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1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북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서정시인이나 음악가들.
trouveur라고도 씀.
북프랑스 지방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활동했던
트루바두르와 대응된다. 이들은
트루바두르로부터 고도로 양식화된 주제와 운율을 차용했다. 이들이 사용한 수사법의 본질은 전통적인 주제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만들어져 있던 형식을 결합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시인의 독창성보다는 이러한 상투적인 문구에 대한 친숙함에서 더 즐거움을 얻었다. 이런 이유로 최후이자 가장 위대한 트루베르인
뤼트뵈프(1250~80 활동)는 가장 트루베르답지 않으면서 오늘날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시인이 되었다.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북부와 남부 프랑스 간의 교류가 촉진되고 장려되자 샤틀렌 드 쿠시나 코농 드 베튄과 같은 수많은 트루베르가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트루바두르의 작품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서정시를 발전시켰으며, 은유를 위한 은유의 난삽함을 높이 사지 않았다. 그들의 시는 때로는 풍자적이고 때로는(콜랭 무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안락한 삶에서 얻는 기쁨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주제는 궁정 연애로, 다가갈 수 없는 귀부인에 대한 짝사랑의 감정을 읊고 있다. 그들의 서정시는 시인 혼자서나 종글뢰르 음악가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들은 원래 봉건 궁정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후원자를 찾아 여러 궁정을 돌아다녔지만, 그들이 지은 시가 귀족사회에서만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점차 중산층에서도 후원자를 찾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트루베르 서정시 가운데 절반가량은 아라스에서 길드를 조직해 활동했던 시민 출신의 시인들이 남긴 것들이다. 트루베르의 상당수는 가스 브륄레(12세기말 활동)처럼 귀족 출신이었으며 티보 드 샹파뉴(1201~53)는 나바라 왕국의 왕이었지만, 뤼트뵈프를 위시한 다른 시인들은 비천한 계급 출신이었다(→
종글뢰르).
이들의 노래는 단선율로 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노래를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고용된 악사나 민스트럴(음유시인)의 반주에 맞춰 노래했거나 민스트럴이 노래와 반주를 모두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주의 형식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주곡과 후주곡, 간주곡의 형식을 취했음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한 음악형식은 아주 다양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적 범주들에 모두 맞는 것도 있었고 운문 형식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이 형식은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즉 교회의 연도처럼 짧은 문구를 여러 번 반복하는 형식, 후렴이 딸린 춤곡, 여러 쌍의 반복되는 행으로 된 노래, 반복하지 않고 시의 각 절에 각각 새로운 선율을 붙이는 노래 등이다.
한 연 안에 반복구가 들어가지 않는 노래로는 베르와
샹송이 있다. 그러나 샹송에서는 짧은 도입 부분을 반복하고 또 끝에 가서 서두부 일부를 다시 반복한다. 현재 남아 있는 트루베르의 음악에는 대부분 음조의 높이를 지시하는 표기는 되어 있으나 그 음조를 얼마나 지속해야 하는지, 어떻게 강약을 조절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이들의 음악을 연주할 때 곡조의 해석을 놓고 상당한 논쟁이 야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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