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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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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는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
2016년 10월 31일 23시 00분  조회:4241  추천:0  작성자: 죽림

김수영 시론의 비극성

 

 

박정근 (평론가, 『윌더니스』 발행인)

 

김수영시인은 대표적인 4.19 혁명의 상징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가 4.19 혁명의 자유정신을 시를 통해서 가장 절실하게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부조리한 상황을 수용하기보다 부조리가 없는 사회를 꿈꾸고 그것의 현실화를 추구하였다. 완벽한 민주적 사회는 아직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현실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 속에서 고통이 뒤따르고 심지어 불가피하게 충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온몸으로 밀고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저항을 노래한 김수영 시인은 그로 인해 외적인 압력에 시달리고 실존적인 고통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고통을 피하는 것은 시인의 도리가 아니며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요구하였다. 그런 극단적 선택은 시를 쓰는 행위를 실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적 행위로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시쓰기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 시 한편마다의 창작의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며, 한편의 시가 완성되고 나면 시인은 이전의 자아의 죽음을 자초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해야 한다고 보았다. 만일 시인이 불변의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를 집착한다면 진정한 시를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죽음의 순례를 지속해야 한다. 김수영 시인의 자유에 대한 추구는 참된 창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며, 그의 일관된 죽음의 시론이 되었다. 결국 김수영의 시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언급했듯이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에 대한 해석과 측정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진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수영이 시론으로서 내거는 ‘죽음’은 결코 패배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 관점의 육체적 파멸의 개념이 아니다. 시인의 죽음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한계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소멸하는 현상에서 머물지 않는다. 고대 풍요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노쇠한 노왕을 야음을 틈타 제거하고 젊은 왕이 등극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속을 꾀하던 비극적 긍정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노왕의 죽음이란 낡은 것의 제거를 통한 새로운 것의 탄생을 기도하는 제의적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이 갠지스강에 몸을 담고 씻는 행위는 죽음을 통한 재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라는 해석을 김수영의 죽음의 시론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개체의 자아가 불가피하게 가지는 한계로 인하여 생기는 타자와의 소통과 나눔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개체는 사회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마치 세계 속에 홀로 존재하는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세계의 현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양처럼 개체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에 개체는 자신의 주위에 ‘마야의 베일’을 씌우고 그 환상 속에서 숨고자 한다. 니체는 이러한 기만적인 도피를 ‘아폴로적 환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런 환상 속에서 안주하는 개체는 세계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개체는 이런 자아나 세계와의 불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과 함께 공존해야할 공동체나 대자연으로 시야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개체적인 죽음을 불사한다. 그 마야의 베일인 환상의 막을 찢어버리고 개체의 죽음을 초래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의 주장과 연관해보면 그의 시론에서의 죽음이란 “가장 고유한 나만의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바깥으로의 타자로의 열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을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말이 아니다

(「말」 부분)

 

 

시인이 작품 속에서 구사하는 말은 결코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개체의 한계를 규정짓는 사고나 가치관은 시인을 과거의 시간에 가두는 감옥이다. 그것들은 그가 추구하는 자유와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요, 시인이 바라보고자 하는 미래를 가리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자신을 죽이려고 결단해야 한다. 여기서 죽음은 패배적인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재생을 위해서 시인이 벌이는 의도적인 자살행위이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 죽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시를 창작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주관적 환상의 막을 찢어내고 죽임으로써 보편적 세계를 획득한 시인의 말은 이미 우주적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시어로 승격될 수 있는 것이다.

II

 

