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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태어나 1926년에 사망한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Antoni Placid Gaudí i Cornet)는 단순히 ‘천재 건축가’라고 표현하기엔 무척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과 알바를 병행해야 하는 고학생이였으나, 그 덕분에 (훗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풍부한 현장 경험을 얻었다. 비록 부모님을 일찍 여위었으나, 대장장이였던 아버지 덕분에 기발하고 독창적인 철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졸업시험에 탈락한 후 재시험을 간신히 통과한 낙제생이였으나, 사후에 자신의 주요 작품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누렸다.(유네스코의 입장에서 보건데 18세기의 인물인 가우디의 작품이 창덕궁이나 조선왕릉급인 셈) 형제자매조차 없었을뿐더러, 평생 그 어떤 여인의 사랑도 받지 못한 불행한 인생이였으나, 구엘이란 후원자를 얻어 살아 생전에 건축가로써 최고의 명성을 쌓았다. 73세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가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한해 200만명 이상이 방문해 그의 이름을 기린다. 안토니 가우디,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여행작가 조명화의 1분여행
첫 번째 키워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인정한 단 한명의 건축가
일반적으로 세계문화유산은 특정한 건축물 혹은 특정한 구역(역사 지구)를 기준으로 심사와 등재가 이루어진다. 2005년에 등재된 마카오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Macao)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과 포르투칼이란 동서양의 복합문화구역으로써 20여개의 건축물과 광장이 함께 등록되어 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만 보더라도 40기의 왕릉이 무려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다. 비록 마카오란 지역과 조선왕릉이란 주제의 가치는 인정받았으나, 정작 이를 설계한 ‘건축가’는 찾아볼 수 없는 셈인데, 마추픽추나 앙코르와트는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중에는 건축가는커녕 건축연대도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우디는 건축가 가우디 본인이 세계문화유산의 주체다. 스페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우디 건축물의 공식 명칭은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아닌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대상이 특정한 건축물이기 이전에 가우디란 ‘인물’인 셈이다. 세상에 유네스코가 인증한 건축가, 또 있을까.
Editor’s tip. 가우디가 평생 주도적으로, 공동으로, 조역으로 참가한 크고 작은 건축 프로젝트는 약 60여개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그 중 7곳.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카사 비센스(1878-1880), 구엘 저택(1885-1889), 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1898-1914),구엘 공원(1900-1914),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5-1910), 그리고 성가족성당 탄생의 문 및 지하경당(1884-1926).
두 번째 키워드, 죽는 순간까지 삐딱했던 반항아
여러분, 제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미치광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답은 시간이 말해 줄 것입니다.
가우디의 졸업식날 로젠 교장(Elies Rogent)이 남긴 한마디는 오늘날 그의 천재성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일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나,사실 그를 지지하는 일부 교수의 설득으로 재심 끝에 간신히 졸업한 그에게 격려와 축하를 전했을 뿐이다. 가우디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하느라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고학생인데다가, 교수진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문제아였다. 심지어 동기들의 책을 빌려서(당시 건축교재가 원체 고가라 가우디의 형편으론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제멋데로 낙서를 일삼아 친구들의 비난을 사기 일쑤였다고.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그의 삐딱한 성격은 심지어 죽을 당시에도 변치 않았다. 그는 73세의 나이에 전차에 치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망한 곳은 현장이 아니라 그가 3번째로 옮겨진 병원이다. 그런데 얼마나 심한 상태였길래 병원을 3곳이나 옮긴 것일까? 가우디의 상태도 상태지만, 실제로는 병원측에서 사고 당시 그의 초라하다못해 남루한 행색을 보고 진료를 거부해 3번이나 병원을 옮겼다고 한다. 가우디는 가까스로 정신이 든 이후에도 빈민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거부했고, 결국 사망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신분을 활용했다면, 자신의 목숨을 위해 좀더 유연하게 대처했다면 최소한 조금은 더 오래 살았으리라. (이를 계기로 가우디를 친 전차 운전수는 물론 그를 태우지 않은 택시 기사 3명과 두 곳의 병원은 시민들의 항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세 번째 키워드, 가우디를 사랑한 단 한명의 친구, 구엘
가우디를 낳은 것은 대장장이인 아버지였으나, 건축가 가우디를 알아준 것은 구엘이다. 언급했다시피 가우디는 학교에서는 교수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요, 직장에서는 선임의 설계안을 제멋데로 바꾸는 후임인데다가 결혼은 커녕 평생 변변한 연애조차 하지 못한 쑥맥이였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주변에 적이 너무 많으면,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법인데 건축가 가우디의 재능을 이해하고, 신뢰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구엘이다.
가우디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구엘. 구엘은 벽돌 제조업으로 쌓은 막강한 부를 기반으로 가문의 주요 건축물을 가우디에게 독점적으로 의뢰했다. 오늘날 가우디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게된 구엘 가문의 건축물은 그의 역량 이전에 건축주 구엘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숨진 가우디에게 구엘이 없었다면? 글쎄, 아마도 가우디 없는 바르셀로나는 평범한 스페인의 소도시로 남았으리라.
