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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사모곡(思母曲)이다...
2016년 10월 10일 17시 01분  조회:3705  추천:0  작성자: 죽림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 중국 ‘천눈’(天眼)
[ 2016년 09월 29일 09시 06분 ]

 

 

‘중국 천눈(天眼)’


  물의 형식과 운명



   박 남 희


  물처럼 기구한 운명을 지닌 것도 없다. 흘러가다가 멈추고, 돌연 어디론가 증발하고, 약수물이 되었다가 빗물이 되고, 때로는 눈물이 되기도 하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 땅의 물들을 나는 시로 읽는다. 물의 형식은 시의 형식이며, 물의 운명은 시의 운명이다. 물에게도 운명이 있다고? 누군가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물에게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2000년 전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의 그 물은 운명의 물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불가사의한 변화 속에 물의 운명이 있고 형식이 있다. 그것은 곧 시의 운명이고 형식이다. 시의 형식 속에 시의 운명이 있고, 시의 운명 속에 시의 형식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물 그 자체를 선뜻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은 단지 시로 표현되기 이전의 어떤 것, 즉 에스프리나 포에지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 안에 어떤 형식이 되기 위한 운명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운명의 최초의 발현은 어떤 몸짓(Geste)에서 비롯된다. 어떤 몸짓이 갖는 삶의 가치, 그것은 삶에 있어서 형식이 지니는 가치이며, 삶을 창조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형식들의 가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영혼과 형식』심설당, 1988 51쪽 참조) 여기서 루카치가 말한 '삶'은 곧 시이고 물이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일은 곧 시의 몸짓을 읽는 일이다. 김춘수가 그의 작품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한 구절의 '몸짓' 역시 꽃이 되기 위한 운명의 초발심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꽃의 운명은 호명되는 형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시나 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나 물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사물들은 운명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게 운명이고
그나마 그 운명을 거역치 않으려는 게 형식일까

바람이 일방적으로 나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바람이 나무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나무의 허벅지 살을 꼬집고, 나무의 손목을 비튼다

나무가 바람에게 마냥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듯
나무가 바람의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무례하게 손을 집어 넣어, 바람의 급소를 더듬어간다

다정한 연인처럼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바야흐로 사랑싸움이다

아무렴 그렇지, 어차피 떨쳐낼 것은 떨쳐내고
부러뜨릴 것은 부러뜨리고서야
더욱 대담하고 당당하게 서로를 탐하는 
저 바람과 나무들의 교향악이여

   ㅡ 임동확, <운명과 형식> 일부(현대시, 11월호)

  인용 시를 보면, 임동확은 바람과 나무에서 그것들의 운명과 형식을 읽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게 운명이고 / 그나마 그 운명을 거역치 않으려는 것이 형식"이다. 따라서 바람과 나무는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운명과 형식을 수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떨쳐낼 것은 떨쳐내고/ 부러뜨릴 것은 부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나무의 삶의 방식이다. 그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바람의 운명이 나무를 흔드는 것이라면/ 나무의 형식은 되도록 직립하려는 몸부림/ 나무의 운명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면/ 바람의 형식은 가능한 한 소란스런 움직임"이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바람과 나무의 서로 상이하면서도 불가분의 운명과 형식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바람과 나무의 운명과 형식은 시인의 삶에 내재해 있는 운명과 형식이면서 동시에 시의 운명과 형식이다. 시인은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결코 우린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데, 이러한 깨달음은 삶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성찰에서 우러나온다. 그에게 있어서의 삶은" 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몸으로 버티어 보는 것"이며, "그렇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결국 뿌리째 흔들리고야 마는" 나무와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시가 보편적인 울림이 되어 우리를 흔들어주는 것은 바람과 나무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의 운명과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둘러 오는 동안,
그새 각주가 많이 붙었다
그러므로 나는 진술되지 못하고
다만 해석된다
그의 꼼꼼한 시선에
오래 붙들려 놓여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내가 연기한 
온갖 방종의 
내막과 배면이 샅샅이 읽혀진다
삼인칭으로 바뀐
술어까지의 까마득한 시간을 견딘 후
빛나는 오해가 난외주기로 
필기되기도 한다
칸칸이 불이 켜지고
붉은 울음이 몇 줄 그어진다
침묵은 더욱 오물오물 씹히고
정독이 더욱 오독과 긴밀해진다
결국 잘 빚은 반역이 극명하게 번역된다

에둘러 오는 동안,
그새 각주가 많이도 붙었다
각주의 府下 그 안에서
그러므로 나는 진술되지 못하고
다만 해석된다

ㅡ 유춘희, <온유한 독서> 전문 (현대시학, 11월호)


