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 속에 시가 있다/김성오
시의 다양성과 다의성으로 볼 때 시를 짓고 고치는 방법이 수학에서의 공식, 그것과 같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리라.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 마음 편하게 나의 경우를 말해볼 요량이다. 그것도 결국 전체의 모습 중에 어느 한 부위에 속하겠지만.추상화에는 무수히 많은 시가 묻혀 있다. 광물질처럼.
추상화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 그것은 나의 시 쓰는 방법 중의 하나다. 추상화 한 점을 앞에 놓고 이것은 불, 혹은 아침, 혹은 슬픔이다 라고 내가 말했을 때, 누구나 반박의 여지없이 아 그렇구나!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탁월한 상상력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아니라, 고정관념 따위는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보내버려야 한다. 고정관념이 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서도 안된다. 무덤도 만들어 두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도 부족하고 막무가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나로서는 정말 힘이 들어서 기진맥진하기가 부지기수이지만, 그래도 즐겁기만 한 것은, 시를 캐낼 때의 삽질이나 괭이질이 주는 노동의 참맛 때문이리라. 정신이 땀을 흘릴 때의 그 신선한 기분을 나는 시의 끈질긴 추적에서 자주 느끼곤 했었다. 돈도 안 되고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손해만 주는 시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정신의 노동이 주는 상쾌함 때문일 것이다.
추상화에서 시를 캐내기 위한 터 닦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일반적 언어 체계가 아닌, 독특한 체계의 문장을 찾는다. 예컨대, 탁월한 상상력이 깃든 고정관념이 극락왕생한 그런….
언젠가 추상화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실 안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쌓여 있는 그림을 보고 무슨 천상의 창고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집 거실에 걸려 있는 80호 정도 되는 추상화가 대뜸 나에게 자기를 ‘아침’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림 앞에 붙잡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얻어낸 문장이,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였다. 이 문장을 접한 것으로 나의 시를 캐내기 위한 터 닦기가 끝난 셈이다. 이제 정신의 삽과 괭이와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연장을 동원하여 시를 캐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때에 사용되는 일련의 도구들은 나의 여러 경험들, 나의 삶 전체이겠지만, 어떻게 딱 들어맞는 연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을 훨씬 쉽게 할 수 있다. 아무튼 작업을 통하여 내가 얻어낼 시의 성공 여부는 객관화의 성공에 좌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결과, 다음과 같은 시를 캐내었다.
아름다운 고독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나에게
아침은 주둥이가 좁았다
손등이며 손바닥 여기저기가 다쳤다
너무 가벼웠다
햇빛없는 아침은
우글쭈글해져서 보기에도 흉했다
나는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반딧불로
알맞게 아침을 채웠다
외로울수록 아침을 채우기란 쉬웠다.
물론, 시를 만드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됐든지 간에 공통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목재를 가지고 가구를 만들 때의 방법과 흡사하다. 목재가 가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패질이 되어야 하고, 용도에 맞게 톱질도 되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사포질을 해야 하는가 하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하기도 하고, 적당히 못도 박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 칠도 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칠은 제일 나중에 하게 되어 있지만, 또 못질을 한 다음에 사포질을 하게 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중에 칠을 하기도 하고, 못질하기 전에 사포질을 하기도 한다. 능률이라던지 필요에 따라 순서야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이지만, 과정 중에 어느 하나가 빠져서는 올바른 가구가 될 수 없다. 사포질을 안 했다고 쳐보라. 또는 칠을 안 했다고 쳐보라. 제대로 된 가구일 리가 없는 것이다. 이상은 내가 시를 쓸 때 염두에 두는 것들이기도 하다.
시를 퇴고하는 일은 가구를 만들 때의 사포질하는 과정에 속한다. 목재의 고유한 성질인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데는 사포질을 얼마나 끈질기게 오래 곱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포질이 잘 되어진 목재가 가구 전체의 분위기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다.
나는 위 시의 사포질을 다음과 같이했다.
1연은 너무 돌발적이라 이질감과 어색함을 느슨하게 풀어 주기 위해, 끝에 ‘부스러기까지 죄다’를 추가했다.
