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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ㅡ미치광이가 머리속에 들어 있다...
2016년 10월 19일 22시 57분  조회:4474  추천:0  작성자: 죽림

록 음악의 탄생
  쉽게 설명하자면 록 음악은 음악이 풍요롭지 못하던 1950년대 초에 탄생되었다. 그 당시 미국과 영국의 음악은 블루스가 재즈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목소리 위주의 스탠다드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 민속적인 음악을 바탕으로 한 포크와 컨트리도 기본적으로 시대와 같이 융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는 시끄러운 록음악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젊은 음악인들 사이에는 보다 힘있고 강력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음악을 시도하고자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록운동(Rock Movement)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그동안 즐겨 연주했던 만돌린이나 벤조, 어쿠스틱 기타 대신에 전기 기타를 이용한 증폭장치에서 표출되는 고출력 사운드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그의 출연으로 조용하고 점잖던 음악계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음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좋던 싫던 간에 록 음악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아 나아갔으며 그것을 모티브로 각기 다양한 록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부모와 자식간에는 음악으로 인한 세대차이가 생겨 났는데 그것은 프랭크 시나트라를 즐겨 듣던 부모세대와 하체를 유난히 흔들어대며 '불타는 사랑'(Buring Love)을 외쳐대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펜들의 대립이었다. 부모는 TV에 비쳐지는 앨비스의 모습을 제지했지만 록음악의 물결은 더욱더 거세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당시의 록음악은 시대상과 어울려 극단적이지는 못했다. 다시말해서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그이상의 광적임과 추앙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1954년부터 시작된 록음악은 젊은이들에게 움직임과 호흡하는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더 나아가서 부모의 보호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여러 젊은이들이 제2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꿈꾸며 새로운 형태의 록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1955년 부터 1960년대 까지 엘비스의 전성기 시절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부터 새로운 형태의 록음악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어쿠스틱 기타위주의 포크음악에서 전기기타를 이용한 포크록이 밥딜런을 비롯하여 탄생되었고 컨트리도 컨트리록 스타일로 변형되었다. 기존 블루스 스케일에 록을 접목시킨 블루스 록, 환각적이고 충동적인 사운드를 주로 표출한 사이키델릭 록도 출연하였다. 또 다양한 음의 표현에 중점을 둔 프로그레시브 록도 생겨났다. 이러한 각 분야에 록의 개념이 융합되자 대중적인 지지도에서 세분화되는 인기도가 형성되계 되었다. 다시 말해 엘비스가 록이었을 때는 그만 좋아하면 되었지만 음악 장르와 뮤지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자 전체적인 통일감을 형성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록은 대중적인 지지력을 어느정도 상실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1955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의 주간 음악 전문지 빌보드 집계로 살펴볼때 재미있는 것은 그룹들이 대중의 인기를 받았다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엘비스가 솔로였던것에 반에 음악성이 융합된 다시 말해 목소리에서 사운드로 변모된 스타일을 대중들이 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상륙으로 인하여 불을 당긴 그룹 열기는 록 음악의 개념을 사운드 위주로 감상하도록 종용하였으며 그후 각기 각양의 사운드로 채색된 다양한 록음악이 공존하게 되었다.  솔로 위주의 록음악에서 그룹으로 변모된 록음악은 다양한 장르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비틀즈 이후 그룹들은 앞서 언급한 포크록, 컨트리록, 사이키델릭록, 프로그레시브록등으로 각기 특색있는 사운드를 표출하면서 록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후 다시 획기적인 충격을 가한 록음악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하드록의 출현이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40만명이상이나 끌어들인 대규모의 공연 우드스탁의 '평화의 제전'이 치루어진 1969년에 하드록은 탄생되었다.
그 음악은 엘비스가 출현하여 전기 기타를 이용한 폭발적인 모습에 더욱더 위력이 가세한 사운드로 형태를 갖추어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하드록 사운드의 주역은 레드 제플린, 딥 퍼플, 지미 헨드릭스등이었고 그들은 엘비스 못지않은 지지도와 인기 그리고 시대상을 반영한 음악성으로 확고한 명성을 획득하여 나아갔다. 1954녀 탄생된 록음악이 15년만에 더욱더 파위풀하게 된것이다. 그들의 앨범은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 했으나 다른점이 있다면 싱글힛트는 하지못했다. 그것은 엘비스의 록음악에서 이제 스타를 원하는것이 아닌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그룹을 원할 뿐 스타는 크게 원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입증해 주었다. 더욱더 가사, 사운드, 테크닉 등에 귀를 기울인 록음악 팬들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등의 기본 라인업에서 더욱더 다양하고 신비로운 음의 세계를 원했고 그같은 영향으로 재즈록, 글램록, 모던록, 아트록, 일렉트릭록, 헤비메틀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미국과 영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록 소규모 였지만 이태리, 프랑스, 독일등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다. 각국은 그들의 개성적인 음악 분위기를 록에 결합시켜 프랑스에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독일에서는 무그의 영향을 받은 전자음악이,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록이 클래식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TV쇼와 FM라디오등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록을 미국과 영국뿐만이 아니라 제 3세계에까지 광범위하게 퍼뜨리게 하는 것이었고 지금은 지구상의 전국가에서 록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것이다. 1985년 7월에 있었던 아프리카의 기아 남민을 돕기 위한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를 계기로 소련에도 록그룹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록음악이 이미 전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 장르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다.

   록음악의 세계적 공시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록음악은 그 중심국가 뿐만 아니라 공산국가에도 그 사회체제에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60년대 이후 록음악은 청소년들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현재 10여개가 넘는 공식화된 소련의 록그룹이 활동 중에 있고 동독에서는 현재 5000여 아마추어와 120여개의 전문 록그룹이 국영 레코드회사를 통해 연간 50 만장이 넘는 레코드를 찍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공산국가에서 뿐만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에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나라에는 이미 1970년대초 신중현을 탄생시킨 바 있다. 다시말해 록은 오래전부터(적어도 70년대이후) 전세계적인 음악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적 공시화'란 개념으로 설명한 햄린크의 견해는 이렇다. 그가 언급한 '문화적 공시화'란 개념은 모든 인간 사회의 문화 체계는 환경에 대한 기술적, 상징적, 사회적 적응을 통한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문화적 자율성은 모든 사회의 독립과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의 문화는 역사상 꾸준히 서로 영향을 끼쳐왔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었지만 상대문화의 특정양상을 받아들여 자국의 총체성을 유지한채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20세기의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전례없이 세계적 차원에서 특정 문화형태의 공시화 현상이 일어났다. 문화 제국주의는 문화적 공시화가 발생하는 가장 빈번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소련의 대중매체가 수많은 서구의 상징들과 문화물 형식들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명백한 자본주의적 관계가 없을지라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공시화 과정은 중심국가내의 특정한 문화적 발전 형태가 설득적으로 수신국가들에게 전달되는 것, 문화적 산물이 한 방향으로 유통하면서 근본적으로 공시적 양태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그 지역의 사회적 창의성과 문화적 창조성은 혼동되거나 결정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수세기 동안 발전해 온 인간적 가치들의 고유한 차원은 급속히 사라져간다. 그러므로 문화적 공시화란 어떤 국가의 문화적 발전에 대한 의사결정들이 강력한 중신국가의 이익과 필요에 적합하도록 되고 수신국가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교묘하면서도 파괴적인 효과를 행사하는 것이라 정의될 수 있다.