시인의 상징적 죽음은 타자나 공동체와의 진정한 열림의 가능성을 확장시킴으로써 당대 사회에 대해 정직하게 진단하게 한다. 김수영은 그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경직성이나 폐쇄성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50년대나 60년대에 그를 포함한 한국인이 가장 치명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도그마가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정신적 압박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이 부정선거를 비롯하여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정치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상황은 시인에게 자유에 대한 갈구를 하게 한다. 시인은 작품을 통해서 정치 및 사회적 병폐를 개혁하고자 나설 때 ‘참여’라는 명칭을 쓰고자 한다. 그는 참여에 대한 판단기준을 “죽음을 어떤 형식으로 극복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정의한다. 시인이 살았던 50, 60년대는 적색 콤플렉스가 만연했었고 그가 갈구했던 “자유와 전위의 시적 혁명을 용인하지 못할 만큼 경직된” 시대였다. 그가 추구했던 “혁명정신과 글쓰기는 현실적으로 시인의 존재를 위협하였고 죽음의식으로” 몰아갔으며 “빠져나갈 곳을 몸부림치며 모색과 운산을 거듭하는” 삶은 그로 하여금 다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했다. 그는 민주사회가 내세우는 정의와 자유가 단지 활자로서만 존재하는 상황에 대해서 환멸과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사령」 전문)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창작과 글쓰기의 자유를 필수적인 가치로 여기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한국이 분단국가로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고 획책하는 것을 묵과하지 못한다. 당시 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규제하는 모순된 상황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내세웠다. 김수영은 이념적 경직성이 시민들과 시인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에 대해서 회의를 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창작과 글쓰기에서 필수적인 사고의 다양성을 해치는 검열과 규제는 시인에게는 죽음과 같은 감옥이 아닐 수 없다. 김수영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묶인 사회 현실 속에서 불러일으킬 일신상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트적이고 독재적인 체제에 대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선언적 시, 「김일성 만세」를 쓰기에 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발표의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2008년 계간 창비 여름호 특집을 통해 미발표 유고시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시야말로 분단국가의 금기를 풀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담고 있으며 정치세력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신분상의 파멸을 각오함으로써 쓸 수 있는 용기를 획득한 ‘죽음의 시론’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일성 만세」 부분)

 

김수영이 시쓰기에 있어서 아방가르드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그의 죽음의 시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시인은 한순간도 어떤 이념이나 가치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매순간 변신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첨단의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서 기존의 사고와 감정을 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의 의식이 된다. 항상 새로운 시적 방법과 소재를 추구하기 위하여 완성된 시를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버리고 독자들에게 맡긴 채 다시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시를 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인의 정신은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서 자유분방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움직임은 시의 본성이면서 이 본성은 삶과 세계의 본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런 시의 속성을 수용해야 하며, 또한 그는 “인간이기에 움직이고, 시를 쓰는 주체이기에 움직”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영의 죽음의 시론이나 아방가르드 정신은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죽음의 시론’을 통해서 “시의 탄생은 곧 시인의 죽음의식을 통해 완성되고 이러한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새로운 시를 창작하려는 시인의 열망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김수영의 이러한 태도는 타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타난다. 그는 감명을 받은 책일수록 읽자마자 자신의 서고에서 버리고 만다. 일단 자신의 소화해낸 것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작품 속에서 같은 형식과 내용을 표현하는 것은 그의 아방가르드적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III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죽음의 의식을 마치 제의를 진행하는 사제처럼 진지하게 임하고자 한다. 시인에게는 죽음이란 결코 패배주의적 파멸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죽음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구원의 줄이 되는 비극적 영웅의 운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고통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성숙의 계단에 올라가 선다. 시인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고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해야 한다. 김수영에게 “몸의 통증은 태고적 원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삶의 조건”이며 현재에 존재하는 실체였고 고통은 현재의 실체일 뿐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서 “원시적 과거의 먼 시간에서부터 예측 가능한 미래의 시간에 이르기 까지” 반복되는 운명적 존재였던 것이다. 고통은 그에게 자신의 시론 속의 죽음처럼 결코 부정적이고 고질적인 저주가 아니다. 겨울에 죽음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봄에 재생의 환희를 맛보기 위해서 자연은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다가 그 꽃잎을 모두 떨어뜨려야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울 수 있다. 인간의 탄생은 여성의 산고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극복해야 한다. 김수영은 그러한 운명적인 고통의 상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으로부터 전문」)

 

