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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어도 문학이란 친구는 있다...
2016년 10월 31일 22시 16분  조회:3958  추천:0  작성자: 죽림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번 저 사람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한번 폼 나고 싶은 거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 나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애나 어른이나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폼 나 보이고 싶어 한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 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motivation’다. 내 지적 성장 과정에서는 이어령 선생과 도올 김용옥 교수가 그렇게 폼 나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84년, 반정부 시위로 제적당했던 사람들을 일괄 구제해준다며 군사정권이 유화정책을 폈다. 그 덕에 나 역시 채 1년도 못 다니고 제적당했던 고려대학교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해직되었던 사학과의 강만길 교수, 이상신 교수 등도 제적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되었다. 그들은 전설이었다. 복교 후, 그때 그 강의실의 벅찬 흥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어 했고, 선생들은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학생들은 강만길 교수에게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의 한국 근대사 논쟁에 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아, 그땐 교수들 사이에 그렇게 폼 나는 학문적 논쟁도 있었다. 이상신 교수는 의외로 키가 작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쓰리보단three button’의 양복을 항상 단정하게 입고 나타났다. 그의 콧수염도 참 멋졌다. 해직 기간에 썼다는 그의 『서양사학사』는 책의 두께만으로도 학생들을 압도했다. 그토록 그리웠던 ‘공부하는 캠퍼스의 냄새’였다. 지식을 폼 잡을 수 있었던 그 허영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해직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특이한 교수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철학과 김용옥 교수였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촌스러운 ‘하이카라’ 스타일이었다. 검은색, 흰색 한복을 번갈아 입고 나타났다. 가끔은 이소룡 영화에 나오는 중국옷을 입고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욕설이나 성적性的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들의 ‘주관적인 성적 수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표현들이었다. 요즘 세상이라면 바로 구속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온통 억압뿐이던 그 시절, 그의 언행은 ‘통쾌함’ 그 자체였다. 사실 그의 도발적 언행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의 인정투쟁은 이제 많이 진부해졌다. 통쾌함이 없다. 아니, 별로 안 재밌다! 그러나 당시, 김용옥 교수는 내게 아주 특별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용옥이 처음이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여겨진 후, 인식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 및 ‘비교 가능성comparability’이다.
 
 
 
과학적 주장이란 그 누구도 주관적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관성은 과학성의 최대 적이다.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이 자연과학적 과학성이 어느 순간부터 인문·사회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학문의 주어가 생략되어버린 것이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 또한 객관화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같은 객관성의 신화가 구체화되고 제도화된 결과가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다. 그래서 심리학과에 들어가면 통계학과 자연과학적 실험방법론을 필수로 배워야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이야기만 주워듣고 인간 심리를 분석해보겠다며 심리학과에 진학한 이들은 죄다 실망한다. 프로이트는 객관적 심리학의 적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포스트모던 논쟁을 거치면서 ‘객관성의 신화’는 무너진다.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러했다.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핵심은 객관성의 해체다. 객관성 개념 대신 이제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주체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유효한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성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에 계몽이나 강요가 설 자리는 없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 이야기 하기를 주저했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아예 자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 생각해서 이론을 수립하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의 위대한 학자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변부 열등감에 주눅 들어 보였다. 그러나 김용옥은 달랐다.
 
 
 
그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쓴 글의 주어는 대부분 ‘나’였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용도 엄청났다. 『논어』 『맹자』 『주역』을 말하다가 느닷없이 가다머H. G. Gadamer나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의 해석학을 설명했다. 고루한 『논어』 『맹자』 이야기가 그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그런 식의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김용옥은 그 모든 학술적 담론을 항상 ‘자기 자랑’으로 끝냈다. 죄다 ‘깔때기’였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좀 이상했다. 미국 사람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과 비슷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의 주체적 글쓰기의 탁월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크로스 텍스트는 텍스트를 떠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두려워하는 자기 생각 말하기, 즉 주체적 글쓰기가 김용옥에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크로스 텍스트cross-text’적 사유 때문이다. 동양적 텍스트의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서구 해석학적 방법론이라는 그의 무기는 해당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문화·언어·정치적 콘텍스트context, 맥락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크로스 텍스트적 독해는 당연히 주체적 글쓰기로 이어지게 된다. 텍스트의 콘텍스트를 상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김용옥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무한하다는 거다. 죽을 때까지 한 이야기 또 할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스님들이 평생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가 항상 변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나는 요즘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신문에 연재하는 내용이나 출간하는 책을 보면, 참 고수다. 틀에 박힌 공자, 맹자 이야기가 아니다. 내 연배에서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이는 드물다. 그에 비하면 내 성과물은 참 우울하다. 그다지 겸손할 이유가 없는 나지만 그의 저작들을 보면 기가 많이 죽는다. 그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무한하다. 고전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기본적으로 한 자락 깔고 들어가는 거다.
 