록음악과 그것에 기반한 대규모 콘서트등 미디어 이벤트들이 구현하는 '우리주의'의 효과는 앞서 설명한 문화적 공시화의 효과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미 록 음악이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부분이라고 할때 이들 록의 중심국가들이 중심이 된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들이 외쳐대는 이른바 우리주의(We-ism)는 제3세계 국가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까지도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록음악은 발생기에서부터 청소년층의 자기확인, 사회적 정체성의 구현수단이었으며 록음악을 잘 아는 청소년이 소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시 말해 록음악은 지금까지 청소년들의 개인성을 실현시키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해 왔다는 뜻이다. 이런 록음악의 청년 문화적 특성과 함께 록음악이 스스로 간직 한 포크 이데올로기 - 록음악이 자신과 팝음악의 구분을 위해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음악을 생산하고 생산자와 청중의 삶의 양식이 동일한 음악 형태인 포크음악의 성질을 진취해서 록음악은 상업적일지라도 어떤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표상하는 것을 말한다 - 에 기초한 '록 공동체'의 발생은 록이 중심국인 미국과 영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제3세계에 더욱더 그 영향력을 높여갔고 록음악의 미국 내적 변화와 전세계적인 확산은 두개의 커다란 록이벤트인 1969년의 히피 운동과 반문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우드스탁 '콘서트, 1985년에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위해 열렸던 '라이브 에이드'콘서트의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우드스탁 '이 3일 동안 50여만명의 히피 추종자들이 모여서 반전, 반권위, 진보를 외쳤던 반면에 '라이브 에이드'는 17시간동안 9만여 관람객과 15억에 달하는 세계의 시청자를 겨냥해서 인도주의를 외쳤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한 언론의 담론을 통해 가장 빈번히 등장했던 단어들은 '세계는 하나', '우리는 세계', '전세계에 록을'등 세계를 '우리'란 통합체로 묶으려는 것들이었고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에 마지못한 듯이 동조했다.
분명히 록음악은 록음악과 록운동은 이것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젊은이들이 주체가 된 형태로 나타났고 일견 그러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리고 또 이것이 발현된 시기에는 확실히 이것들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젊은이들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록음악을 가리켜 하나의 도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기존 양식에 대한 불만이며 정신적으로는 구차한 인습에 대한 거부이다. 그것은 언제나 한 시대의 가장 극단에 서서 사물을 보며 모든 도덕적, 관념적 권위에 대해 정공법적으로 대항해 왔다. 때문에 록은 대내적으로는 선배들의 낡은 연주방식에 대한 성토의 역사이며, 대외적으로는 모든 도덕적 권위주의자들과의 투쟁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글이 바로 록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록은 언제나 그렇게 비쳐져 왔다. 그렇기에 록음악의 정체성은 그 음악적인 특질보다는 록음악이 구현하는 록이데올로기의 관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록이데올로기의 이상적 구현을 우리는 '우드스탁 '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9년 8월 15일에서부터 19일까지 사흘에 걸쳐 개최된 역사적인 사랑과 평화의 제전인 우드스탁 록 페스티발은 그야말로 록의 역사상 전 대미문의 경이를 선사한 이벤트이다. Woodstock Art & Music Festival이라 명명된 이 행사는 67년의 몬트레이 팝으로부터 시작된 록 페스티발의 결정으로서 자리하며 록 문화의 전설로서 각인되었다. 그 당시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50여만명의 플라워 칠드런들이 사랑과 평화의 숭고한 이념을 실현한 우드스탁 페스티발은 실제 우드스탁 (뉴욕근교의 조그만 마을)과는 55마일이나 떨어진 낙농업자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 Woodstock Nation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적 정신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와 함께 탄생하였다.
출연진 역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서 우드스탁 아트 & 뮤직 페스티발의 기획자는 마이클 랭이라는 청년이었다. 전문 프로모터가 아닌 그가 이런 초대형 이벤트를 성공시킨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우드스탁은 TV나 신문 라디오등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하지도 않았으며 대대적인 홍보활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우드스탁의 성공 속에는 당시의 플라워 칠드런들이 구현하려 했던 '사랑과 평화'의 정신적인 모토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위선적이며 모순된 도덕관을 박차며 달리는 젊은이의 자화상 '이지 라이더'에서 보여진것과도 같은 행복으로 가는 길로의 도정이었으며 50만의 젊은이들에게 공통으로 작용한 공감된 연대감 - 음악과 결부된 휴머니즘의 발로로서 - 과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페스티발의 성사에는 최악의 조건들이 내재해 있었다. 지방관리들에게서 행사의 승인을 얻지못한 이유로 개인 소유농장에서 공연은 벌어져야 했고, 첫날 공연이 끝나가면서  모든 음식 공급은 고갈되어 버렸고 교통두절로 인해 식량의 재보급 또한 불가능하게 되었다. 페스티발의 기간중의 우천으로 관객들은 진흙탕에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 했으며 우드스탁 사방 20마일 내의 모든 도로는 통제 당했다. 후생시설 역시 최악으로써 간이 화장실은 미처 비울 틈도 없이 차 넘쳤으며 지방 행정 관리들은 이 지역을 재난 구역으로 공표해줄 것을 상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우드스탁에 모인 플라워 칠드런들은 산재한 열악함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느꼈으며 실천해 보였다. 고의나 악의적인 사고없이 펼쳐진 사흘간의 우드스탁은 일종의 정신국가인 우드스탁 네이션에 근접해 있었고 기존의 사호가가 현상과는 별개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TIME지는 이 행사를 가르켜 '역사적으로 가장 큰 해프닝이며 새세대가 벌이는 정치적, 사회작 사건'으로 NEWS WEEK지는 '각 세대들이 갖고 있는 의식 세계를 살피는 대 전황점'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록문화의 잠재적인 상품적 가치가 하나둘씩 개발되어진 록의 산업화와 록문화의 구심체로 역할을 했던 라이브 콘서트를 스폰서한 미디어 이벤트에 의해 변질되는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헤게모니의 구축을 목적으로하는 권력에 의해 록 음악은 명백히 극도로 발달된 미디어 기술에 이용당해 맥루하니즘을 구현함으로써 토대에 결여되어 있는 신뢰감과 공동체성을 위로부터 재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되는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콘서트에 경우에 그 공동체는 문화산업이 닦아놓은 취향과 감수성에 기초한 것일 뿐, 거기에서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산화되거나 심각하게 왜곡되어져 있다. '라이브 에이드'와 같은 미디어 이벤트 현상은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가 자신의 감수성으로 세계를 묶을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록음악이 이미 세계로 향한 권력의 통로가 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록 이데올로기를 통한 권력의 효과적인 지배인 셈이다.

