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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사진작가 Jordan Matter의 모델로 된 반라체의 모습...
일반적으로 상징파는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났고,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主觀的情緖)의 시적 정착(詩的定着)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A.티보데는 고답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롱사르로부터 위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시 전반에 대해서 상징파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풀이하였다.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점이다.
① 자유시: 그 시작은 민중적인 노래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채용한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에 대해 의식적 ·계통적으로 자유시를 발전시킨 것은 G.캉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시인은 정형(定型)을 채용하는 자와 자유시 형태를 쓰는 자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② 순수시(純粹詩): “음악에서 그 부(富)를 빼앗는다”라는 말라르메의 말로 요약되는 순수시의 개념은 상징파에서 비롯된다(이 경우의 음악은 주로 바그너의 음악이다).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은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에서 시작되어 발레리에서 완성되었다. ③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상징파는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세대(前世代)의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인정했다. 전위(前衛: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탄생한 이후 문학은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으로 나누어졌고 유파(流派)의 수도 늘었으며, 선언(宣言)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이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특징인데 이 경우, 순수한 문학사적 의미에서 상징파는 1890년에 전성기에 달했고 1902년에 종지부를 찍은, 대략 15년간에 걸친 일군(一群)의 시인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즉,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인들이다. G.캉, J.라포르그, A.사맹, F.잠, E.뒤자르댕 등을 들 수 있다. 외국인으로서 여기에 호응한 사람은 벨기에의 조르지 로당바크, E.베르아렝 등이다. 앙리 드 레니에, 장 모레아스는 일시적인 상징파 동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의 상징파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다. 티보데는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코르 비에르, 로트레아몽을 상징파의 선구자로 보았으며 발레리를 그 후계자로 보았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상징파는 선구자와 후계자에 필적할 만한 대시인(大詩人)이 없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티보데가 말하는, 선구자를 포함한 상징주의적 시인들이 활약한 15년간이라는 운동기간을 떠나, 좀더 넓게 상징주의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즉,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발레리, 잠, 클로델에게 계승되어 마침내 완성된 시적(詩的) 세계와 그 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하나의 시적 혁명(詩的革命)을 일으켰다 하겠다.
첫째로 그 의식적 방법에서, 이윽고 이것은 말라르메를 탄생시켜야 했다.
둘째로 원죄의식(原罪意識)에서 베를렌을 탄생시켰다.
셋째로 그 감수성(感受性)과 대응(對應)의 이론에서, 이것은 마침내 랭보를 탄생시켰다. 또한 말라르메와 발레리, 베를렌과 잠, 랭보와 클로델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상징주의적 세계의 분석에 샤를 뒤보스, 자크리비엘,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등의 비평가가 따랐다. A.지드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파 시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교류한 M.프루스트도 이 세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독일의 S.게오르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또 M.릴케도 다소간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英語)를 사용하는 시인에게서는 독일의 시인처럼 확실한 영향은 찾아볼 수 없으나 A.시몬즈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뛰어난 이해자였다.
서양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형상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내면(內面), 관념 등을 상징 ·우의(寓意) ·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하였다.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P.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다. 나비파(派)의 M.드니도 상징파로 자처했으며 그들은 생(生) ·사(死) ·불안 ·사랑 ·성(性) ·꿈 ·환상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체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 ·문학적 측면과 서로 대립된 순수조형적 구성이라는 관념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세기말(世紀末)’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널리 파급되었다.
상징주의의 명작으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1897), G.클림트의 《물뱀》, F.호들러의 《밤》, E.뭉크의 《절규》 등이 있다. 이 밖에 P.퓌비 드 샤반, O.르동, 벨기에의 장미십자그룹, 러시아의 파란장미그룹,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의 후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슴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문학은 김억(金億) ·백대진(白大鎭)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제6호와 제7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예이츠의 《꿈》 등 상징파 시인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잇따라 베를렌의 《작시론》 등을 비롯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창조》 《백조》 《폐허》를 통해 번역, 게재되었다. 김억 ·황석우(黃錫禹)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의 작품에서는 비록 내면적 깊이는 얕지만 상징주의적 작풍이 짙게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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