이를 위해 제발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안개가 걷히면 어린이는 이 세계가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기분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므로」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유년시대에 매어두고 싶다, 인생에 상처를 입는 일(<모래더미와 난파>)에서 구해주고 싶다, 누구든 어른이 되면 인생에서 상처를 입는 일은 늘 있는 일이므로. 그러나 시는 이런 결말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시 아무리 부모라도 자기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비록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또 사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2행에서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떠나 성장해 가는지, 마치 안개나 물(<샘>)이 우리의 손끝을 빠져나가듯 빠져나가는 것을 묘사했다.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기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시간은 이미 <길가의 깃발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6행에 대해 뭔가 깨달음이 없는지? 모래더미와 난파의 이미지를 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길가의 깃발 사이로 빠져나갔다>는 문구 (사실 이 문구도 나의 기억에서 따온 이미지로, 내가 14세의 소년이던 때 2마일의 장애물 경기를 했을 때의 기억이다.) 속에 있는 flag(깃발로 경주로의 표시를 하는)라는 동사는 4행의 flags(깃발)의 반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이미지를 쓰는 대신 처음 8행의 이미지―안개와 샘과 하구와(<샘물이 흘러서 개울 폭이 넓어지면 거기에는 모래더미와 난파가 기다리고 있다>) 깃발의 이미지로 반복했다. 이따금 시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이란 단순히 단어나 프레이즈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많은 거울이 있는 복도를 지나면 자기 모습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듯이, 나의 두 개의 주제를 몇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아달라기 위해서다. 

끝으로 이들 각각 다른 특정한 이미지의 원천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이 참고해준다면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의 일생의 각각 다른 시기에 내가 겪고 그 뒤에 잊어버린 몇 개의 경험을 내가 전혀 깨닫지 않는 동안에 어찌된 셈인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았다. 그 씨앗은 데번셔 주의 안개와 아일랜드의 샘과 도우셋 주의 장애물 경주를 잡았다. 그리고 또 요트가 돛을 올리고 달리고 있는 어느 강의 하구를 덧붙였다. (이 광경은 어디서 따오게 됐는지 나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고 보니, 이들 네 개의 이미지가 이 시의 주제를 조명하기 위해 나의 마음속에서 자연히 떠올라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쓸 때의 실제의 줄거리는 다이아몬드 브로우치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치 광부가 산허리에서 구멍을 파듯이 자기의 마음속을 파내려 가서 가장 귀중한 보석―시의 주제와 이미지를 발견하려고 한다. 광부가 아무리 그 기술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일해도 산에 다이아몬드가 없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에 시가 없으면, 즉 우리의 상상력이 높은 열을 내뿜고 굳센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경험을 시의 소재인 보석이 될 때까지 융합하지 않고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단 한 편의 시도 낳을 수는 없다. 그것은 땅속의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어떠한 몇 가지 화학적 조건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시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시를 쓸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캐내어지면 그것을 선별되고 순위가 정해지고 잘리어서, 비로소 장식품으로 쓸 수가 있다. 이 순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그의 상상력이 낳은 소재로부터 완성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보석쟁이의 손에 들어오는 다이아몬드의 질과 크기에 따라 그가 만드는 브로우치의 디자인이 정해지듯이, 시인의 소재의 성질과 품질이 완성된 시의 바탕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커다란 힘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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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필 무렵 
―이순주(1957∼ )

겨울 지나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의 붓질,
대지는 화선지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선이 굵고 힘찬 
획이 그어졌다
바람이 운필의 속도를 조절하여 농담을 이룬 자리
쑥을 뜯던 당신 흰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때필법이능란하여비백(飛白)을만들어낸바람,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망울들을 매만졌다
툭툭 산벚나무의 꽃망울들이 터지곤 했다
당신 얼굴 주름살이 웃자
망울진 꽃망울들은 다투어 벙글었다
당신이 쑥대궁을 자를 때마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올랐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동안
정겨운 수묵화 한 폭 살아났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어머니,
대답 대신 당신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배가 불룩한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가지런한 틀니 드러내며 내게 봄을 건네준 그 해
당신은 먼 길을 떠나시고
시시때때 꺼내보는
내 안에 소장된 수묵화 필 무렵


이 시가 실린 이순주 시집 ‘목련미용실’에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여럿이다. ‘기차가 미끄러져 간다 칸칸마다 아이들 코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냉장고 소리 어머니 해수 기침 소리를 싣고//돋보기안경 너머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애벌레처럼 밤 가운데 몸을 말고 앉아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한 땀 한 땀 박히는 일정한 걸음의 음보, 어둠을 밀어내며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한밤의 뻐꾸기 울음 두 번, 기차가 두 시를 지나가고 있다.’(시 ‘푸른 방’에서) 

화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지키느라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젊은 어머니의 푸른 방, 푸른 밤을. 형제들 중 홀로 깨어, 그러나 기척 없이 누워서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안도감이며 걱정이며 어떤 서러움을.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 연배가 된 화자가 얼굴에 주름살 가득하고 틀니를 한 노인이 된 어머니와 보낸 어느 봄날이 ‘정겨운 수묵화 한 폭’으로 그려져 있다. 말수가 적고, 드문드문 건네는 말도 나직하고 부드러우실 화자의 어머니. 삶이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으련만 기품을 잃지 않은 노인은 대개 ‘일하는 사람’이더라.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꾸려온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아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은 인생을 담담히,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오르는’ 산기슭에서 모녀가 봄날을 나누는 풍경이 맑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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