   록음악을 통한 권력의 효과
  이와 같이 록문화가 권력의 통로로서 사용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면서 록문화의 사회적 위상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런 의문들이 등장할 것이다. 록음악은 계급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지배와 피지배를 발생시키는 어떤 특별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가? 록문화의 논리는 어떤것이며 그 문화는 궁극적으로 어떤것에 봉사하는가?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힘과 권력에 대한 연구들은 그것의 억압적 성격, 금지와 검열, 단일한 기제로 움직이는 입법적 권력리 테두리 내에서 수행되어 왔고, 나름대로 대상 영역에 있어 권력의 메카니즘을 분석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현재 일상 생활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여러가지 힘의 말초적 신경들이 억압적 성질만을 띈 것인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문화는 세계 어느곳에서나 사람들에게 지난 세기의 문화보다 많은 양의 자유와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다. 금기시 되어 왔던 많은것들이 -  서양에서의 기독교 윤리관의 해체, 동성연애, 마약들의 일상화, 동양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의 붕괴, 혼전 성교 등등 - 일상적인 것이 되어가고 매스 미디어는 그것들을 광범위하게 전파시킨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는 더 이상 일상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는 어떤 힘의 영향하에, 권력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권력 이전보다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후기 구조주의 학자 미셸 푸꼬는 권력의 역학과 그 효과에 대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억압이 아닌 상태로 작용하는 권력의 매카니즘을 매우 예리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그의 권력의 매카니즘에 대한 논의는 텍스트 분석을 통한 담론 연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의 추상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구체적인 권력의 근원지와 그것의 다양한 전략에 관한 열린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기존의 연구에 있어서 우익에서는 사법적인 맥락에서만, 좌익에서는 국가기구의 맥락에서만 권력을 논했을 뿐 권력의 그 특유의 속성과 전술적 기술을 발휘하며 구체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어떻게 핼사되는가의 문제는 아무도 확인하려 들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권력에 접근하는 푸꼬의 이러한 입장은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라는 개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선진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의 방향이 강요된 채 근대화를 겪어왔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의 일반법칙이 중추적인 사회논리로 작용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단순한 '새로운 설명'의 제공을 넘어서서 더욱 개관적이고 현실적인 분석의 영역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된다. 그가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도도 구조도 아니며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붙인 이름이다.'
푸꼬는 시민들은 예속시키는 정치와 제도들, 합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예속화의 양식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지배의 일반 체계 등은 오히려 이와 같은 권력의 효과이며 결론적인 형태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권력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권력의 행사와 그 조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역학관계가 다양하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끊임없는 대결과 투쟁을 통해 권력을 변형시키거나 강화시키거나 혹은 역류시키는 작용, 그것들이 일련의 고리와 체계 속에서 서로 의존하는 현상, 또는 어긋남과 반목을 통해 이합집산하는 현상, 마지막으로 권력의 효과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전략인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문화, 세계적인 문화가 되어버린 록문화는 어떤 권력의 전략을 실천하고 있으며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권력의 효과와 발생하는 전략을 분석해 나가려면 관련된 모든 영역에 대한 입체적인 논의가 필요한데 록문화 영역에서의 권력의 효과와 효율적인 분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논리와 자본주의적인 성장치가 위에서 설명한 중심국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록 이데올로기의 영역과는 별도로, 집중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록문화를 통한 권력의 효과는 이런 각각의 매카니즘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며 사회적 조건에 따라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지만 현단계에서는 지배의 총체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록문화의 자본주의적 모습
  50년대를 전후해 시작되어 60-70년대 그 절정에 들어선 '아메리칸 드림'과 '팍스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미국의 경제는 사상 유래없는 대 경제 호황 속에서 어느때보다도 활발한 대외 원조 활동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전개된다. 전후의 베이비 붐을 타고 태어난 아이들은 이 시기에 청소년층을 형성하고 이들은 이러한 초호황의 경기 속에서 과거 그 어느때 보다 풍성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또 문화 산업도 그 어느때보다도 많아진 청소년층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50년대를 걸쳐 60년대 중반까지의 활발했던 실황 공연이나, 그밖에 새로 등장한 TV와 이를 이용한 많은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들, 또 음반등, 특히 이당시 등장한 카세트 테이프는 음반의 가격을 대폭 낮추는 혁신적인 발명품으로 기존의 레코드 판뿐이었던 음반업계에 대단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소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던 당시의 상황과 적절히 맞물리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음악은 더욱 그 소비자들 가까이에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나 레코드가 미국에서 대중 상품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이 단지 앞서 말한 유효적절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으며 음악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때문은 더더욱 아니다.특히 60 년대 말에 이르러서 왜 레코드가 젊은이들에게 실황공연을 대체하는 강력한 상품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아프리오리한 이유도 없었다. 이런 록음악의 경우와 유사한 예를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계속되어 온 영국의 뮤직홀 전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 뮤직홀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면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해 갔는데, 영국의 노동자 계급에 가장 보편적인 대중문화의 향유와 보급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뮤직홀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장소로 그들은 25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가벼운 술로 하루의 피로를 잊고 휴식을 취하며, 그들 나름대로의 계급적 동질성을 재확인했으며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제점을 함께 생각하며 정치적 의식을 키워 나갔다. 이곳에는 예외 없이 이들이 즐길만한 음악 들이 연주되었는데 음악들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것으로 바뀌어 불려지곤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임의 성격상 이곳에서는 거친 행동이나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런 이유들로 급기야 의회는 뮤직홀 허가에 관한 법령을 제정해서 뮤직홀 설립의 시설과 설비요건을 규제했기 때문에  이들 하위문화의 주도적 중심체인 뮤직홀은 많은 경우 전업을 하거나 문을 닫아버렸고, 남게 된 홀도 기존의 이동식 좌석이 고정식 좌석으로 바뀌고 입장료의 요금도 인상되었는데 이로서 이른바 '뮤직홀 문화' 라고 불리던 하위문화의 구심체는 사그라들어 버렸다. 대중상품으로서의 레코드의 등장도 직접적인 노동계급의 의사소통 통로를 제거하려는 뮤직홀의 경우와 유사한 정치적 이유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레코드가 대중 음악 전반에 걸쳐 특별한 사회적 가치를 갖게 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시기를 전후해 청소년층의 자기확인, 사회적 정체성의 구현수단으로의 록음악이 그 소비의 형태에 있어서 콘서트 중심에서 대중 음반 산업 중심으로 변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록음악을 잘 아는 청소년이 소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그들에게 록 아티스트의 레코드 소장 정도는 그가 얼마나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척도로써 작용했고 이것은 음반의 소장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자본 주의적 대중 음반 사업에서는 내용과 질에 있어서 대동소이한 수천 종의 음반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자유 경쟁을 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수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상품 선택권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음반 산업은 소비자의 특별한 기호와 선택을 창출해야만 자유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인해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 내에서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낭만주의는 18-19세기의 문예조류로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태도를 말한는데 그것은 자아표현에의 이상과 자유, 천재성의 강조,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인과관계의 거부, 문예인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재능과 감수성을 지닌 자에 대한 근대 사회의 적의와 일상생활에의 혐오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중 음악의 음반 산업의 영역에서 음악인들의 위치는 위와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도록 구성되며 이런 현상은 자작곡 가수와 그룹의 연주가 발달해 있는 록음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난히 록음악의 담론에 있어서 가수, 작곡자, 연주자들이 아티스트란 말로 불리우며 대중매체가 대대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개성을 부각시키고 있음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낭만주의 시스템에속에서 각 음반회사및 대중 메체는 소비자의 특별한 기호와 선택을 창출할 목적으로 음악을 생산하는 생산자 즉 아티스트들에게 보증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걸 필요가 있다. 