김수영 시의 비극성은 연극적 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갈등구조는 김수영이라는 비극적 주인공으로서 시인과 그의 시창작을 가로막는 적대자(antagonist)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것들은 시인의 사고와 정신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도그마일 수 있고, 시인의 전위적 행위나 표현을 가로막는 수구적인 도덕, 윤리, 전통일 수 있다. 그것들은 시인의 끊임없는 변화를 방해하거나 규제하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들을 적으로 여기고 일전을 불사한다. 시인은 자유정신과 아방가르드를 구가하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끊임없이 규제의 성을 쌓고 장애물의 그물을 던지기 때문에 그의 창작은 자꾸만 미완성과 소화불량에 의한 설사를 거듭할 수 있다. 즉 시인이 추구하는 자유정신과 권력이 주입하는 통제와 규제가 시인의 정신 속에서 갈등구조를 구축하며 전투를 벌이는 형국이다. 그의 창작정신은 자유와 전위의 투사들을 비극적 영웅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전투를 벌이지만 냉전의식이라는 계엄령 아래에서 승전하기가 쉽지 않다. 고작 자유정신이 투정을 부리듯이 돌멩이를 던지면 레드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런 정치적 이념은 도덕이나 윤리 등의 보수적 가치를 방패막이 삼아 근엄한 가부장적 마스크로서 뒤집어쓰고 있다. 김수영은 단지 전위적 광대로서 윤리나 도덕의 허위적 마스크를 벗기려 애쓰지만 오랜 시간 덕지덕지 밀착해있던 마스크라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균형적 전투에 너무 탈진된 나머지 진실을 토로하지 못하고 심리적 설사의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죽음의 시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즉생의 결단으로 진실을 토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포함한 소시민의 허약함에 고통을 느끼며 혁명적 외침이 아니라 풍자나 조롱의 간접적 형태로 빈정대는 시는 설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규제로 시를 쓰고 있다 타의 규제

아슬아슬한 설사다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다 우리의 행동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설사의 알리바이」 부분)

 

 

김수영의 시의 새로움을 위한 투쟁의 대상은 당연히 옛 것의 상징인 전통이다. 변화를 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사회는 흔히 전통의 반복성을 강조하여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김수영은 전통이 가지는 완고성에 대해 투쟁을 벌일 뿐 전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전통을 수용하는 것은 전통의 긴 역사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죽은 전통이 살아있는 전통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가 「더러운 향로」에서 원하는 전통은 박물관에 화려한 조명 아래 전시되어 있는 획일적으로 각질화 되어 있는 향로가 아니라 어느 창고에 흙먼지에 뒤덮힌 향로 같은 비인위적인 전통이다. 박물관이나 교과서에 일정한 시각에 의해서 포장되어 있는 전통은 시인에게 새로움을 주지 못하고 식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창고에 처박혀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향로는 시인에게 과거라는 시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호기심을 낳는다. 시인은 더러운 향로를 닦아가며 향로의 연원을 더듬으며 흘러간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발견의 과정을 통해서 “이미 향로 이상의 것으로 새롭게 소생한 것이며, 그것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결국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만을 고집하며 그것을 관성적으로 보여주고 수용하는 기계적인 전통을 극복하고 시인의 전복적 시각에 의해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반복되는 전통의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하여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더러운 향로」 부분)

 

김수영 시의 비극성은 투쟁의 대상이 외부에만 두지 않고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정직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그것이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또는 그것이 물질적이든 추상적이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모든 것을 내포한다. 이로 인해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과 싸움을 벌이는 꼴이 된다. 시인은 자신이 일생 운명처럼 끌고 다니는 자신의 그림자와도 결투를 벌임으로써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학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김수영이 주장하는 죽음의 시론에 의하면 그것은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과 결별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시인이 쓰는 “시는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시인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의 이행”과 “모험”을 결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고통 속에서 전투를 벌이며 “시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일 대 일의 대결의식’으로 순교”하는 의식을 치루며 새로운 창작을 향해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 부분)

 

 

김수영의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권력이나 부정한 자본 등 흔히 자유나 정의를 부르짖는 투사들이 논하는 것들만은 아니다. 시인은 독자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대상을 시적 혁명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그가 이미 그 당시 한국인들의 소시민의식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들을 포함해서 중산층들이 집에서 애지중지로 귀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싸움을 거는 것을 알면 실소를 금치 못할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지상정이라 아이의 잘못을 보고도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남의 자식의 흠이야 가벼운 힐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좀처럼 비난하려는 부모는 흔치 않다. 하지만 시인은 어미가 없어서 동정의 눈으로 지켜보아도 시원치 않을 자식에게 혹독하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본다. 마치 독수리나 매가 새끼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는 벼랑으로 데리고 가서 떨어뜨리는 교육방법과 유사한 개념이다. 그는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뿌리는 식초를 치듯이 자식에게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친 애정이나 감상성을 배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나친 애정이나 관심은 자식에 대한 객관적 교육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식을 망치는 것을 의식하여 홀로 독립할 수 있도록 객관적 관찰자로 자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잔인한 교육방법의 상징으로서 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사탕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냉담, 무관심, 회초리 등같이 “아이에게 있어 죽음의 세례”로 매가 새끼를 단련시키는 냉혹한 의식의 소산이며, 이러한 잔인함으로 그에게 “자생력”을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초가 쳐 있다 잔인의 초가