2연에서의 아침에 다친 손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친 손은 밝았다/ 환히 보였다/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를 넣었다
3연의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것이 반딧불 하나로는 부족했으므로 같은 계열의 ‘야광충 도깨비불’을 넣어 다양화하고, 보다 선명함을 위해 시각적인 ‘따듯하게 모아’라는 행위를 넣었다.
4연은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듯하여 삭제했다.
이미지와 이미지와의 충돌이 시의 모습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돌의 결과는, 비례관계에 있는 거리와 속도에 좌우된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체와도 같이. 아시다시피 그러한 충돌은 거리가 멀수록 효과가 크다. 거리, 그 역할을 제목이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제목을 다는 일이 어렵고 까다로운 일임은 분명하다. 나의 경우는 여지없이 실패했다. 「아름다운 고독」이라니 유치하지 않는가.
가구를 만들 때 칠을 하는 일은 시에서 제목을 다는 일과 유사하다. (흔히, 제목다는 일을 가구에 비교한다면 제목은 진열장, 신발장, 장롱… 이라고 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것은 산문에서의 일이지 시에서는 아니라고 본다.) 어느 구석도 빠뜨리지 않고 칠붓은 지나간다. 목재의 무늬와 색깔은 다를지라도 칠은 어디라도 고루고루 일정하게 묻어 있다. 가구의 어느 한 부분만 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시 전체에 고루 묻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결과 1연의 ‘꺼낸다’ 2연의 ‘주둥이’ 3연의 ‘채웠다’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있었다. 병이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용으로 보아 흔한 병이면 안될 것 같고, 특별한 어떤 병이라야 했다. 그때 문득 박물관에서 보았던 고려청자니 이조백자니 하는 것들이 떠올랐는데, 책을 뒤져 마음에 쏙 드는 병 하나를 찾아냈다.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싶을 때의 즐거움은 홀로 낯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와의 만남, 그럴 때의 따뜻함과 포만감이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여정 중에 우연히 만난, 마냥 내 편이 되어주기만 하던 사람은 얼마나 따뜻하던가. 그냥 세상이 싫어서 무작정 도망다니던 한때의 외로운 섬 어중간에서 만났던 그 사람처럼.
결국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
나는
아침을 열어 햇빛을 꺼내기 시작했다
부스러기까지 죄다
가난한 나에게
아침은 주둥이가 좁았다
손등이며 손바닥 여기저기가 다쳤다
다친 손은 밝았다
환히 보였다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
너무 가벼웠다
햇빛없는 아침은
우글쭈글해져서 보기에도 흉했다
나는 나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반딧불 야광충 도깨비불
따뜻하게 모아
알맞게 아침을 채웠다.
나에게 있어서 그 추상화는 아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침은 ‘진사채 양각란국충문병’이었다. 아침이 병이었기에 나는 손을 다치면서 햇빛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햇빛을 꺼내다 다친 손에서라면 달동네 판잣집 연탄재…가 보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병이 된, 그래서 내가 내용물을 다 꺼내어 버린 아침이라면 그 속에, 내 안에 있는 반딧불, 야광충, 도깨비불… 이러한 것들로 채우는 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의 아침이란 그런 것이었다. (김성오)
◇95년 『현대시』 등단.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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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이상국(1946∼ )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1960년대의 한 농촌 소년 투쟁기가 가슴 짠하고 따뜻하게 펼쳐진다. 화자는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인 듯하다. 양 부모 건재하고 장성한 아들이 여럿인데, 공부도 잘했을 막내가 ‘사투’를 벌이며 소원하는 대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된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당최 비빌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착했던 아이가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해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을 해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고학을 할 각오로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니 화자는 독한 데 없는 순둥이였던가 보다. 어쨌든 대학교는 이쯤 열망하는 사람이 가야 하는 건데 공부에 뜻이 없고 집이 어려워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대학에 다니는 오늘의 청소년도 가엾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화자가 누이 부르듯 ‘자두야’ 속삭이며 묻는다. 인생은 알 수 없죠. 그런데 빈속에 자두를 따 먹고 당신은 시를 낳았죠. 이상국의 시들은 진솔하고 따뜻하고 해맑다.(사족: 화자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국면이 달라졌기 쉽다. 대개 누이들은 마음이 여리고 희생정신이 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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