이들 록스타들은 소속된 회사의 재산으로 명목화하여 회사의 고정자본으로 창출되어지고, 음반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이미 검증들로부터 록스타들은 '제조'되는 것이며  이것들은 낭만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다시 록스타들을 유일무이한 신으로 우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경우 그가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록스타가 된 이유가 단지 그의 음악이 전세계 팬들을 열광적으로 매료시킬만큼 충분히 훌륭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록문화 산업은 회사에 고용되어 활동하는 록스타들뿐 아니라 과거의 이미 사라져버린 아티스트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70년대 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의 3J의 요절은 지금까지도 록매니아 들에게 많은 잡담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최근 올리버 스톤 감독의 'THE DOOR'란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던 짐 모리슨은 그 의문에 싸인 죽음때문에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고 시내 중심가의 록 전문 상점을 통해 도어스의 많은 수입음반들이 판매되었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는 지미 핸드릭스의 사망 32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전 앨범들이 발매되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앨범들은 기간을 두고 그 전 앨범들이 발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 대대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특히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심야 FM방송과 음반 업계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최근에 유럽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네오 프로그레시브 운동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지금까지 비교적 생소한 영역이었던 유럽의 음악들을 소비자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소비자의 음악에 대한 다양성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면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이것이 단지 소비자의 음악에 대한 욕구때문에 일어난 형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시장에 나온 상당한 부분의 유럽 프로그레시브 음반들은 모두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저물어가던 70년대 이전의 작품들로 이들은 록 칼럼니스트에 의해 하나같이 모두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명반들로 공인되어 발매되고 있고 특히 특정 음반들은 높은 가치를 지닌 명반으로 취급되어 시내의 수입 음반 판매상에 의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어 - 특히 이탈리아의 록 그룹 '알파타우르스'의 앨범은 126만원의 고가로 거래된다고 한다. - 유럽에서 소비된 음반들이 우리나라에 고가에 수입되어 재활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록음악의 강력한 실황적 성격은 음악의 소비자와 생산자가 일견 같이 숨쉬고 호흡하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동일한, 수용자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병하는 음악으로 그려지게 하고 또 일견 그런 모습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대중음악들은 그것의 생산자와 분리되어져 음반 산업의 게이트 키핑 과정을 겪으면서 음반으로 만들어지며 소비자는 거기에 수록된 음악, 가수, 문화의 상징적 성격때문에 그 음반을 구입할 뿐이다. 이러한 음반산업의 매카니즘에서의 개인에의 강조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표준화'의 요구와는 모순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구조가 지속되도록 하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레코드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많은 개인들이 그것을 선호하고 구입하는 해위를 통해서 자신의 개인성이 실 된다고 여김으로서 가능한 것인데 이러한 소비자 상황의 모순, 즉 대량소비에 의한 개인성의 확인은 단지 음반산업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데서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근본적인 자기모순의 자기반영이라 하겠다.
한편 이와같은 음반산업의 전략은 거시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비자의 증가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흥하는 것이다. 지본제적 대량생산의 가속화에 맞추어 소 자는 매번 새롭게 창출되어야 하므로 시장은 수평적으로 (다른 국가로) 그리고 수직적으로(노동 계급에게로) 사용 가치를 고양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장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소비주의는 근본적 사회관계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생산력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바람직하고 판매가능한 상품이 되어야 했고 전통적 가족형태와 유대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가장 진보된 존재 형태로 제시할 필요가 생겨났다. 여기에 작용하는 소비원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사, 판사, 공장 지배인 따위의 기존의 노동법칙과는 상이한 법칙을 가지는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억압적인 노동원칙과는 상반되는 것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상품선택의 자유가 부르조아 시장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중의 하나이고 그것이 갖는 '노동 원칙으로부터의 해방' 이란 이데올로기는 결코 억압적으 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전통적인 사회관계의 붕괴는 개인의 정체성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고 이 자리는 사회적 구별을 구현하는 상품들의 모자이크로서의 개인에 의해 채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생활양식들 만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생활양식들은 대중스타들에 의해 통합된 형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들 사 의 변동은 광범위한 문화영역의 소비창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화 산업의 '해방'이란 가치의 전유와 확대 재생산의 매카니즘은 반문화의 성쇠에서 드러난다. 록음악은 겉으로는 반문화와 대기업 사이의 투쟁의 장으로 존재하는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항상 대기업이 반문화를 자신의 목적에 알맞도록 이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 생산 자체에 대한 자본주의의 통제라기보다는 오히려 1970년대의 록음악의 산업화 전략, 전문가 주의, 장르 분화, 대스타들, 다매체 촉진 운동 등등 자본제적 향락산업의 '질서 정연한 소비'를 통한 문화적 실천에의 자본주의적 통제라 하겠다. 이런 질서 잡힌 소비의 과정 속에서, 록음악 주변에 기반을 둔 반항적 젊은이의 하부문화는 디자인과 패션의 개혁에 창의적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고양된 사용가치의 창출에 전위적 역할을 해왔으며 이것은 항상적으로 기존의 상품을 진부화시켜서 문화상품 전반에 걸쳐 생상과 소비의 주기를 가속화 시켜왔다. 50-60년대 히피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오토바이는 영화'이지 라이더'와 그밖의 다중 매체를 통해서 미국에서 일반적인 청년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런 따위가 앞선 글을 가장 잘 설명하는 적절한 예일 것이다. 오토바이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게 된 까닭은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오토바이가 특별하게 유용한 물품이었던 때문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행위가 일종의 해방이라고 여겨지게 된 까닭이고 그럼으로서 자신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때문이었고 이것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보여졌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가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 필요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주의깊게 살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결국, 소비를 통한 '자아'와 '해방'의 획득, '해방' 영역의 끊임없는 확대와 재생산 - 여기서 60년대 이후의 록 문화는 핵심적인 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

      성장치로의 록문화
미셸 푸꼬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 Histoire de la sexualite]에서 노동계급의 성이 노동 에너지의 충전을 위해 부르조아에 의해 억압되었다는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며, 오히려 억압되고 끊임없이 감시되었던 것은 부르조아의 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17세기 이후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확장 일로를 달렸다고 주장한다. 푸꼬에게 있어서 섹스는 성장치에 의해 생산되는 무었이지 남성과 여성에게 작용하는 법칙이나 억압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담론이 작용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신체, 성기관들, 쾌락, 혈족관계, 대인관계 등이며 역사적으로 특수한 적용해 의해 특정한 섹스가 생상된다.