요놈-요 어린 놈-맹랑한 놈-6학년 놈-

에미 없는 놈-생명

나도 나다-잔인이다-미안하지만 잔인이다-

콧노래를 부르더니 그만두었구나-너도 어지간한 놈이다-요놈-

죽어라

(잔인의 초 부분)

 

김수영이 창작자로서 가장 절실하게 추구하는 가치는 자유정신이다. 하지만 시인의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적들과 투쟁을 벌이는 필사적인 노력은 성공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적과의 전투는 시인으로 하여금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타협적인 시인들은 “〈오늘의 적〉은 옹호하면서도 〈내일의 적〉을 몰아내는 데”열성적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적〉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내일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존재들은 과거와 기득권에 집착하여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는 시인의 아방가르드적 추구에 대해서 사회의 전통이나 도덕, 윤리 등의 보수적 가치들은 역사발전을 위한 변화를 ‘불온’이나 ‘퇴폐’등의 죄목으로 판결하고 시인을 구속하고자 한다. 시인은 아방가르드성과 전위성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의 문화의 위험의 소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치스가 뭉크의 회화까지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 전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문예시평」자가 역설하는 응전력과 창조력-나는 이것을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시 실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은 제대로 정당한 순환작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또한 시인을 둘러싼 환경과 계절, 그리고 습관조차도 한사코 변화를 거부하고 시인에게 반격을 가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시인의 내면속에서도 똬리를 틀고 있는 옹고집의 성격적 요소들이 방패로 가로막으며 변화를 추구하는 자유의 정신에게 배반의 칼을 갈고 있다. 시인을 둘러싼 어느 쪽도 시인의 ‘사즉생’의 창작 정신에 대해서 동의를 하지 않는 상황을 맞은 시인은 그야말로 죽음의 순간과 같은 실존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밀려드는 파도가 그를 익사시킬지라도 변화를 막는 환상적 ‘마야의 베일’을 찢어버려야 한다. 즉 시인은 죽음을 불사하는 순간에 삶의 정체성(status-quo)에 대해서 절망과 좌절의 외침의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절망」 전문)

 

시인이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반성하지 않는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 모든 가치나 사물들이 본래적으로 과거의 안락을 지속하려고 하는데, 시인만이 온몸을 들이대며 고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죽음’의 경계를 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과정을 통해서 비극적 위대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김수영은 민중을 노래하는 문인들이 자신은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유리현상을 허위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그가 높게 평가하는 신동엽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획득하는 기술”을 지녔다고 보았다. 이 과정 속에서 비극적 주인공으로서 시인은 한계상황에 의해서 생물학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평범한 속인들이 속물성이나 소시민주의를 위해서 현실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에 시인은 자유와 아방가르드 정신 부재에 대한 절망과 저항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온통 완강하게 거부의 손짓을 하면서 그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극성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의 비극성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의 투쟁이 머리로만 수행되었을 때 발생하듯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며, 가슴으로만 수행되었을 때처럼 감상적이거나 자기 몰입적이지 않다. 그의 투쟁은 “〈몸〉으로 하는 것”으로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모두 내포하면서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유와 아방가르드를 위한 자신의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안과 밖을 동시에 밀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적으로 삼는 대상은 결코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분류로 가려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적은 기득권과 안락을 취하려는 자신의 내면의 속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들을 온몸으로 밀어서 변화시키려는 시인의 행위는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사랑’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희생을 통한 자유정신과 아방가르드의 획득이라는 영웅적 비극성으로 볼 수 있다. 김수영 시가 현대시로서 위대성을 획득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물의 움직임의 속성을 파악하고, 시인 또한 발을 맞추어 부단히 모든 존재적 변화의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해 “상승의 힘을 초월의 세계가 아닌 땅의 세계, 생활과 현실에서 찾아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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