네 번째 키워드, 화려한 건축의 이면에 숨겨진 ‘창조의 고통’
그가 창조한 건축물을 보노라면 시각적인 기발함으로 인해 ‘가우디는 천재 혹은 미치광이구나’라고 여길 뿐 서태지조차 은퇴시킨‘창조의 고통’은 간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색색의 타일 조각을 붙여 마치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시킨 도마뱀(구엘 공원), 로마 병정을 본딴 환풍구(카사 밀라), 해골의 집(카사 바트요),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빛이 건물 내부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테인드글라스(사그라다 파밀리아) 등은 최신기술로 지어진 현대 건축물과 비교해 보더라도 경이롭기만 하다. 그의 창조성을 단순히 미학적인 측면과 장인정신으로만 접근하기엔 아쉬운 이유다.
트렌카디스(Trencadis) : 마치 어린아이가 색종이를 붙이듯 타일, 유리 등의 소재를 이용해 건축물을 장식하는 트렌카디스 기법은‘가우디하면 떠오르는 상징’과도 같다. 타일아트나 모자이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쉽겠다. 구엘공원의 도마뱀으로 잘 알려진 트렌카디스는 최소한 건축 분야에서는 가우디가 최초로 시도한 기법 중에 하나이며, 그의 명성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또 다른 건축가 주졸(Josep Maria Jujol)이나 마니(Carles Mani) 등과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개성있는 가우디 특유의 기법이라고 여겨지지만, 생각해 보라. 트렌카디스를 시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가의 자기를 부쉈을 것이며, 동시대의 건축가와 인부들에게 얼마나 비난과 오해를 샀을 것인가. 아무리 자신의 이름을 딴 건축물을 짓는다고 하지만, 구엘이 가우디의 진정한 후원가인 이유다.
제철 기술 :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가우디의 말마따나 그는 종려나무의 입사귀, 박쥐, 도마뱀 등의 동식물은 물론 해외의 건축물에서 모티브를 딴 실험적인 건축을 시도했다. 새로운 장식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적절한 ‘기술’ 또한 필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철을 다루는 아버지 밑에서 수련 아닌 수련을 쌓은 가우디가 아니었다면, 철을 종잇장처럼 다루는 화려한 곡선과 형상의 장식은 결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리라.
오늘날 그의 건축물을 놓고 기존의 권위에서 탈피한 ‘아르누보 예술’이니 자유로움을 추구한 ‘아방가르드 스타일’ 따위의 ‘뒤늦은’해석이 붙여지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반항은 예술가의 필연이 아닐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반항을 위한 반항일지라도.
다중 현수선 모형(Multiplex Catenary) : 첨단 컴퓨터와 건축설계프로그램이 없던 시대, 하늘로 치솟은 고딕 건축물은 건축가에게 현존하는 기술과 이상적인 디자인 사이에 위치한 결과물이였으리라. 3세기 동안 유럽 곳곳을 장식한 고딕 건축은 외형적으로 압도적인 장관을 연출하는 반면 구조적으로 버팀도리(Flying Buttress, 버팀벽, 비량)의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완공시 170미터에 달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내부에서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의 환상적인 색채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가우디는 버팀도리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물을 뒤집었다. 뒤집은 형상의 건축물을 밧줄로 만들고, 무게가 실리는 지점마다 추를 연결해 가장 이상적인 무게 분산과 건축의 형상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성당 지하의 전시실에는 그가 십수년간 성당에서 숙식하며 건축부터 조각까지 수많은 작품을 직접 실험하고, 연습하고 연구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 이래도 가우디가 과연 ‘타고난 천재’인가?
다섯 번째 키워드, 가우디 최후의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체 언제 완공되는 거야? 딱 100년! :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아직도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그가 1883년부터 40년간, 특히 사망하기 직전 15년간은 매진한 최후의 프로젝트로 가우디 사후 100년을 기념해 2016년 완공 예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오직 입장료 수익으로만 진행하고 있어 이 또한 미지수.
완공도 되지도 않은 성당이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까? : 세부 내역을 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전체가 아니라,그 중 가우디가 건축에 참가한 ‘탄생의 문 및 지하경당’만 등재되어 있다. 완공된 이후라 할지라도 세계문화유산의 까다로운 등재요건에 비추어 보건데 가우디 사후에 건축된 성당 전체가 추가 등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독실한 신자 : 가우디의 생애 후반기를 딱히 돈도 되지 않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바친 이유는 그의 신앙심이 깊어졌기 때문이리라.성당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인간에게 전달하고자 고심한 흔적을 세 개의 파사드를 가득 채운 수많은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첨언하자면 가족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그가 매진할 곳은 종교와 일 뿐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부모가 모두 사망하고,형제자매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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