  우리의 삶의 내용은 곧잘 책의 내용으로 은유 되기도 한다. 인용 시에서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행위는 간접화된 비유적 문자로서 '에둘러' 오는 글쓰기로서의 삶이다. 따라서 책으로서의 그의 '몸짓'은 누군가에게 읽혀지기 위한 운명과 형식으로서의 몸짓이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의 세목들을 문자화시켜 백지 위에 공간화 하려는 몸짓이다. 책 속의 그의 삶은 "에둘러 오는 동안/ 각주가 많이 붙"은 삶이다. 그는 그의 삶이 다만 '진술'되기를 바라지만, 그의 삶은 진술되지 못하고 '해석'된다. 여기에 책으로서의 그의 운명이 놓여있다. 여기서 책이 '진술'되지 못하고 '해석'된다는 것은 책으로서의 그의 삶이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자화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삶에는 '각주'가 붙고, 일인칭이었던 '나'가 삼인칭인 '아무개 엄마'나 '부인'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그'의 독서는 곧잘 오독 되어, "빛나는 오해가 난외주기(欄外註記)로 필기되기도"하고 "정독과 오독이 긴밀해"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책인 '나'를 읽는 '그'의 눈은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신'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책을 제멋대로 읽고, 책에 제멋대로 낙서를 하는 '세상'일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책인 '나'를 읽으며 가는 어떤 운명이고 형식이다. 나 또한 세상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읽은 세상은 불완전한 독서의 주체일 뿐이다. '그'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읽고 있다. "잘 빚은 반역"으로서의 내 삶 역시 '그'에 의해서 샅샅이 읽혀지고 해석된다. 즉, 타자화 된다. 이러한 '그'의 독서는 분명히 "온유한 독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온유한 독서"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 왜곡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상인 '그'가 시인에게 "온유한 독서"라는 역설적 이름을 붙이게 강요했을 것이다.

이사 온 날 밤, 빗소리를 듣는다.
야산에서 캐온 화분의 청죽(靑竹)도 잎새를 뒤척이며
비에 젖는다.
비에 젖어도 푸른 잎새엔,
비의 지문이 남지 않을 것이다.
중년이,
중년의 이사가 무거운 건
이삿짐에 포개온 타인의 지문 때문일까.
오래 덮던 이불을 덮어도
잠자리가 설어 잠이 오지 않는다.
어디서 밤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뻐꾹, 뻐, 뻐꾹……
곁에서 뒤척이던 아내가 일러준다.
앞집 시계뻐꾹이예요.
딱, 열두번을 울리잖아요.
(열세번은 아니고?)
고통과 불면의 시간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했던
중년의 이사,
밤새 뒤척이던 내 허망한 꿈자리 위로 
문득 새벽을 알리는
뻐꾸기의 지문이 찍힌다. 이런!

         ㅡ 고진하, <뻐꾸기의 지문> 전문 (베스트셀러, 11월호)

  자신의 삶의 지문이 묻어있는 보금자리를 싣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행위는 자신의 삶의 형식을 바꾸어 보는 일이다. 이러한 '이사'는 중년이라는 삶의 무게, 즉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고, 시 속의 화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그의 이사는 중년의 무게만큼 무겁고, "오래 덮던 이불을 덮어도/ 잠자리가 설어 잠이 오지 않는다." 그의 "이사가 무거운 건/ 이사짐에 포개온 타인의 지문 때문일까"하는 진술은 자신의 삶 속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성을 암시해준다. 여기서 이사를 하는 행위는 단순히 장소만을 옮기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관계 맺어온 무수한 '타인'과의 멀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래 덮던 이불"도 예전에 덮던 그 이불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사'라는 삶의 형식의 변화를 통해서 그와 친숙했던 사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음'은 삶의 형식과 운명의 부조화로부터 생긴다. 시인이 꿈꾸는 이사는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형식을 담고 싶어하지만 그의 운명이 지시하는 이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이사'는 현대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집 없음(homelessness)'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집 없음"은 단순히 살아갈 거처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에 관한 문제이며, 주체성 상실의 문제이다. 그가 살아가는 삶은 "고통과 불면의 시간"속의 삶이며, 그는 이사를 통해서 이러한 삶의 조건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시계뻐꾸기는 열세 번을 울지 않고 열두 번만 울뿐이다. (여기서의 열세 번의 '13'은 불안한 현실에 대한 초월의 의미를 지닌 숫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이사'를 통한 초월의 희망은 좌절되고 그의 꿈자리 위로 "새벽을 알리는 뻐꾸기의 지문이 찍힌다." 여기서의 "뻐꾸기의 지문"은 결코 이상화 될 수 없는 현실적 시간으로서의 지문이다. 이 시에서 '지문'은 삶의 형식과 운명으로서의 지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사를 통해 삶의 형식을 바꾼다고 삶의 운명까지 쉽게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중년의 이사'는 비에 젖어도 '비의 지문'이 남지 않는 청죽(靑竹)의 푸른 잎새의 이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각의 棺 하나를 땅에 심었네 슬픔은 모르는 척 한 줌의 흙으로 던져졌네 사람들은 몸 속에서 투명한 울음을 꺼내 골고루 뿌려주었네 그의 생은 흠뻑 젖었네