 
 
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한두 번 반복하면 ‘자기표절’이라고 욕먹는다. 억울하다. 다 그놈의 청문회 때문이다. 어설픈 교수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자기표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나오는 거다. 세상에 자기 생각을 표절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굴 표절하라는 것인가? (허접한 변명인 것 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위로가 된다.)
 
 
 
난 그래서 앞뒤 꽉 막힌 ‘한글 전용론자’들이 몹시 원망스럽다. 한글의 의미론적 배후에는 죄다 한자가 숨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더욱이 21세기는 동양이 대세다. 실용적으로만 생각해도 한자는 필수다. 영어는 유치원 때부터 배우면서 왜 한자는 필수로 배우지 않는 것일까? 한반도의 문화사적 이해가 배제된 어설픈 민족주의는 정말 위험하다. 한국 사람이 동양고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김용옥이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 텍스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전 해석학은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현재의 텍스트’와 ‘현재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과거의 텍스트’가 서로 교차한다는 뜻이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이 ‘과거의 현재’ 혹은 ‘현재의 과거’라는 해석학적 맥락과 아울러 ‘동양의 서양’ 혹은 ‘서양의 동양’이라는 해석학적 맥락이 이중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래서 남들은 전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한계도 있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반드시 텍스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를 떠나면 ‘순 구라’가 되는 까닭이다. 개신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떠나면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콘텍스트를 바꿔가며 한 이야기 또 해도 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김용옥의 정치적 발언들이 조마조마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크로스 텍스트의 숙명이다.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유학을 다녀온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다 위대한 서구 학자를 전공했다. 헤겔 전공, 마르크스 전공, 하버마스 전공 등등. 나 또한 비고츠키L. S. Vygotsky를 전공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상하다. 그럼 헤겔은 누구 전공인가? 마르크스나 하버마스는 대체 누구를 전공했단 말인가?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옳은 소리다. 깜냥도 안 되는 미국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이 수십만 달러씩을 받고 한국 사회에 대해 아는 체하며 훈수 두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태도다. 외국의 석학이라며 어설픈 ‘선수’들 모셔와 영양가 떨어지는 이야기 듣는 데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신문사나 기업을 보면 아주 속이 터진다. 한국의 지적 콘텍스트를 처절하게 고민하는 내 원고료는, 죽어라 하고 수십 매 써봐야 몇십만 원이 안 된다. 그것도 많이 주는 것이라며 생색을 낸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김용옥 식 크로스 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한국에도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IT 혁명’이라며 다들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흥분할 때,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이야기했다. 디지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의 디지로그 개념을 ‘비데와 휴지’로 설명한다. 비데가 나왔다고 화장실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어설픈 싸구려 휴지를 쓰면 그 부위에 부푸러기가 낀다! 엄청 가렵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 개념의 핵심은 디지털의 발전이 아날로그의 변화를 가져오고, 아날로그는 여전히 디지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폰의 터치다. 앞서 설명한 대로 디지털을 쓰다듬고 만지는 아날로그적 행위가 아이폰의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가끔 이어령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개념 구성을 ‘말장난’이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말장난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말장난 중에 최고는 하이데거M.Heidegger의 실존철학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말장난이 아니던가? 변증법의 핵심 개념으로 ‘지양止揚’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식 번역으로는 아주 폼 나 보이고 그럴 듯하다. 도무지 못 들어본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양’은 독어의 ‘Aufheben’을 번역한 것이다. 독일어로는 지극히 단순한 단어다.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나사처럼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는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메타포를 헤겔은 ‘들어올린다’는 의미의 ‘Aufheben’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번역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들어올림’,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화·언어적 콘텍스트를 생략하고 헤겔 철학을 읽으려니 그토록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 따위 어설픈 일본식 번역에는 기죽어 지내면서 자기 언어로 학문하려면 그렇게들 폄하한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김용옥은 고전 텍스트의 권위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해석학에 머물고 있다. 이어령은 다르다. 텍스트의 끝없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모험을 시도한다.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령의 마이크’를 뺏을 사람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혼자만 이야기한다. 제발 좀 귀 기울여 한번 들어보라는 거다. 그는 그래도 된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라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매번 좌절이다.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paradigmatic’과 ‘결합syntagmatic’의 구조를 설명했다.
 