19세기부터 서구에서는 성관계의 결합장치 - 결혼, 인척 관계의 고착과 확대, 성과 재산의 이동등의 제도 - 에 새로운 장치인 성의 장치가 포개어지면서 결합장치의 중요성을 축소시켜 나갔다. 결합장치가 허용과 금지, 합법과 불법, 법의 유지와 그것에 따른 쌍방간의 연대관계와 관련된 반면, 성의 장치는 유동적이며 미세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육체의 감각, 쾌락의 질감, 일상의 성질을 통해서 통제의 형태와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한다. 성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장치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이 뒤덮고 있는 망상의 표면에서 육체의 자극, 쾌락의 강화, 언어의 유발, 지식의 형성, 통제와 저항의 증감등이 권력과 지식의 어떤 전략에 따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마디로 결합장치가 현상유지를 그 기능으로 하는 정온적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반면 성장치는 육체에 대한 다양한 방법의 침투를 통해 민중에 대한 좀더 총체적인 통제를 그 존재 이유로 삼는다.  푸꼬에 의하면 육체에 대한 가치부여는 부르조아 헤게모니의 정착 및 확대과정과 직결되는 것이며 귀족 계급이 혈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듯이 부르조아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에게 육체와 성을 줌으로서 정체성을 획득하고 성장치를 통래 힘과 번영과 영속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성은 강한 도구성을 지녀서 수많은 조작에 사용될 수 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전략들의 접합점과 받침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치는 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그 안에서의 실천을 통해 부르조아 계급의 육체와 성을 화보하믓로서 다른 계그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그것을 통해 타계급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푸꼬가 역설한 '권력의 통로로서 성정치' 란 개념을 우리의 현실로 옮겨와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성장치를 논의한 맥락은 계보학적인 것이지만 앞서 기술한 권력의 개념과 그 권력으로서의 성, 성장치의 현대적 기구로서의 록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치로서의 록문화는 '성;이란 허구적인 요소를 창조해서 성을 욕방의 기제로 만드는 기제, 그것을 폭발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확대시키는데 있어 특별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록수타들의 발생기에서부터의 탈청교도 주의는 성 자체가 자유, 해바으 자아구현, 반문화의 상징으로 보여지게 했고, 앞서 기술한 문화산업 영역의 매카니즘 속에 흡수되어져 대중의 생활 영역의 가장 말초적인 곳까지 배포되어 있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록음악의 저속성과 청소년에의 악영향에 대한 논란이 일어 기독교 단체와 PMRC(미국 상하의원의 부인들이 만든 단체로 건전 음악 보존을 위한 학부모 모임)와 같은 압력단체에서는 이 문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 갈 정도로 심각하게 논의되었는데  - 사타닉을 추구하는 블랙 메틀 그룹인 킹다이아몬드의 앨범 의 발매를 둘러싸고 각종 기독교 단체와 PMRC 등에서는 '사악한 악마 숭배자의 한심한 작품', '이단에 물든 반기독교 앨범', '저주받은 작품'이라고 혹평과 비난을 퍼부은 예가 있다. 이에 대한 킹의 반응은 '사탄 숭배는 또다른 종교적 신앙이며 결코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는 아니다. 당신들이 기독교를 믿는 만큼 나는 사탄을 믿으며 남의 믿음에 간섭하는 것은 위선과 오만이다'였다.                  
             록음악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인 압력은 록의 도덕적 해이성을 주춤거리게 할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지배적 도덕률과는 상이한 도덕률울 가진 가수 - 또는 그들로 대변되는 같은 도덕의 추종자들 - 들의 발언권을 높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법정이라는 공식적 영역에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끔 함으로서 록문화와 그것에 대한 담론의 영역을 공식부문에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라디오, TV, 신문의 가십란, 수많은 록음악에 관계된 잡지들은 록스타들의 해방된 사생활을 끊임없이 보도함으로써 록과 성에 대한 담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며 마돈나 스타일의 스타킹을 통해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자유로운 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 록 문화의 확장은 문화산업이 조직하는 매우 질서잡힌 소비를 통해 특정장소 - 댄스홀, 대중음악회, 쇼핑장소, 영화관, TV, 침실 - 와 특정 통로로 소비의 장소가 한정되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통제 영역의 확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반란의 에너지는 부르조아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허상의 해방경험으로 소진되어 거는 것이다.

     한국의 외래음악사
  한국의 록음악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그 정확한 고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록음악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전래된 외래 음악의 전반적인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음악의 위치와 전망을 적절히 조망해 보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외래음악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겠다. 첫번째는 개화기 이후에 강대국들의 침락욕구와 함께 들어온 찬송가를 비롯한 양악, 그리고 나머지는 6.25이후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받아들인 영미권의 팝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1882년 10월 청국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그후로는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 러시아등의 국가들이 이 땅에서의 정치적 우위권을 가질때마다 서양식의 군제 개편과 훈련, 서양식 군악대 등의 양성을 각기 달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883년 5월부터 이은돌 등의 우리나라사람들에 의해 서양식의 군악대가 조직되었다. 이 서양식 군악대를 시작으로 이 땅에는 강대국들의 강렬한 침략욕구와 맞물린 외래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된다.
1880년대에 아펜젤러를 비롯한 서양의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종교를 전하기위해 한국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이때 선교사들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과 같은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기성세대보다는 학교를 통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설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항 예측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서양식 학교를 통해서 서양의 종교는 이땅에 뿌리내릴 수 있었고 서양문화 또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음악 또한 음악 수업시간에 혹은 예배시간에 찬송가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 서양식 학교들에 의해 서양식 노래가 많이 불리워지기 시작했는데 <애국가>, <독립가> 등 주로 독립, 자주 애국의 의지를 담은 노래등이었다. 이런 노래들은 당시 세계 강대국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이 땅에서 주로 신식 교육을 받은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사람들을 계몽하는 뜻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지은 그러한 노래들의 일부가 1896년, 1897년 '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노래들은 민요식 창법과 서양식 창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기존의 전래민요에 익숙한 이들은 민요식 창법을 서양식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은 서양식 창법을 쓴 것이다.
한편 전통 음악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 이후 기존의 음악 형태를 변모시켜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대처하였다. 즉 김창조가 기존의 민속음악을 융합하여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을 선보였고 소리꾼들도 판소리를 '창극'이라는 새로움 공연 예술로 바꾸고 새로운 사설과 곡조를 창작해서 불렀다. 이러한 노력은 원각사와 같은 신식 극장의 출현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같은해 8월 제1 차 한일협약과 함께 고문정치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이땅의 기존음악들을 강압으로 약체화시키고 공립학교를 통해 그들의 쇼오카(唱歌)를 교육시켜 이땅의 민족정서를 해체시켜 나갔다. 1906년 공립학교 창가가 교과목으로 개설됐고 1910년에는 일본 전래의 노래들을 그대로 번역하여 실은 '普通 敎育 唱歌集'이라는 교과서를 제작하고 이것을 이당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주입시켜 이땅에 일본의 정서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이 교과서에는 <학도가>, <학문가>, <권학가>, <운동가>와 같은 곡이 실려 학생들에게 애창되었는데 특히 <학도가>와 <권학가>는 1913년에 기독교 청년 회원이 日畜朝鮮 소리에 녹음했을 정도로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대중적인 노래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식 창가가 학생들의 음악 정서가 되었고 이 학생들은 커서도 일본 은막 정서속에서 살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은막정서의 변천과정이 음반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한국음반사 초기에는 거의가 전통음악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왜색가요 음반이 제작되었다. 즉 음반 구입층이 전통음악에 익숙한 세대에서 일본 음악에 익숙한 세대로 바뀌면서 자연 음반에 담겨지는 음악도 전통음악에서 왜색가요로 변하게 된것이다.