  한 장의 햇살이 달려왔네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네 그는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갔네 그 씨앗 속에 혼돈과 좌절과 영광으로 우거진 거대한 숲이 밀봉되어있네
                              ㅡ 손순미, <어떤 식목> 전문 (현대 시학, 11월호)

  인용 시를 통해서 보면, 죽음은 삶의 또 다른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棺 하나'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다. 여기서 관을 땅에 묻는 행위는 또 다른 삶의 형식인 '주검'이라는 나무를 땅에 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한 장의 햇살"이 달려와서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는 장면은 죽음을 애도해야 할 하관식이 하나의 작은 축제임을 암시해준다. 이처럼 죽음을 삶의 또 다른 형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에는 '하관'이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형식의 바뀜이 '순환적 삶'이라는 생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천년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라/ 돌 밑에 누가 깔려 누워 있는 줄도 모르고 / 입맞춤에 열중하던  아주 싸가지 없는/ 한 사랑이 있었는지 몰라"로 시작되는 염창권의 <고인돌 공원> (현대시, 11월호) 역시 삶과 죽음,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비적 묘사를 통해서 '고인돌'이라는 죽음의 장소가 온갖 동물들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바뀐 것을 아이러니컬한 시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손순미의 시와는 달리 삶과 죽음을 순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 안에서 병치시켜서 바라보고 있다. 이 시에서 병치라는 기법으로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은 고인돌이 만들어졌던 '천년쯤 전'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과의 병치이다. 시인은 이처럼 이질적인 시간을 병치시켜 나란히 바라봄으로써 사랑의 영속성에 이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시인은 사랑의 영속성이 없다면 "아이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저 여자의 기쁨이/ 봉긋한 젖무덤이 만드는 두 섬 사이에서/ 어찌 저리 파도처럼 출렁일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햇살가루로 부서져 버릴 사진을 찍으며/ 햇살가루 같은 웃음을 피워 올릴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의 사랑의 영속성은 삶의 운명이고, 고인돌(과거)과 그 위의 현재적 삶은 각기 다른 삶의 또 다른 형식들일 뿐이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볼 때, 물은 포도주가 되어도 물이고, 이슬이나 눈물이 되어도 물이다. 물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형식이 바뀔 뿐이다. 이렇게 바뀐 형식으로의 물들이 물의 운명과 만나 포도주가 되고 빗물이 되고 바닷물이 된다. 물의 운명과 형식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물이 지금 우리 안에서 출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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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오세영(1942∼ )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 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사모곡(思母曲)’이라는 말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작자를 알 수 없는 고려의 노래라고 나온다. 다시 말해 사모곡은 특정 노래의 제목인 셈이다. 하지만 ‘사모곡’이라는 말의 주인은 고려 때 불리던 그 노래 하나만이 아니다. 생각할 ‘사(思)’에 어머니 ‘모(母)’, 즉 어머니를 생각하는 노래는 다 사모곡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어머니를 기리는 시는 퍽 많기도 하다. 시인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모든 자식에게 어머니는 가장 절대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모곡 중에서도 오세영 시인의 시를 골랐다. 시는 독자를 울려야지 제가 울면 좋은 작품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사모곡은 우는 시가 되기 쉬운데 이 시는 울지 않는다. 대신 한 아들의 전 생애에 걸쳐 있는 어머니의 의미를 잔잔하고 아름답게 펼쳐놓았다.
 

 

시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을 모르고 자랐다. 그 어머니의 삶은 오죽 팍팍했으랴. 아이의 눈에도 어머니는 외롭고 시렸는가 보다. 그는 일곱 살 적 어머니를 ‘하얀 목련꽃’으로 기억했다. 어머니는 한때 눈물짓는 ‘봉선화’였다가 아들의 곁을 지키는 ‘국화꽃’이기도 했다. 꽃으로 기억되는 어머니는 복되어라. 그런데 그 어머니는 이제 돌아가시어 하늘의 별과 바람이 되셨다. 봄의 목련 어머니, 여름의 봉선화 어머니, 가을의 국화꽃 어머니는 사라졌을까. 아들은 어머니가 마음 안에 여전히 살아 계신다고 말한다. 잃고도 잃지 않았다고 쓰는 이 마음이, 잃었으나 잃지 않아지는 그 마음이 참으로 절절하다.

절절함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든 그것을 알거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직 상실의 절절함에 닿지 않은 자식이라면 어머니를 한 번 더 안아드리라, 이 시가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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