 
 
음악을 작곡할 때, 작곡가는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고, 이어지는 음 또한 7음 중에서 또 하나를 뽑는다. 처음에 ‘레’를 뽑았다면, 다음에는 ‘솔’을 뽑고, 그 다음에는 ‘도’를 뽑는 식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나간다. 이때 각각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각각의 음들을 이어가는 것은 ‘결합’이다.
 
 
 
음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면 현존하는 음악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즉, 각각의 음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왜 그러한 순서로 결합되었는가를 의심해보면 된다는 말이다. 바흐의 대위법,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은 모두 그런 식으로 창조된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해보자. 코스 요리를 먹는다 치자. 애피타이저를 먹을 때, 메뉴에 있는 여러 가지 애피타이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수프도 하나를 고르고, 이어 샐러드를 고르고, 메인 메뉴를 고른다.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고른다. 새로운 메뉴는 선택의 종류를 달리하고, 그 선택의 순서를 바꾸면 가능해진다. 창조적 셰프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어, 술어, 목적어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동시에 주어, 술어, 목적어가 선택된 각각의 맥락에서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이어령은 자신이 어릴 적 품었던 『천자문』에 관한 의심을 이야기한다. 『천자문』의 첫 구절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천자문』을 몇 시간 만에 외웠다는 양주동을 천재라고 했다. 그러나 이어령은 의문 없이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가『천자문』을 배우며 품었던 의심은 이렇다.
 
 
 
다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의 순서로 외운다. 그러나 이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적 독해는 각각의 단어가 ‘선택’되는 그 기호학적 구조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단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할 때, 왜 하늘을 검다고 하는가에 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하늘이 파란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다들 ‘하늘은 검고……’라고 『천자문』을 외우는가.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첫 문장부터 이상한 『천자문』을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1000년 이상 동안 죽어라 외우기만 하느냐는 거다. 이어령은 이런 의심이 가능해야 동양사상에 숨겨져 있는, 방향과 색깔의 연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렇게 해체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재구조화, 즉 편집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어령의 질문은 계속된다. 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순서인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거다. 왜 ‘천天, 현玄, 지地, 황黃’이라 하지 않는가. ‘천天과 지地’를 함께 묶고, ‘현玄과 황黃’을 차례로 묶어내는 이 결합 구조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의심을 할 수 없으면 새로운 생각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古典’의 ‘전典’ 자는 책을 받들고 있는 모양을 상징화한 것이다. 다들 책, 즉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납득이 안 되면 일단 들이받았다.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는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적 사고는 이해 안 되는 것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런 자신의 태도가 뭐 그리 특별하냐고 되묻는다.
 
 
 
이어령은 너무 억울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항상 건방진 놈, 잘난 체하는 놈, 얄미운 놈이라는 욕을 먹고 자랐다. 항상 미움을 받았다.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다. 자신은 그저 이해 안 되는 것을 질문했을 뿐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미워했다는 거다. 단지 텍스트만 해체했을 뿐인데, 그토록 힘들고 외롭게 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문학을 한 것이라고 이어령은 고백한다. 자신이 만약 사회 규범이나 도덕을 해체하고, 경제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치가나 혁명가가 되었더라면 돌을 맞아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상 앞에 앉아, 앞뒤로 놓인 여섯 대의 컴퓨터로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의 구조를 파괴하고 재창조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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