1907년 3월 미국의 Columbia 음반회사가 최초의 한국음악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전통음악을 담아 팔았다. 이 미국 음반 회사들은 한국과 거리상으로 멀어 제작, 판매가 번거러웠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적 우위에 서게 되자 한국음악 음반 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이땅을 황금의 음반시장으로 바꿔나간다. 1911년 9월부터 일본 축음기 상회는 한국음악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1928년 부터는 Columbia로 개칭하고 광복때까지 이땅의 음반산업을 주도했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을 앞세운 기계식 녹음의 일동 축음기주식회사(제비표조선 레코드, Nitto)는 전기식 녹음을 쓰는 Columbia의 출현으로 얼마가지 못해 이땅을 떠났다. 그리고 Columbia와 함께 Victor, Polydor, Okeh, Chieron이 1920년대 말부터 광복때까지 한국내에 있던 대표적인 음반회사였다. 당시에 제작된 음반에는 한국인의 음악정서가 바뀌어가는 상황이 생생히 남아있고 전통음악과 양악, 왜색가요가 적절히 유합되지 못한채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었다. 또 일제 말기 음반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음악도 상당수 담겨있다.
이 가운데 옛 전통 음악인들의 음반을 비롯해서 안기영이 구전 민요를 편곡, 악보화하여 합창곡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담은 음반들은 전통음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나 외래음악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현실에 알맞게 자리매김을 하는데 있어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광복후에도 왜색가요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민족음악이 나가야 할 방향조차 하지 않은 산태에서 전통음악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전통음악과 양악, 왜색가요 사이의 장벽은 더욱 높나만 갔다. 또 광복 후에도 학교에서 양악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 전통음악은 우리음악이면서도 외국음악으로 느껴질 정도로 낯선 음악이 되었고 오히려 양악이 우리음악인 것처럼 친근감을 느께게 되었다.
옛부터 예술인을 천대하는 풍조와 선진국의 음악은 선진 음악일 것이라는 생각이 맞물려 전통음악은 소외되고 일부 전통 음악인들은 평생동안 공들인 예술을 등지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채 숨어살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양의 고전 음악은 상류충의 고급음악으로 인식되면서 이땅에서 그 세력을 넓혀갔고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62년 재정 법률 제 961호 '문화재 보호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전통음악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박자하나, 가사하나 바꿀 수 없이 박제화 되어 그 생명력을 잃어갔다. 즉 대중 속에서 사랑받고 비판받으며 자라는 전통음악이 아닌, 문화재보호법이라는 구멍난 비닐하우스 속에서 보호받는 전통음악이 되자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되고 말았다.
한편 국내에서 1956년 경부터 10인치 장시간 음반(LP)이 1962년부터는 12인치 음반이 1963년부터는 스테레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국내의 음반산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6.25이후 이땅에 또다른 양악이 들어오게 되는데 미8군을 중심으로 유입된 영미권의 팝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미권의 팝음악은 미군을 대상으로한 AFKN방송을 통해 급겨히 확산했는데 AFKN은 그 특성상 문화수준아디 낮은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어서 미국내의 상업벙송보다 더 오락적으로 편성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중 음악뿐만이 아니라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는 대중문화 전반의 방향설정에 광범위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영미의 팝음악은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시 소통된 영미권의 음악은 주로 록음악과 재즈였는데 그부렵 국내 음반산업과 방송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오디오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영미권의 음악은 음반과 방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유행되었다. 라이센스 음반이 없었던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10여년 동안은 외국에서 제작된 음반을 복제해서 만든 일명 '백판'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서 팝송도 라이센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라이센스가 나온뒤 복제음반은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나 지금도 복제음반은 제작되고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약 25년간 제작되어온 복제 음반을 통해서도 팝송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면 국내 음악인들은 록음악을 어떻게 소화하고 이해하였는가?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연예인에게는 새로움 일터가 생겨났다. 미군부대내의 쇼뮤대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쇼무대는 당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고 전쟁이 끝난후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국내의 연예인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터였다. 미8군 쇼무대에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한 것은 연예인 용역 회사들이 이태원을 비롯한 평택, 문산, 의정부, 동두천등지의 주한 미군을 위한 클럽에 연예인을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컨트리 패키지 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경 신중현의 등장으로 국내 록음악이 본격화 된다. 그는 초기에 미8군 쇼무대를 주무대로 해서 활약했었다. 신중현은 1960년대초 4인조 그룹 '에드 훠'를 결성한 뒤로는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 등을 창작, 한국적 록 음악을 선보이면서 '키보이스'등의 그룹들이 영미의 록음악을 모방하던 당시의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 '키보이스'나 '키보이스가 양분하여 생긴 '히식스','키브라더스'등은 60년대 초반 부터 미국의 '서핀록'을 받아들여 '해변으로 가요'풍의 가벼운 록음악을 히트시켰고 이들은 주로 외국곡 연주나 젊은이의 사랑 노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래로 일관했다.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대중문화로 정착되는 데느 방송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64년 여름부터 라디오 방송국들은 다투어 팝뮤직 프로그램을 신설해 미국의 최신 유행 음악을 배포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TBC-TV에는 '쇼쇼쇼'란 본격적 쇼 프로그램이 생겨서, 무대 체질인 이들 록그룹들은 더욱 광범위한 시청자를 향해 대중문화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30-40대의 젊은 시절 음악이었던 이 시대 그룹들을 편의상 록그룹 1세대로 부르기로 한다.
1976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가요정화운동으로 기존의 록그룹들이 해산되고 록음악은 쇠퇴하는듯 했으나 대학가요제가 생겨나면서 '샌드 페플즈', '라이너즈', '오슨80'등과같은 신선한 록그룹들이 탄생하여 록음악은 다시 활기를 띄게 된다. '나 어떡해'로 시작된 그룹사운드의 붐은 신선한 매력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들끓게 했다. 히식스나 키보이스 같은 그룹의 사운드와 '나 어떡해'를 비교하면 금방 그 음악성의 차이가 드러난다. 밤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이 팝을 그대로 도용했다면 대학 그룹사운드는 그것을 한국적인 사운드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는 지금도 많은 젊은이가 애창하는 명곡을 만들어 냈다. 이 당시의 음악들은 젊은이들이 대학 가요제를 통해 그들 나름의 분위기 속에서 생산한 록음악이 제도 방송권 내에서 방송된것으로 이당시 등장한 '송골매', '산울림', '벗님들', '사랑과 평화'등이 록그룹 2세대를 이루는데 이들의 등장에는70년대 들어와 널리 보급된 FM음악 방송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등장은 국내 록음악의 흐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이 그룹들은 더 이상 외국곡을 앵무새처럼 불러대지 않았으며 신선한 감각의 노랫말과 음악내용을 지닌 창작곡을 통해 한국대중음악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당시 등장한 대학가요제 출신 팀중 구창모가 주축이 된 '블랙 테트라'와 배철수가 주축이 된 '활주로'가 합세하여 만든 '송골매'가 80년대 록음악의 새로운 가는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송골매보다 앞서 1977년에 등장한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의 3형제그룹 '산울림'은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독창적인 음악들은 선보이면서 한국 록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산울림'의 출현으로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계속되었던 송창식, 양희은, 윤형주,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이장희, 이정선 등의 포크음악 일변도였던 당시의 음악분위기가 급전환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사랑과 평화는 <한동안 뜸했었지>등을 앞세운 높은 수준의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록음악계를 석권했다. 1979년에 <일곱 빛갈 무지개>로 화제가 된 '작은 거인'의 김수철은 놀라운 작곡능력과 참신한 기타연주로 이후 국내 음악계의 선봉장이 되었다.
1985년 MBC-FM '이종환의 디스크쇼'의 공개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들어낸 '들국화'는 뛰어난 음악성을 과시하며 <그것만이 내세상>, <행진> 등을 발표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리고 '들국화'와 함께 '다섯 손가락'과 '벗님들'의 인기또한 대단했다. 록 음악의 제3세대라고 명명할 이 그룹들은 실황 공연과 매체로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여러가지 점에서 전세대의 록그룹과는 판이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70년대 초반에 기성화된 서구의 록 음악의 영향하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서구적인 감수성을 체질화시킨 아들은 록음악2세대의 서정성의 범위를 넘어서서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더욱 '헤비'해졌다는 것인데 전기기타와 신서사이저, 드럼연주의 지배정도가 극도로 강화되고, 보컬이 노래로서 보다는 소리로써 일종의 악기와 같은 구실을 하며 연주에 가세되는 것, 가사의 반복성과 무의미성, 음악에서의 강력한 리프, 사랑노래의 후퇴들이 그러한 요소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요소들에 힘입어 1986년 '시나위'에 의해 국내에도 헤비메틀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후 수많은 헤비메틀그룹들이 생겨나 현재 국내에는 헤비메틀의 전성시대라 할만큼 대중에게 큰 지지를 얻고 있다.

      록 문화 ; 중산층의 문화산업
  1987년 8월 18,19 양일간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은 7시간 동안 록그룹 1, 2, 3세대에 속하는 17개 그룹이 출연하고 수천의 청소년들이 열광했던 대규모 집회였다. 이런 규모의 음악회가 공공장소의 상징과도 같은 잠실체육관에서 그럴듯한 스폰서(동아 일보와 음악 세계 주최)를 얻어 열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록음악이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공식화된 영역에서 스스로의 문화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록음악의 수용층을 닦아놓은 것은 한국적 입시제도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한 리디오의 심야방송 음악 프로그램들이라 하겠다. 라디오 FM의 음악방송은 록음악에 심취한 청소년들 뿐만이 아니라 입시의 중압감을 느끼는 수험생들이 밤을 밝힐 때 배경음악으로서 공간을 채워주는 무형의 동반자로 기능하기 때문에 청소년층의 심리적 불안정과 예민한 감수성의 균열을 통해 막강한 전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험생을 위주로 한 청소년의 '라디오 공동체'는 그들이 공동체를 느끼는 채널을 통해 함께 소비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로 구별하여 향수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들국화'이후의 젊은 록그룹들이 보여주는 TV출연 안하기, 또는 TV 출연에 대한 무감각 이라든지 공연장에서 보여지는 공연자와 관람자 사이의 상징의 공유, 공연자에 대한 열렬한 공감 표현들은 일종의 반문화적 요소를 지닌 '문화적 동일성'에 대한 록음악의 향유자와 공연자 사이의 확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록음악의 반항적 요소들은 지극히 표면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서 기존의 문화에 대한 반항이라기 보다는 동질적 취향을 가진 그룹의 자기 정체성 구현의 성격을 지닌 '수동적 반항'의 테두리에 머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입시 또는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적 도덕률과 허세의 무게에 대한 도피의 성격을 띈 반작용이며 그것은 가수와 관객, 관객과 관객사이의 동질적 느낌을 확인할 수 있는 실화공연이라는 공개장소에서 수렴되어서 표면화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음악을 향수하는 청소년 그룹은 적어도 자신의 문화를 다른 가족성원과 구별지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인 방을 가져야 하고 실화공연의 주된 스폰서가 말해주듯이 음악을 귓속으로 직접흘려 넣을 수 있는 자신의 카세트와 월간 음악 잡지를 소유해야 하고 백화점의 공연장이나 호텔, 6.3빌딩 등에서 열리는 록음악회에 평균 5000-10000원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가를 지닌 그룹이다. 또한 영어로 대변되는 미국문화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알파벼으로 뒤덮힌 티셔츠와 스노우 진 청바지, 때바지 정도는 유행에 따라 마련할 수 있는, 그리고 공연장에서 일제 카메라를 들고 캔콜라나 그밖의 청량 음료를 마시면서 친구들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부류의 청소년들이다.
록음악은 서구에서 발생 초기에 가졌던 반문화적 성격이 완전히 거세된 채 반규율적 성격, 새 세대의 자기표현의 형식으로 수입되어 구매력을 갖은 '중산층' 청소년들의 개성 추구의 욕구 기존 문화와의 차이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획득의 욕구에 부흥하려는 문화산업 전반에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구의 록음악이 노동자, 청년 문화로 발생하여 문화 산업화 도중에 그 내부에서 패권적 과정을 거쳤던 것에 비해 국내의 록음악이 우리사회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노동자 문화로서의 성격을 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외국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부르스 스트링스틴이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미국인의 보스로 군림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한갓 남의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다. 또 그들은 강한 사회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미치광이가 내머리 속에 있다. 
        '칼을 들고 나를 찌르며 
        '그가 지금 내 머리속에 들어 있다 
        '넌 내가 제정신을 찾을때까지
              날 여기저기 손보려 하겠지.'
또 엑소더스는 에서는 이렇게 노래하며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소리가 나를 미치게 한다. 이제 나는 악몽으로 잠자는 게 두렵다. 안절부절 못하므로 치료도 받아야 한다. 방금 나는 밖으로 나가 어떤 사람을 죽였다. 난 지금 정신 착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싱과 의사는 내가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를 길들였다고 샐각한다. 그러나 나는 진짜 미쳤다. 살인죄로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된 나는 죄를 시안하고 몇몇 정신과 의사의 도움과 뇌엽 절제 수술을 받고 석방되어 다시 사회로 내보내진다. 그들의 게임에서 내가 놀아났다는 것도 알았다. 그 때문에 난 전보다 더 싸이코가 되었고 심지언 내 이름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크리에이터는 현대인들 특유의 무관심을 를 통해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어떤 사내가 유혈이 낭자한 채로 길 모퉁이에 누워 있으나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런 일에 상관해야만 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그냥 지나간다.'
메틀리카는 에서 마약에 지배되는 사람들을 꼭둑각시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의 대중들에게 얼마만큼 호소력있게 다가설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팝을 듣는 대부분의 경우를 생각하면, 비록 청소년들이 영어문화권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뜻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을것이다. 
메탈리카는 을 통해
'이제 전쟁도 끝이 났다.       
그러나 나는 깨어 있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내몸이 얼마 나 남아 있는지.... 
지금난 펌프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숨을 멈추고 죽움을 기다릴 뿐이다. 
신이여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말하며 전쟁의 비인간성과 도덕성을 폭로하지만 메탈리카의 가사는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만큼 빠르다. 가사에 나타난 문제 의식들이 전혀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없는 현실이며 우리에게는 록의 형식만이 관심거리가 될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국내 노동자들에게 록을 소비할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 또하나의 그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 급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열악한 작업환경과 노동시간의 장시간등은 라이브 무대를 주로 펼치는 신세대의 록그룹들과의 갭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고 록은 그들에게는 멀고 먼 나라의 얘기이거나 '잘 사는 놈'의 얘기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혀 록을 소비하고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에 언급되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하부 문화로서 정착된 록을 대중 문화 산업에 의해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된다.
마지막으로 록이 말되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노동자들의 문화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록이 처음 생겨난 그 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과론적 해명일지는 모르지만 록은 자본에 의해 창출된 음악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전기 기타의 상업화로 부터 록의 시작을 잡는것이 지배적인데, 그것이 비록 전세대의 음악양식에 대한 비판의 소리이고 구차한 인습에 대한 반기를 들고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제반 여건이 바로 전기 기타의 상업화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록이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기 시작한때는 밥딜런 이후의 포크록부터로, 포크 음악을 통해 록이 새로운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된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전통음악인 포크 음악이 가진 원래부터의 노동자 문화로서의 의식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의 록음악은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그 안에 갈등적 요소를 전혀 포함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용가치를 광범위하게  창출하는데 매우 능동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요즈음의  텔레비젼 광고와 청소년 잡지의 현란항 광고를 보면  이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광고주들은 특정한  취향의 청소년들에게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 산업의 또다른 문제 ; 표절
문화 산업에 의한 효율적인 이용은 또다른 록음악의 또 다른 영역에서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의 록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반작인 음악문화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표절에 관한 문제이다. 음악 형식의 서양화 이후 한국적 록음악뿐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얼을 담아낼 우리 음악다운 우리 음악조차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서양음악의 표절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사이래 표절에 대한 기록은 브라암스의 교향곡 1번 피날레 테마가 52년전 작곡된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제4악장의 주제와 흡사하다는 논란을 일으킨 것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의 주제와 형태가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과 같다는 판결을 법정에서 받은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법적인 의미에서의 표절은 첫째 노래의 동기가 2개 소절 이상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 때, 둘째 노래의 중간 부분이 4개 소절 이상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때, 세째 노래의 전주부분도 위의 경우처럼 기성곡과 같거나 유사할 때와 같이 명기하고 있는데 표절을 그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보면, 하나는 전에 들은 노래의 기억이 나중에 떠올라 무의식 중에 쓴 후 자신의 곡으로 착각을 하는 류이고 다른 하나는 고의적인 표절, 바로 우리가 가장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본인에게는 상당히 아깝고 속상한 일이겠지만 모두를 위해 포기해야 할 부분의 것이다. 
의식적인 표절, 고의적 표절 역시 몇가지 성격의 차이가 있다.
첫째는 원작자를 감추려고 하는 경우이다. 현재까지 일본의 노래, 작가의 곡은 금지되어 있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의 가요계 인사들이 교류하고 그 친분으로 일본 작곡가의 곡을 심의의 통과를 위해 이름만을 빌려주는 행위로 표절의 멍에를 받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혼다 미나꼬의 곡을 일본에 진출했던 M이라는 여가수가 L이라는 작곡가의 이름을 통해 받았다가 들통이 난 경우가 있다.
둘째는 의뢰인의 외압에 의한 경우이다. 요즘 방여되고 있는 TV의 드라마, 퀴즈 프로그램등을 보면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에 쓰이는 음악까지 시청률을 지나치게 의식해 일 풍의 것으로 요구, 결국 표절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쪽이지만 얼마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 일본의 민방 프로그램 '풍운의 젠다성'의 표절이라며 로얄티를 요구해 왔고 일부 이를 긍정하는 망신스러운 일이 있었다. 
  또 '토요 대행진'의 '개그 클럽'의 경우 Shizuka Kudo'의 의 도입부가 4초 정도 나왔고 '뽀뽀뽀'의 소개 멘트에 테마 사용 등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일본 음악은 방송이 일본 문화 유입과 표절을 부추김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반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광고의 경우에도 그에 못지 않아 모 화장품의 경우에는 'Nineteen'주제가의 영어가사 부분 'Blue'를 그대로 내보냈고, 손지창이 부른 컵스컵스의 CM송은 안전지대의 노래 중 가사만을 바꾸어 사용했었다. 이러한 형태는 과당경쟁 중에 쉽게 시선을 끌어 보려는 무책임한 이기주의의 한 형태로 표절과 함께 사라져야 할 것이다.
  셋째는 불로소득을 노리고 남의 노래를 적당히 베끼는 경우이다. 특히 일본 노래의 경우는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고는 하는데 국내 가요의 상당수가 랩이 유행하기 전까지는 이런 일본 노래의 부분부분을 따 썹고 결국 최근에는 김민종의 <나를 위해> <질투>와 같이 대담한 표절까기도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리믹스에서 남용되는 해머의 여성보컬 목소리와 원본을 밝히지 않은 많은 부분은 대부분 라이센스하지 않고 사용되어지는데 결국 이것은 표절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국내 음악시장에 심화되고 있는 이런 노골적 현상에 대하여 누군가가 지적해 주어야 하지않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우선 최근의 선두로는 아무래도 MBC 창사 특집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의 테마>(최경식 곡)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보인 이곡은 이후 드라마 삽입곡의 음반발매를 본격적으로 하게 한 앨범이다. 이 음반은 모스크바 국립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재녹음을 했지만 영화 'Dress To Kill'의 주제가를 표절한 것이 밝혀져 발매가 포기되었다.
이후 같은 MBC에 같은 작곡가 음악을 담당한 드라마 '질투'의 주제가 <질투>(김지환 곡)가 방송 초기에 일본의 록그룹 HOUND DOG의 의 표절임이 드러나자 급히 곡의 일부를 화음을 바꾸어 매우 이상한 형태의 곡으로 방송을 한 적이 있다. 홍수철이 부른 <보고싶다 친구야>는 일본의 나카부치 치요시가 부른 <잠자리>의 표절임이 판명났고 일본에서 통용되는 8cm CD를 국내 최초로 내면서 왜색 분위기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앨범 The Blue의 <나를 위해>(서영진곡)가 일본 그룹 X의 을 표절했다는 것이 어느 고등학생의 제기로 6소절 표절 판정을 받았다.
또한 현재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승철의 <방황>은 Bobby Brown의 의 표절이라는데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이승철의 팬들은 방황의 작곡시기가 더 빠르다고 주장하며 바비브라운의 앨범 발매 시기가 이승철이 밝힌 작곡시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비 브라운의 앨범 발매 시기(9월)와 또 이승철의 녹음(11월 심의등록)이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때 상당히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과 <너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각각 Right Said Fred의 와 Hammer의 를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에 그대>는 Color Me Bad의를 김건모의 <잠못드는 밤 비가 내리고...>는 Shanice의 ,  그리고 최근 록장르에서 최고의 인기를 두렸던 두곡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서라면>과 드라마 주 제가로 삽입되었던 <걸어서 하는까지>는 각각 Van Halen의 , 노리꼬 사까이의 와 Yngwie Malmsteen 의 을 표절한것이 아니냐는 논란속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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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록", ㅡ미치광이가 머리속에 들어 있다... 2016-10-19 0 4474
521 먼 길을 왔고 가야 할 먼 길을 막 출발하다... 2016-10-19 0 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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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문학에 대한 경고!!!" ㅡ 노래가 곧 詩, 詩가 곧 노래 2016-10-19 0 4823
517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저서전 불티나다... 2016-10-19 0 4429
516 우리도 작문학(作文學) 문제로 고심할 때이다... 2016-10-19 0 4279
515 [쉼터] - 세상에 없는 세가지??? 2016-10-19 0 4115
514 [쉼터] - 같은 문학상을 두번 받고 권총으로 자살하다... 2016-10-19 0 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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